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80
80화
황금 물레바퀴와 낫. 새턴 왕가의 문장이었다. 우편 시스템도 잘돼 있는 나인 호더에서 굳이 마차를 탄 시종을 보내는, 시대에 뒤떨어진 시스템. 전통의 수호자, 통치하지 않는 군주, 해리엇 2세. 지금은 고작 서른일곱 살의 젊은 나이였다.
“왕성으로 불러들이려고 한 거군요. 공작과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과 달리 왕성에 드나들려면 확실한 이유가 필요할 테니…….”
“이런 방향이면 적들이 의심하더라도 명분이 있죠.”
“어차피 눈에 띌 수밖에 없으니 아예 부풀려 버리는 거네요.”
위험한 방식이었지만 어차피 그 위험은 전부 에스페란사가 떠안는 것이니까 에드먼드 입장에선 상관없었을 것이다.
협력을 제안해 놓고 말이지. 괘씸하기 짝이 없다.
“그들이라고 마냥 믿진 않겠지만, 당신은 겉으로 보기엔 그냥 숙녀고. 역시 날 견제하는 쪽으로 가겠네요.”
“아, 당신을 미끼로 던지겠다?”
예의도 없고.
“미끼가 되기엔 내가 그리 만만치는 않아서.”
짧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한 시더는 초대장을 집어 들어 열어보며 말했다.
“이게 당신을 설득하는 작업의 일환인지, 아니면 적들과 당신을 마주치게 해서 강제로 한쪽 편을 들 수밖에 없게 하려는 건지 모르겠네요.”
그렇게까지 머리를 써야 하나. 공작은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길로 빙빙 돌아가는 데 재주가 있나 보다.
“차라리 머리 박고 부탁하면 들어줬을지도 모르는데…….”
정말이었다. 공작은 전혀 불쌍하지 않지만 여왕을 비롯한 왕실 가족에게는 13년 후의 세계에서부터 이어져 오는 유구한 호감이 있으니까. 협박당한다니 딱하기도 하고.
“글쎄요, 난 어떻게 나오든 들어주지 말자는 쪽인데.”
“왜요?”
“당신, 그 ‘적’들 죽일 수 있겠어요?”
에스페란사가 눈을 크게 떴다. 죽인다니.
“꼭 죽일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어떤 인물이든 이길 자신은 있다. 제압할 자신도. 하지만 시더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말했다.
“죽여야 할 거예요.”
“아니, 왜 그런 걸 나한테 맡겨요. 죽이고 싶으면 자기가 죽이지. 죽이기 쉽게 잡아 주는 것까진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그렇게까지 한다면 그건 결국 직접 죽이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무릎에 턱을 대고 숨을 푹 내쉬었다.
“가급적이면 죽이고 싶지 않아요. 꼭 필요하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게임 속에서의 살인과는 다르다. ‘황금 발톱’은 게임이라기에는 너무 현실적이어서, 게임인 걸 아는데도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하물며 진짜 세계에서의 살인이라니.
하지만, 필요하다면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말하려는 순간, 시더는 초대장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최대한 받아들이지 않는 쪽으로,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정보는 얻어 오는 쪽으로 생각해 보죠.”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우리가 원하는 정보라. 일단 어떤 기제로 던전이 발생하는 건지 확인을 해야겠네요.”
“무엇보다 확인해야 할 건, 던전이 만들어지는 것과 없애는 것이 같은 기제를 따르는지예요. 즉, 공작이 알고 있는 정보가 ‘황금 발톱’에 관한 정보인지, 아니면 지금까지 우리가 헛발질해 온 건지.”
맞는 말이었다. 달리는 것만 생각하다가 방향을 잊어서는 안 되지.
“그치만 사실 헛발질이라고 생각하진 않죠?”
“그냥 확인하는 거죠.”
아니나 다를까, 예상한 그대로의 대답이 돌아왔다. 살인이라는 단어를 들은 후로부터 굳어 있던 기분이 좀 풀렸다.
