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75
75화
“왜 그래요?”
“조금 있다가.”
헨리 베이먼 앞에서는 말할 수 없는 얘기라는 뜻이다.
“전하께서 보내신 물품의 목록입니다. 파오룬 실크, 담비 털, 타조 깃털, 헤리티지 사의 찻잔 세트, 비블리 사의 여성용 시계입니다.”
정말 뭘 많이도 보냈다. 파오룬 실크는 커다란 상자로 두 개였고, 시계를 제외한 다른 물건들도 만만찮은 크기의 상자에 담겨 왔다. 오토마톤이 삐걱삐걱 상자를 내려놓았다. 시계 상자는 헨리 베이먼이 손수 전했다.
그리고 마지막 오토마톤이 상자 위에 커다란 꽃다발을 올려놓았다.
“가지가지…….”
“잘못 들었습니다, 미스 헌터?”
“제대로 들으신 거 같은데요.”
헨리 베이먼은 귀를 의심했지만, 들은 말이 바뀌지는 않았다. 그는 거드름 피우는 것을 그만두고, 재빠른 설명과 함께 초대장을 주고 돌아갔다.
“그래서, 저 선물들은 다 어쩔 건가요?”
“인벤토리에 넣어 두죠, 뭐. 아직 자리도 많은걸.”
다시 꺼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양해를 얻어 꽃을 응접실 화병에 꽂아 두도록 지시했다. 에스페란사는 나머지 선물들을 인벤토리에 넣으려다가, 마음을 바꾸었다.
찻잔 세트는 럭스 부인에게, 실크는 애니와 매들린에게, 타조 깃털은 요리사 캐셔 부인에게 돌아갔다. 나머지 선물들도 고용인들에게 전부 나눠 줘 버렸다.
“이제 남은 건 이것뿐이네요.”
에스페란사는 손에 든 봉투와 초대장을 흔들며 말했다.
“진짜 돈을 준 건가?”
“공작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 있겠어요?”
“사실 전 돈 좋아요. 써 버리기도 편하고.”
나머지 선물도 돈으로 줬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고 말하자, 시더는 나직이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공작이 준 꽃다발에는 데이지와 치자꽃, 그리고 노란 장미가 섞여 있었다. 선명한 노란빛이 응접실을 한층 화사하게 했다. 그러나 마주 앉은 두 사람은 화병에 꽂힌 꽃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시선은 온통 테이블 위의 지폐를 향하고 있었다.
뭔가를 알아낸 것 같다며 에스페란사를 데리고 가까운 응접실로 들어온 시더는 아무 말 없이 테이블에 지폐를 쭉 펼쳤다.
“뭐 하는 거예요?”
“자, 봐요.”
봉투 하나를 다 비운 시더는 에스페란사가 들고 있던 봉투의 지폐를 꺼냈다. 그리고 테이블 중간에 있는 지폐 위에 올려놨다. 그다음에는 왼쪽 위, 오른쪽 위, 오른쪽 아래, 다시 중간. 처음엔 뭘 하는 건가, 하고 쳐다보던 에스페란사가 탄성을 터뜨렸다.
“일련번호가 똑같잖아요.”
일련번호가 똑같은 지폐.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
“위폐인가? 위폐 문제 때문에 나를…….”
입 밖에 내고 보니 별로 설득력이 없었다. 그럼 왜? 공작은 대체 무슨 의도로 일련번호가 같은 지폐를 봉투 가득 보냈을까?
갈피를 잡지 못하자, 시더가 힌트를 던져 주었다.
“에스페란사. 하나가 좀 더 낡은 것 같지 않아요?”
듣고 보니 그랬다. 에스페란사는 같은 지폐 두 개를 들어서 보았다. 1837년, 즉 올해 발행된 지폐인데 하나는 족히 10년은 된 것처럼 바래 있었다.
10년……. 누가 머리를 한 대 친 것 같았다.
“지금 이거, 설마.”
시더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이 알고 있네요. 당신이 미래에서 왔다는 걸.”
에스페란사는 천천히, 결론부터 되짚어 나갔다.
공작이 알고 있다. 지폐는 그 증거였다. 일련번호가 같은, 한쪽은 찍어 낸 지 10년이 족히 넘어 보이고 다른 하나는 올해 찍어 낸 티가 나는 지폐. 둘 중 하나가 위폐가 아니라면, 진짜 지폐 두 종이 한꺼번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미래의 지폐가 과거로 와야 한다.
