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86
86화
사격장 문 앞에 도착한 시더는 고개를 기울였다. 지나치게 조용했다. 사람이 없을 때야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는 저 안에 누가 들었는지 알고 있었다. 마력 아까운 줄 모르고 마력탄을 뻥뻥 쏘아 댈 테니 안주머니의 스티뮬러가 마력을 감지하고 시끄럽게 돌아가야 하는데.
“이상한 기계도 만들어 달라고 하더니.”
어렵지 않은 부탁이라 들어주었더니, 같은 걸 일곱 개 더 만들어 달라고 했다. 어이가 없었지만, 맡겨 놓은 듯이 뻔뻔하게 부탁해 놓곤 민망해서 빨개진 얼굴을 보니 귀찮음을 감수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게 닫힌 철제문 앞에 다가가 귀를 기울이자, 기계가 공을 쏘아 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시더는 이 기계를 위해서 8천 개의 테니스공을 구입했다. 그렇게 많은 공을 갑자기 내놓을 수 있는 가게가 없었기에 공장에 직접 주문을 넣어야 했다. 이야기를 들은 공장장이 공장 하나를 통째로 비워 겨우 제때 완성했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해서 만들어 줬더니 공만 쏘아 대고 총은 안 쏘고 있다고? 에스페란사가 그럴 리가 없었다.
시더는 한쪽 팔로 트레이를 받쳐 들고 문을 열었다.
여덟 대의 기계가 공을 쏘아 대고 있었다. 한 방향으로만 쏘는 것도 아니었다. 완전히 무작위로 온갖 방향에서 쏟아졌다. 공을 피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닐 텐데, 거기에 그 공을 쳐 내는 것까지 해내야 한다. 몸이 여덟 개라도 부족할 것 같은데, 에스페란사는 그럭저럭 해내고 있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공 열 몇 개를 제외하고, 수백 개의 공은 모두 기계 옆의 커다란 바구니에 들어가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새 일곱 개의 기계가 공을 전부 토해 내고 덜컥거리는 빈 소리만 냈다. 여덟 번째 기계가 마지막 공을 던지기 전에, 에스페란사는 사격장 한가운데 주저앉았다.
“끝났어요?”
그 말과 동시에 에스페란사는 허리춤에 있던 총을 뽑아 들고 시더를 향해 쏘았다. 시더는 입꼬리를 올렸다. 아슬아슬하게 머리칼을 스치지 않고 지나간 탄알이 마지막 공을 쏘아 떨어뜨렸다.
“일부러 그랬죠?”
아예 팔다리를 펼치고 누운 에스페란사의 가슴이 크게 오르내렸다. 숨이 차서가 아니라 웃는 것이었다. 시더는 나직이 혀를 찼다. 그가 오는 걸 보고 일부러 주저앉은 것이다. 에스페란사의 곁에 몸을 수그려 앉은 시더가 땀에 젖은 머리칼을 이마에서 쓸어 올려 주며 물었다.
“이 기계는 왜 만들어 달라고 한 거예요? 사격 연습은 하지도 않을 거면서.”
“공이 8천 개밖에 없는데 어떻게 쏴요? 아깝게.”
“아하. 2만 개쯤 주문할 걸 그랬나 봐요?”
“그건 낭비잖아요. 아껴 써야죠.”
시더는 별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이 대꾸했다.
“나한테 이런 기초적인 기계를 여덟 개나 만들게 한 건 돈 낭비가 아니고요?”
엄연히 말하면 여러 사람 몫을 혼자 하니 오히려 인건비를 절약한 게 아닐까? 에스페란사가 입을 삐죽거리자 시더는 그 위에 가져온 컵을 올려놓았다. 차가운 물이 든 컵이 떨어질까 봐 입술이 틀어막힌 에스페란사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유리컵인데? 미친 거 아냐!
“말하면 떨어질걸요. 떨어지면 깨질 거고.”
눈으로 비명을 지르는 에스페란사를 지켜보던 시더가 웃으며 컵을 들어 올렸다.
“유리 아니에요. 설마 깨질 걸 당신 얼굴 위에 올려놨겠어요?”
