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73
73화
기자들도 모두 돌아간 저택의 응접실에 여름이 무르익어 가는 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한기가 흘렀다.
“숙모님. 분명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셔버리 공작 부인이 비명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곱게 틀어 올렸던 머리칼이 엉망으로 흘러내렸다.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고.”
“난, 난 네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미스 헌터에게 도둑 누명을 씌우는 게 말입니까? 아니면 폐하의 목걸이를 잃어버리는 게?”
“약점을 찾으라고 했잖아!”
다친 새처럼 파들거리는 여자를 갈리스턴 공작은 싸늘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동정을 사려는 수작인 것은 알고 있었다.
“약점을 찾으라고 했지, 언제 누명을 씌우라고 했습니까?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니 이렇게 일을 크게 만드시는 것 아닙니까.”
명백한 위협을 담고 낮아진 목소리에 공작 부인은 목을 움츠렸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한마디를 덧붙이는 것은 잊지 않았다.
“네가 그 계집애를 싫어하니까 그런 거야!”
에드먼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고개를 푹 떨군 공작 부인이 변명을 늘어놓았다.
“난 노력했어. 그 천한 계집애랑 팔짱도 끼고 친한 척도 했고, 약점을 잡으려고도 했다고. 분명 셀마가 그 계집애 주머니에 목걸이를 넣었는데, 그게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이야?”
“그러니 미스 헌터가 숙모님보다 고단수라는 겁니다. 되도 않는 머리를 굴리려 애쓰지 말고, 가만히, 시키는 일이나 하십시오.”
모욕적이었지만, 공작 부인은 이 모욕에 익숙해져 있었다. 열 살도 넘게 차이가 나는 조카와 나름대로 친밀했던 적도 있었으나, 셔버리 공작이 죽고 조카는 학업으로, 군 복무로 바빠 10년간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만났을 때, 그는 무능하면서 콧대만 높은 숙모를 경멸하는 오만한 공작이었다. 지금까지, 쭉.
“그 계집애가 수를 쓰지만 않았어도 제대로 누명을 씌웠을 거라고!”
“하지만 결국 실패하시지 않았습니까. 결국 시킨 일은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하셨습니다. 미스 헌터의 호감을 사지도 못했고, 약점을 잡지도 못했고. 이렇게 무능한 숙모님을 언제까지 지원해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거침없이 다가온 구둣발이 공작 부인의 드레스 자락을 짓밟았다. 고운 공단이 너덜너덜해졌다. 공작 부인은 좋아하는 옷이 망가지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에드먼드의 팔을 붙잡았다.
“에드먼드. 내, 내가 더 열심히 할게. 정말이야. 시키는 건 다 할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돈을 끊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새 보석을 사야 하니까?”
“내가 그거 말고 할 게 뭐가 있어!”
할 일도 없고, 하고 싶은 일을 할 돈도 없었다. 셔버리 공작령은 왕실로 귀속된 지 오래, 공작 부인에게 주어지는 것은 품위 유지비와 일정량의 연금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웬만한 귀부인의 1년 치 생활비를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지만, 공작 부인에겐 그저 부족할 뿐이었다.
그래서였다. 무도한 조카의 손을 잡은 것은. 부인이 없어 사교계에 손을 뻗치기 어려운 에드먼드는 셔버리 공작 부인의 영향력을 이용했고, 그 대가로 공작 부인은 원하는 만큼 사치할 수 있는 돈을 받았다.
“숙모님, 제가 숙모님께 드리는 돈이면 한 달에 공장을 세 개는 세울 수 있습니다. 적어도 공장 세 개 값은 하셔야지요.”
“노력할게! 정말이야. 그 계집애한테 사과도 할게.”
“미스 헌터와는 더 접촉하지 마십시오. 숙모님이 사과한다고 받아 줄 인물도 아닙니다.”
“그 건방진 계집애가, 공작 부인이 사과를 하는데!”
“공작도 없는 공작 부인 아닙니까. 오펜바흐의 알렉산드라 공주.”
희게 질린 얼굴이 공작을 올려다보았다. 그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멸망한 나라의 이름. 망명 공주라는 조롱. 수십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갔다.
“시키는 대로 하십시오. 숙모님.”
공작 부인이 입을 다물었다. 공작은 붉은 노을이 타오르는 정원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당분간 숙모님을 쓸 곳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자선 활동이나 하시며 자중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공작 부인이 울먹이며 에드먼드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에드먼드!”
