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79
79화
하녀들이 간식 트레이를 가져다 놓고 사라진 후, 에스페란사는 무려 서재 계단 한가운데 걸터앉았다. 왕실에 납품하는 유명 회사의 홍차 잔을 손으로 감싼 채였다. 찻물이 불안하게 넘실거렸다. 난간 사이로 고개를 들이민 에스페란사가 물었다.
“진지하게 할 말이 뭐예요?”
“꼭 그런 자세로 말해야겠어요? 아, 잠깐. 뛰어내릴 생각은 하지도 말아요. 내 책에 차 쏟아져요.”
난간 위로 뛰어넘으려던 에스페란사는 가볍게 계단참을 딛고 아래로 훌쩍 내려왔다. 에스페란사의 키만 한 높이에서 단숨에 뛰어내린 것임에도 바닥은 차 한 방울 떨어지지 않고 깨끗했다. 치마를 탁 털어 정리하고 자리에 앉자, 시더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럭스 부인이 봤으면 1년 치 잔소리 감이었어요.”
“그래서 몰래 하잖아요.”
어쩌다 보니 가정부보다 백 배쯤 관대해진 백작은 피후견인이 소파에 발을 올리는데도 한숨만 내쉬었다. 분명 처음에는 지적을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이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드니 이상한 일이다.
“어쩌다 당신의 그 방만한 자세에 익숙해졌는지 모르겠어요.”
“이게 편하다니까요.”
“물론 그러시겠죠.”
에스페란사는 그를 슬쩍 흘기다가 입을 가리고 키득거렸다.
“자기는 럭스 부인 잔소리 안 듣는 것처럼.”
“내가 럭스 부인의 제일가는 골칫덩이였는데, 지금은 당신이 그 자리를 꿰찰 것 같아서 말이죠.”
“제가 당신 자리를 빼앗을 일은 없을 것 같아요. 아까 전까지 럭스 부인이 한탄을 했거든요. 백작님이 어제도 새벽까지 안 주무셨네, 어쩌네…….”
“아, 나 없을 때 자기들끼리 내 욕을 한다?”
“비밀 지켜요.”
“당신 하는 거 봐서요.”
에스페란사는 어느새 잔뜩 늘어나 소파 한쪽을 다 차지한 쿠션 더미를 무릎 위로 켜켜이 쌓고 그 위로 턱을 푹 묻었다.
“그래서, 진지하게 할 말이 뭐예요?”
그 말에 거짓말처럼 기분이 가라앉은 시더는 모래시계에 눈을 고정한 채 느린 어투로 물었다.
“갈리스턴 공작이 당신한테 청혼할 거란 이야기가 파다하던데, 어떻게 생각해요?”
아. 그 얘기가 거기도 들어갔나. 말마따나 나인 호더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소문이기는 한 모양이었다. 에스페란사는 애매한 웃음을 지으며 얼버무렸다.
“글쎄요…….”
별로 좋은 대답이 아니었다. 시더의 머릿속에서 조금 전에 폐기한, 망상에 가까운 추측이 다시 싹을 틔웠다. 절로 삐딱한 말투가 나갔다.
“소문으로는 아주 열렬하더군요.”
에스페란사는 고개를 기우뚱했다. 갑자기 왜 저렇게 심술이 났담? 그러나 굳이 그 생각을 드러내지는 않고 이어 말했다.
“애초에 청혼이 아니었잖아요? 굳이 따지면, 능력 좋은 직원을 스카우트하고 싶은 헤드헌터?”
올바른 비유도 아니었을뿐더러 이해할 만한 비유도 아니었다. 시더는 ‘헌터?’ 하고 되물었을 뿐이다. 아, 그 헌터가 아니라요. 머리를 추수하는 헌터가 아니고.
“그러니까 음, 당신이 아주 뛰어난 집사를 발견해서 고용하고 싶어지는…….”
“하워드는 충분히 잘해 주고 있고, 다른 집사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어요.”
뻔히 이해했으면서 저런다. 그러나 답답하기는 시더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 덧붙였다.
“에스페란사. 난 당신 의견이 아니라 당신 감정을 물어본 거예요.”
“공작한테요? 미쳤어요?”
“그럴 수도 있잖아요? 가끔 자기한테 못되게 구는 사람한테 연애 감정을 갖는 멍청이들이 있긴 한 모양이고.”