그런 부분에서 시더 클라이번만큼 못 믿을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피라도 나면 실수인 척 가져가려 그러는 거 아니고?
“진짜 겁먹었어요?”
“깨지면 그걸 누가 치워요!”
“하인들이 알아서 하겠죠. 고작 그거였어요?”
고작 그거라 실망한 건가? 에스페란사가 눈을 부라리며 몸을 일으켰다. 무릎을 세우고 앉은 에스페란사의 입가에 물컵을 대주자 흘기면서도 얌전히 받아마셨다.
찬물이 입술을 적시고 턱에 한 줄기 흘러내렸다. 시더는 턱에 손등을 대고 물기를 닦아 주었다. 손등부터 손가락을 지나 손끝까지 스쳤다가 담백하게 물러났는데도, 이상할 정도로 오래 머물러 있는 듯했다. 속이 간지럽고 어색해 도저히 마주 볼 수가 없었다.
“……갑자기 왜 이렇게 잘해 줘요?”
“난 늘 당신한테 잘해 주잖아요.”
“아, 네에.”
무성의한 대답과 함께 물잔을 받아든 에스페란사가 마지막 한 방울까지 털어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이런 거 직접 들고 들어오는 성격 아니잖아요.”
“내가 아니면 누가 여기 들어오겠어요. 이런 걸 봤다간 다들 무서워서 당신을 피해 다닐걸요.”
에스페란사는 코웃음으로 답했다. 수건을 받아 들고 목덜미를 닦은 에스페란사는 무릎에 팔을 올리고 그 위에 턱을 괴었다.
“진짜 왜 왔어요?”
“당신이 뭐 하나 궁금해서요.”
“아. 저걸 어떻게 쓰는지 궁금했던 거구나?”
시더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냥 정말 당신이 뭘 하는지 궁금했어요.’ 하고 대답해 봤자 별로 믿을 것 같진 않았다.
“갑자기 훈련을 한다면서 별다른 노력은 안 하는 게 이상하기도 했고.”
“아…… 나 나름대로 열심히 하지 않았어요? 거의 매일 훈련했는데.”
“네. 현상 유지만.”
역시 이 남자 앞에서는 물도 함부로 못 마시겠다. 컵을 든 손가락 모양 같은 걸 보고 뭔가 알아내고 그러는 거 아닌가? 그러고 보니 시가도 피웠지. 파이프는 아니지만. 사냥 모자도 안 썼고.
“엉뚱한 생각하지 말고.”
“아, 그거 나한테 하는 소리예요?”
그런 얘길 하려면 본인부터 반성하는 게 맞지 않을까?
에스페란사가 실컷 비꼬았으나 시더는 꿋꿋했다.
“그래서?”
앞뒤 다 잘라먹은 말임에도 곧바로 알아들은 에스페란사는 어깨를 크게 으쓱였다.
“사이러스 때문이죠.”
“아.”
시더의 목소리에서 온도가 뚝 떨어져 내렸다. 그래프로 그리면 바로 이 ‘아’ 구간에서 절벽이 하나 생길 것이다.
“그 사람이 왜요?”
없는 성의를 바닥까지 긁어모은 시더가 다시 물었다. 에스페란사는 반동을 주어 몸을 일으키고 가죽 바지를 탁탁 털었다.
물론 그 바지 때문에 사격장 근방에 고용인들의 접근이 금지됐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는 채였다.
“죽일 수는 없잖아요.”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에스페란사는 목에 걸친 타월을 쥐고 바닥에 떨어진 공 하나를 주웠다. 손안에서 가볍게 굴리다가, 이미 공이 가득 차 있는 바구니 안에 던져 넣었다. 유일하게 탄알이 박힌 공이었다.
“죽이지 않고 제압하려면 연습을 좀 해야…… 음, 부러뜨리는 건 괜찮겠지?”
“에스페란사. 난 죽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네.”
듣지도 않는다. 시더는 다시 한번 제안했다.
“당신이 잡고 있으면 내가 죽일까요?”
“관심도 없더니?”
“방금 생겼어요.”
