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78
78화
오후의 신사 클럽은 여느 때와 같이 북적거렸다. 시더 클라이번은 빈자리에 대강 자리를 잡고 파오란에 불을 붙였다. 궐련에서 알싸한 냄새가 났다.
짙은 녹색으로 칠한 창문틀에 팔을 기댄 그는 신문팔이 오토마톤에게 동전을 넣어 주고 적당한 신문을 하나 꺼내 보았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신문이라도 안 보고 있으면 누군가 와서 말을 걸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그런 대화는 보통 영양가가 없다.
팔라시움, 속칭 ‘올빼미 클럽’이라고 불리는 신사 클럽은 법학, 과학, 공학, 문학 등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성취를 거둔 신사 숙녀만 내부 회의를 통해 정식 멤버로 받아들였다. 숙녀라도 조건을 충족하면 클럽의 일원이 될 수 있었지만, 숙녀가 팔라시움의 새 멤버로 받아들여진 것은 10년 전의 일이었다.
대부분의 신사들이 그렇듯, 시더 클라이번도 이 클럽 하나에만 적을 두고 있었다. 그나마 사적으로 어울리는 학교 동창들도 몇 년 사이에 클럽에 들어온 인물들이었다.
예를 들면…….
“벌써 와 있었군. 자네가 늦을 줄 알고 30분 늦게 출발했는데.”
“당장 나오라고 불러 놓고 말이지. 펄즈베리.”
펄즈베리 자작 켄드릭 그림스턴-행어. 법관이자 형법학자.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이 심사를 받고 있으니 조만간 그들 나이 대에 젊은 박사 하나가 더 등장할지도 모른다.
시더는 입술에 대고 있던 궐련을 옆으로 비껴들었다. 켄드릭이 거대한 몸을 의자에 구겨 넣었다.
“젠장, 여기 의자는 왜 이렇게 작아?”
오스던 남자의 평균에 비해 상당히 키가 큰 편인 두 사람에게는 일반 의자보다 조금 더 큰 것이 몸에 잘 맞았다. 하지만 테이블에 있는 의자 두 개 중 큰 것을 시더가 먼저 차지하고 앉아 있었으니 켄드릭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곰 같은 덩치를 어찌어찌 구겨 넣으면서 그는 시더를 노려보았다.
“자넨 작은 의자에도 그럭저럭 앉으면서 꼭 그래야겠나?”
“나도 불편한 게 싫긴 마찬가지라. 그러게 일찍 와서 기다렸어야지.”
“……파오란 좀 끄게. 사람이 앞에 있는데.”
“불이 꺼지기 전에 용건을 말하고 꺼져 줄 건가?”
켄드릭은 얼굴이 빨개지도록 씩씩거렸다.
“자네랑 말을 하는 게 아니었어.”
“피차 같은 생각이네. 그래서, 언제까지 이 재미 없는 문답을 계속하려고? 빨리 끝내, 펄즈베리.”
그러나 막상 판을 깔아 줘도 켄드릭은 미적거리며 망설일 뿐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시더는 눈을 가늘게 떴다. 꼴같잖은 부끄럼을 타는 걸 보니 주제는 대충 알 만했다.
“내가 ‘자네의 허락하에’ 예의를 갖추어 구애하고 있는 미스 헌터의 일에 대해서 말인데.”
아, 역시.
“갈리스턴 공작께서 미스 헌터에게 청혼했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청혼?’
그 순간 시더는 클럽 내의 모든 눈과 귀가 이쪽으로 향하는 것을 느꼈다. 모두가 아는 소문이었단 거지. 당연히 그는 오늘 처음 들었다. 켄드릭이 아니었다면 계속 몰랐겠지.
“누가 그랬나?”
“모르는 사람이 없는 소문인데, 뭐.”
소문에 어두운 편인 데다 한창 논문 심사를 받느라 바빴을 켄드릭이 알 정도라면 모르는 사람이 더 드물긴 할 것이다. 시더가 짐짓 관심 두지 않는 척 내용을 캐자, 그는 네가 공작을 만났느니, 선물을 보냈느니, 소문의 세세한 내용까지 전부 털어놓았다. 정보를 얻을 만큼 얻어낸 시더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야.”
“말 돌리지 말고 대답 좀 하게.”
“내가 언제 자네 구애를 허락했지?”
