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81
81화
침묵이 길었다. 생각이 길어졌다. 도와줄 수는 있다. 하지만 죽여 달라고 한다면, 그것까지 들어주기는 쉽지 않았다.
시더를 돌아보자, 그는 굳은 얼굴로 에스페란사의 손등을 손끝으로 길게 그었다. 하지만 그 역시 알고 있었다. 그들은 너무 깊게 들어왔다. 왕명으로 떠들썩하게 초대장을 보냈으니 들어오지 않을 방도도 없었지만.
……일부러 그랬겠지. 망할 왕족들.
에스페란사가 눈을 짧게 깜박였다. 시더는 고개를 저었다. 무언의 대화는 결국 시더가 에스페란사의 손등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끝이 났다.
“여기까지 온 이상 다른 선택권은 없겠군요.”
이미 ‘그자’들은 에스페란사를 적으로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뒷조사를 시작했을지도 모르지. 갈리스턴 공작이 본인의 정보력을 여기에도 발휘해서 적당히 덮어 놓았길 바랄 뿐이다.
“제가 원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폐하. 저는 어떤 물건을 찾고 있습니다. 던전을 없앨 수 있는 물건인데…….”
여왕이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짐이 알고 있소. 짐과 공작 외에 이 나라의 그 누구도 모르오.”
역시, 그들은 잘못된 길로 걸어온 것이 아니었다. 시더의 가설은 옳았다. 적어도 던전을 만드는 자가 황금 발톱을 가지고 있다는 것까지는 확실했다.
이제 여왕의 제안을 승낙하면 모든 게 쉬워지겠지만.
“하지만 죽이겠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저는 관련도 없는 일에 살인의 책임까지 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여왕의 눈이 번뜩였다. 에스페란사는 여왕이 그 짧은 사이에 자신의 살인에 대한 거부감을 읽었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별수 없다. 시더가 약한 한숨을 내쉬며 여왕을 재촉했다.
“폐하.”
“미스 헌터는 파오룬에서 왔다고 했으니 그럴 수 있지. 하지만 에이번데일, 그대는 내 신하로서의 충심을…… 됐네. 기대도 안 했네.”
시더가 빙그레 웃었다.
“아시니 다행입니다.”
에스페란사가 시더를 흘끔거렸다. 여왕도 포기했을 정도라니. 대체 어떻게 산 거지? 그러나 시더의 웃음에서는 아무것도 읽어 낼 수 없었다.
‘그래, 그냥 지금 같이만 살았어도…….’
알 만했다.
여왕은 찡그린 눈으로 시더를 쏘아보더니, 에스페란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확답을 들을 수 없을 거라고는 생각했소. 조만간 다시 부르지. 우리의 이익이 일치하니, 아무쪼록 좋은 답을 기다리겠소.”
결국 거절도, 조정도 받지 않겠다는 말이다. 정말이지 오만하고, 그걸 완전히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 불쾌하면서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손수건으로 눈 주위를 찍어 낸 여왕은 눈가가 빨간 것만 제외하면 처음 봤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여왕이 종을 울렸다. 시녀 대신 셔버리 공작 부인이 들어왔다.
“숙모님, 미스 헌터에게 어거스텀 궁전을 안내해 주십시오. 듣기로는 파인먼트 하우스의 안내도 숙모님께서 맡으셨다더군요.”
셔버리 공작 부인은 하얗게 질려서 삐걱거렸다. 에스페란사는 셔버리 공작 부인에게 좋은 감정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찌그러진 공 같이 치이는 모습에는 묘한 동정심이 들었다.
“미스 헌터. 다른 약속이 있는 게 아니라면 어거스텀 궁전을 구경하고 가시오. 그리고 에이번데일. 대공이 그대를 초대한 것이 벌써 다섯 번인데 그중 단 한 번도 응해 주지 않았다지? 미스 헌터가 궁전을 구경하는 동안만이라도 대공을 상대해 주길 바라오.”
“폐하. 죄송한 말씀이지만.”
시더가 입을 열려는 순간 여왕이 손을 들어 막았다. 시더 클라이번이 아무리 앞뒤 가리지 않는다고 해도 여왕은 그의 군주였다. 적어도 명목상은.
