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82
82화
한참 후, 대공에게서 해방되어 지친 낯으로 돌아온 시더가 에스페란사를 발견하고 짧게 미소 지었다. 대공은 13년 후에도 마도 공학 대학에 축사를 하고 다니더니, 어지간히 관심이 많은 모양이었다.
한달음에 달려간 에스페란사는 시더의 코트 소매를 붙들고 인사도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봤어요. 여왕을 협박하는 사람들.”
회색 눈이 잠시 커졌다가, 이윽고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검지로 에스페란사의 입술을 가볍게 눌렀다.
“쉿. 누가 듣겠어요.”
사람이 없는 복도로 에스페란사를 이끌고 간 시더가 되물었다.
“확실해요? 말로 하지 말고.”
힘줄이 불거진 손등을 내밀자, 에스페란사가 그 위에 원을 그렸다. 확신의 크기만큼 커다랗게. 시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돌아가서 하죠. 나도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요.”
* * *
저택에 돌아올 때까지도 침묵을 지키고 있던 에스페란사는 마침내 에이번데일 저택, 그들에게 가장 안전하고 누구의 시선도 의식할 필요 없는 곳에 도착하자 비로소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이었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린 긴 라이딩 후드 차림. 하나는 키가 크고 하나는 그보단 좀 작았어요. 얼굴은 못 봤지만. 여왕의 응접실로 가는 것 같았고요.”
척 보기만 해도 음산했다. 어차피 갈리스턴도 찾아내지 못한 그들의 정체를 에스페란사와 시더가 찾아낼 수는 없었다. 그럴 이유도 없었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신경이 쓰였다. 여왕의 눈물 어린 부탁과, 작고 물정 모르는 루이 왕자의 모습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연구실로 들어서자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귓불에 달린 녹음기를 빼냈다. 해석 기관이 바쁜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금속으로 된 기계 부품이 부딪치는 소리. 잡음이 끼어 있던 목소리가 점점 깨끗해졌다.
“이게 뭐예요?”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 분명 자기 목소리인데 말이라기보다는 음소의 모음 같았다.
“녹음해 온 부분이요. 나가서 공작 부인이랑 한 대화까지 전부 녹음했네요. 루이 왕자를 만났어요?”
“그렇게 됐어요. 근데 진짜 내 목소리 맞아요?”
“네. 못 알아듣는 건 거꾸로 나와서 그래요. 마력 저장 순서의 역순으로.”
“그걸 왜 그대로 둬요?”
“나만 알아들을 수 있으면 상관없으니까요.”
“……아, 아, 네.”
떨떠름한 대답 외엔 돌려줄 게 없었다. 뭐, 본인은 알아들으신다니. 저런 인간이 있으니까 기술이 발전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잠깐 기계를 멈춰 놓은 시더가 그 위에 뭔가를 더 연결했다. 계기판에 불이 들어왔다. 아리송한 얼굴을 하고 있던 에스페란사를 돌아본 시더가 물었다.
“알아들을 수 있게 해 줄까요?”
“할 수 있어요? 그럼 빨리해요, 빨리.”
그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시더는 느릿느릿 다이얼을 돌렸다. 그리고 레버를 당기자 한 박자 늦게 다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명확히 알아들을 수 있는 문장이었다.
‘얼마 전에는 시청 소유의 부지를 내놓으라고 하기까지 했소.’
여왕의 목소리가 본래 들었던 것보다 조금 느리게 그 문장을 말했다. 시더는 버튼을 눌러 소리를 정지시키고는, 어떻게 생각하냐는 듯 에스페란사를 향해 턱짓했다.
“이게 왜요?”
“시청 소유의 부지. 이런 얘기를 어디서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어디서 들었는데요?”
“당신한테서. 우리가 처음 같이 외출하던 날, 기억해요?”
에스페란사도 그날을 떠올릴 수 있었다. 13년 전의 나인 호더를 처음 제대로 목도한 날. 그때의 시더 클라이번은 약간 쌀쌀맞은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의 그는 거의 봄바람처럼 다정했다.