“나보고 멍청이라고요?”
“그렇게 말하진 않았어요.”
하지만 시더의 웃음에는 ‘당신의 대답에 따라 달라지겠죠’ 하는 함의가 숨어 있었다. 에스페란사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내뱉었다.
“객관적으로 조건이 훌륭한 것은 사실이기도 하고.”
“그렇기는 한데.”
“나한테 말 못 할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면, 이쯤에서 당신이 멍청이인지 아닌지 솔직하게 말해 줄래요?”
그렇기는 하다. 공작은 객관적으로 미남에, 왕족이고, 부자고, 똑똑하고, 매너도…… 보통은 좋은 모양이고, 아무튼 나이가 많은 것을 빼고는 나무랄 데가 없는 인물이었다. 그 나이마저 에스페란사의 원래 나이와 따지면 고작 세 살 차이였으니.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세 살 차이라는 것이 무슨 뜻이겠는가? 에스페란사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사람은 나랑 열여섯 살 차이였다고요! 내가 처음 봤을 때 벌써 마흔 살 다 된 아저씨였는데 무슨 연애 감정을 가져요!”
고개를 든 시더가 멍하니,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 생각을 못 했네요.”
“진짜 미쳤나 봐.”
“내가 실례했네요. 당신을 그런 중년 남자랑 엮으려고 하다니,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그렇죠?”
“다시는 그런 말 하지도 말아요. 갈리스턴 공작이랑 결혼이라니, 그런 짓을 왜 해요.”
“그렇죠. 그런 짓을 왜 하겠어요.”
달래는 듯 즐기는 듯 느릿느릿한 말소리가 에스페란사가 하는 말마다 동의를 표했다. 한참 씩씩거리던 에스페란사가 한숨을 푹 쉬었다.
“됐으니까 그만해요.”
이런 것에 흥분한 것도 민망했다. 소문이 퍼질 대로 퍼졌는데, 물어볼 수도 있지. 적어도 지금의 갈리스턴은 갓 서른이니까, 감정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왜 이렇게 기를 쓰고 부정했는지 스스로도 이해를 못 할 일이었다.
쿠션을 고쳐 안은 에스페란사가 물었다.
“사실이야 어쨌든 소문이 퍼졌으니까, 공작이 이걸 어떻게 이용하긴 하겠죠?”
“반대라고 봐야죠. 공작이 이용하려고 소문을 퍼뜨렸다는 쪽이 맞을 거예요.”
“대체 이런 소문을 어디다 쓰려고…….”
“그러게요. 파인먼트 하우스에 도청기라도 설치하고 올 걸 그랬네요.”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의하던 에스페란사가 눈을 설핏 찡그렸다.
“불법 아니에요?”
“불법이죠.”
“그래도 돼요?”
“공작이 한 건 합법이겠어요?”
애초에 암살자를 기르는 공작이 합법과 불법을 구분씩이나 해 가며 일을 할 리도 없었다.
“내 말은, 템프턴 수상한테 또 불려 가서 안 혼나냐고요.”
“혼내 봤자 제명 정도겠죠. 상원 의원에서 제명되면 난 좋아요.”
“그래도 제명은 좀…… 아니, 그보다 제명 못 한다 그러지 않았어요?”
“제명하고 나면 혼낼 수가 없잖아요. 데려다 일도 못 시키고.”
템프턴 수상이 이 남자를 어떻게든 써먹어 보려고 얼마나 고생했을지 눈에 선했다. 그리고 시더는 템프턴 수상의 고생 따윈 아무 관심 없었겠지.
“아무튼, 공작이 이 소문으로 뭘 얻어내려고 하는지는 두고 봐야겠어요. 뭐 때문에 이렇게 일을 키웠는지.”
“그럼 소문은 그냥 두는 걸로요?”
시더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내키진 않지만.”
* * *
소문의 목적이 밝혀진 것은 그로부터 자그마치 2주 뒤였다.
여느 때처럼 시더는 연구실에 있었고, 드물게도 에스페란사도 서재가 아니라 연구실 안쪽에 있었다.
시더는 거대한 황금빛 기계가 타자기에서 종이를 뽑아내는 모습을 곁눈질하며 작은 기계를 이리저리 만졌다.
나사를 조였다 풀었다 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에스페란사가 팔뚝에 붙은 작은 반창고를 만지작거렸다. 방금 전 피를 뽑은 흔적이었다.