뒹굴거리다 총 좀 쏘고 차 마시고 책 읽고 빈민가 꼬마나 만나러 가는 걸 몇 달 동안 반복해 온 걸 보면 에스페란사의 성격상, 안 하던 일을 갑자기 시작하는 것은 꽤 큰 관심의 표현이다. 스스로의 무력을 누구보다 신뢰하는 에스페란사가 연습씩이나 하겠다고 몇 시간 동안 사격장에 틀어박힌 채 고작 반복 운동 따위에 매진하는 것도 사이러스라는 인물을 진지하게 대하고자 하는 태도였다.
시더 클라이번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눈이 가늘어졌다.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당신이 아는 그 사람은 아닐 거예요.”
“……그렇겠죠.”
에스페란사가 한발 늦게 대답했다. 썩 달갑지 않은 얼굴로. 시더는 한숨을 내쉬었다. 장밋빛 입술이 삐죽이는 게 시야에 선명히 들어왔다.
“난 그런 걸로 상처받진 않아요.”
느닷없이 이 세상에 홀로 떨어졌다는 이유로 불안해하기도 했고, 그 때문에 시더에게 유독 의지하기도 했으니 그가 걱정하는 이유는 이해한다. 하지만 정말로 괜찮았다.
“애초에 그렇게 친하지도 않았고.”
“동료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말 그대로죠. 그냥 동료.”
무슨 오해를 한 건진 알겠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게임 친구일 뿐이다. 에스페란사가 알던 사이러스였다면 함께 낯선 곳에 떨어진 데에 대한 동질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지만 13년 전, 진짜인지도 확실하지 않은 사람을 두고 감상적이 될 이유는 없었다.
구불거리는 머리채를 높게 들어 묶은 에스페란사가 손부채질을 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던 시더가 몸을 일으켰다.
“괜찮다면 됐어요. 당신 총이나 보러 와요.”
잘 닦인 구두코에 테니스공이 툭 부딪혔다. 시더는 묵직한 사격장 문을 열어젖혔다. 쨍쨍 내리쬐는 태양 빛을 받은 시더가 문득 생각난 듯이 물었다.
“……당신 무슨 수로 그 복장으로 여기까지 왔어요?”
“당연히…… 이 복장으로 여기까지 안 왔죠. 여기서 갈아입었어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등을 돌리더니 문이 쾅 닫혔다. 에스페란사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본인이 보는 건 적응했어도 여전히 시더의 눈에 다리 선을 전부 드러내는 가죽 바지는 ‘참아 줘야’ 하는 물건인 모양이다. 이건 가치관이 다르니 어쩔 수 없지. 당장 갈아입으라고 난리 치지 않는 것만도 대단한 괴짜인 것이다.
하지만 갈아입기 귀찮았다. 어차피 씻어야 하는데. 에스페란사는 사람이 없는 틈을 타 긴 후드로 몸을 가리고 발코니를 계단 삼아 자기 방 창문으로 올라갔다. 침대를 정리하던 애니가 뒤로 넘어갈 뻔했다.
“꺅, 아가씨!”
“아, 미안.”
후드를 쓰고 있었는데 어떻게 알아본 거지?
“창문으로 드나드는 사람이 아가씨 말고 더 있나요.”
애니가 그 질문을 예상한 듯이 투덜거렸다. 하긴, 문보다도 이쪽을 더 애용하긴 했다. 특히 얼터 지구에 갈 때는.
“목욕물 받아 놨어요. 얼른 들어가세요. 대체 사격장에서 얌전히 총만 쏘시는 아가씨가 어쩌다 그렇게 땀범벅이 됐담.”
“나 땀 냄새 많이 나?”
“그 정도는 아니고요.”
애니의 태도는 믿을 게 못 됐다. 에스페란사의 외모에 관해서는 늘 놀라울 정도로 관대한 태도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거울 속 에스페란사의 모습은 아주 가관이었다. 땀이 물처럼 흘러 목이 번들거리는데, 시더 클라이번은 이 꼴을 전부 보고도 가만히 있었단 말이지. 창피하게. 손등으로 달아오른 뺨을 식혔다.
잠시 후, 씻고 나온 에스페란사는 애니의 손에 머리를 맡겼다.
