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83
83화
그리 쉽지는 않았다.
시더는 그 사흘 내내 보란 듯이 아침 일찍 일어났다. 에스페란사와 세 끼 식사를 전부 같이했고, 파오란 피우는 시간도 따로 가지지 않았다. 에스페란사가 침실에 들어가는 걸 보고 잠드는 치밀함까지 선보였다. 에스페란사 쪽에서 먼저 질려서 그럴 거면 같이 가자고 할 뻔했다.
그러나 인내의 과실은 에스페란사의 나무에 먼저 열렸다.
시더 클라이번은 본인에게 ‘사회생활’이라는 것이 존재는 한다는 것을 잠시 잊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가 참다못해 직접 저택으로 찾아온 보좌관과 대화하는 사이, 에스페란사는 무사히 저택을 빠져나가, 셔버리 공작 부인의 저택으로 향했다.
공작 부인은 창문으로 들이닥친 에스페란사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담이 커서가 아니라,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에스페란사가 공작 부인의 침실 창문을 두드렸을 때, 공작 부인은 졸도할 뻔했다.
‘어거스텀에 들여보내 달라고? 미쳤구나?’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어떻게 도와주지 않고 모른 척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겠지. 왕족들이란. 에스페란사는 가볍게 테라스 문을 톡톡 두드렸다.
‘전하께서 문을 안 열어 주시면, 제가 여길 못 들어올까요?’
돌려 말하려는 성의조차 없는 직접적인 협박이었다. 테라스 문을 강제로 열고 들어올 수 있는 자라면 더한 것도 할 수 있다. 공작 부인은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누, 누가 안 들여보내 준댔니? 미쳤다고 했지!’
화풀이하듯 문이 벌컥 열렸다. 에스페란사가 들어오자, 공작 부인은 새침한 얼굴로 소파를 향해 턱짓했다. 가운을 꾹 여민 공작 부인은 불청객에게 차를 대접하기 위해 주전자 아래의 스위치를 눌렀다. 자리에 앉아 침실을 둘러보던 에스페란사가 불시에 물었다.
‘폐하가 요즘 만나는 손님이 보통 언제 오는지 아세요?’
하마터면 티팟을 떨어뜨릴 뻔했다. 공작 부인은 눈을 부라리며 대꾸했다.
‘놀랐잖니! 그 시커먼 사람들 말이야? 글쎄다. 넌 내가 그걸 알 것 같니?’
에스페란사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공작 부인은 여왕에게는 무시당하고, 공작에게는 이용당한다. 지금까지의 행동을 종합해봤을 때, 결론은?
‘대충은 알 것 같아요.’
무시당하든 이용당하든 권력자들 옆에 붙어서 콩고물을 얻어먹는 것도 아무나 하는 일은 아니었다. 은근히 눈치도 빠르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인물 아닌가. 공작 부인은 입을 삐죽거렸다.
‘뭐, 네 말대로 대충은 알고 있다만. 말 그대로 대충이야.’
‘그 사람들이 오는 날에 맞춰서 어거스텀 궁전에 들어갈 거예요. 물론 몰래.’
‘실패하면?’
‘걱정 마세요. 공작 부인 덕에 들어왔다고는 말 안 할 테니까.’
실패할 리가 없다. 하지만 공작 부인과 성공 가능성에 대해 논하는 건 시간 낭비였다.
‘그렇다면야…….’
불안한 얼굴을 한 공작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페란사는 인벤토리에 있던 고철덩어리 중 하나를 공작 부인에게 쥐여 주었다.
‘이게 뭐야? 어머, 마도구네!’
‘제 거랑 한 쌍이에요. 그자들이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눌러요. 여기로 올 테니까.’
‘에이번데일이 이런 깜찍한 것도 만드는구나. 난 맨날 그 군함 얘기 같은 거나 들었지 뭐니.’
사실 이건 에스페란사가 가지고 있던 수많은 잡동사니 중 하나였을 뿐이다. 시더가 만들었다면 이것보다 더 깔끔했겠지. 고작 불빛 정도만 전달할 수 있게 만들지도 않았을 테고. 아무튼 지금은 이 잡동사니가 도움이 됐다.
그리하여 시더의 감시가 본의 아니게 느슨해지자마자 에스페란사는 냉큼 셔버리 공작 부인의 저택으로 들어온 것이다.
“설마 그 꼴로 나를 따라올 것은 아니겠지?”
“후드는 벗고 갈 거예요.”
“그으래…….”
여전히 안심이 되지 않는지, 공작 부인은 마차를 타고 가는 내내 에스페란사에게 다짐을 받았다.
“들키더라도 다 네 탓인 거야. 난 조금도 도와주지 않은 거다, 알았지? 만약 도와준 게 티가 나면 날 협박했다고 말해! 나도 협박당했다고 할 테니까!”
“네, 네.”