“헨리, 숙모님을 모셔라.”
헨리 베이먼이 난감한 얼굴로 공작 부인을 끌어냈다.
“전하, 이러시면 안 됩니다. 가시지요.”
공작 부인은 얻어맞기라도 한 듯 비통하게 울부짖으며 끌려나갔다. 버브리지 부인이 울다 실신한 공작 부인을 마차에 태웠다. 마차가 떠나는 모습을 창 뒤편에서 지켜보던 공작은 생각했다.
‘알렉산드라의 말썽이 아무 수확도 없었던 건 아니지.’
에드먼드는 분명히 보았다. 에스페란사 헌터는 목걸이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어디론가 감춰 버렸다. 맹금의 눈을 가진 커크필드 부인의 감시망을 피해서. 아마 목걸이는 여전히 그 손에 있을 것이다. 왕실의 보물이 외부에 유출된 것에 대한 유감도 있지만…….
시더 클라이번의 경계심 그 자체를 보여 주듯 장신구가 들어갈 만한 구석마다 마도구를 주렁주렁 달고 나타난 여자. 하지만 주머니에 들어갔던 손은 반지가 없는 손이었다. 생각건대, 에스페란사 헌터의 고유한 능력.
그 여자가 가진 것이 단지 압도적인 무력만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에드먼드의 가설은 더욱 완벽해진다.
시킨 일도 제대로 못 한 알렉산드라가 결과적으로 제 몫은 한 셈이다. 배상금 정도는 해결해 주는 것이 나을까.
공작 부인을 보낸 헨리 베이먼이 돌아오자, 침묵하던 공작이 불쑥 물었다.
“헨리. 왕성은 어떻지?”
“아직 괜찮은 것 같습니다. 폐하께서도 방문을 받으신 기색은 없습니다.”
“빠른 시일 내로, 이번엔 백작까지 함께 약속을 잡아라. 그들이 에스페란사 헌터와 먼저 접촉하지 않도록.”
“예.”
“그리고, 헤이븐리에게 모자 가게를 살피라고 전해라.”
“모자 가게 말입니까?”
“그렇게 말하면 알아들을 거다.”
수석 시종 헨리 베이먼은 이해하지 못한 답을 그대로 들고 나갔다. 홀로 남은 공작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에스페란사 헌터를 다소 쉽게 본 것은 사실이다. 생각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 여자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다. 압도적인 무력과 알 수 없는 능력을 가진, 평범한 사람. 그런데 마지막에 그렇게 뒤통수를 때릴 줄이야.
마벨우드의 사건.
‘그 이야기를 할 거라 예상은 했지만.’
예상보다도 더 뼈아프게 다가왔다.
광차의 딜레마 같은 것이다. 레버를 당긴 자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더욱이 그와 같이 목적을 가지고 레버를 당긴 자는 신이라도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
* * *
물먹은 솜처럼 몸이 축 처졌다. 어려운 사람을 대하는 것은 던전을 공략하는 것보다 더한 피로감을 선사했다. 다수의 어려운 사람이라면 더 그렇고, 적의를 가진 어려운 사람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시더는?”
“아직 안 오셨어요. 그래도 일은 끝나셨다고 했으니 오고 계시지 않을까요?”
정말 오래 걸리는 일이기는 했던 모양이다. 정작 일을 벌여 놓은 갈리스턴 공작은 오후에 집으로 돌아와 티타임에 참석했는데 말이다.
애니는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에스페란사를 달랬다. 씻고 나와서 덜 마른 머리칼을 늘어뜨린 채 서재로 향한 에스페란사는 시더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적당히 가벼워 보이는 책을 하나 가지고 온 에스페란사는 소파 팔걸이에 쿠션을 덧대서 베개 삼아 기대고 허리에 나쁜 자세로 앉았다. 허벅지 위에 올린 소설책을 성의 없이 넘기다가, 하품을 했다. 눈이 깜박, 깜박, 불규칙하게 감기다가 고개가 푹 꺾였다.
저택의 주인이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세 시간 후. 노을이 짙던 하늘이 새까맣게 변하고, 태양 대신 가스등이 거리를 밝히는 시간이었다. 어퍼 레인은 잠들고 얼터 지구는 깨어나는 시간.
“에스페란사는?”
지팡이와 모자를 집사의 손에 맡긴 시더가 물었다. 럭스 부인은 흐뭇하게 웃었다.
