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77
77화
소문은 바람 사이로 퍼진다.
나인 호더는 거대한 도시였지만 사교계는 좁은 사회였다. 입단속이라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그리고 유구하게, 소문을 가장 늦게 접하는 것은 그 당사자들이었다.
코델리아 마벨우드는 나인 호더에 도착하자마자 친구들에게서 요즘 가장 뜨거운 화제라던 소문을 들었다.
“그럴 리가! 나이 차이도 그렇게 나는데?”
“고작 일곱 살 차이야. 스무 살 연하의 숙녀와 결혼하는 남자도 널린 판국에 고작 일곱 살.”
코델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럴 리가 없을 것 같아.”
“이미 나인 호더 사교계에 소문이 다 퍼졌어.”
“근데 나도 이상한 것 같긴 해. 다른 분도 아니고 ‘그’ 갈리스턴 공작이 귀천상혼을? 나도 미스 헌터를 좋아하지만 레이디 칭호도 없고, 평판도…….”
“말이 피후견인이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쯤은 우리처럼 순진한 숙녀들도 다 아는데 말이지.”
예민한 부분은 전부 대명사로 넘겨 버린 루신다가 코끝을 찡그렸다.
“그럴 리 없으면 뭔데?”
“에잇, 나도 몰라!”
실비아가 고개를 들이밀며 묻자, 루신다는 빨개진 얼굴로 쿠션을 집어 던졌다. 깔깔거리며 쿠션 안의 깃털이 빠질 정도로 팡팡 두들겨댄 숙녀들이 가쁜 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그레이스 스톤윌이 고개를 치켜들며 말했다.
“하지만 그렇잖아. 전하께서 일개 숙녀를 굳이 티타임에 초대할 이유는 뭐고, 셔버리 공작 부인도 만나게 하고, 선물도 보내고! 그다음엔 전하께서 직접 로드 에이번데일을 만났다잖아. 이상하지 않아?”
소문은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온 나인 호더가 알도록 티를 풀풀 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맞아, 이상하긴 해.”
“어쨌든 우리끼리 말해 봐야 아무 소용 없어. 나도 에스페란사와는 두어 번 말해 본 게 다였는데, 사람들은 나만 보면 소문에 대해 물어본다고!”
“우리 중 에스페란사와 가장 친한 건 코델리아지?”
“맞아. 컨트리하우스에 초대도 했었다면서!”
친분 때문에 한 초대는 아니었다. 오히려 친분은 마벨우드에서 함께 지내면서 쌓은 것이었다. 그리고 ‘던전’ 사건이 있으면서 마침내 완성된…… 오랜 친구들과는 또 다른 특별한 유대. 코델리아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랑 친해.”
“그럼 코델리아가 가서 물어보면 되겠다. 비밀은 지키겠다 하고!”
“맞아. 우리끼리만 알겠다고 해. 아니다, 아무한테도 말 안 하겠다고 해!”
“너 같으면 그 말을 믿겠어?”
코웃음 치며 일갈했지만 코델리아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침 화제의 모자 가게를 궁금해하는 에스페란사를 위해 가게에 데려가기로 날짜까지 정해 두었으므로, 질문을 하기 위해 따로 약속을 잡을 필요도 없었다.
‘한번 물어볼까?’
호기심은 날이 갈수록 켜켜이 쌓였다. 그리하여 약속 날짜에 당당하게 에이번데일 저택으로 쳐들어간 코델리아는 에스페란사가 제대로 인사를 하기도 전에 대뜸 물었다.
“에스페란사, 갈리스턴 공작 전하께서 청혼하셨다는 게 사실이에요?”
딱딱하게 굳은 에스페란사가 코델리아를 밀어내며 소리쳤다.
“……누구요? 갈리스턴? 미쳤어요! 누가 그런 소리를 해요?”
“나인 호더에 소문이 다 퍼졌던걸요. 사흘 전에 올라온 나도 아는데, 모르고 있었어요?”
“전혀 몰랐어요!”
에스페란사는 호기심 가득한 럭스 부인의 눈치를 살피며 일갈했다.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간 럭스 부인에게 붙잡혀 해명의 시간을 가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코델리아의 손을 붙잡고 재빨리 마차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증기 마차가 저택 앞의 작은 길을 지나 대로로 나오자, 에스페란사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소문이 뭐라고 났는데요?”
“갈리스턴 공작께서 귀천상혼을 염두에 두고 계신다, 상대는 로드 에이번데일의 피후견인이고, 첫눈에 반해서 춤을 신청했다더라, 이런 이야기요. 게다가 그분답지 않게 저택에 초대를 하시고, 왕실 어른께 소개도 하시고, 선물도 잔뜩 보내셨다고…….”