대충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들키더라도, 뭘 어쩔 건데? 내심 헌터다운 오만함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급한 건 에스페란사가 아니라 여왕이다. 신분도 확실하지 않은 인물을 입궁시켜 손을 붙잡고 애원해야 할 정도로. 고작 무단 침입 정도로 불이익을 줄 리는 없었다. 덮어 줄 테니 제의를 받아들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죽이라고 하지만 않았으면 그때쯤 부탁을 들어주었을 텐데.
“갈리스턴 공작에게 들은 얘기는 없으세요? 그자들에 대해서.”
“에드먼드한테서? 걔가 나한테 그런 얘기를 할 애니?”
공작 부인은 콧잔등을 찡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결론은 똑같았다.
“그자들을 만나고 오면 울분에 찬 것처럼 못되게 굴기는 하더라. 하지만 그 애는 늘 나한테 못된 아이였으니까…….”
공작 부인은 그렇게 얼버무렸다. 다행히도 때마침 마차가 멈춰 섰다.
“도착했다!”
증기가 가시고 난 뒤 마부가 문을 열었다. 에스페란사는 딸려 온 시녀처럼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공작 부인이 늘 데리고 다니던 버브리지 부인이 보이지 않자 시종들이 의아해했으나, 그렇다고 에스페란사가 누구냐고 물어보지는 않았다. 공작 부인이 대답해 줄 리가 없었던 것이다.
“서재로 바로 갈 거야. 뒤따를 필요 없어.”
공작 부인은 시녀 하나만 대동하고 서재로 갔다.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여기서 헤어져.”
서재로 간 공작 부인은 시녀가 없어진 줄도 모르는 척 책을 탐독할 것이고, 에스페란사는 인적이 드문 곳에서 모자를 벗고 라이딩 후드를 걸친 뒤 여왕의 응접실로 향할 것이다.
* * *
복도는 고요하고, 이따금 지나다니는 직원들을 제외하면 조용했다. 이 거대한 궁전에 상주하는 직원은 백 명 남짓, 여왕의 직계에 해당하는 왕실 가족은 고작 네 명.
본래 어거스텀 궁전은 더 북적거리는 곳이었으나 지금은 사태가 사태라 그런지 텅 비어 있었다. 궁정 문화란 것이 쇠퇴한 시기에 방문객도 없는 궁전은 살짝 스산하기까지 했다.
에스페란사는 서재에서부터 사람 없는 복도를 통해 여왕의 응접실로 향했다.
머지않아 도착한 응접실. 상황이 난감했다. 응접실 밖을 지키고 있는 인원이 생각보다 많았다. 에스페란사가 여왕을 만날 때처럼 두 명 정도가 지키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라면 작은 소란을 일으켜 문 앞에서 비키게 할 생각이었는데, 네 명이라니.
일단 먼저 손안의 도청기를 내려놓았다. 시녀들의 발밑으로 지나간 도청기가 문틀 아래에 딱 붙었다.
“폐하. 저번에 부탁드린 시청 부지는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고압적인 목소리가 귀에 꽂히듯 들렸다. 순간적으로 인기척을 낼 뻔한 에스페란사가 숨을 다잡았다.
목소리만으로 누군지 알아내기는 어려웠다. 얼굴을 보고 싶은데. 문을 통하지 않고 안쪽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시녀들의 눈을 피해 모퉁이를 돌며 고민에 빠졌다.
테라스? 커튼이 내려와 있다면 해 볼 만하다. 굴뚝? 여름에 벽난로를 켜진 않았을 테니까 잠입해 볼 만하지만, 다시 올라갈 방법이 없었다. 여왕이 응접실에서 빨리 나가 준다면 테라스를 통해 나가겠지만, 역시 흔적이 남는 걸 피할 수는 없다.
“어떡하지…….”
그때였다. 벽에서 소리가 들린 것은. 가볍고 빠르게 걷는 발걸음 소리였다.
‘비밀 통로?’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어떤 헌터가 어거스텀 궁전에서 비밀 통로를 발견했다고. 그게 정말이었을까? 만약 진짜 비밀 통로라면, 안에 있을 사람을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에스페란사가 아는 걸음이었으므로.
후드를 벗어 인벤토리에 넣은 에스페란사가 조용히 소리를 따라 걸었다. 그리고 어느 복도 끝에 도달한 순간.
‘역시.’
작은 금빛 머리통이 모퉁이에서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어? 어어어? 그때 마녀, 아니, 공작 부인이랑 같이 있었던 사람 맞지!”
에스페란사가 바로 입가에 검지를 붙이자, 루이 왕자는 허리에 손을 턱 올리면서도 따라서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오늘도 마녀랑 같이 왔어? 왜 혼자 다니는 거야? 그러면 혼나는 거 몰라?”
……20대의 루이 왕자는 다정하고 예의 바른, 그야말로 백마 탄 왕자의 현신 같았는데.
“죄송해요, 전하. 공작 부인 전하와 함께 왔는데 잠깐 구경하는 사이 길을 잃었어요.”