켄드릭의 얼굴은 시뻘겋다 못해 시꺼멓게 변했다.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분명히……!”
“허락한 적 없어.”
“분명히……!”
그러나 되짚어 보니 그의 기억 속에서도 시더 클라이번이 ‘구애를 해도 좋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놀랍게도 저 여우 같은 에이번데일은 그의 애원을 능구렁이처럼 피해 갔을 뿐, 확답을 주지는 않았던 것이다.
“왜, 왜 허락을 안 해 주는 건가? 설마 자네, 사적인 감정으로?”
사적인 감정이 8할을 차지하기는 한다. 그러나 저 곰이 경쟁 상대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그리고 굳이 상황을 정직하게 가르쳐 줄 필요도 없지.
“글쎄. 그런데 에스페란사가 아직도 거절 안 했나?”
“안 했네! 저번에 탤벗 부인의 자선 파티에선 춤도 췄어.”
“춤이 별거라고.”
“별 게…… 아니긴 하지. 그래도!”
시더는 클럽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웃음을 지었다. 보는 사람이 절로 기분이 나빠지는 미소였다.
“에스페란사는 자네 안 좋아해. 앞으로도 좋아할 일 없고.”
“그건 모르는 일 아닌가.”
“좋아할 일을 했어야 좋아하지. 자네의 구애라고는 싫다는 일을 하는 것밖에 없는데 자네 같으면 좋아하겠나?”
찔리는 게 없지 않은 켄드릭은 지레 시더를 노려보며 변명했다.
“다 숙녀분의 안전을 위해 그런 거네.”
“이해하네.”
예상외의 긍정적인 반응에 켄드릭의 얼굴이 잠시 밝아진 순간, 시더는 내리꽂듯이 말을 마쳤다.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난 이해하지만 에스페란사는 이해 못 한다니 대신 거절해 주기로 했네. 차마 자네에게 직접 모진 말은 못 하는 숙녀분의 마음을 이해하겠지?”
이해할 리가 있나! 그러나 더 달라붙다가는 꼴이 우스워졌다. 거절당한 남자와 거절당한 뒤 질척거리는 남자는 급이 다르다. 씨근덕거리던 켄드릭이 숨을 깊게 내쉰 뒤 물었다.
“그래서, 공작 전하는 허락해드린 건가?”
“이미 거절당한 자네가 알아서 뭐 하게?”
“이미 거절당했는데 그것도 못 물어보나?”
어떻게 대답하는 게 좋을까? 소문을 아예 부정해 버릴 수도 있고, 거절했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었고, 아예 구애를 허락했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그는 에스페란사에게 구애하는 남자를 전부 막아 버릴 생각이 없었다. 다만 에스페란사가 불편해하는 게 뻔히 보이는 켄드릭이라면 대신 막아 줄 의향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소문에는 의도가 느껴졌다.
공작의 성격이나 에스페란사의 신분을 볼 때 청혼 같은 말이 나인 호더 사교계에서 이토록 무분별하게 언급되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일이었다.
“펄즈베리.”
“내 말에 대답 좀 하게.”
“공작께서 티스비아의 알렉산드라 공주와 파혼한 사유가 뭐였지?”
“기억을 못 하는 건가? 자네가?”
켄드릭은 방금 전까지 열을 내던 것도 잊고 멀뚱히 되물었다. 물론 그럴 리가 없었다. 시더는 처음부터 몰랐던 것뿐이었다. 남이 남과 파혼한 사유 같은 걸 알아서 쓸 데도 없고, 당시의 그는 연구에 한창 매몰되어 있었으므로 관심도 없었다.
“공주의 일방적인 파혼 통보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사유는 잘 모르겠네.”
“그래. 자네가 도움이 될 거라곤 생각도 안 했네.”
시더는 궐련을 재떨이에 비벼 껐다. 재떨이가 삐걱거리며 입을 벌리더니 타다 남은 꽁초를 삼켰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입구에 걸어놓은 모자와 겉옷을 찾아 걸치고 지팡이를 들었다.
“뭐야, 내 질문은?”
“알아서 생각해.”
그는 번뜩이는 눈으로 대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마도 공학 꿈나무들이 붙잡기 전에 냉큼 문을 열고 나갔다.
“백작님, 저택으로 돌아갑니까?”
“지금이…… 세 시가 다 됐군. 저택으로 바로 가지.”