보통 피를 한번 뽑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구에만 몰두하던 시더가 웬일인지 반창고를 붙여 줬다.
“이리 와서 이거 볼래요?”
시선을 느낀 것처럼 에스페란사를 부른 그는 긴 벤치의 옆자리를 두드렸다. 에스페란사가 그 옆에 붙어 앉자, 그는 만지고 있던 기계의 속을 보여 주었다. 기계를 가득 채우고 있는 부품들은 너무 작아서 장난감 같았다.
“여기에 이걸 넣으면 끝이에요. 당신이 넣어 볼래요?”
“내가 해도 돼요? 너무 작은데.”
핀셋으로 집어도 될 것 같은 크기의 부품이었다. 에스페란사의 손가락 위에 올라가니 넘치지 않고 딱 맞았다.
“그대로 넣기만 하면 돼요.”
마침 딱 부품 하나가 들어갈 자리가 남아 있었다. 에스페란사는 마른침을 삼키며 부품을 집어넣었다. 황동빛 기계 부품이 자리에 빨려 들어가듯 맞아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부품들이 한 몸처럼 돌아가기 시작했다.
에스페란사는 흠칫 등을 뒤로 물렸지만, 시더는 뚜껑을 닫고 기계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카펫의 짧은 털 사이에 묻힌 기계는 잘 보이지도 않았다.
“뭐 하는 기계예요?”
“이동식 도청기예요. 이렇게 내려놓으면, 알아서 적당한 벽에 가 붙는 거죠.”
어느새 저 끝까지 꾸물꾸물 굴러간 기계는 작은 팔다리를 벽에 딱 붙이고 있었다.
“왜 이런 걸 만드는데요……?”
누가 봐도 범죄에 악용될 소지가 높은 물건이었다. 에스페란사는 ‘초소형’으로 시작하는 그다지 떳떳하지 않은 물건들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대체 왜?
“이제 슬슬 소문이 무르익었잖아요. 공작이 자기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딱 좋을 때죠.”
“뭔지도 모른다면서.”
에스페란사가 투덜거리자, 시더는 어깨를 크게 으쓱이며 말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 것 같아요.”
알았으면 알아내자마자 말을 해 줄 것이지!
“뭔데요?”
“자연스러운 그림을 만드는 거죠. 그의 적들이 의심하지 않게. 그러니까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예요.”
여기서 말하는 ‘그의 적’은 수상을 위시한 그의 정적들이 아니다. 사교계의 자잘한 소문 따위는 그들의 영역이 아니므로. 공작의 진짜 ‘적’은 여왕의 신변을 위협하고 있다는 그 미궁 속의 적이다.
“당신을…….”
시더가 에스페란사의 턱 아래 손가락을 두어 가볍게 두드렸다. 턱이 살짝 들리면서 눈이 마주쳤다. 웃음기 없는 눈이 낯설었다. 시선이 맞닿을 때 그는 늘 웃고 있었으니까.
분명 처음엔 아니었다. 언제부터였지? 문득 뇌리를 스친 의문의 답을 찾고자 기억을 더듬었다. 뭔가 손에 닿을 듯, 말 듯 했다. 감각이 한껏 예민하게 섰다. 그러니까…….
“잠깐만.”
명랑한 종소리가 생각의 흐름을 끊었다. 닿을 듯하던 것이 손안의 모래처럼 빠져나갔다.
“아까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거예요?”
“말해 줄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왜요?”
“이미 온 것 같으니까.”
시더는 서재로 나가 창문을 열어젖혔다. 오래된 마차가 저택 앞에 서 있었다. 그러니까, 정말 말이 끄는 마차였다.
이 시대의 나인 호더에도 물론 진짜 말이 끄는 마차가 다녔다. 증기 마차는 비싸기 때문에 아직 개인적으로 소유하는 계층은 상류층에 국한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퍼 레인의 저택 정문에 서 있을 만한 마차를 말이 끄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짐마차가 아니라 깔끔하고 멀쩡한 모양의 마차는 더더욱 보기 어려웠다.
에스페란사는 순간적으로 시더의 소매를 꽉 쥐었다.
“설마.”
우당탕 소리와 함께 서재 문이 벌컥 열렸다. 밀런이 흰 봉투를 흔들며 다급하게 말했다.
“왕성에서 초대장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