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87
87화
그 말을 들은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던전이 없는 이 세계에 적응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13년 후의 나인 호더는 인구 비례로 봐도 헌터가 가장 많은 도시였고 크고 작은 던전들이 매일같이 발생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있었다면 ‘몬스터 사태’가 그토록 오랫동안, 크게 회자되었을 리가 없다.
“어디, 어디예요?”
“남동쪽. 멀지 않은 곳이에요. 지금 갈 건가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인 에스페란사가 시더를 흘끔 바라보았다. 그는 가늘어진 눈으로 계기판을 바라보다가, 기계에서 판을 분리해 냈다.
“뭐 해요? 무기 챙기고 준비하러 가야죠.”
“당신은…….”
“이번에도 날 떼어 놓고 갈 생각인가 보죠?”
“같이 가 줬으면 좋겠어요.”
질문이 끝나자마자 답이 돌아왔다. 시더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있는 그대로의 뜻이었을 뿐인데 말해 놓고 보니 쑥스러워져서, 옷을 갈아입고 온다는 핑계를 대고 방으로 도망쳤다.
짧은 시간 안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밀런이 불러 놓은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마차가 전속력으로 어퍼 레인을 질주했다. 마차 바퀴가 폭주하듯 굴러가는 소리에 이게 무슨 일이냐고 기겁하던 이웃 주민들도 개조된 마차를 보고는 ‘저 괴짜 백작이 또…….’ 하고 말았다. 평소에 평판을 망쳐 놓으면 이런 이득이 있었다.
“여기서 어디로 갑니까, 백작님!”
테일러가 커다랗게 소리 질렀다. 시더는 떼어 가지고 온 계기판을 유심히 보다가 대답했다.
“더 직진. 다음 블록에서 동쪽으로.”
붉은 침이 가리키는 숫자가 점점 작아졌다. 에스페란사는 창문틀 사이로 보이는 건물을 보고 경악했다.
“여긴 파인먼트 하우스잖아요!”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 던전이 발생했다는 것은.
“공작이 제대로 밉보였군요.”
공작에겐 던전을 다룰 힘이 없고, 그 힘을 가지고 있을 협박범들은 공작을 죽이기로 결정했다.
“여왕이 시청 부지를 넘겨주는 걸 거절해서요? 고작 그거 때문에?”
“당신의 옛 동료란 사람은 좀 과격한 편인가 봐요.”
에스페란사가 아는 사이러스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며 변했다거나 원래 그런 인물인데 아닌 척하고 있었다면 납득할 수 있겠지만…….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에스페란사는 마차가 멈추기도 전에 마차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빨리 와요!”
테일러가 겨우 마차를 멈췄다. 시더는 지팡이를 쥐고 에스페란사를 따라갔다. 손잡이에 원래 박혀 있던 새까만 마정석 대신 정체불명의 붉은 액체가 찰랑거렸다. 벌어진 지팡이 끝에서 나온 총구가 시린 빛을 냈다.
“백작님, 저는 어떡합니까?”
“다시 연락할 테니 근처에서 밥이나 사 먹고 있게.”
연락은 어떻게 하시려고?
테일러의 의문에 대답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묘한 일이었다. 백작과 그 피후견인이 파인먼트 하우스의 정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거대한 입이 그들을 삼켜버린 듯했다. 그 문 너머는 이곳과 다른 공간인 것처럼.
순간 당황한 낯으로 그들이 서 있던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던 테일러는 그저 고용주인 백작이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며 마차를 몰았다.
* * *
[던전 발생!]유형: 미로
등급: A
위험도: B
헌터님, 행운을 빕니다!
궁전은 고요했다. 에스페란사는 빠르게 상태 창을 읽어내렸다.
“A급 미로형 던전이에요. 미로형엔 약한데…….”
[특수 지형 발생!]시간 내에 던전 보스가 있는 중앙부까지 도착하십시오. 보스전이 시작되면 중앙부를 제외한 지역은 파괴됩니다.
01:59:59
헌터님, 행운을 빕니다!
타임 어택형 던전이다.
“죽이려고 작정했네.”
혹시 살아 나올까 봐 확인 사살을 한 꼴이다. 하지만 공작은 그렇다 치고, 아무것도 모르고 저 안에서 공작과 함께 순장될 사람들은 어쩌라고? 입 안에 욕이 굴러다녔다.
“그래서, 이제 뭘 하면 되죠?”