“일단 폐하를 만나 뵙도록 하고, 그 추이를 보며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 같네요.”
“……그, 아까 말한 거요. 정히 필요하다면, 한 번 정도는 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에스페란사가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더는 뭘 할 수 있다는 건지 묻는 대신 낮게 웃었다.
“결심이 필요할 정도면 그건 정말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말뜻은 한 박자 늦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에스페란사는 빈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은 익숙하다. 하지만 진짜로 사람을 죽여 본 적은 없었다. 진짜 살인은…… 아직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오늘 당신 무기는 다 주고 가요. 정비해 둬야겠어요.”
정말 걱정할 필요 없는 거겠지? 에스페란사는 멀뚱히 무기를 빼앗기면서도 생각했다. 믿어도 되는 것 맞나?
“에스페란사. 지금 당신한테 날 믿는 것 말고 다른 선택지가 있어요?”
“아, 네에…….”
“이제 나가 봐요. 나가서, 럭스 부인에게 폐하를 알현할 일이 생겼다고 전해 줘요. 알아서 해 줄 테니까.”
그 말을 듣자마자 깨달았다. 익숙한 방식의 심술이다.
* * *
아니나 다를까, 럭스 부인은 그 말을 듣자마자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에스페란사를 끌고 가서 전 백작 부인의 드레스 중 제일 귀해 보이는 것을 가져다 입혔다.
왕을 알현하는 데는 그만한 예의가 필요했다. 즉 이 드레스는 정장이었다. 그것도 최고급 정장.
그러나 키가 작고 통통한 체격의 전 백작 부인이 입던 드레스가 에스페란사의 몸에 맞을 리가 없었다. 그걸 이리저리 수선하고 멀쩡한 꼴을 만든다고 고생을 했다.
“새것을 맞춘다면 좋겠지만, 날짜가 이렇게 촉박해서야……!”
“설마 아가씨가 왕성에 가실 일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한창 바쁜 와중에 밀런이 문을 빼꼼 열고 손만 내밀었다.
“백작님께서 이것도 가져다주라고 하셨습니다.”
한 번 거절한 적이 있었던 보석함이었다. 럭스 부인은 조심스레 그중에서 가장 커다란 브로치를 골랐다. 다행히 드레스와 같은 색의 작은 모자와 신발은 금방 구할 수 있었다.
에스페란사는 원래 숙녀의 옷차림에 그렇게 많은 규칙이 있는지 몰랐다. 점심때는 어떤 천으로 만든 옷이어야 하고, 네크라인은 어디까지 내려와야 하고, 형태는 어떠해야 하고…….
‘더 놀라운 건 저걸 절반 이상은 지키고 있었다는 거지.’
주는 대로 입다 보니 그렇게 됐다.
초대장에 적힌 날짜가 다가오는 동안 에스페란사는 능력치에 0 하나씩이 더 붙은 총과 시더가 시시때때로 날라 주는 의미 모를 물건들을 인벤토리에 꽉꽉 채워 넣고, 옷이 터지지 않을 정도의 체중 조절을 했다. 다시 말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녀들과 럭스 부인은 옷을 수선하랴, 옷에 맞으면서도 격식을 차린 장신구를 고르랴 정신이 없었고, 시더는 시더대로 연구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 * *
그렇게 지루한 며칠이 흐르고, 이윽고 왕성으로 향하는 날. 시더도 오늘은 가장 정복에 가까운 차림을 하고 있었다.
모닝코트, 베스트, 셔츠와 애스콧 타이. 검고 윤이 나는 옥스퍼드 구두와 실크해트, 회색 가죽 장갑, 지팡이, 회중시계. 그린 듯한 신사의 모습이었다. 장식이나 변주 하나 없는 정복.
“훈장을 받은 날 이후로는 처음인 것 같네요.”
“저도…… 훈장 수여식 때 이런 걸 입긴 했었는데.”