아, 이게 아니지. 아무튼 첫 외출 날.
“내가 얼터 지구에 들어갔다가 당신이 쫓아 들어왔고, 그때 잭을 만났고, 그 전에 우리 같이 몬스터 가죽을 봤고.”
그날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에스페란사는 언뜻 추억에 젖었다가, 방금 떠올려 본 장면들에 아직 ‘시청 소유 부지’와 관련된 부분이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얘기는 언제 했더라.
다행히 시더는 에스페란사가 혼자 그 날의 대화를 전부 복기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정확히 대화의 시점을 짚어 냈다.
“그 전에요. 당신이 이렇게 말했어요. ‘저긴 헌터 협회가 있던 자리인데.’ 하고.”
기억난다! 마차 안에서 13년 전의 나인 호더 시가지를 둘러보던 때에, 시더가 어떤 건물을 보고 ‘시청 소유 건물’이라고 말했다. 건물의 위치나 모양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에스페란사도 그때의 대화를 어렴풋이 떠올려 낼 수 있었다.
“그 부지가 이 부지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증거는 없지만요.”
헌터 협회가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 모르지만, 국공립 단체도 아닌 헌터 협회가 시청 소유 건물을 허물고 협회 건물을 지을 수 있을 경우의 수는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았다.
물론 시청은 소유한 부지가 아주 많을 테고, 헌터 협회 건물이 세워지기 전에도 국가 소유의 토지를 사고팔았을 테니 그자들이 여왕에게 요구한 것은 전혀 다른 곳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시더의 예상이 맞다면. 그러니까, 만약 그자들이 여왕을 협박해 얻어 낸 부지가 바로 13년 후 헌터 협회의 자리라면.
“여왕을 협박하는 그 사람들이 헌터 협회 사람들일 수도 있겠네요.”
해터의 장비 상점처럼, 하나둘씩 ‘황금 발톱’의 오픈을 준비하는 거겠지. 헌터 협회가 유독 정치적으로 강한 입김을 발휘했던 것도 여왕의 목숨을 틀어쥐고 있었다면 납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체 뭘 위해서? 그들은 던전과 헌터의 시대를 예견하고 있는 것인가? 그 시대를 대비해서, 혹은 그 혼란의 시대를 틈타 권력을 얻기 위해 왕실의 힘을 이용하려는 건가?
그러나 이 가설은 금방 반론에 부딪혔다. 여왕과 공작이 던전의 키를 쥐고 있다면 이렇게 쉽게 당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혹시 그들이…….
같은 생각을 했던 것인지, 시더가 안락의자의 팔걸이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공작은, 자기가 달리는 전차의 방향만 바꿀 수 있다고 했어요.”
거기엔 말하지 않은 전제가 있다. 아마 공작은 일부러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한 번 할 수 있으면서 두 번은 못 하는가? 왜 그걸로 상대를 해치우지 않는가? 우리에게 답하지 않은 것들이 많이 있는 거죠.”
만약 그 답이 저들과 관련이 있는 거라면. 그러면 모든 게 말이 된다. 사실 던전의 발생을 조절할 수 있는 것은 공작이 아니라 ‘그들’이라면?
“가설을 확인해 봐야겠어요.”
“어떻게 할 셈이에요?”
에스페란사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뗐다. 벌써부터 이 패를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이 패가 이렇게까지 유용해질 줄도 몰랐다.
“궁전에 들어가서 직접 확인할 거예요. 헌터 협회 사람이라면 내가 얼굴을 모를 리 없으니까.”
예상했던 동조의 말 대신 긴 침묵이 흘렀다. 시더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에스페란사의 얼굴을 위아래로 살피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내가 잘못 들은 거겠죠? 당신 지금 어거스텀 궁전에 쳐들어가겠다고 한 건가요?”
“네.”
“위험해요.”
에스페란사는 눈을 깜박이며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내가요?”
그럴 리가 없었다.