“저번과 같은 일은 없을 거요. 셔버리 공작 부인도 반성을 했으니까. 그렇지 않은가?”
친척 어른에 대한 일말의 예우도 없는 물음은 그 자체로 경고였다. 셔버리 공작 부인이 창백하게 질려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네, 폐하.”
“이만하면 걱정은 덜었겠지?”
이렇게까지 하는데 별수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시종을 따라가면서도 계속 뒤를 돌아보는 시더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상황이 이상하게 끝났다는 생각은 든다. 오늘은 그저 상대에게 넘어가지 않은 채 동태를 살피려는 계획뿐이었으나, 상대도 탐색전만을 벌일 것은 예상치 못했다.
* * *
“얘.”
복도를 걷던 중 공작 부인이 툭 물었다. 여왕이 극진한 예의를 갖추어 대한 것과는 상반되는 허물 없는 태도였다.
“내 목걸이는 언제 돌려줄 거니?”
아. 잊고 있었다.
“이번 달 안에 반납하지 못하면 배상금을 내야 한단 말이야. 네가 가지고 있는 거 들키면 너 이번엔 도둑으로 잡혀 온다? 응?”
“저한테 없어요.”
“거짓말 말렴, 너 가고 나서 파인먼트 하우스를 다 뒤집었는데도 발견이 안 됐어. 흥, 내가 바보로 보이니? 뭔가 술수를 썼겠지. 넌 에이번데일의 피후견인이잖아.”
공작 부인은 별 위협도 안 되는 으름장을 놓았다. 떼를 쓰는 것이 철이 덜 든 어린애 같기도 했다.
그래도 단순한 공작 부인과 단순한 대화를 하고 있자니 숨통이 좀 트일 것 같다. 이것마저도 여왕과 공작이 의도했을 거란 생각은 들었지만, 상관없었다.
“공작 부인 전하, 호수 반대편 정원을 열어 두었습니다.”
궁전 문 앞의 시종이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공작 부인은 코웃음을 치며 지나쳤다. 그러다 에스페란사를 휙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무시당하니까 기분 좋니?”
무시당하는 건 알고 있었구나.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사실 기분 좋잖아. 다 알아.”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겠다, 에스페란사는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그 정도로 전하께 관심이 있지는 않아요.”
“정말…… 기가 막혀선!”
공작 부인은 발을 쾅쾅 구르며 앞서 나갔다가, 다시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다가왔다.
“빨리 따라오지 않고 뭐 해?”
그러면서도 은근히 보폭을 맞추는 것이, 정말로 앞서 나가기가 싫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제대로 대접하라고 여왕에게 한 소리 들었거나. 싫은 티를 잔뜩 내면서도 여긴 뭐다, 저긴 뭐다, 설명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파인먼트 하우스에서 본 것보다 한층 더 푸르러진 잔디와 무성한 나뭇잎이 바람에 찰랑거리며 한쪽으로 누웠다. 대충 아는 내용 반, 모르는 내용 반인 설명을 흘려듣던 에스페란사가 불쑥 물었다.
“제가 목걸이를 돌려드리면, 뭘 해 주실 수 있으세요?”
“뭐? 역시 네가 가지고 있었구나!”
성큼성큼 다가온 공작 부인이 에스페란사의 목깃을 꽉 쥐었다.
“어디 있어? 돌려줘!”
“그건 제 맘이죠. 전하, 뭘 해 주실 수 있으시냐고 물었어요.”
“뭐든지 해 줄 테니까, 돌려달라고!”
쉿. 입술 위에 검지를 올린 에스페란사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공작 부인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떼어 냈다.
에드먼드는 이 여자가 위험하다고 했다. 위험하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고.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한 척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알 것 같았다. 평온하고 무심한 얼굴에서 문득 드러나는, 잘 벼린 날 같은 눈빛.
“뭐든지?”
“그, 그래, 뭐든지.”