“서재에 계세요. 백작님을 기다리시는 것 같던데.”
“나를?”
“피곤해 보이는데도 구태여 서재로 가시던걸요.”
그러기에는 꽤 늦은 시간이었다. 시더는 외출복을 갈아입고 서재로 향했다. 럭스 부인의 말은 반만 맞았다. 서재에 있는 것은 맞았으나, 그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다.
“완전히 공이 됐네요.”
무릎을 잡고 몸을 동그랗게 만 채 비스듬히 누운 에스페란사는 멀리서, 아주 흐린 눈으로 보면 공 비슷한 것으로 보일 법도 했다. 색만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흐린 눈으로 보자면은. 밀런은 주인의 말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다 조심히 문을 닫고 서재 밖으로 나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더는 조심히 에스페란사 앞에 다가갔다. 소파에 옆으로 누워 잠든 에스페란사는 누가 업어 가도 모를 것 같았다.
“이렇게 불편한 자세로 잠이 와요?”
당연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시더는 피식 웃었다.
이대로 안아 올려서 침실로 데려다주는 편이 나을까? 깊게 잠든 것 같으니 괜히 깨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전에, 잠든 모습을 조금 지켜보더라도 그를 탓할 사람은 없겠지.
숙녀처럼 곱게 잠든 에스페란사를 보면 누구도 거대한 장총을 들고 숲을 누비며 괴물을 사냥하는 헌터를 연상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고요하고 평화로운 곳에서만 살아온 숙녀로만 보겠지.
사실 전투 상황이 아닐 때의 에스페란사는 대부분 그런 모습이었으므로, 시더는 헌터가 되기 전의 에스페란사가 상당히 유복하게 살았으리라고 추측했다. 쏟아져 내려 얼굴을 가린 머리칼을 조심히 쓸어 올려 주려던 찰나, 손목이 붙잡혔다.
보랏빛 눈동자가 경계심을 담고 번뜩였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지 빠르게 깜박여졌다가, 아는 얼굴을 발견하고 손을 툭 내려놓았다. 금방 순해진 눈을 다시 반쯤 감으며 흘리듯 물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늦게 와서, 기다리다 잠들었어요?”
“기다린 건 아니고요.”
웅얼거리는 와중에도 사실 관계는 확실했다. 시더는 웃으며 에스페란사의 눈앞에 손을 흔들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방에 들어가서 자요.”
“여기가 방인데.”
“여기 말고 당신 방.”
“내 방…….”
그제야 자리에서 비척비척 일어난 에스페란사가 눈을 비볐다.
“아, 밤이네. 늦게 왔네요.”
잠이 다 깬 모양이다. 시더는 조금 아쉬워졌다.
“그렇게 됐어요. 어찌나 붙잡아 두려고 하는지, 의도를 모른 척해 주고 싶어도 티가 나더군요. 당신은. 공작이 잘해 주던가요?”
“잘해 주기는요, 괴롭혔지.”
코웃음을 친 에스페란사는 치맛자락을 툭툭 털었다.
“협박이나 하질 않나…… 이만 자러 갈게요. 피곤해서.”
“에스페란사.”
왜요? 하고 물으려던 에스페란사가 말을 멈췄다.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듯 부드럽게 귓바퀴를 따라 손가락을 미끄러뜨리다, 귀에 걸려 있던 장신구를 빼냈다. 그는 이걸 보란 듯이 장신구를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잘 자요.”
문이 닫혔다. 에스페란사가 눈을 깜박였다.
“아, 자기 거라서 가져갔구나.”
입을 가리고 하품을 한 에스페란사는 느린 걸음으로 침실로 돌아갔다.
시더는 마도구를 손안에서 굴렸다. 연구실 문을 열고 기계를 작동시켰다. 대화를 그대로 녹취했다고 해도 음성을 다시 출력시키기 위해서는 마력의 패턴을 풀어서 음성으로 변환시키는 과정이 필요했다.
해석기관의 톱니바퀴와 기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넓은 벽면 하나를 가득 메운 해석기관은 창문 밖으로 증기를 뿜으며 돌아갔다. 시더는 거기에 음성 출력기를 연결했다.
저장된 마력을 역순으로 풀어내니 음성도 역순으로 흘러나왔다. 그러나 시더 클라이번이 알아듣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안락의자에 가만히 턱을 괴고 앉아 대화를 듣던 시더의 얼굴이 차츰 굳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