“그래?”
“네.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잠깐만!”
붙잡을 줄 알았다. 속으로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에스페란사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저번에 했던 그거 말이야, 그거 어떻게 한 거야? 너 막 나무 위까지 날았잖아.”
“그건 비밀인데.”
단호한 거절에 루이 왕자는 대뜸 소리를 높였다.
“그런 게 어딨어? 왕자가 시키면 말해야 되는 거야.”
“폐하께서도 비밀로 해도 된다고 하셨는걸요.”
“으으으, 말해 줘. 너 마녀 편이라서 말 안 하는 거지?”
“전하. 비밀은 원래 함부로 말할 수 없어서 비밀이에요. 대가를 치른다면 몰라도.”
코델리아와 처음 만났을 때 썼던 방법이 이번에도 빛을 발했다. 묘하게 스산한 바람. 그리고 바람을 따라 툭, 툭 꺼지는 조명. 복도의 조명은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반은 두려움으로, 반은 흥분으로 점철된 꼬마의 입술이 웅얼거렸다.
“대가?”
“네. 대가.”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에스페란사는 단도직입적으로 루이 왕자가 걸어온 뒤쪽의 문을 가리켰다.
“내 비밀 통로? 이건 내가 발견한 건데…….”
“폐하의 응접실과 통해 있겠죠?”
“어떻게 알았어?”
소문이 그랬으니까. 여왕의 응접실 한편에는 책장이 있는데, 그 책장 뒤쪽으로는 통로가 나 있다고. 묘하게 자세한 소문이라 설마 했는데, 그 소문이 나고 나서 통로가 없어졌다는 얘기도 있었다. 어느 용기 넘치는 유저가 직접 들어가 본 모양이지.
“통로를 가르쳐 주시면 저도 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드릴게요.”
“정말이지?”
“거짓말을 왜 하겠어요? 전 여기 올 일도 별로 없는데.”
다행히, 루이 왕자는 아직 철이 없었다. 왕실의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왕자로서의 의무와 비법에 대한 호기심 사이에서 고민하던 루이 왕자는 곧 호기심을 선택했다.
“비밀로 해야 해.”
물론 에스페란사는 시더에게 전부 말해 줄 것이다. 어린 루이 왕자가 에스페란사가 다녀갔다는 사실을 오랫동안 함구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지만, 증거만 남지 않으면 상관없다.
“흥, 그럼 이쪽으로 들어와. 문 잘 닫고.”
얘는 여왕보다는 공작 부인의 아들 같다? 코웃음 치는 게 어째 똑같아서, 에스페란사는 속으로 좀 웃었다.
루이 왕자가 작은 손을 움직여 비밀 장치를 조작했다. 수상하게 튀어나와 있던 벽돌들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옆으로 움직여 아치형의 통로를 만들었다.
통로에는 빛 한 점 들지 않았다. 루이 왕자가 뻐기듯 반바지 주머니에서 작은 빛을 내는 마도구를 꺼냈다. 구불구불하고 먼지가 많은 길을 따라 걸어가다가, 한곳에서 멈춰 섰다.
“여기야. 봐 봐.”
벽면에 가로로 긴 직사각형 모양의 홈이 파여 있었다. 그 홈을 따라 벽을 옆으로 밀자, 가득 꽂힌 책들의 종이 면이 보였다. 아마 저 너머에서는 책장을 빼곡히 채운 책등만 보일 것이다.
에스페란사는 안쪽의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조심 책을 밀어 치웠다. 작은 틈으로 내부를 살피며, 흘려듣던 도청기 속 목소리에 다시 집중했다.
“시청 부지는 줄 수 없소. 짐의 소유였다면 어떻게든 마련했을 것이나, 그 부지는 국가의 것이오.”
“이해는 하겠습니다만, 안 된다는 말은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안 되면 방법을 찾으셔야지요.”
나지막하고 오만한 미성. 테이블에 찻잔 하나 두지 않은 자리에서, 여왕은 양손을 꽉 쥐고 있었다. 손이 떨리는 것이 이렇게 멀리서도 보였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요!”
“입장 차가 명확하니, 어쩔 수 없군요. 폐하, 다음번엔 더 좋은 답을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폐하의 고귀하신 사촌께서 근래 들어 새로운 취미에 빠지신 모양인데, 그러다 무슨 일이 생길지, 누가 알겠습니까?”
키가 작은 쪽이 일어났다. 에스페란사의 시점에서는 어깨만 언뜻 보였다. 그리고 키가 큰 쪽은…….
잘못 본 거겠지.
부정해 보았으나, 눈을 두 번 깜박이고 다섯 번 비빈 다음 다시 봐도 똑같았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앳되어 보였지만, 그 얼굴을 잘못 봤을 리 없었다.
‘황금 발톱’의 랭킹 2위. 에스페란사의 조언자이자 몇 안 되는 동료 중 하나.
사이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