말을 꺼내 놓고도 아차 했다. 뭐든지라니, 발목이 묶일 수밖에 없는 그런 말을 하다니. 하지만 무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저 몸을 살짝 낮추고 숨을 죽인 것만으로도 숙녀에서 맹수로 변한 여자 앞에서,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셔버리 공작 부인 전하. 최선을 다하시리라고 믿어요.”
햇빛이 차가운 보석에 부딪혔다. 분명 방금 전까지 비어 있던 손 위에 목걸이가 있었다. 공작 부인은 눈을 크게 떴다.
“뭘 어떻게 한 거야? 응?”
“에이번데일이 쓸 만한 술수가 뭐가 있겠어요?”
“마도 공학으로 이런 것도 가능하단 말이야? 난 마도 공학자는 다 냄새나는 기계나 만지작거리면서 돈 달라는 사기꾼들인 줄 알았지!”
불쾌해져야 하는데 너무 해맑아서 불쾌해지지도 않았다. 에스페란사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막았다. 공작 부인은 그새 눈치를 봤다.
“내가 좀 말을 잘못했니?”
“아시니 다행이네요.”
“저기, 근데 내가 뭘 도와주면 되는 거야? 에드먼드한테 들키면 곤란한 일을 도와달라고 하는 건 아니지?”
“그런 걸 부탁하면 안 들어주실 건가요?”
공작 부인은 깜짝 놀라서 고개를 휘휘 저었다. 잘 틀어 올린 머리칼이 풀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아니야! 얘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그냥, 걱정돼서 그러지……. 저기, 내가 네 말 들어주기로 한 건 에드먼드한텐 비밀로 해야 한다, 응?”
“전하야말로 말씀하지 마세요.”
“내가 미쳤다고 말하겠니.”
공작 부인은 여기저기 치이는 자기 신세가 안타깝다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에스페란사가 보기에는 자업자득이었다. 적어도 이번 일에서만큼은. 애초에 에스페란사에게 누명을 씌우지 않았으면, 처음부터 이런 일은 없었을 것 아닌가?
“절 싫어하시는 건 알지만, 도움을 주실 때는 확실히 주시길 바라요.”
공작 부인이 약속을 어길 것 같진 않았다. 어길 것 같은 낌새가 보이면……. 사람을 죽이지 않고도 괴롭히는 방법은 아주 많다.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공작 부인의 손 위에 목걸이를 얹어 주었다. 공작 부인은 멍한 눈동자로 보석을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내가 널 왜 싫어하니? 나도 너한테 관심 없어, 얘. 난 그냥 에드먼드가 널 싫어하는 것 같길래…… 앗, 내가 이런 말 했다고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돼!”
“제가 말할 데가 어디 있겠어요.”
공작 부인이 눈치가 빠른 걸까, 아니면 갈리스턴이 공작 부인을 신임해서 빈틈을 보인 걸까? 공작 부인을 갈리스턴과의 관계에서도 이용해 볼 수 있을까?
“절대로, 아얏!”
다시 한 번 다짐을 받으려던 공작 부인이 별안간 날아온 솔방울에 얼굴을 맞고 비명을 질렀다. 얼굴에 새빨간 자국이 남았다.
“누구야!”
“마녀야, 너희 집으로 가!”
솔방울을 수류탄마냥 비장하게 던진 꼬마는 무려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꽤 멀찍이 떨어진 나무였는데, 어찌나 힘이 좋은지 그 멀리서 던진 솔방울이 공작 부인의 얼굴에 맞을 때까지 힘을 잃지 않았다.
“가! 가라고!”
밝은 금발을 가진, 인형 같은 남자아이였다. 나이는 생각보다 적지 않아 보였다. 잭보다 발육이 조금 더 좋아 보이는 걸 보면 그와 비슷한 나이 대일 것 같았다. 그러니까 열 살 내외. 아이가 심술궂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솔방울을 손에 가득 쥐었다. 공작 부인이 몸을 움츠렸다.
“던지기만 해봐! 피츠 부인에게 일러 줄 테니까!”
“피츠 부인은 네 말 안 믿어, 이 마녀야!”
사실 아이의 정체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 나이 대의 꼬마 중 궁전의 나무를 자유롭게 탈 수 있을 만한 금발의 남자아이.
