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71
71화
자기가 불러 놓고? 에스페란사는 딱딱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공작이 내민 손을 붙잡고 무릎을 굽혔다. 공작은 검은 장갑을 낀 손으로 에스페란사의 손을 감싸 쥔 채 입술 높이까지 끌어당겨 그 위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그는 솔몬 기사의 제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검은 제복 위에 금장과 붉은 망토. 금빛 단추. 가슴팍에는 솔몬 훈장, 산타 마리나 훈장, 그리고 아마 공군으로 복무하면서 받았을 훈장 하나가 더 자리하고 있었다.
의도했다면 탁월한 선택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제복을 입은 공작은 마치 그 자신이 군 통수권자인 듯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으므로.
“늦었지만 차를 들지. 숙모님, 이리로. 헨리, 미스 헌터를 에스코트해라.”
“미스 헌터, 가시죠.”
차를 마실 응접실은 그들이 지나온 수많은 방 중 하나였다. 붉은빛을 내는 원목과 짙은 카펫이 특히 그런 느낌을 자아내서, 이 방이 갈리스턴 공작이 자주 쓰는 응접실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이번데일은 어디 있지?”
“새벽에 해군 전함에 문제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그쪽으로 갔습니다.”
분명 공작의 수작임에 틀림이 없는데, 무기질적인 낯은 미동도 없었다.
“흠. 두 사람 이야기 나누겠니? 난 읽을 책이 있어서. 저쪽에서 읽고 있을 테니 조용조용 이야기하렴.”
공작 부인은 에드먼드를 힐끔거리더니 책장에서 두꺼운 책을 뽑아 들고 흔들의자로 향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책은 위장이고, 눈치 보지 않고 편하게 이야기를 엿듣겠다는 것으로 보였다.
엿들어도 된다고 생각했으니 동석시켰겠지. 그건 얕보는 것일까, 신뢰하는 것일까?
하녀들이 들어와 찻잎 통과 찻잔 세트를 가져다주었다. 간단한 티 푸드는 파인먼트 하우스나 에이번데일 저택이나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미스 헌터.”
“네.”
“헤이븐리에게 내 암살을 의뢰했다지?”
“네.”
아닌 척 귀를 세우고 있던 공작 부인의 찻잔이 달그락거렸다. 헤이븐리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공작의 수족인 것 같은데, 공작의 수족에게 공작의 암살을 의뢰해? 뻔히 알면서? 보기와 달리 무시무시한데.
“이유를 들어 보고 싶군.”
“자기가 누구 수족인지 다 들킨 판에 정보상 행세를 하는 것이 우스워서요. 저도 하나 여쭙겠습니다.”
“말해 보게.”
“마벨우드까지 저를 미행한 자도 헤이븐리인가요?”
“다른 자였네.”
숙녀에게 미행을 붙였어? 제 어머니가 살아서 들었다면 뒤로 넘어갈 짓을 잘도…….
“제가 실수로 그자를 죽였으면 전하께서 곤란해지실 뻔했네요.”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 감사를 표하네.”
“죽였어야 했는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에 에드먼드가 찻잔을 바라보던 눈을 들었다. 셔버리 공작 부인은 이제 반쯤 몸을 돌리고 있었다.
“미스 헌터.”
에드먼드는 늘 가죽 장갑에 감싸여 있던 맨손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느리지만 무겁게. 그것만으로 대화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난 그대에게 관심이 많네.”
어머머. 공작 부인은 이제 엿듣고 있음을 숨기지도 않았다. 그러나 대화의 당사자인 두 사람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루크 헤이븐리가 그대에 대해 보고했을 때부터 그랬고, 지금은 더더욱.”
에스페란사는 태연히 찻잔을 비웠다.
“그래서 미행을 붙였고. 뒷조사도 좀 했지.”
“신사보다는 무뢰배가 할 법한 짓이네요.”
“인정하지. 그러나 꼭 필요한 일이었네. 가장 신실하신 폐하의 안녕을 위하여.”
너네 여왕 너나 중요하지. 에스페란사는 목 끝까지 튀어나올 뻔한 말을 지그시 억눌렀다. 뒷조사라 해 봤자 뒷골목에서 잭과 노닥거리던 것밖에 없을 텐데. 공작이 에스페란사의 뒷조사를 생각보다 이르게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파오룬에서의 행적까지 조사해 정보를 받아 올 만큼은 아닐 것이다.