“우린 상대에 대해 아는 게 없잖아요.”
안락의자에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킨 시더가 책장에서 에스페란사의 인벤토리 목록을 가져와 훑었다. 저번에 공작에게 초대받았을 때 인벤토리를 털어 주면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각종 장비와 마도구 등의 종류와 능력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전부 약자로 적혀 있어서 정작 인벤토리 주인은 알아보지 못하지만.
“이 중에 이거, 이거, 이거 두고 가요. 손봐 놓을 테니까.”
“위험하다면서요?”
목록을 살펴보던 자세 그대로 눈만 살짝 들어 올린 시더가 말했다.
“가지 말라곤 안 했어요.”
“아, 네.”
“준비를 하고 가자는 얘기죠.”
아? 잠깐만.
“가는 건 나 혼자예요.”
이번에는 목록을 들고 있던 손까지 완전히 내렸다.
“왜요?”
“당신 말대로, 위험하잖아요.”
“위험하니까 날 두고 간다니, 반대가 돼야죠.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명분이라도 세우려면 내가 있는 게 나으니까. 당신 혼자 있으면 정말 침입자일 뿐이잖아요.”
시더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에스페란사는 입을 꾹 다물고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원론적으로는 그의 말이 다 맞다. 다 맞는데.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시더의 반론만큼 에스페란사의 이유도 단순하고 명쾌했다.
시더는 눈에 띈다. 어디에서나 그랬다. 시선을 사로잡는 외모가 가장 큰 문제였으나, 외모를 가린다고 해결될 것도 아니었다. 그는 존재감을 죽이는 망토를 세 겹 씌워도 눈에 띌 것이다. 잠입에 있어서는 최악의 인선이었다.
문제는, 그런 말을 어떻게 하냐는 거지. 당신은 존재 자체로 너무 눈에 띄어요? 그런 말을 어떻게 해. 에스페란사는 입 안을 부풀리며 말을 돌릴 방법을 찾다가 포기하고 벌떡 일어났다.
“아, 몰라요. 몰라요. 아침 일찍 나갈 거니까 일어날 수 있으면 일어나 보든지!”
떼쓰는 아이처럼 딱 잘라 하는 말에 시더는 멍하니 에스페란사를 올려다보았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걸러지지 않은 말이 흘러나왔다.
“방금 당신 되게 귀엽…….”
“네?”
아차. 시더는 빙그레 웃었다.
“아, 실언했어요.”
명백히 면피용 웃음이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들어 버렸으니까. 뺨이 화끈거렸다. 뭐라고? 당황한 건 피차 마찬가지였다.
눈이 마주친 그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하기로 무언의 합의를 했다. 잃어버렸던 미소를 어설프게 되찾자,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등을 떠밀었다.
“에스페란사, 줄 거 주고 이만 나가 봐요.”
“진짜예요. 나 혼자만 갈 거예요.”
혹시나 따라오겠다고 할까 봐, 에스페란사는 거듭 당부했다. 시더는 코웃음으로 답했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시작한 언쟁에 차츰 진심이 섞였다.
“내가 못 일어날 것 같아요?”
“정오가 되기 전에는 눈도 못 뜨면서!”
“그런 사람이 의회는 어떻게 나갔겠어요.”
의회에 나간 척을 하다니? 기가 막혔다. 양심이 있는 걸까?
“당신 의회를 너무 안 나가서 템프턴 수상한테 혼났잖아요.”
시더는 다시 그림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평소와 달리 약간의 투지를 담고 있었다.
“그게 중요해요? 중요한 건, 당신은 나랑 같이 왕성에 가게 될 거란 거죠.”
“두고 봐요.”
에스페란사의 승부욕에도 불이 붙었다.
그리고 정확히 사흘 뒤.
“누가 말 걸어도 대답하면 안 돼. 들키면 나까지 폐하께 혼나니까, 알았지?”
에스페란사는 어거스텀 궁전의 정문에 서 있었다. 어딘가 어설픈 조력자와 함께.
시더 클라이번은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