에스페란사가 쓴 지폐라는 것은 루크 헤이븐리에게 받아서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에스페란사가 미래에서 왔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고작 지폐일 뿐이었다. 이 빈약한 증거만으로 거기까지 추측할 수 있나? 에스페란사는 자신이 아는 가장 똑똑한 사람에게 물었다.
“시더. 당신이라면 이거 두 개를 보고, 시간 여행자가 있다는 추측을 했을 것 같아요?”
“아마도요?”
그는 전혀 놀란 것 같지 않았다. 나머지 지폐를 한쪽으로 쓸어 놓고, 빈자리에 같은 지폐 두 장을 나란히 놓았다.
“자, 이렇게 똑같은 지폐가 있으면 보통 할 수 있는 생각은 두 가지예요. 하나, 조폐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30장이나 같은 실수를 할 리는 없죠.”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에스페란사를 만족스레 응시한 시더가 손가락 하나를 더 펼쳤다.
“둘, 둘 중 하나는 위조 지폐다. 공작은 얼마든지 최고의 위폐 감정사를 부를 수 있었을 테니까, 적어도 현 기술에서 공작의 감정사가 찾아낼 수 없을 정도로 교묘한 위폐는 없다고 가정하고.”
그러니까 그 가정이 어떻게 나오냐는 말이다. 에스페란사였다면 당연히 위폐 제조 기술이 발전했다고 생각했을 텐데. 시더는 그 생각을 읽은 듯 미소지었다.
“두 가지 가정을 모두 해 봤겠죠. 내 생각엔 공작이 시간 이동이라는 초자연적인, 이 표현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초자연적인’ 현상을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증거를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의미심장한 침묵이었다. 에스페란사가 시더의 팔을 붙잡고 흔들었다.
“아니면 뭔데요?”
“던전에서의 당신에 대해 듣고 추측했겠죠. 당신, 거기서 좀 수상하게 군 건 사실이잖아요.”
“아, 네에…….”
이건 할 말이 없다. 남들은 다 처음 보는 재앙을 혼자 몸으로 능숙하게 뚫었으니, 보고를 받은 공작이 ‘초자연적인’ 가설을 채택할 만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공작이 던전의 존재를 안다면 시간 여행도 쉽게 납득했을 것 같네요.”
에스페란사에게는 너무 익숙해서 없는 편이 오히려 어색했지만, 현재의 오스던 사람들에게 던전은 자연재해도 아니었다. 듣도 보도 못한, 신의 징벌이나 멸망의 징조에 가까웠다.
“아, 그러네요. 그게 그렇게 되네. 그래서 공작이 알아차렸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말이 된다. 명쾌해졌다. 테이블 위의 지폐를 인벤토리에 밀어 넣은 에스페란사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공짜 12만 테롯이 생겼으니 이걸로 시더에게 뭐라도 선물을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공작에게 협박당한 것도 결론적으로 결과가 나쁘지 않았다.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시더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은근하게 덧붙였다.
“우리 둘만의 비밀이었는데, 다른 사람에게 들켜 버렸네요.”
아.
에스페란사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괜한 생각인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둘만의 비밀’이라는 말은 이 쾌청한 초여름의 이른 오후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사뭇 은밀하고, 묘한 음영. 고작 말 한마디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왠지 열이 오른 낯을 손등으로 식히며 말을 돌렸다.
“……아무튼 결론은, 공작의 초대를 받아들여야 된다는 거죠. 우리끼리 고민해 봤자 소용없으니까.”
다행히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어색한 태도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다행이었다. 그가 알았으면 많이 부끄러울 뻔했다.
* * *
에드먼드 프레드릭 아서 앨버트는 두 번째 초대에서도 지각을 하는 과오를 범하지는 않았다. 비록 첫 번째 초대의 지각도 그의 본의는 아니었지만. 실수 아닌 실수가 있었던 만큼 보다 철저했다.
“에이번데일, 미스 헌터. 환영하네. 두 사람 모두 첫 방문이 아니니 궁전의 안내는 생략하도록 하지. 응접실에 다과를 마련해 놓았네.”
