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76
76화
“수상 각하 말씀입니까? 왕실과 내각의 기 싸움에 끼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시더가 태연히 말했다. 수상? 에스페란사의 귀가 쫑긋거렸다.
수상과 여왕은 오랫동안 대립하고 있었다. 그 대립의 근원은 알지 못하지만, 그것이 13년 후까지도 결론이 나지 않으리란 것은 알고 있었다.
왕실의 권한과 국가 원수로서의 권위를 관습에 불과한 것으로 무게를 낮추려는 내각의 지속적인 시도. 그리고 입헌 군주로서, 신민의 정신적 지주로서 그 위치를 공고히 하려는 여왕의 대치.
그 정도의 정치적 갈등은 있어 줘야 사건이 일어나는 법이다. 너무 평화로운 세상은 재미가 없다.
에스페란사는 이 갈등으로 인해 일어난 몇 가지 사건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정치적 사건과 던전이 얽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던 나인 호더의 모습도.
“템프턴 경과 정치적 견해는 다르지만 그는 정치가로서 훌륭한 인물이지. 그의 내각은 오스던을 훌륭하게 이끌고 있네.”
“무엇보다 결코 폐하의 안위를 해치지는 않겠죠.”
시더가 덧붙였다. 다 알면서 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빙그레 웃는 얼굴을 한 그는 아무런 악의도 없어 보였다. 물론 이 자리에서 그의 악의 없음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폐하의 일일세. 말을 조심하게.”
“제가 무슨 말을 했다고 그러시는지? 수상 각하께선 폐하의 옛 애인이니 폐하께 해가 될 일을 안 할 거라고 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에이번데일!”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게임에서는, 장성한 자식이 둘 있는 여왕과 결혼은 안 했지만 중년이 된 수상의 로맨스를 상상하는 사람은 없었다. 비록 레이먼드 템프턴이 상당한 미중년이라 인기몰이를 하기는 했어도.
흠, 그랬단 말이지? 그런데 어쩌다 지금은 서로 죽이지 못해 공생하는 관계가 됐을까.
‘전 애인이라는 게 다 그렇고 그렇긴 하지……’
“모호한 말로 피해 가지 마십시오, 전하. ‘사사로운 이익’, ‘폐하의 안위’, ‘해하려는 자’. 이런 식으로 뭉뚱그려 말하면 오해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쓸데없는 생각에서 빠져나온 에스페란사가 시더를 돌아보았다. 공작의 입에서 나왔을 때는 평범한 낱말로 이루어진 문장이었는데, 되짚어 보니 단어 선택 하나하나에 가치 판단이 들어 있었다.
대상이 얻고자 하는 이익은 가장 사사롭고 부당한 것으로, 그에 대비되는 자신들의 이익은 중요하고 절박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 강한 단어는 아니라도 듣는 사람의 머릿속에 옅은 선입견을 심어 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수작을 부리려고 했단 말이지. 에스페란사가 불만스레 입을 열었다.
“전하, 계속 이러실 거면 더 이상 이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요.”
공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더 클라이번을 동석하게 한 것은 역시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다른 선택지가 없긴 했으나.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같소. 정말로 그들은 폐하의 안위를 인질로 붙잡고 있으니까. 폐하께선, 협박당하고 계시오.”
“그리고 전하께선 그 협박범을 해결할 능력이 안 되시고요?”
그는 자존심을 긁는 말에도 분노한 기색이 없이 평온했다.
“부끄럽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렇소. 나로서는 그들의 정체조차 알 수 없었소. 이 나라 사람인지, 외국인인지, 혹은 전혀 다른 세상에서 온 건지. 꼬리를 잡으려고도 해 봤고, 암살도 시도해 봤지만 번번이 실패했소.”
다른 세상이라는 말에 에스페란사는 흠칫 몸을 굳혔다. 하지만 공작은 별다른 의도 없이 한 말인 듯, 여상히 말을 이었다.
“폐하와 부군이신 대공 전하의 안위, 루이 왕자와 멜리사 공주의 목숨이 달려 있는 일이오.”
