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8
8화
“아무튼 이건 내가 더 읽어 보도록 하죠.”
에스페란사가 대강 고개를 끄덕이니, 시더는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안 돌려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어? 그거 가지세요. 전 어차피 있어도 안 읽는데.”
“진심이에요? 이런 자료를?”
저건 고맙다는 뜻인가 멍청하다는 뜻인가. 어째 설리번 박사는 인정을 받았는데 에스페란사에 대한 평가는 더 떨어진 것 같다. 불공평하게.
“네, 뭐. 제가 갖고 있는 것보단 나을 것 같고.”
낫을 줬던 걸 생각하면, 뭐라도 더 퍼 줘야 서로 수지가 맞을 것 같고.
“그렇다면야. 고마워요.”
“아뇨…….”
답을 하기도 전에 시더는 벌떡 일어나 나가 버렸다. 아주 신이 났다.
“난, 이거나 치워야지.”
괜히 쏟아 냈다. 폼 좀 잡아 볼랬더니.
에스페란사가 손짓하는 대로 쪽지들이 인벤토리에 착착 들어가 쌓였다. 찻잔을 치우러 온 하녀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모습을 구경했다.
“아가씨의 마도구인가요? 처음 보는 거예요!”
“와, 또 보여 주시면 안 돼요? 정말 신기해요!”
하녀들의 아부 실력이 상당했다. 기분이 으쓱해진 에스페란사는 그들 앞에서 간단한 마법까지 선보였다. 손바닥 위에 작은 불덩어리를 띄우자 하녀들은 아예 자지러졌다.
“마법을 이렇게도 쓰는구나!”
“저희 백작님이 쓰는 거랑은 되게 다르네요. 아가씨, 물도 만드실 수 있어요?”
“와아아, 물도 만들어 주세요!”
그 모습을 시더가 발견한 것은 몇 시간 뒤의 일이었다.
얌전히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집사를 대동한 백작이 들어오자, 일도 안 하고 모여들었던 하녀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에스페란사의 손 위에 일렁이던 물이 펑, 하고 사라졌다.
들어오려던 것도 잊고 에스페란사의 손바닥을 멍하니 바라보던 시더가 물었다.
“당신, 마법 써요?”
빈 응접실에 홀로 남은 에스페란사가 눈을 깜박였다. 하녀들이 사라지는 속도야말로 마법에 가까운 것 같은데.
“당신도 쓰잖아요? 마도 공학자라면서요.”
“물론 나도 쓰죠. 하지만 당신은…… 잠깐 실례.”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손을 잡아당겨서 소맷자락을 뒤집었다. 흰 손목이 드러났다. 장총이나 낫같이 거대한 무기를 쓰는 손이라기에는 가늘어 보이지만 결코 만만하지는 않은 손. 그는 다른 손도 받아서 뒤집었다. 그의 눈길이 에스페란사의 발목으로 향했다가 허둥대며 멀어졌다.
차마 치마를 뒤집을 생각은 할 수 없겠지. 대신 그는 귀에 대고 다그치듯 속삭였다.
“몸에 지닌 마정석, 있어요?”
에스페란사도 덩달아 속삭이며 대답했다. 대체 왜 이래야 되지?
“없어요. 근데 왜 그래요? 어제도 가방 열 때 썼잖아요, 마법.”
“그건 이런 게 아니었으니까!”
천재 박사의 눈에 귀기가 번뜩였다. 에스페란사는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시더도 자신이 과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손을 놓고 물러났다.
“미안해요.”
“……괜찮아요.”
“잠깐 내 연구실로 가요.”
“백작님, 그럼 파티는…….”
“안 가. 하워드, 가서 자네 일 해.”
하워드 집사는 더 의문도 제기하지 않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에스페란사는 혼이 쏙 빠질 것 같았다. 이게 뭐람?
“나랑 같이 가 줄 거죠?”
방금까지 냉랭하던 시더가 돌연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 미소가 그리 우호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 유괴범의 미소 같았다.
“지금요? 이것만 다 치우고요.”
“도와줄 건 없나요?”
“……없어요.”