공작을 따라가면서, 에스페란사는 시더의 팔뚝을 툭툭 두드렸다.
“여기 온 게 처음이 아니에요?”
“일곱 살 때 와 본 것도 와 본 거라고 치면요.”
그냥 공작은 두 사람을 데리고 여행 가이드 노릇을 하기가 귀찮았던 모양이다. 그럴 만도 했다. 에스페란사도 시답잖은 예의 차리기도, 기 싸움도 전부 그만두고 공작을 때려눕힌 다음 가진 정보를 실토하게 하고 싶었으니까.
“커크필드 부인, 응접실 문을 반 뼘 열어 두고, 층을 비우게.”
커크필드 부인은 무릎을 굽혀 인사하고 자리를 떠났다. 공작은 손수 홍차를 우려서 손님에게 대접했다.
“일전의 일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깊은 유감을 표하오.”
“……배상하셨으니 됐지요.”
에스페란사는 한 꺼풀 예의를 벗겨 낸 말투로 대답했다. 예상 밖의 일이었는지,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던 공작이 멈칫했다.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팔의 각도마저 잰 듯 차를 한 모금 마신 공작이 대답했다.
“마음에 들었길 바라오. 젊은 숙녀의 선물을 준비한 지가 오래되어 걱정을 했지.”
시더는 그 말에서 더는 에스페란사의 신분으로 협박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함의를 읽어 냈지만, 에스페란사도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다. 보랏빛 눈동자는 유리알처럼 투명하기만 했다. 에스페란사는 대체로 총명하지만, 꼬아서 뱉은 말의 본의를 일일이 추측해서 대항할 만큼 노련하지는 못했다.
그 후 몇 마디의 대화가 더 오갔지만, 전부 표면적인 이야기들뿐이었다. 찻잔의 차가 바닥을 보일 때쯤 공작이 물었다.
“에이번데일, 자네는 학교의 체스 챔피언이었지. 솜씨는 여전한가?”
“겸양을 보이는 게 옳겠지만, 여전합니다.”
“나인 호더에는 자기가 체스 선수쯤 되는 줄 아는 어설픈 실력자들만 한가득이지. 지루한 노릇이야.”
시더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말씀대로입니다만, 지루한 적은 없었습니다. 지루할 틈도 없으니까요.”
공작은 마치 맹수가 웃듯이 낮게 웃었다.
“미스 헌터. 체스를 둘 줄 아시오?”
“규칙만 압니다.”
“규칙만 알면 둘 수 있지.”
“정말로 규칙만 압니다.”
잠시 후 말뜻을 이해한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못한단 말이었다. 숙녀답지 못한 일이었다. 거기에 시더가 말을 보탰다.
“잘 아시는 마벨우드의 사건 전에, 알라스테어 렌프루가 에스페란사와 체스를 두었던 적이 있습니다. 불쌍한 스털링 백작이 자기 말을 죽을 자리에 가져다 두더군요.”
그 얘긴 왜 하는 거야? 에스페란사가 눈을 흘겨도 시더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 왜 그런가 했더니, 공작이 창백한 낯을 찻잔으로 가리고 있었다.
마벨우드의 사건? 아니면 알라스테어 렌프루? 어느 쪽이 그의 심기를 건드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둘 다일지도.
“그러고 보니, 전하께서 보낸 암살자들이 로드 스털링의 다리를 부러뜨려 놓았죠.”
“……어쩔 수 없었소.”
변명하듯 중얼거린 공작은 이윽고 한숨을 내쉬었다.
“스털링 백작은 괜찮소?”
“그가 다 회복했다고 해서 전하의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요. 물론 전하께서 직접 하신 일은 아니지만, 직접 저지른 자들은 책임을 질 자격조차 없지 않나요?”
“미스 헌터. 수단의 잘못은 겸허히 인정하오. 죄 없는 로드 스털링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됐소. 하지만 그는 그곳에 머물러 줬어야 했소.”
본론이 시작될 시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 마벨우드에 던전이 나타났는가. 공작은 무엇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가. 그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했다.
“왕성에 사사로운 이익을 위하여 여왕 폐하의 안위를 해하려는 자가 있소.”
어쩐지 궁중 암투물에서 많이 들어 본 것 같은 첫 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