저 애가 13년 후 나인 호더 최고의 인기인이 되는 루이 왕자였다.
‘다 큰 루이 왕자는…… 저렇지 않았는데.’
할머니뻘 되는 귀부인을 향해 솔방울을 던지며 마녀 소리를 하는 골치 아픈 꼬마일 줄이야. 에스페란사는 자기도 모르게 이마를 찡그렸다.
“루이 왕자님, 대체 어디 계신 거예요!”
“앗, 피츠 부인이다!”
보모 내지는 시녀 정도 될 인물이 직접 발로 뛰어 아이를 찾고 있었다. 아이는 입 다물라는 듯이 솔방울을 공작 부인을 향해 휘두르더니 나뭇잎 사이로 숨었다. 물론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공작 부인은 피츠 부인이란 인물이 눈앞에 나타나자마자 꼬마의 위치를 고발할 것이다.
피츠 부인이 가까워지는 소리를 듣고 몸을 더 제대로 숨기려던 참이었는지 나뭇가지 위에서 꼼지락거리던 꼬마는 결국 중심을 잃었다. 몸이 뒤로 미끄러졌다.
“아, 으아악!”
공작 부인이 숨을 삼켰다. 눈앞에서 왕위 계승 제1 순위의 왕자가 나무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못된 꼬마라도 애는 애지.’
다치게 둘 순 없었다. 발을 구른 순간 발밑 공기가 빠르게 돌았다. 뛰어올라 나뭇가지를 쥐고, 다른 손으로는 떨어지는 아이의 목깃을 붙잡았다. 손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아이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에스페란사를 올려다보았다.
에스페란사는 말없이 아이를 내려놓았다.
“저기!”
겨우 중심을 잡고 선 루이 왕자가 소매를 붙잡았지만, 부드럽게 털어 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왔다.
“잠깐만, 좀 기다려 봐!”
“왕자님, 여기 계셨군요. 얼른 돌아가요! 세상에, 이게 무슨 꼴이람.”
애타게 찾던 인물의 목소리를 들은 피츠 부인은 매처럼 아이를 낚아챘다. 힘껏 다리를 버둥거려 보아도 힘 좋은 피츠 부인의 팔 사이에 허리가 잡힌 채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좀 놔 보라니까, 피츠 부인!”
앳된 목소리가 차츰 멀어졌다. 에스페란사는 다시 공작 부인이 서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공작 부인의 눈은 거의 튀어나올 것 같았다.
“방금, 방금 그거 뭐였니?”
“제가 위험한 이유요.”
“좀 위험해 보이긴 하더구나. 조금. 정말 아주 조금. 응.”
공작 부인이 멍하니 대답했다. 자기가 뭐라고 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자연히 이어지는 말에도 힘이 빠졌다. 그들은 정원을 돌아 다시 궁전 안쪽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의 드레스 자락이 문 안으로 사라지자, 응접실의 커튼도 소리 없이 닫혔다.
궁전 바깥에서는 나름대로 어깨를 펴고 있던 공작 부인은 안으로 들어오자 다시 눈치를 살피며 다시 쭈그러들었다.
“전하, 우리 어디로 가는 건가요?”
“대공 전하의 응접실. 들여보내 주실지는 모르겠다만.”
무시를 당한다고 해도 그 정도였던가? 보는 사람이 다 답답해져서, 한마디 하려던 때였다.
“얘?”
쉿. 공작 부인의 입을 막은 에스페란사가 자리에 멈춰 섰다. 먼 복도 끝, 붉은 카펫 위로 두 켤레의 구두가 지나갔다. 머리부터 발등까지 가린 길고 검은 라이딩 후드.
홀연히 나타난 수상한 차림의 두 사람.
“저 방향, 폐하의 응접실로 가는 방향이죠?”
두 사람이 사라진 뒤 에스페란사가 물었다. 공작 부인이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지 알아요?”
“폐하께서 요즘 만나는 손님인 것 같은데. 나도 직접 보는 건 처음이라서. 누군데?”
모른다. 모르는데도 알 수 있었다.
저 두 사람이다. ‘미궁 속의 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