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84
84화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모르겠다. 나오기 전 응접실에 홀로 남은 여왕이 긴장이 풀린 몸을 부여잡고 덜덜 떠는 모습을 잠깐 바라보았다가, 곧 그 떨림이 여왕만의 것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에스페란사의 몸도 똑같이 떨고 있었다.
“어디 아파?”
아무것도 보지 못한 루이 왕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이의 청력으로는 도청기 속에서 오가는 대화를 듣지도 못했을 것이다. 다행한 일이다.
“이제 돌아가요.”
“뭐야? 그럼 이제 말해 주는 거야? 그렇게 날아다니는 건 어디서 배운 거야?”
새로운 거짓말을 만들어 낼 기운도 없어서, 대강 대답했다.
“파오룬의 신비주의 문파에서 전승되는 무술이에요.”
“와아아. 그런 게 진짜 있단 말이야?”
이 나라 사람들의 차별주의적 환상은 가끔 에스페란사에게 도움이 된다.
“멋지다. 나도 배울 수 있을까?”
“누가 전하께 그런 걸 가르치겠어요?”
“그치만 멋있잖아. 나도 슉슉 날아다니고 싶다고.”
처음으로 투덜거리는 어린아이의 모습에서 여전히 순진했던 스물세 살의 루이 왕자가 보였다. 헌터들의 무력과 위험을 향해 서슴없이 몸을 던지는 강단을 존경한다고 말하던, 순진하고 선량한 얼굴이. 에스페란사는 아까보다 조금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직접 날아다니는 것보단 비행선에 타는 게 훨씬 좋을걸요.”
비행선이란 말이 아이의 낭만을 자극했는지, 루이 왕자는 금세 고개를 주억이며 비행선을 타고 어디로 가고 싶은지에 대해서 떠들기 시작했다.
루이 왕자를 무사히 방으로 돌려보내고 도청기를 회수한 에스페란사는 공작 부인을 찾으러 가는 대신 홀로 궁전에서 빠져나왔다. 정신없이 떠들던 꼬마 왕자가 없어진 빈자리에 휑한 바람이 불었다.
사이러스가 왜 거기 있었을까?
비슷한 얼굴을 가진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지나가다 스치듯 본 사람이었다면 착각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근 5년간 적어도 한 달에 한두 번은 보았던 얼굴이었다. 에스페란사는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이러스가 왜.
다시 최초의 의문으로 돌아온다. 왕자와 공주의 목숨줄을 잡고 협박하고 있다는 ‘미궁 속의 적’. 하지만 에스페란사가 아는 사이러스는 0과 1로 이루어진 게임 캐릭터들도 죽이지 않고 제압하던 사람이다.
‘이렇게 진짜 같은데 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 쉽게 죽이는 걸까요?’
그런데 왕실 가족과 나인 호더의 안전을 빌미로 재물을 요구하는 패거리에 들어가 있다고?
그보다, 그는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아직 헌터도 던전도 없는 시대의 나인 호더에.
‘나처럼 넘어왔나? 아니면…… 플레이어가 아니었나?’
현실에서는 남을 결코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게임 속의 생명은 가벼웠다. 에스페란사도 그랬다. 그런데 그만 유독 사람의 목숨을 중시했다. 그가 만약에 NPC였다면, 이를테면 헌터 협회 쪽 사람이었다면 설명이 된다. 그렇다 해도 왜, 어떻게 플레이어 행세를 하며 랭킹까지 섭렵했는지는 모르겠다.
아니. 그냥 다 모르겠다. 이 세계와 게임 속의 오스던이 같은 곳인지 다른 곳인지조차. 때가 되면 이 세상에도 본격적으로 던전이 생기고, 헌터들이 나타나는 건가? 그들은 플레이어인가? 에스페란사는 일개 NPC가 되는 건가? 그 전에, 여기가 진짜 세상이긴 한 건가?