“맨날 어깨에 수건 하나 두르시고 백작님 서재에 가시고 말이에요.”
애니가 조잘조잘 잔소리를 했다.
“그럼 우리가 얼마나 좋은지 아세요?”
잔소리……인가?
“……뭐?”
“음,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튼 물이 떨어지지 않게 조금만 말려드릴게요.”
도톰한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말려 준 애니는 실내복만 입은 에스페란사의 어깨에 얇은 숄을 둘러 주고, 그 위에 새 수건을 걸쳐 주었다. 그래 봤자 머리가 길어서 어차피 물은 떨어지는데.
그래도 애니의 성의를 생각해 그 차림 그대로 실내화에 발을 꿰고 시더의 서재로 향했다.
이번엔 총에 또 희귀 옵션을 얼마나 달아 주었을지 기대가 됐다. 이미 캐시템으로 구하려고 해도 구할 수 없을 대단한 물건이 되어 버렸는데, 저걸 그대로 들고 돌아가면 황금 발톱에 한 달에 1억씩 쓰는 유저들이 팔라고 줄을 설지도 모른다.
물론, 안 팔 거지만.
이곳에서의 삶이 벌써 익숙해진 건지, 시더에게 정이 들어 버린 건지, 돌아간다는 가정을 하자 아쉬운 점부터 떠올랐다.
좋은 일도 많았지. 아마 오랫동안 생각나지 않을까?
이렇게 시더의 서재 문 앞에 서 있던 것부터 이 문을 여는 순간의 책 먼지 냄새, 눈이 확 트이는 2층짜리 서재의 정경.
그리고 그 한가운데, 황동빛 기계 부품에 눈을 고정한 채 세상이 떨어져 나가도 돌아보지 않을 것 같은 금발의 남자.
달빛 같은 눈동자가 가늘어진 채 크고 작은 기계 부품, 에스페란사는 이름도 못 외우는 부품들을 설계도대로 끼워 맞췄다. 그러면서 틈틈이 만년필로 약자로 휘갈기는 글자는 읽을 수는 있어도 이해할 수는 없었다.
어떤 정보도 소리도 없는 그저 한 장면. 그래서 그 모든 것은 그저 그림처럼 머릿속에 남을 뿐인데.
남을 뿐인데…….
“총 보러 오라더니, 뭐 하는 거예요?”
“아.”
시더가 뒤늦게 기계 장치에서 눈을 뗐다.
“책상에 있어요. 가져가서 봐요.”
뭐지, 이 홀대는? 에스페란사가 눈을 깜박이며 책상에 올려둔 총을 쥐었다.
상태 창을 켜자 더 오를 데 없던 능력치가 그 이상으로 올라가 있는 게 보였다. 이번엔 상대의 방어를 무시하는 버프가 붙어 있었다. 확률이 꽤 높을 것 같은데, 과녁으로는 시험을 해 볼 수가 없으니……. 상태 창을 한참 바라보던 에스페란사는 문득 잊고 있었던 퀘스트 창을 띄워 보았다.
[퀘스트: 황금 발톱을 찾아라!]진행률: (50/???)
완료 보상
―칭호: 시간의 지배자
―아이템: 황금 발톱, 귀환증(집)
엄청나게 올랐다. 두 눈을 의심할 만큼. 그리고 다음 순간, 에스페란사는 정말로 눈을 의심했다.
[퀘스트: 황금 발톱을 찾아라!]진행률: (51/???)
완료 보상
―칭호: 시간의 지배자
―아이템: 황금 발톱, 귀환증(집)
실시간으로 오르고 있다. 잠시 후 진행률이 52로 바뀌었다. 그보다 조금 더 시간을 두고, 53, 54…….
“뭐지?”
“……고장이 아니었어요.”
시더가 홀린 듯 중얼거렸다. 마치 에스페란사의 질문에 대답하듯이. 에스페란사는 그가 고치고 있던 장치를 뒤늦게 알아보았다. 마벨우드에서 완성했던 던전 탐지기였다.
알 수 없는 숫자들이 깜박였다. 계기판의 붉은 침이 남동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시더는 조용히 속삭였다.
“나인 호더에 던전이 열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