이상한 사족을 다 제외하고 건조하게 사실만 보자면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춤 신청, 했지. 저택에 초대도 했지. 왕실 어른에게 소개도 했고…… 그 어른이 이쪽에 도둑 누명을 씌우려 했지만. 선물도 보냈지. 어른이 저지른 사건의 뒷수습용 배상금이었지만.
“공작 전하께 아무런 마음 없어요?”
“전혀요.”
“멋있는 분이잖아요. 말수는 적으신데 가끔 하시는 말씀엔 무게감이 있고요. 무엇보다 숙녀를 유혹하려 하지 않는 점이 좋은 것 같아요.”
코델리아는 그런 사람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에스페란사는 머나먼 북부에 있을 알라스테어 렌프루를 떠올리며 혀를 찼다.
“음, 그런 분이신 거 같긴 하지만.”
“호감이 전혀 없어요?”
“그런 식으로는 전혀 없어요.”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에드먼드 새턴이 에스페란사에게 저지른 온갖 위협을 전부 차치하고서라도, 첫눈에조차 매력을 느끼지 못한 이유.
하지만 코델리아에게는 설명할 수 없는 이유였다. 에스페란사는 대충 얼버무렸다.
“내 취향이 아닌가 봐요.”
“하긴…….”
“응? 무슨 소리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코델리아는 뭔가 알 만하다는 얼굴로, 그러나 에스페란사에게는 전혀 설명해 주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 아니라면 됐어요. 그보다 모자 가게 얘기부터 듣고 싶어요! 대체 무슨 소문이 어떻게 퍼진 거예요?”
코델리아는 모자 가게 주인과 아는 사이라고 호언장담하며 에스페란사를 끌고 나와 놓고, 정작 소문에 대해서는 별로 잘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에스페란사도 소문에 대해 깜깜하긴 마찬가지였다.
“나도 가 본 건 아니라서요.”
“모자에 능력이 있다니, 미신일 것 같은데. 뭐, 그것도 오늘 밝혀지겠죠.”
궁금증을 쌓는 사이 마차가 멈춰 섰다. 3층 내지 4층 정도 되는 높이의 건물들에 창문이 빼곡하고, 전차가 증기를 뿜으며 지나갔다. 먼 곳의 시계탑이 뾰족한 머리를 드러냈다. 에스페란사가 기억하는 것과 같은 모양이었다.
시계탑이 보이지 않는 곳이라도 시간을 확인하는 데엔 무리가 없었다. 길 중간중간에 신호등처럼 위치한 시계를 볼 수 있었으니까. 머리 위로 커다란 비행선이 지나갔다.
코델리아는 건물 사이로 난 작은 골목으로 들어간 뒤, 아까 본 건물의 뒤편을 가리켰다.
“이쪽이에요!”
코델리아 마벨우드,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지?
하녀들이 새벽부터 줄을 서서 주인의 모자를 사 간다는 모자 가게였다. 아무리 뒷문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멋대로 들어가도 되는 건가?
“이래도 되는 거예요?”
“돼요, 돼요. 들어가 보면 알아요.”
코델리아는 에스페란사의 손을 잡고 건물 바깥으로 난 계단을 올랐다. 노크를 하자, 얌전한 인상의 여자가 문을 열어 주었다.
“어서 오세요, 아가씨.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이미 얘기가 되어 있었는지 주인의 응대가 자연스러웠다. 에스페란사는 코델리아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가게가 아니었다.
“공방이네요.”
마도구로 보이는 커다란 재봉틀이 황동빛 팔을 철컥거리며 혼자 돌아가고 있었다. 뿌연 연기가 굴뚝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천에서 나온 먼지 때문에 코델리아가 연신 기침을 했다.
벽 한편에 걸려 있는 가죽들은 에스페란사도 잘 아는 몬스터 가죽으로 보였는데,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 외에도 몬스터 부산물들이 마치 평범한 구슬과 깃털처럼 보관되어 있었다. 모자와 머리 장식, 신사용 정장 장식 같은 것들이 아직 미완성인 상태로 전시되어 있었다.
“이른 시간에 불러서 미안해. 에스페란사, 인사해요. 이쪽은 가게 주인인 소피예요.”
“에스페란사 헌터예요.”
여자가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20대 정도로 보이는 여자는 검은 머리칼을 땋고 자기가 만든 것 같지만 화려한 장식은 하나도 없는 모자를 썼다. 에스페란사의 모자를 알아보았는지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소피라고 불러 주세요.”
코델리아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소피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대단한 성공을 했던걸!”
“운이 좋았어요. 이번에 새로 계약하게 된 납품업자가 좋은 물건을 가져다줬거든요. 소문 덕도 있고요.”