애초에 견고하지 못한 논리 체계였다. 에스페란사의 추측은 대부분 시더의 것에 기반하고 있는데 그의 추측은 에스페란사의 것과 전제부터 달랐다. 그러니 꼬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이제 와서 이 세계가 게임 속 세계이며, 자신은 이 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었다, 그렇게는.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사이러스를 죽일 순 없었다. 고작 게임 속 동료라도 동료는 동료였다. 그들은 긴 시간 동안 등을 맞대고 수많은 던전을 파괴했다. 지금의 사이러스가 정말 에스페란사처럼 미래에서 넘어온 것이 아니라 이 시간대의 사람이라면 지금의 에스페란사와 상대도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그를 죽일 순 없었다.
하지만 이미 여왕을 돕기로 한 것도 사실이었다. 죽이지 않겠다고 말하기는 했으나 결국 에스페란사는 여왕의 적들과 맞서 싸워야 하는 처지였다. 지금 상황에서 황금 발톱과 던전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면 여왕과 공작을 통하는 수밖에 없으니까.
게다가 여왕이 방금 그들의 요구를 거절했으니 그 싸움의 시기는 더욱 빨라졌을 테고.
머릿속이 패닉 그 자체였다. 지금까지는 포장은 없어도 다져 놓은 길을 따라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수풀만 무성한 숲속에 내던져진 것이다. 방향도 잡을 수 없는 길.
어쩌면 좋지? 사이러스라니, 이 상황은 대체 뭐고, 어떻게 하지?
‘주저앉아 버리고 싶다…….’
하녀 하나 없이 혼자 터덜터덜 걸어가는 숙녀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한 번씩 흘끔거렸다. 널찍한 도로를 달리는 마차들과 번듯한 건물, 오토마톤을 거느린 신사 숙녀들이 지나다니는 거리.
아닌 척 사람들이 한 번씩 시선을 주고 지나가는 숙녀의 옆으로 마차 한 대가 부드럽게 멈춰 섰다. 에스페란사는 생각에 빠져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자 창문을 연 신사가 고개를 기울여 물었다.
“숙녀분, 걸어갈 건가요?”
마차가 자기를 찾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에스페란사가 눈을 크게 뜨고 돌아보았다.
“시더?”
실크해트가 드리운 그림자 아래에서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자기도 모르게 가벼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일순간 복잡한 생각들이 녹아내렸다.
“어떻게 알고 왔어요?”
“우선 타요.”
마차 안의 백작이 문을 열고 나와 숙녀를 에스코트했다. 에스페란사가 얼떨떨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마차 안으로 몸을 집어넣자, 백작도 올라타서 문을 닫았다. 마차가 거리에서 벗어나자 흘끔거리던 시선들도 사라졌다.
“집에 가는 중이었어요?”
시더가 무슨 말이냐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쪽 길이 아니잖아요.”
“에스페란사. 내가 당신을 모르겠어요?”
길지 않은 말인데도 어떻게 된 건지 알겠다. 에스페란사는 어깨를 크게 으쓱였다.
“그래서, 내가 궁전에 다녀왔을 줄 알고 일부러 이쪽 길로 온 거예요?”
시더는 잠시 답이 없었다. 재촉하듯 바라보자 그제야 느릿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런 셈이죠.”
“어떻게 딱 맞췄대. 그런 것도 계산이 돼요?”
“네, 대충은. 그래서 날 두고 간 성과는 있었나요?”
입가에 서려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까. 영영 숨길 수는 없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걸 봤어요.”
어깨가 크게 오르내렸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바라보던 시더가 팔을 내밀었다. 얇은 코트 아래의 셔츠는 새것처럼 빳빳했다.
“자.”
이걸 쥐어뜯으라고 내민 건가? 무심코 내려다보니 이미 손은 버릇대로 소매를 쥐고 있었다. 시더는 미소로 답했다. 에스페란사는 던지듯 손에 힘을 풀었다.
“내가 대체 당신 셔츠를 몇 개나 해 먹은 거예요?”
“해 먹다니.”
부적절한 단어 사용을 지적하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 백작이 이윽고 짧은 웃음을 지었다.
“적어도 한두 장은 아니죠. 하지만 뭐, 괜찮아요.”
“버려야 될 정도였어요? 아니, 그럼 그만하라 그러지. 또 왜 내밀고 그래요.”
팔을 툭 밀어냈다. 눈치라도 주지, 왜 또 팔을 내밀고 있담.
“버렸다곤 안 했어요. 밀런이 알아서 잘 다려 놨겠죠.”
