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74
74화
아침 열 시. 시더 클라이번을 만나기에는 지나치게 이른 시간이다. 습관적으로 응접실로 향하던 에스페란사가 시더를 발견하고 우뚝 멈춰 섰다.
“벌써 일어났어요?”
그러다가 문득 느껴지는 위화감에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설마 안 잤어요?”
“잤어요. 그러는 당신은 아주 잘 잔 것 같네요.”
어젯밤엔 반밖에 못 뜨던 눈이 오늘은 제법 선명했다.
“네, 뭐.”
“잠깐 나 좀 볼래요?”
에스페란사는 영문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서재는 언제나와 같았다. 에스페란사는 시더가 밤새 과열된 해석기관을 끄고 환기를 하는 동안 적당한 책을 고른 에스페란사는 긴 소파에 시더와 마주 보고 앉았다. 시더가 1인용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으므로, 에스페란사가 그를 마주 보려면 소파 팔걸이에 기대서 다리를 펴고 앉는 수밖에 없었다.
시더는 기가 막혀 고개를 내저었다. 흰 치맛자락 안쪽에서 꺼낸 맨발을 소파에 얹고 노닥거리는 모습이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왜요?”
“공작과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들었어요.”
에스페란사가 얼굴을 굳혔다. 파인먼트 하우스에 머무르며 녹음한 것은 한두 시간 분량이 아니다. 그런데 그걸 전부 들었다면…….
“잤다면서요?”
“지금 그게 중요해요? 도둑 누명을 쓸 뻔했다는 얘기는 왜 안 했어요? 그러고도 갈리스턴과 더 얘기를 해 볼 생각이에요?”
“들었으면 알잖아요. 공작이 한 일도 아니라고 했고, 잘 해결했어요. 사과도 받았고, 배상도 한다고 했고.”
“누가 계획했든, 당신 명예를 완전히 실추시키려고 작정하지 않고서야 계획조차 할 수 없는 일이고, 셔버리 공작 부인을 대동한 건 공작이니 공작이 책임져야 해요.”
에스페란사는 피식 웃으며 쿠션에 턱을 기댔다. 이곳에서의 명예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는 기분은 나쁘지 않다.
“그래서, 에스페란사.”
할 말을 다 한 시더가 돌연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그걸 그냥 내버려 뒀어요?”
적어도 시더가 아는 에스페란사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배상은 배상이고, 그 자리에서 한 방 먹여 주지 않고 그냥 왔을 리가 없었다. 그의 예상대로, 에스페란사가 씩 웃으며 허공을 휘저었다.
“설마요. 이거 봐요. 왕실 목걸이.”
비어 있던 손 위에 목걸이가 나타났다. 목을 둘러싼 열두 개의 레디언트 컷 사파이어와 주위를 장식하는 작은 다이아몬드. 에스페란사가 악동의 미소를 지었다.
시더는 그만 참지 못하고 경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고요하던 서재 안에 한참 동안 그의 웃음소리만 울려 퍼졌다. 보는 사람마저 기분 좋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잠시 후 웃음을 멈춘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옆자리로 옮겨 목걸이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더 레서 사파이어 세트네요.”
“아는 보석이에요? 너무 유명한 거면 좀 부담스러운데.”
시더는 짧게 목걸이의 유래나 왕실과 얽힌 에피소드를 몇 개 풀어 주었다. 전부 흥미 본위의 이야기였고, 결론은 간단했다.
“왕실 것이니 어느 정도는 유명하고, 좋은 물건이기도 하지만 이거 하나 없어졌다고 탈이 날 정도는 아니에요.”
그리고 그는 목걸이를 보자마자 웃음부터 터뜨린 사람답게 한층 더 악랄한 계획을 제안했다.
“팔아 버릴래요? 왕실 물건이라면 장물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사는 수집가가 구파오룬 왕족 중에 꽤 있어요. 아니면 칼린디 번국 쪽도 괜찮고.”
“진심이에요? ……어둠의 루트 같은 건 잘 모른다고 하지 않았어요?”
“난 잘 모르죠.”
그는 능청스레 눈을 깜박였다. 진짜 잘 모르는 거 맞나?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정말 잘 몰라요. 그런 쪽에는 관심도 없고. 내가 수집하는 것 중 광물 비슷한 거라곤 마정석밖에 없고, 나머지는 절판된 책이나 어디에도 처치 곤란인 기계 같은 것뿐이잖아요.”
“그럼 어떻게 팔아요?”
“그래도 찾으려면 못 찾을 건 없죠.”
에스페란사가 흔들리는 듯하자,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무릎까지 다가와 속삭였다.
“어디 한번, 부자가 돼 볼래요?”
거절하기엔 너무 유혹적인 제안이었다. 그 제안의 내용부터 제안자의 묘한 목소리와 반짝이는 눈빛까지도. 에스페란사는 마른침을 삼키며 눈을 피했다. 시더는 좀 더 가까이 다가올 듯 고개를 약간 기울였지만 에스페란사가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당기자 산뜻하게 물러섰다.
“좋은 생각이지만…… 솔직히 진짜 그러고 싶긴 한데요, 이건 용도가 따로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셔버리 공작 부인의 목줄?”
시더가 이마를 찡그렸다.
“셔버리 공작 부인한테 목줄을 걸어서 어디다 쓰죠?”
“어디든 쓸 데가 있지 않을까요? 공작 부인은 당장 목걸이를 돌려받지 못하면 배상금을 내야 할 처지고.”