시더가 저택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보스전이 시작되기 전까지 중앙부로 가야 해요. 문제는 중앙부라는 게 어디를 말하는지 모른다는 거고. 아마 복도가 다 꼬여 있을 거라 찾아가기도…… 그리고 그사이에 사람들을 다 구해서 가야 된다는 게, 아, 어쩌지.”
이런 던전을 혼자 깨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아니, 공략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궁전 안의 사람들을 포기하기만 하면. 하지만 그럴 것이었다면 처음부터 던전 발생 자체를 무시했을 것이다. 에스페란사는 입술을 짓눌렀다.
전부 구할 수는 없다. 그래도 최대한 구해 보는 것으로.
“일단 들어가요.”
시간이 없다.
저택 문을 열자, 에스페란사도 익히 잘 아는 홀이 나타났다. 그러나 전과 달리 홀은 일그러져 있었다. 곧게 뻗어 있던 복도가 지그재그 형태로 변한 데다가, 끝이 흐릿하게 보였다.
“일단 응접실 쪽으로 가 볼까요?”
시더가 앞장섰다. 적어도 그는 응접실이 어딘지 헷갈리진 않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을 만한 곳이 어디예요?”
“주인이나 손님이라면 당연히 응접실이나 홀이겠지만 이 경우엔 고용인들이 문제일 테니, 고용인 숙소나 주방, 휴게실 아닐까요?”
“고용인 숙소는 여기서 멀죠?”
“멀겠죠. 같은 건물도 아닐 가능성이 크고.”
“그럼 일단 가까운 곳부터 수색해요.”
응접실 문을 열자, 이마에 총구가 닿았다.
마법 무기다. 이곳에서 마법 무기를 가지고 있을 만한 사람. 에스페란사는 신경질적으로 총신을 붙잡아 당긴 뒤 끌려 오는 상대를 엎어 쳤다.
“전하!”
응접실 한구석에 덩어리가 되어 뭉쳐 있던 하녀들이 비명을 질렀다. 공작의 맞은편에서 램프를 머리 위로 치켜들고 있던 하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작의 위에 올라타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가슴을 누른 에스페란사는 공작의 적대감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잠시 후, 공작이 입을 열었다.
“미스 헌터. 어떻게 왔소?”
“알 거 없어요.”
“날 구해 주러 왔소?”
공작의 날카로운 눈동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에스페란사는 그대로 주먹을 쥐어 공작의 뺨을 후려쳤다. 퍽, 중심을 잃은 공작의 몸이 바닥에 넘어졌다.
“멍청한 새끼.”
“에스페란사.”
시더가 에스페란사의 어깨를 붙들어 일으켰다. 공작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시더를 바라보다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에스페란사가 얼굴을 왈칵 일그러뜨리며 공작의 가슴을 발로 밟았다.
이 새끼가 웃네?
“여기 있는 사람들, 절대 다 못 구해. 이 사람들이 죽는다면 그건 다 너 때문이야.”
“하지만 그대는 최선을 다해 주겠지.”
대답과 동시에 몸을 일으킨 공작은 손수건에 피를 뱉어 내고, 피 묻은 손수건을 접어 재킷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부탁하오. 내 사람들을 구해 주시오.”
“대가는?”
허공에서 커다란 총이 나타났다. 보고를 받은 적이 있었다. 저 여자는 사람 몸통만 한 총을 한 팔로 들고 날아다닌다고. 직접 보니 사람 몸통만 한 정도는 아니었으나…….
“뭐든지.”
쾅! 총구에서 새파란 빛과 함께 천둥소리가 터져 나왔다. 꽉 닫힌 문에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을 만큼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단면에서 치이익, 불에 지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하녀들이 반색하며 에스페란사의 머리 너머를 흘끔거렸다. 에스페란사는 총을 겨눈 채 앞장서서 문을 넘어 나갔다.
‘역시.’
복도가 곧이곧대로 나와 줄 리가 없었다. 미로형 던전에서는 동서남북이 마구 뒤섞이고, 안팎이 뒤집어진다. 익숙한 공간을 이어 주던 문은 엉뚱한 공간으로 연결되며 길은 사람을 현혹한다.
응접실로 들어올 때와 달리 문밖에 있는 것은 좁은 통로와 이어져 있는 둥근 홀이었다. 마지막 한 사람이 홀에 들어선 순간, 그들이 있던 문을 포함해 뚫린 통로마다 돌로 된 벽이 뚝 떨어졌다.
쾅. 쾅.