에스페란사가 있다면 함께 차를 마시고, 아니면 간식 없이 차만 연구실로 가져가면 될 것이다.
‘공작이라.’
창문틀 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시가지의 모습을 응시하던 시더는 켄드릭이 본의 아니게 준 정보를 되짚어 보았다. 공작이 에스페란사에게 청혼했다는 그 웃기지도 않는 소문.
그 소문을 낸 건 공작이겠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공작이 에스페란사에게 다른 감정을 품고 있는지도, 솔직히 확신할 수 없었다. 공작같이 자기감정을 숨기는 데 능란한 인물을 속내까지 꿰뚫어 보려면 적어도 티타임 한 번으론 부족했다.
이유를 확신할 수 없으니 의도 또한 알 수 없었다.
시더는 잠시간의 생각 끝에 쉽게 인정했다. 에스페란사에게 정치적 모략에 약하다고 한 것은 진심이었다.
짐작 가는 게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일단 두고 봐야 할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소문이 퍼지고, 기사까지 날지도 모르지. 에스페란사는 질색하겠지만, 공작도 에스페란사가 싫어하리란 것은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닌가.”
문득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스쳤다.
에스페란사는 정말로 공작을 싫어할까?
그가 보기에는 그랬다. 질색하고 불편해했다. 그럴 만한 이유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은 모르는 것이다. 에스페란사가 그만큼 신경 쓰고 의식한 사람도 공작 말고는 없었다. 공작이 객관적으로 매력적인 신랑감인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의식하고 있기에 더 질색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시더는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청혼이니 어쩌니 하는 소문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아 놓고, 망상에 가까운 추측을 가지고 혼자 일희일비하는 꼴이라니.
이렇게 멍청해질 예정은 없었는데. 별것 아니라고 치부했던 감정은 들쭉날쭉하게 뇌리를 잠식했다. 이성이라도 멀쩡하게 작동하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이윽고 마차는 어퍼 레인의 익숙한 저택들을 지나 한적한 에이번데일 저택 앞에 도착했다. 그때까지도 기분이 가라앉은 채였다.
마차에서 내리자, 증기 마차 한 대가 일방통행 도로를 따라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마벨우드가의 마차였다. 에스페란사가 돌아온 모양이다.
곧 분주하게 간식을 준비할 럭스 부인의 모습이 눈에 훤했다. 두 사람 몫으로 준비한 것이겠지만 대부분 에스페란사의 입으로 들어갈 것이다.
실없는 웃음이 튀어나왔다.
“왜 그러십니까?”
“별일 아니네.”
마차가 차고로 들어가는 동안 시더도 현관으로 들어갔다. 하인들이 문을 열었으나 충직한 집사는 저택의 아가씨와 대화를 나누느라 주인의 귀환을 알아차리지도 못한 것 같았다.
“왔네요?”
오히려 알아차린 것은 에스페란사가 먼저였다. 하워드의 어깨너머로 까치발을 들고 고개를 내민 에스페란사가 손을 흔들었다. 시더도 마주 웃었다. 의식하고 한 일은 아니었다.
“어디 다녀왔어요?”
“클럽에요.”
“아…… 신사 클럽? 재밌었어요?”
“전혀요. 그러는 당신은?”
“모자 가게에 갔다가, 식사하고.”
“재미있게 놀았나 보죠?”
에스페란사는 애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코델리아 마벨우드가 그의 마법사를 별로 즐겁게 해 주지 못한 듯했다. 시더는 치졸한 우월감을 내리누르며 지팡이를 집사의 손에 맡겼다.
“재밌게 놀다 온 어린이는 손 씻고 육아실로 가서 간식이라도 먹어야죠.”
그 말을 들은 럭스 부인이 차를 준비하라며 하녀들의 등을 떠밀었다. 에스페란사는 픽 웃으며 물었다.
“육아실이 어딘데요? 1층? 아니면 서재?”
“당신이 좋은 곳으로.”
“그럼 서재로 가요.”
시더는 내심 놀랐다. 에스페란사가 책 먼지가 풀풀 날리는 그곳을 좋아하는 줄은 몰랐다.
“서재가 마음에 들어요?”
“복층이잖아요. 멋있어요.”
그러면서 에스페란사는 콧등을 찡그리며 웃었다. 별것도 아니었는데, 짜증의 잔여물까지 전부 씻겨 내려갔다. 널뛰는 감정에선 도무지 규칙성을 찾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