“그들이 원하는 게 뭐라던가요?”
“지금은 폐하의 영향력과 왕실 재산을 사사로이 이용하여 사소한 이득을 취하고 있을 뿐, 궁극적인 목표는 밝혀지지 않았소. 그야말로 미궁 속의 적이지.”
분명 뭔가 숨기고 있다. 에스페란사조차도 그런 느낌을 받았으니, 시더는 말할 것도 없었다. 눈빛만으로 무언의 대화가 오갔다. 에스페란사가 입을 열었다.
“그럼 마벨우드의 일은 절 시험하기 위해서 벌인 건가요? 제가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으면 그곳의 사람들은 다 죽었어요.”
하나도 둘도 아니고 마을 하나가 통째로 사라질 뻔한 일이다. 아무리 자기 곁의 사람이 소중하다고 해도 신민을 시험대로 사용하면서 군주의 안위를 부탁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공작은 에스페란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듯이 샅샅이 재 보는 눈이었다. 시더가 손을 들어 공작의 시선을 차단했다. 여전히 웃는 낯이었지만, 신경질이 묻어났다.
“전하, 이건 동등한 거래가 아닙니다. 폐하의 목숨은 하나뿐이지만 미스 헌터는 전하의 보복이 별로 두렵지 않으니까요.”
“알고 있네.”
창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 공작은 잠시 침묵했다. 에스페란사는 그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시더가 손등을 치는 감각에 고개를 돌렸다. 왜요? 하고 입 모양으로 묻자, 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장난인가? 에스페란사도 마주 웃었다.
이윽고 생각을 끝낸 공작이 고개를 돌리다가 그 꼴을 보고 혀를 찼다. 에이번데일을 동석시킨 건 정말이지 최악의 결정이었다.
“미스 헌터. 마벨우드의 일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유감을 표하오. 그대를 시험하기 위해 괴수가 나타날 지역으로 마벨우드를 고른 것은 내가 한 일이 맞고, 그 책임을 통감하오. 그러나…… 나는 달리는 열차의 방향만을 바꿀 수 있을 뿐, 열차를 멈추게 하지는 못하오.”
어차피 현상 자체를 막을 수는 없었기에 그 기회를 에스페란사를 시험하는 데 사용했다는 말이었다.
“그 결정은 후회하지 않소. 결국 아무도 죽지 않았으니까.”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뿐이에요.”
“목숨 앞에서 결과보다 중요한 것이 있소?”
이번에는 에스페란사가 말문이 막혀 입을 꾹 닫았다. 결과적으로는, 그의 선택이 옳았다. 에스페란사가 있는 곳에 던전을 만든 것으로, 결국 그는 사람들의 목숨을 구한 셈이었다.
“던전이 원래는 어디에 발생할 예정이었죠?”
‘던전’이라는 표현에 그는 “어울리는 명칭이군” 하며 실소했다.
“벨링엄.”
오스던 제2의 도시이자 최대의 항구 도시 벨링엄. 인구 백만, 인구 밀도 최악. 항구 노동자, 상인, 밀수업자와 탈옥범들이 북새통을 이루는 곳.
벨링엄의 빈민촌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아주 많은 사람들이 사라졌을 테고, 아무도 찾지 않았을 것이다. 부패한 지역 경관들이 덮어 버리고 기록까지 말소하면 그것으로 끝.
여전히 공작의 선택이 옳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의 선택이 무고한 희생을 줄인 것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벨우드에 그만한 규모의 재난을 일으킬 능력이 있으면서 왜 그것으로 폐하를 구하지는 못하냐고 묻고 싶었겠지? 대답이 되었길 바라오. 미스 헌터, 그대가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던전’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내가 어떻게 발생 장소를 바꿀 수 있었는지 알게 될 거요. 내 생각에 대가는 그것으로 충분할 것 같군.”
시더와 에스페란사가 공작의 의도를 짐작한 만큼, 공작 역시 에스페란사가 무엇을 원하는지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는 직접 본 것일지도 모른다. 황금 발톱이든, 그 무엇이든, 던전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방법을.