그땐 헌터 협회에서 정해 주는 옷을 사 입었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정복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몸이 더 조이고 불편했다. 전투라도 하게 되면, 중간에 옷을 갈아입을 시간이 있을까?
“오늘은 내 소매 구기면 안 돼요.”
그러고 보니 에스페란사가 구겨놓은 셔츠가 한두 장이 아니었다. 어쩌다 그런 버릇이 생겨 버렸는지 모르겠다.
“그럼 대신 이걸로?”
에스페란사는 시더의 손을 쥐어 자기 손바닥 위에 올리고 손끝으로 그의 손등 위에 원을 그렸다가, 가로로 길게 그었다.
“예, 아니오.”
대답 대신 짧은 웃음이 돌아왔다. 에스페란사의 귀에 걸린 녹음기를 다시 한 번 확인한 시더가 증기 마차 문을 열었다.
나인 호더 한복판을 일직선으로 가로지르던 증기 마차가 왕성으로 들어갔다.
통칭 ‘왕성’이지만 정식 이름은 어거스텀 궁전이었다. 여왕은 보통 한 해 중 여덟 달 정도를 이곳에서 보낸다. 여름 휴가가 머잖은 이때, 여왕이 친분 없는 숙녀를 초대한 것은 왕실의 입장에서도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예우는 확실했다. 어느 것 하나 부족하거나 과한 것 없이, 일반 손님을 대하는 대로.
“로드 에이번데일, 미스 헌터. 어거스텀 궁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거스텀 궁전의 응접실도 파인먼트 하우스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널따란 호수가 잘 보이는 2층의 응접실. 에스페란사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젊은 모습의 여왕이 그들을 맞이했다.
그러나 젊음과 생기를 맞바꾼 것처럼, 짙은 가운을 입은 여왕의 뺨은 핏기 없이 창백했고 눈에는 짙은 어둠이 드리워 있었다.
여왕의 옆에는 셔버리 공작 부인이 앉아 있었다. 여왕보다 대여섯 살 정도 많은 나이의 왕실 어른임에도 불구하고 찌그러진 듯 우울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적잖이 주눅 든 듯한 공작 부인은 에스페란사를 보고는 눈을 잠깐 반짝였다.
“숙모님, 나가 계시지요.”
그나마 자리에 앉혀는 주었던 갈리스턴과 달리 여왕은 가차 없이 공작 부인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공작 부인은 입술을 꾹 다물고도 여왕에게 무릎을 굽혀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여왕이 힘껏 미소 지었다. 에스페란사도 잘 아는, 여왕이 가장 군주답다고 생각하는 미소였다.
“반갑소, 미스 헌터. 오랜만이오, 에이번데일. 훈장 수여식 이후로 처음인가?”
“그렇습니다.”
여왕은 조금 편안한 미소로 그들을 자리로 안내했다. 시종 하나 없는 널따란 응접실에 오직 세 사람만 앉아 있었다. 여왕은 손수 차를 내렸다. 응접실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숨이 막힐 것 같이 불편한 고요였다.
“이런 식으로 불러들이게 되어 미안하오.”
처음부터 사과를 들을 줄은 몰랐다. 에스페란사는 한발 늦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이해합니다.”
“오스던의 여왕이 손님 하나 초대하는 데도 공을 들여 소문을 만들고, 이토록 불명예스러운 방식으로 초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참으로 수치스럽소.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오. 이해해 주어 고맙소.”
여왕의 목소리는 모든 비통함과 무력함을 애써 갈무리한 듯 떨림이 없었다. 그러나 한 겹 막 너머로 그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미리 알았다면 더 좋았겠으나, 별수 없지요. 기분 나쁘지 않았습니다.”
“에드먼드가 소문에 대해 언질을 주지 않았군.”
침음을 삼킨 여왕이 자리에 앉았다. 연신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러면 여왕은, 그들이 처음부터 알았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그 소문의 정체부터? 그런 거라면 여왕이 자기 사촌을 대단히 오해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니면 에드먼드 새턴이 이번 일에 유독 혹독하거나.