“그대의 부친, 마이클 헌터의 출생 기록이 없더군.”
찻잔 내려놓는 소리가 사뭇 크게 들렸다.
“출국 기록도 없고, 입국 기록도 없네. 혼인 신고도 한 적이 없고.”
“혼인 신고는 아마 파오룬에서…….”
“출생 신고도 파오룬에서 했다고 할 셈인가? 그러려면 조부의 기록이 있어야 할 텐데 지난 백 년간 ‘헌터’라는 사람의 출국 기록을 전부 살펴본 결과, 마이클 헌터의 부친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네.”
그 말은.
“그 말은.”
에드먼드는 처음으로 웃음이라고 할 만한 것을 보였다. 승리를 확신하며.
“마이클 헌터가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것이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마이클 헌터와 알레한드라 헌터는 시더와 에스페란사가 급조한 가상의 인물이었다. 혹시나 질문이 나올 경우를 대비해 스무 해가량의 행적이 모호하도록 설계했다. 설마하니 누군가 에스페란사 본인도 아니고 부친의 뒷조사를 해서 출생 신고 이력까지 찾아볼 줄을 알았겠는가.
이럴 땐 방법이 없다. 잡아떼는 수밖엔.
“돌아가신 아버지의 출생 신고 기록을 못 찾았다고 없는 사람이라고 하시면…… 저더러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네요. 이런 말씀을 하려고 초대하신 거라면 그냥 돌아가겠어요.”
하지만 상대는 잡아뗀다고 납득할 만치 어리석은 자도, 넘어가 주는 아량을 가진 자도 아니었다. 에드먼드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마치 왕좌에서 굽어보듯 에스페란사를 내려다보았다.
“미스 헌터. 없는 사람을 꾸며 말한 것이 무슨 죄인가 하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는 법이고, 그대에게는 책임을 질 자격조차 없네.”
그다음 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우려했던 바 그대로였다.
“책임은 그대의 이름을 보증한 에이번데일 백작의 것이지.”
오늘이 되면 공작의 의도를 알 수 있을 테고, 그 의도가 뭐든 그가 시더를 명목으로 협박을 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시더는 거듭 자기 안위는 신경 쓰지 말라고까지 말했다.
그때는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그걸 나인 호더에 퍼뜨리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존재보다 비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더 어렵지요. 전하의 주장은 추측뿐 증명이 아니지 않나요?”
“착각하고 있군.”
크라바트를 당겨 느슨하게 하며 공작이 말을 이었다. 하나하나 계산된 동작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가 의식했든 하지 않았든, 상대가 최대한의 위협을 느끼도록 계산된 시간, 그에 맞춘 적절한 움직임. 에스페란사의 손톱이 소파의 가죽을 긁었다.
“내가 할 일은 의혹을 던지는 것뿐, 증명의 책임은 그대에게 있네. 미스 헌터, 그대의 말대로 비존재보다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더 쉽다면 그대가 부모의 존재를 증명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공작이 그 의심을 입 밖으로 내기만 한다면 사람들은 파오룬에 있을 무덤을 파헤쳐서라도 증명하라고 할 것이다.
갈리스턴 공작이 사교계에 직접적으로 끼치는 영향력은 크지 않지만, 그에게는 이 나라를 주름잡는 친척들이 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위신을 위해서라도 공작의 증거도 없는 말 한마디를 사실로 만들어 줄 것이다.
에스페란사는 괜찮다. 그들이 아무리 의심하고 곤란하게 만들어도 그건 영원하지 않다. 결국엔 돌아갈 테니까.
하지만 시더는 이 세계에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 그의 명예는 밝고 깨끗하다. 비록 자기 입으로는 장난처럼 평판이 바닥이라느니 할지라도, 그것은 정말로 반 장난에 불과했다. 그는 정말로 명예가 바닥에 떨어진 삶을 모른다.
그의 명예가 훼손된다면, 적어도 그것은 에스페란사 때문이어서는 안 된다.
“제가 부모의 존재를 증명하길 바라시는 건 아닐 테고요. 입을 다물어 주는 대가로 원하시는 게 있겠죠.”