“하지만 이렇게 예쁜 모자를 만든 건 네 능력이잖아? 지치지 않게 만들어 준다느니, 안색을 곱게 만들어 준다느니, 그런 소문이 없었더라도 유명해졌을 거야.”
코델리아는 마네킹 위에 씌워 놓은 모자 하나를 자기 머리에 쓰고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소피는 그런 코델리아를 어린 여동생을 보듯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 소문은 진짜야?”
“설마요. 그냥 운이 좋았던 것 아닐까요?”
코델리아는 더 묻지 않았다. 행여 사실이라 해도 일생에 비현실적인 일은 마벨우드의 던전 사건만으로 충분했다.
“그럼 소피가 정성껏 모자를 만들어서 행운이 찾아왔나 보다. 아, 온 김에 좀 더 보고 가도 될까?”
“물론이죠.”
코델리아는 예쁜 장신구에 금세 시선을 빼앗겼다. 하지만 에스페란사는 두 사람을 안내한 뒤 실크 모자에 깃털을 다느라 정신이 없는 소피 쪽에 더 시선이 갔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모자 가게 소피라니, 공교롭기도 하지’ 하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눈이 마주쳤다. 에스페란사는 소피에게 다가가 친근한 미소를 지었다.
“몇 가지 좀 물어봐도 될까요?”
“그럼요. 코델리아 아가씨의 친구분이신걸요.”
그래 봤자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소피는 친절했다. 하지만 동시에 지체 높은 숙녀의 질문에 답하지 못할까 긴장하는 티를 숨기지 못했다.
“코델리아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가요?”
소피의 어깨가 안도감에 축 늘어졌다.
“아버지께서 마벨우드 남작님의 은혜를 입어, 저희가 나인 호더에서 정착하게 됐어요.”
그래서 코델리아가 이 공방에 출입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마벨우드 남작에 대해 말하는 소피의 눈에는 환한 빛이 감돌았다. 에스페란사는 맞장구를 치며 몇 가지 사소한 질문들을 덧붙였다. 그리고 소피가 완전히 긴장을 풀었을 때, 불쑥 물었다.
“혹시 그 납품업자 얘기를 해 줄 수 있을까요?”
“예?”
소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눈을 굴리다가, 조심스레 되물었다.
“어떤 이야기를……?”
“소피 양의 모자가 유명해진 건 새 납품업자한테 재료를 받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했잖아요?”
“죄송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함부로 해드릴 수 없어요.”
경계 어린 눈초리가 에스페란사를 흘끔거렸다.
“처음 보는 재질의 구슬이잖아요. 깃털도 어떤 새의 깃털인지 알 수가 없고. 신기해서 그래요.”
“정말로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비밀 유지 서약을 했는걸요.”
납품업자라는 자가 아무래도 수상했다. 에스페란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때, 벽에 달려 있던 종이 거칠게 흔들렸다.
“앗, 아버지가 나가셨나 봐요. 전 아버지 대신 가게를 보러 가야 해서……!”
소피는 벌떡 일어나 도망치듯 계단을 내려가며 소리쳤다.
“좋은 아침입니다, 손님. 해터의 모자 가게입니다! 어떤 물건을 찾고 계신가요?”
모자 가게 점원이 할 법한 평범한 인사였지만, 에스페란사의 귀에는 다르게 들렸다.
[좋은 아침입니다, 손님. 해터의 장비 상점입니다. 어떤 물건을 찾고 계신가요?]동시에 소피의 얼굴에서 차츰 앳된 기색이 빠지며 30대의 브룩 부인으로 변했다.
소피 브룩.
헌터 협회 인근의 캐틀릭 스트리트에서 초보 헌터용 장비를 판매하는 ‘해터의 장비 상점’의 주인.
“에스페란사, 어디 가요!”
2층 창문에서 골목으로 바로 뛰어내린 에스페란사가 가게의 정문이 있는 반대편 대로로 향했다.
표지판에 흰색으로 선명하게 적힌 길의 이름. 고개를 돌려 보았다.
게임 속에서 수천 번은 다녀 본 거리였다. 시기가 다르니 사람들의 차림도, 가로등의 모양이나 증기 마차의 모양도 다르고 가게들도 바뀌었다. 그래도 에스페란사가 아는 캐틀릭 스트리트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 가게.
‘해터의 장비 상점’ 대신 ‘해터의 모자 가게’라고 적힌 간판. 몇 년 후면 ‘해터의 장비 상점’으로 바꿔 달겠지.
마법 용품 상점의 사냥꾼, 몬스터 부산물을 납품하는 납품업자와 몬스터 부산물로 만든 장비를 상류층에 뿌리는 역할을 맡은 직원 소피.
에스페란사가 마음을 놓고 있던 와중에도 이 세상은 ‘황금 발톱’의 오픈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는 증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