뒤를 돌아보니, 마지막으로 빠져나온 하녀는 아슬아슬하게 발을 뺀 듯, 벽 바로 앞에 주저앉아 있었다.
“주, 죽을 뻔했어…….”
다른 하녀들의 부축을 받아 겨우 일어난 하녀의 눈에 물기가 가득했다. 그러나 달래주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돌벽에 달린 경첩이 철컥 소리를 내며 기둥에 달라붙었다. 순식간에 벽은 새로운 문이 되고, 거대한 자물쇠가 그 문을 걸어 잠갔다.
그래, 원래 이런 거였지. 한숨을 내쉰 에스페란사가 맵을 켰다. 응접실, 그리고 셔버리 공작 부인과 함께 들어가 봤던 전시실만 미색으로 칠해진 가운데, 엉뚱한 동쪽 끝이 열려 있었다.
“저택 동쪽으로 온 건가.”
“갤러리로 쓰던 곳이오. 쓰지 않는 곳이라 폐쇄했었소.”
황동빛 자수가 새겨진 붉은 벽지와 먼지 쌓인 채 빛을 내는 샹들리에. 도금한 액자가 줄지어 걸려 있었을 벽은 비어 있었고, 바닥과 벽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에스페란사는 나직이 미로형 던전 전용 배경음악을 흥얼거렸다.
“던전 중심부는 북서쪽이에요.”
사방에서 돌벽이 떨어지는데도 계기판만 쳐다보고 있던 시더가 말했다.
그걸 어떻게 알지? 에스페란사는 그의 어깨너머로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까치발을 들고 시더의 귓바퀴에 입술이 닿을 만큼 가까이 붙어서 속삭였다.
“거기에 뭐가 나와요?”
“던전에 진입하면 아무것도 안 나올 줄 알았는데, 계속 표시가 되는 걸 보면 보스가 있는 곳을 가리키는 거겠죠.”
계기판에는 나침반 형태의 작은 방향계와 반원형의 거리계가 있었다. 그 외에도 알아볼 수 없는 표시등이나 다이얼이 보이기는 했지만, 그 두 가지가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거리계의 붉은 침은 왼쪽에서 20도 정도를 유지하며 파들거렸고, 방향계는 북서쪽을 향해 빳빳하게 서 있었다.
공작에게 궁전 북서쪽에 대해 묻자, 바로 대답이 나왔다.
“북서쪽에 중심부라고 할 만한 곳은 예배실뿐이오. 복도를 따라가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소. 그런데…….”
지금은 그 복도가 막혀 있지.
에스페란사는 잠깐 고민했다.
“뚫죠.”
들고 있던 장총의 개머리판을 어깨에 받친 에스페란사는 마력을 올렸다. 철컥,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가동 마력이 점점 늘어났다. 총구에 파괴적인 푸른 빛이 서렸다. 정체 모를 고대 건축물처럼 두꺼운 돌로 된 벽을 금방이라도 뚫을 수 있을 만큼.
에스페란사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기려던 순간, 벽 너머가 소란스러워졌다.
“사람 목소리가 들리는데.”
공작이 벽 앞으로 달려갔다.
“거기 누구 있나!”
웅성거리는 소리. 그다음으로는 선명한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커크필드입니다. 이쪽은 다섯 명, 그중 부상자가 셋입니다.”
“다섯 명이라고?”
“본래 열한 명이었습니다만, 나머지는 전부…….”
뒷말은 예상이 갔다. 던전을 겪어 본 적 없는 하녀들조차 그 말의 어감으로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직감했다. 공작은 그의 실수로 영문도 모르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괴물들에게 학살당했을 고용인들을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쪽은 공간이 얼마나 있죠?”
벽에 거의 붙은 듯한 커크필드 부인이 대답했다.
“방 하나 없이 좁은 복도뿐입니다. 목소리가 익숙한데, 혹시 미스 헌터이십니까? 어떻게 여기에…….”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요. 그보다.”
멀리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에스페란사는 말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서 난 소리가 아니다.
“그쪽에 무슨 일 있어요?”
“길이 전부 막혔습니다! 저흰 완전히 갇혔다고요!”
목소리가 앳된 하인이 대답했다. 겁에 질려 말끝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벽을 뚫으면 뒤쪽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다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럼 어떡하지? 에스페란사는 곁눈으로 상태 창을 확인했다.
[01:48:30]벌써 10분이나 지났다. 이걸 뚫고 가지 않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