자리에서 일어난 공작은 느리게 걸어 응접실 커튼을 열어젖혔다. 새하얀 햇빛이 응접실 안으로 길게 발을 뻗었다. 햇빛의 세례를 받은 검은 머리칼을 따라 흰 원반이 드리웠다.
“누구 하나가 작은 거짓말로 신분을 속이고 가장 신실하신 폐하의 이름 아래 봉사하는 백작의 후견을 받아 나인 호더를 누빌지라도, 그것이 폐하와 황금 물레 문장의 영광에 흠을 낼 수 있는 것은 아니지. 문제를 일으키지만 않는다면…….”
“제가 문제라도 일으켰다는 말씀이신지?”
“아니. 문제를 일으키는 자는 따로 있네.”
무슨 말이지? 그러나 에스페란사에게는 퍼즐 조각을 맞춰 볼 여유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게 내가 오늘 그대를 부른 이유이고, 그대가 해야 할 일이네. 미스 헌터. 그대가 숙녀 행세를 하며 나인 호더에 머무르는 이유를 알지는 못하지만, 그대의 숙녀 행세가 조금 더 오래 지속되길 바란다면 내 지시에 따르도록.”
“그러지 않으면 로드 에이번데일의 명예를 땅에 떨어뜨리실 거고요?”
“현명한 선택을 하리라 믿네.”
막상 일이 닥치니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래서 공작이 시더를 떼어 놓은 것이다. 그가 옆에 있었다면 막아 줬을 테니까. 하지만 에스페란사는 시더 클라이번처럼 머리가 좋지도 않았을뿐더러, 난데없는 협박을 당한 순간 그나마 돌아가던 머리도 삐걱삐걱, 잡음을 냈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에스페란사는 지금 패닉 상태였다. 손끝이 빨개지도록 말아 쥐고 안 굴러가는 머리를 억지로 굴려 보아도 생각은 진전되지 못한 채 튕겨 나오기만 했다. 차라리 몸으로 공작을 상대했다면 쉬웠을 텐데.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에이번데일 백작과 상의할 시간? 미스 헌터. 정말로 선택권이 있다고 믿고 있나?”
답이 정해진 문제다. 한숨이 터져 나왔다. 뭔지도 모르는 제안을 덥석 받아야 한다니.
아니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공작의 제안을 수락한다고 해서 공작의 뒤통수를 한 대 때려 줄 일이 없으리란 것은 아니다.
정말 그런가? 방법이 없나? 뭔가 생각이 날 듯 말 듯 한데……. 사방이 막힌 곳에서 가벽을 찾아 부딪히던 머릿속 생각이 드디어 허점을 찾았다. 에스페란사는 미소를 지었다.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처음부터 굳이 저한테 이러실 이유도 없고, 저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패를 내려놓아서 협상을 결렬시킬 이유가 없죠.”
공작은 에스페란사의 신분을 멋대로 폭로할 수 없다. 공작이 원하는 게 에스페란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는 에스페란사가 수락할 때까지 약점을 쥐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협박은 결국 공허한 울림에 불과했다.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일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암살자, 마벨우드 던전, 그리고 이 초대장과 시더를 떼어 놓기 위해 해군 부대에 일으킨 말썽까지 생각해 보면 적어도 에스페란사에게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희소성은 그 자체로 힘이다. 물론 에스페란사에게는 다른 힘도 있지만. 치켜든 턱에 힘이 들어갔다.
“전하. 다시 말하지만 저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이만 돌아가 볼까 해요.”
공작이 굳은 얼굴로 에스페란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더는 위압감을 느끼지 않았다. 공작은 에스페란사의 안위를 해칠 수 없고, 시더의 명예도 해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를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해군 부대에 있을 시더의 안위는……. 그는 자기 안위는 스스로 지킬 수 있다고 했다. 공작과 같은 자는 그를 죽일 수 없다고. 그 말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두 쌍이 눈이 흔들림 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호의 없는 눈 맞춤. 아니, 에스페란사가 그 눈에서 읽어 낸 것은 분명한 적의였다.
문 열리는 소리가 그 긴장감을 거칠게 끊어 냈다.
“공작 부인 전하, 전하의 목걸이가 사라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