이렇게 되면 이해관계가 일치한다고 봐도 될 것 같다. 공작의 행동을 전부 납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도, 에스페란사의 가치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정도는 아닌 듯하고……. 황금 발톱에 대한 실마리도 얻을 수 있을 듯하니, 이쯤 해서 받아들이는 게 맞지 않을까?
그러나 에스페란사가 입을 열려는 순간, 커다란 손이 에스페란사의 손등을 덮었다.
“전하의 의중은 알겠습니다. 조만간 결정해서 답을 드리죠.”
“……미스 헌터의 뜻도 같은가?”
누가 봐도 시더가 멋대로 결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에스페란사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좀 늦어진다고 조건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공작만 초조해질 뿐이다.
“네.”
그것으로 대화는 끝이었다. 빈 찻잔을 바라보던 에스페란사가 몸을 일으켰다.
따라 일어난 공작이 에스페란사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미스 헌터, 그대는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자선을 하겠다고 말했소. 그대의 동정심에 호소하겠소. 폐하를 지켜 주시오.”
바람이 공작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흩트렸다. 에스페란사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공작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끝까지 재고, 평가하고, 명령할 줄 알았다.
이렇게까지 나오니 곤란해진다. 이쪽은 재고 평가할 생각이었으니까.
“긍정적인 답을 기다리겠소.”
애써 무감한 척 인사하고 나가려는데, 이번엔 시더가 걸음을 멈췄다.
“에스페란사, 먼저 나가 있지 않겠어요?”
“왜요?”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물론 공작이 알 리 없는, 일방적인 용무였다. 공작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커크필드 부인, 미스 헌터를 마차까지 안내해 주게.”
이제 응접실에 남은 것은 두 사람뿐이었다. 공작은 고개를 숙이느라 머리칼이 조금 흐트러졌을 뿐, 그것만 제외하면 빈틈 하나 없이 완벽한 매무새였다. 시더는 그 모습을 보며 한쪽 입꼬리를 불량스레 끌어 올렸다.
“끝까지 비겁하시군요, 전하.”
“내가 백작에게 그런 말을 들어야 할 이유라도?”
“선량한 미스 헌터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지만, 전하께서 바라시는 건 결국 청부살인 아니겠습니까? 그걸 빙빙 돌려서 마치 대단한 대의라도 되는 듯이 말씀하시고 살인의 책임은 숙녀에게 전가하실 생각이시겠죠.”
“내가 할 수 있었다면 내가 했을걸세.”
“그런 가정은 의미가 없죠. 못하시니까 말입니다.”
공작은 더 이상의 대화가 의미 없을 정도로 선명한 적의를 느낄 수 있었다. 시더 클라이번은 본성이 오만하기는 해도 그 오만함에 근거가 있었고, 결코 선을 넘는 법이 없었다. 에스페란사의 차림새에서부터 드러났던 이전 날의 경계심과 오늘의 적의.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굳이 따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공작은 딱딱하게 말했다.
“백작, 내게는 신념이 있네.”
시더가 신경질적으로 응수했다.
“제겐 신념은 없습니다만, 성질은 있습니다.”
그리고 이내 여왕의 사촌마저 제 아래로 내려다보는 그 오만한 눈길로 빙긋 웃는 것이었다.
“이해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안 하느니만 못한 인사를 한 에이번데일 백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택을 빠져나갔다.
공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필 에스페란사 헌터의 피후견인이 다루기 까다로운 에이번데일이라니. 골치 아픈 노릇이다.
그나마 수확이 있다면, 이번에는 거절당할 것 같지 않다는 점이다. 확답은 주지 않더라도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하면 에스페란사 헌터가 그들과 직접적으로 대면하지 않으면서, 그들을 죽이게 할 수 있을까?
공작과 같은 자에게는 결코 보여 주지 않는 그 동정심을 어떻게 하면 자극할 수 있을까?
에스페란사 헌터 같은 인물, 강한 자에게는 강해도 약한 자에게는 뭉그러지는 인물을 대하기에 적합한 상대는 따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