배상금뿐 아니라 여왕의 비난과 질책도 중요한 문제였다. 왕성 출입을 금지당하는 것은 그렇다 치고, 당분간 왕실 보석을 빌리지 못하게 될 테니까.
망명 왕족 출신에 남편도 자식도 없어 반쪽 왕족 취급인 셔버리 공작 부인에게 왕실 보석은 자신이 여전히 왕족 대우를 받는다는 증거였다. 그러니 셔버리 공작 부인은 협조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공작 부인의 협조 따위를 어디다 쓴단 말인가?
“일단 들고 있어 보죠, 뭐. 어차피 팔아 치우려고 해도 시간이 걸리잖아요.”
“좋을 대로 해요.”
목걸이는 다시 인벤토리 한구석으로 돌아갔다.
“아, 그리고 들었겠지만 마벨우드 사건은 공작이 벌인 게 맞대요. 그러면 공작에게 황금 발톱이 있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요? 공작과 담판을 지어서 황금 발톱을 얻기만 한다면…….”
“그런 물건을 쉽게 남의 손에 넘겨 줄 리 없죠.”
“그럼 공작을 때려서 빼앗으면.”
“당신, 갈리스턴에게 악감정이 많군요?”
없게 생겼나? 에스페란사는 입을 삐죽거렸다. 무례한 댄스 매너, 협박, 도둑 누명…… 좋아할 구석은 어디에도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치밀어 오르는 생각들을 모두 삼키고, 한마디로 정리했다.
“난 나 좋다는 사람이 좋아요.”
“아, 그래요?”
왠지 즐거워 보이는 미소였다. 에스페란사는 이유도 모르고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튼! 공작과 다시 협상할 필요는 있을 것 같아요. 공작도 나한테 원하는 게 있는 것 같고, 꽤 절박해 보였으니 잘하면 가능할지도 몰라요.”
“겉보기에는 그래 보이네요. 그래서 공작의 초대를 받아들이기로 한 건가요?”
“이번엔 당신도 동석시켜도 된다고 했어요. 저번 같은 수작을 또 부리진 않겠죠.”
음성만 들어도 공작이 에스페란사를 제법 인정한 것 같았으니, 아마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의문 없어 보이는 에스페란사의 맑은 낯을 응시하며 시더는 생각했다.
‘과연 공작이 마벨우드 사건의 배후일까?’
공작이 에스페란사의 도움을 구하는 것은 에스페란사의 무력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가 원하는 곳에 던전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인물이라면 에스페란사의 무력을 원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말하자, 에스페란사도 웃던 것을 멈추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더는 문득 생각했다. 괜히 말했나?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
에스페란사는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그 추측에는 허점이 많았다. 다행히 에스페란사에겐 불확실하게나마 추측을 확인해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퀘스트: 황금 발톱을 찾아라!]진행률: (25/???)
완료 보상:
―칭호: 시간의 지배자
―아이템: 황금 발톱, 귀환증(집)
‘별로 안 올랐어.’
그 전이 15였는데, 황금 발톱의 소유자와 직접 접촉했다면 10보다는 많이 올라야 하지 않을까? 황금 발톱의 다른 퀘스트들을 보더라도 그렇다.
그래도 공작은 큰 실마리였다. 그의 제안을 파헤치다 보면 황금 발톱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
“일단 공작이 우리한테 얼마나 도움이 될지 확인하고, 그다음에 공작의 제안을 받아들일지 결정해야겠어요.”
그렇게 말한 에스페란사는 갑자기 팔지 못한 목걸이 생각이 나서 씩 웃으며 덧붙였다.
“아니면 배상금 액수를 보고 결정해도 되고.”
“공작이 얼마나 성의를 보일지 기대되네요.”
이쪽이 이런 생각을 하는 걸 알지는 모르겠지만, 공작도 자기 잘못을 알면 한몫 제대로 챙겨 주겠지. 에스페란사는 문득 시더를 흘끔거렸다. 그러고 보니 시더에게는 받기만 했는데.
이 남자가 좋아할 만한 선물이 뭐가 있을까? 에스페란사는 책을 읽는 척, 서재와 연구실을 오가며 복잡한 회로를 그리는 시더를 흘끔거렸다. 시더는 시선을 알면서도 모른 척 내버려 두었다.
에스페란사가 시더에게서 시선을 뗀 것은 그로부터 세 시간 후의 일이었다. 그조차도 자의는 아니었다.
“에스페란사 아가씨, 갈리스턴 공작께서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1층에 있는데 양이 좀 많습니다.”
얼마나 많길래? 시더와 에스페란사는 밀런을 따라 1층으로 내려갔다. 공작의 시종, 헨리 베이먼이 손수 이끌고 온 수송용 증기 마차에서 오토마톤들이 손에 한 아름 선물을 들고 왔다. 가벼워 보이는 상자들, 무겁고 작은 상자 하나, 그리고…….
“전하께서 보내셨습니다.”
에스페란사는 멀뚱히 헨리 베이먼의 손에서 흰 봉투 두 개를 받아 들었다. 봉투는 묘하게 두툼하고 아무 봉인도 없이 깨끗했다. 보통 이런 데 들어가는 건.
‘돈이지.’
아무리 배상금이라고 했다지만 정말 봉투에 든 현금으로 줬다고? 그런데 진짜였다. 시더도 봉투 속에서 나온 현금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품위 없게 현금이라니, 못 본 새 공작이 미쳤나 보죠?”
그 말 그대로였다. 공작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 없었다. 그때, 여왕의 얼굴이 찍힌 지폐를 살펴보던 시더가 돌연 표정을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