백작은 신사답게 뒤로 물러나 문 앞에 팔짱을 끼고 섰다. 그리고 에스페란사가 인벤토리 안에 마지막 쪽지까지 집어넣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가죠.”
성큼성큼 앞서 나가는 그를 따라가자니 에스페란사는 폭이 좁은 드레스 안에서 최대한 넓은 보폭으로 걸어야 했다. 시더는 옆에서 불편하게 걷는 게 보이지도 않는지, 눈을 번뜩이며 앞서 나가고 있었다.
‘귀가 빨개졌네.’
베스트에 가려진 등 근육에 힘이 바짝 들어가 있다. 대체 뭐가 그렇게까지 놀라운 거지?
“저기.”
등을 살짝 건드리자, 등줄기가 확 움츠러들었다가 풀린다. 그렇게까지 놀랄 줄은 몰랐다.
“아, 미안해요.”
“…….”
대답할 겨를도 없어 보였다. 그가 바쁘게 도착한 곳은 서재였다. 여전히 놀라운 규모의 서고를 통과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지나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연구실이 나타났다.
설리번 박사의 연구실과 비슷하지만 훨씬 부유해 보이는 연구실이었다. 마호가니로 책장을 도배해 놓았고, 황동으로 된 톱니바퀴가 쉴 새 없이 굴러가는 정체 모를 기계들과 붉은 침이 움직이는 계기판들로 가득했다. 기계들은 자기들끼리 뭔가를 주고받고 회로를 바꿔 끼우기를 반복했다.
“……굉장하네요.”
“에스페란사, 여기 서 봐요.”
시더는 계단이 끝없이 이어진 통로로 내려가더니 거대한 모눈 판을 끌고 와서 발 앞에 내려놓았다. 에스페란사는 흠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저한테 이상한 거 하려는 거 아니죠? 저 해부 싫어요.”
“당신을 왜 해부하겠어요? 살아 있는 채로 연구할 수 있는 게 훨씬 많은데.”
아, 그게 문제셨다?
“아프지도 않을 거예요. 금방 볼 테니까, 여기 서서…….”
사뭇 낮고 달콤한 목소리였다. 정혼자에게 장미를 건네는 신사처럼 은근한. 다른 상황이었으면 이 남자의 본성도 잊고 심장이 뛰었을지도 모르겠다. 속셈을 아는 지금도 감탄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상황에 맞는 비유는 아니지. 상황에 맞는 비유는…….’
유괴범이지.
“정말 그냥 판독기예요. 원래는 마법 용품에 사용하는 거지만.”
“그거 마력을 흘려서 되받아치는 걸 보는 거잖아요!”
현실로 치자면 사람 몸에 전기를 흘려 넣는 셈이다. 시더가 눈을 크게 떴다. 저걸 해석하자면, ‘알고 있었네?’
“그게 어떻게 안 아파요!”
에스페란사가 덜덜 떨면서 뒤로 물러났다. 손에 잡히는 대로 무기를 들었더니 원래 쓰던 무기들 대신 장난감 같은 권총이 잡혔다. 인벤토리를 헤집고 있을 시간이 없어 그거라도 쥐고 겨누었다. 그러나 눈이 뒤집힌 마도 공학자는 총구를 앞에 두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안 아프게 할게요. 정말 아주 조금만 흘려 넣을 거예요.”
“사람한테 해 본 적 없잖아요.”
“그야 사람은 원래 마력이 없으니까요.”
그는 억울하다는 듯이 고개를 기우뚱하며 말했다.
“당연히 기회가 있다면 해 봤을 거예요. 나도 당신에게 이런 테스트를 하게 된 게 마음이 좋지는 않아요. 좀 더 합법적으로 구할 수 있는 실험체가 있으면 좋았겠지만.”
“당신 지금 실험체라고 했다고!”
“물론 당신은 아니죠, 에스페란사. 당신은… 손님이잖아요? 우린 같은 걸 찾고 있는 동료고요. ‘당신’은 실험체가 아니죠.”
안 믿어. 안 믿어.
“……그래요. 못 믿을 수도 있죠. 내가 그리 믿음직한 남자는 아닌가 봐요.”