“뭐야. 처음부터 그렇다고 말을 하든가!”
에스페란사는 입을 삐죽이면서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정말 해 먹었어 봐, 민망할 뻔했다.
“그래서, 뭘 봤는지는 말 안 해 줄 건가요? 도착할 때까지 30분은 더 걸려요.”
“여기서 집까지 30분이라고요?”
이건 또 무슨 사기인가. 어거스텀 궁전에서 어퍼 레인까지 마차로 30분이 안 걸린다. 에스페란사는 상당히 걸어 나왔고 그들이 지금 5분은 더 달렸으니 15분에서 20분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길이 막히는 것도 아니고.
“정말이에요.”
창밖을 내다본 에스페란사는 길 너머에 어퍼 레인 끝자락이 보이는 것을 확인하고 시더를 흘겨보았다. 그러나 뻔뻔한 마도 공학자는 ‘30분설’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한숨을 내쉰 에스페란사가 입을 열었다. 차라리 여기서 끝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 동료를 봤어요. 사이러스라고.”
남자 이름? 시더는 눈을 찡그렸다. 에스페란사가 말을 멈추자, 그는 손을 내밀었다. 탓하는 눈빛에도 아랑곳없이. 에스페란사는 망설이다 그의 셔츠 소매를 꽉 쥐었다. 정갈한 손톱이 살갗에 스쳤다.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나보다 더 정의롭고 결코 함부로 힘을 쓰지 않는 사람이었어요.”
“사람에게 한 가지 면만 있는 건 아니죠.”
“그래도. 이유가 있다고 믿고 싶기도 하고, 뭘 알고 있냐고 묻고 싶기도 하고. 확실한 건 죽이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깊은 한숨이 흩어졌다. 그리고.
“그리고. 사실은.”
어깨를 쓸어내리는 손길은 다정했다. 지금이 꿈결인 것처럼. 에스페란사는 시더를 올려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이 남자를 처음 봤을 때 이만큼 의지하게 될 거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던가? 그러나 지금은 이 세상에서 반절이나마 진심을 토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유일한.
“사실은, 그냥 만나고 싶지 않아요.”
오늘 알게 된 사실들을 몇 번씩 되뇌고 정리하면서도 차마 선언할 수 없었던 진심을 마침내 소리 내어 말했다. 허탈하면서도 조금 편해졌다.
“실망하고 싶지 않은 건가요?”
“그럴 수도 있고. 그냥 무서운 것 같기도 하고요.”
“한발 앞으로 나가는 것이?”
에스페란사는 그냥 웃었다.
본래 이 세상에서 에스페란사를 두렵게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발밑에 둔 것은 만들어진 세계일 뿐, 발 구름 한 번에 무너질 모래성이었다. 그런 것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라는 사실을 느낀 순간, 장난감 병정을 양팔로 안고 온기를 느낀 순간, 이 모래성 속 세계로 끌어 내려졌다.
“하지만 만날 거죠?”
이 남자는 그의 장담대로, 정말로 에스페란사를 잘 안다. 웃음이 흘러나왔다. 에스페란사는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네.”
두려움은 에스페란사를 멈추게 한 적이 없었다. 헌터가 아닐 때에도.
그 대답 이후, 에스페란사는 한참 미동이 없었다. 눈만 감은 건지, 잠이 든 건지 알 수 없었다. 시더는 이마 위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걸 보니 그새 잠이 든 것 같았다. 머리를 살짝 기울여 어깨에 기대게 해도 고운 숨만 내쉴 뿐 놀라 일어나지 않는다.
처음 이 여자를 만났을 때, 이 여자를 자기 어깨에 기대 재울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필 이 시점에 옛 동료라.
뭐, 상관없다. 에스페란사 본인도 인정한 만큼 그는 에스페란사를 잘 알았다. 마음의 크기 정도는 손바닥에 놓고 볼 수 있었다.
“백작님, 다시 어퍼 레인인데 아가씨도 오셨으니 이제 저택으로 돌아갈까요?”
“세 바퀴만 더 돌게.”
“예에? 벌써 일곱 바퀴나 돌았는데요?”
“열 바퀴 채운다 생각해.”
테일러가 구시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레버를 잡아당겼다. 마차는 다시 증기를 뿜으며 대로를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