“그 애의 방식이 눈에 차지 않았으리란 것, 이해하오. 부디 관대하게 봐주기를 바라겠소.”
여왕은 시종일관 존대에, 놀라우리만큼 정중했다. 두 사람의 신분 차이를 생각하면 정중하다기보다는 거의 비굴한 것에 가까웠다. 갈리스턴 공작은 마지막 부탁을 제외하면 시종일관 뻣뻣이 고개를 들고 있었는데 말이다.
“에드먼드는, 그 애는 상황을 잘 몰라. 차마 그 애에게도 말하지 못한 것이 많았소. 짐의 목숨을 위협하는 자들이 얼마나 무도한 짓을 일삼고 있는지. 벌써 연 수입의 절반이나 그들에게 빼앗기고 있는데, 짐은 그 많은 돈으로 그들이 대체 무얼 하는지도 모르오.”
끝까지 수족이자 가장 신뢰하는 친척인 갈리스턴 공작에게조차 말하지 못한 것은 수치스러워서였다. 협박에 굴복한 것도 차마 입에 담지 못할 굴욕인데 심지어 오스던의 군주에게만 주어지는 캐슬다인 공국의 수입을 저당 잡혔다. 그 계약은 심지어 문서로 남아 있어, 그들이 그것을 공개하면 왕실의 명예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것이다.
“얼마 전에는 시청 소유의 부지를 내놓으라고 하기까지 했소. 짐의 것만을 탐한다면 줄 수 있지만, 국가의 것을 달라는 요구는 들어줄 수도 없고, 들어주더라도 막대한 부담을 안을 수밖에 없소. 그런데도 짐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소. 나를 군주로 믿고 따르는 사촌에게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소?”
단지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다, 협박을 당하고 있다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목숨은 그저 빌미일 뿐이고 그것을 통해 재물을, 그것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에드먼드와 여왕이 거듭 말하는 그 위험한 적은 좀 지나치게 속물적이었다.
“폐하, 실례지만 대체 왜 그렇게까지 된 건가요?”
그 점이 가장 이상했다. 오스던의 여왕은 애초에 협박을 받을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한 번 정도는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지속적인 협박을 받고 있다는 것은 이상했다. 대체 그들은 얼마나 강하단 건가?
“그자들이 인질로 잡은 건 이 나라의 안전이오.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이 나라 전체를…… 지금으로선 그저 재물만 탐하는 것을 감사히 생각하는 수밖에 없소.”
여왕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려는 듯이. 에스페란사가 뭔가 말을 하려던 찰나, 시더가 에스페란사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려 막았다. 여왕이 하는 말을 더 들어 보자는 것 같았다.
“짐의 아이들도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소. 그들은 눈치 따위 보지 않소. 그냥 죽여 버릴 수 있으니까! 그리고 세상은 결코 그 아이들을 죽인 게 누구인지 찾아 주지 못할 거요. 절대로. 짐만 알고 있겠지. 알면서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겠지.”
기듯이 다가와 에스페란사의 손을 붙든 여왕의 치마는 쥐고 뜯느라 엉망이 되어 있었다. 자식을 저당 잡힌 부모의 심정을 부모가 아닌 그들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으나, 아이를 위하는 마음이 깊을수록 그것이 늪지처럼 발을 붙들었으리란 것은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에스페란사는 여왕이 가진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혹은 에스페란사가 그렇게 믿도록 만들 심산이거나.
전부 믿지는 않는다.
“에드먼드는 그대만이 그자들과 동등하게 겨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지. 미스 헌터, 일국의 군주로서, 두 아이의 어머니로서 부탁하겠소.”
실핏줄이 터져 새빨갛게 보이는 눈으로, 여왕이 말했다.
“그 두 사람을 죽여 주시오. 그렇게만 해 준다면, 그대가 궁금해하던 것, 전부 알게 될 것이오. 단 하나도 빼놓지 않고, 가감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