에스페란사는 흥분해서 급하게 오르내리는 가슴을 한 손으로 눌렀다. 시더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축 내려간 어깨가 시무룩해 보였다.
밀랍 인형처럼 어여쁜 얼굴이 애처롭게 쳐다보고 있으니 왠지 사탕이라도 내밀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저건 독버섯이다. 식충화다. 에스페란사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럼 피 한 방울만 주지 않을래요? 딱 한 방울만.”
“이……!”
반사적으로 화를 내려던 에스페란사가 멈칫했다. 한 방울 정도는 괜찮지 않나? 어차피 전투에 최적화된 헌터의 몸은 고통에 무디다. 고작 바늘로 쿡 찔러 한 방울 가져가는 것 정도야. 그걸로 잘 연구를 하다 보면 뭔가 소득이 있을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저렇게 고운 얼굴로 애처롭게 부탁하는데. 피 한 방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헌터의 피로 연구를 아무리 해 봐야 황금 발톱이나 던전과 관련된 소득을 얻을 수 있을 리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겠지만, 에스페란사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위생 잘 챙겨서 가져가요. 바늘 소독 꼭 하고.”
손을 내밀자, 시더가 환하게 웃었다. 속눈썹 한 올 한 올이 오후의 햇살처럼 빛났다. 말문이 막혔다. 저렇게 내 취향으로 예쁠 건 또 뭐람.
커다란 손으로 에스페란사의 손목을 감싸 쥔 시더는 핏줄을 따라 손끝을 내렸다.
손끝이 짚는 곳에 짙어진 시선이 닿았다. 귀한 것을 어루만지듯이 진지하고 조심스러웠다. 뱃속이 간지러워졌다. 에스페란사가 무심코 주먹을 쥐자 그는 다른 손으로 꽉 쥔 주먹을 부드럽게 풀어냈다.
“안 아프게 할게요. 약속해요.”
형식적으로 손등에 입 맞추던 때나 외과의처럼 뒤적거리던 때와 달리 지금 에스페란사를 붙든 손에는 열기가 느껴졌다. 섬세한 손끝이 어느 지점을 짚었다. 그때, 에스페란사는 곁눈질로 계기판의 붉은 침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은근히 빨라지던 심장 박동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이 작자가, 몰래 마력 측정을 하고 있었네?’
없던 긴장까지 다 깨어지는 꼴이었다. 시더는 한 발로 모눈 판을 밟고 있었다. 자기 자신을 매개로 해서 간접적으로 마력 측정을 한 것이다. 본인이야 마력이 없으니 아프지도 않을 테고, 에스페란사가 판에 직접 서는 것보다는 정확하지 않아도 마력이 많은 곳이 어딘지 정도는 알아낼 수 있다. 그 사실을 인지하고 나니 뒤늦게 손목이 따끔거렸다. 이걸 감추려고 그 난리를 피웠구만?
시더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노려보는 눈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한 손으로 포장된 바늘을 꺼내 이로 뜯었다. 그리고 보란 듯이 바늘을 한 번 더 소독제로 씻어 냈다. 그 바늘이 그의 엄지손가락이 짚고 있던 부분을 쿡 찔렀다.
“앗!”
“쉿, 괜찮아요. 금방 끝날 거예요.”
바늘이 빠져나오고, 둥글게 배어 나온 핏방울이 유리병에 뚝 떨어졌다. 시더는 은근히 손목을 눌러 피가 더 배어나도록 했다.
“한 방울이라면서요, 이 사기꾼아!”
“찌른 김에, 한 방울만 더. 다신 안 할 테니까…… 응?”
나직이 속삭이는 중에도 아픈 곳을 꾹 누르고 있어서 기어이 그는 손가락 한 마디만 한 유리병을 꽤 채워 갔다. 유리병 뚜껑을 닫은 시더는 손수건으로 상처 주변의 핏자국을 닦아 주었다.
“다신 당신을 믿나 봐요.”
“협조해 줘서 고마워요.”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미련 없이 손을 떼어 냈다. 에스페란사는 기가 막혀 고개를 내저었다. 진짜 이상한 인간 같으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