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88
88화
“자물쇠가 있으면 열쇠도 있겠죠.”
차분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방아쇠만 만지작거리던 에스페란사가 고개를 휙 돌렸다. 시더는 어느덧 벽에 가까이 붙어 거대한 자물쇠를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었다.
“원래 그렇기는 한데…… 그게 이 방에 있으라는 법은 없거든요.”
미로형 던전은 그 구조가 방탈출 게임과 닮아 있었다. 방과 방이 연결된 구조의, 규모가 큰 건물에 주로 발생한다는 점부터 여기저기에 숨겨져 있는 단서를 찾아 보스 룸까지 무사히 도달해야 하는 해결법까지.
“누가 일일이 방을 뒤져 가면서 단서를 찾고 앉아 있어요? 게다가 우린 타임어택이라서 두 시간 안에 사람들을 전부 구해야 돼요.”
물론 세상은 넓고 사람은 다양하기 때문에, 가끔 방탈출 게임 하듯이 미로형 던전만 뚫는 몇몇 변태들도 있었다. 하지만 머리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대부분의 헌터들은 집주인이 피눈물을 흘리든 말든 깔끔하게 벽을 뚫고 가는 편을 선호했다.
에스페란사도 그런 류였다. 공작이 아까워하든 말든, 이번에도 벽을 응접실 문처럼 만들어 버릴 생각이었기에, 단서를 찾을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게 당연한 거 아닌가. 마력이 있는데 뭐 하러 머리를 써.’
하지만 이젠 없는 머리라도 써야 할 판이다. 에스페란사는 헝클어져 반쯤 흘러내린 머리칼을 헤집으며 신경질을 냈다.
“저기…… 제가 찾은 게 있는데.”
저만치 뭉쳐 있던 하녀들 중 하나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묘하게 맹한 얼굴을 가진 하녀는 치마 주머니에서 투명한 상자를 꺼냈다. 에스페란사의 눈에서 번쩍 빛이 튀었다.
“어디서 났어요, 이거?”
“그, 아까 있던 응접실에서요.”
“앨리스! 길에 떨어져 있는 거 함부로 주우면 안 된다고 했잖아.”
응접실 문 앞에서 스탠드 램프를 치켜들고 있던 하녀가 냉큼 달려왔다. 맹해 보이던 하녀는 역시 맹한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치만 너무 눈에 띄고, 전하의 물건도 아닌 것 같았어.”
에스페란사는 투닥거리는 두 하녀들에게서 눈을 떼고 자기 손으로 넘어온 상자에 시선을 주었다. 테두리를 황동으로 두른 투명한 상자였다. 안에 커다란 열쇠가 들어 있었다.
“근데 이거…….”
“퍼즐이네요.”
에스페란사의 머리 위에 턱을 얹은 시더가 말을 대신 마쳤다.
그 말대로였다. 상자는 복잡한 퍼즐로 잠겨 있었다. 퍼즐을 다 풀면 잠금쇠가 열리는 형태였다.
상자 앞부분의 잠금쇠를 막은 퍼즐은 금속판에 그려진 정교한 문양을 가로 20줄, 세로 20줄로 끊어 놓은 것이었다. 빈칸 하나만 뚫려 있는 슬라이드형 퍼즐. 어찌 잘 움직이면 원본 모양을 맞출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원본을 모른다는 게 문제지만.
“좋아. 부수자.”
인벤토리를 헤집어 단검을 꺼낸 에스페란사는 단검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새파란 마력이 검 끝을 휘감는 모습에 아웅다웅하던 하녀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매일 시계탑, 공기청정 비행선, 전차와 오토마톤을 볼 수 있는 나인 호더에 살아도 이렇게 순수한 마력을 맨눈으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에스페란사는 망설임 없이 단검을 상자에 박아 넣었다. 안에 든 열쇠가 망가지지 않도록 비스듬히.
팅.
“뭐야.”
두 쪽으로 쪼개져야 할 상자는 멀쩡했다. 튕겨 나온 것은 있는 힘을 다해 내지른 에스페란사의 손이었다.
팅. 팅.
몇 번을 찔러넣어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마력이 안 통하나 보네요. 요즘 절연체 연구가 활발하죠. 내가 아는 절연체는 아닌 것 같지만.”
“절연체요?”
그러니까 마력이 안 먹는다고? 에스페란사는 시더를 한 번, 그다음엔 공작과 하녀들을 한 번씩 훑어보았다. 이 안에 순수한 힘으로 이 견고한 상자를 부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아까 보고 왔는데 벽에 걸린 자물쇠도 같은 재질인 것 같아요.”
“그럼 역시 문을 부수는 수밖엔…….”
바닥에 둔 총을 집어 들자, 공작이 황급히 총구를 가로막았다.
“아직 포기하긴 이르오.”
“시간이 없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에스페란사도 사람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 총을 쏘고 싶지는 않았다.
“이거, 오래 걸릴 것 같지 않은데.”
공작과 에스페란사는 동시에 고개를 휙 돌렸다. 상자를 이리저리 돌려 보던 시더가 어깨를 으쓱였다.
“고작 399피스 퍼즐이잖아요. 원본을 모르는 게 흠이지만 오래 걸려 봐야 20분?”
“미스 헌터, 20분 정도는 기다릴 수 있지 않소. 에이번데일, 부탁하네.”
에스페란사는 한발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20분 정도는.”
아직 시간은 넉넉했다. 에스페란사의 총구도 바닥을 향했다.
시더는 문을 등지고 서서 상자 앞면의 퍼즐에 손을 가져다 댔다. 황동 판 위, 굵고 검은 선의 문양. 조각을 몇 번 움직이는 동안 머릿속에 그림이 대충 그려졌다. 차츰 속도가 붙었다.
‘생각도 안 하고 그냥 막 하네.’
하긴 큐브도 저런 식이었다. 이대로라면 꽤 순조롭게 풀고 지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을 때였다. 너무 방심한 걸까?
“꺄아악!”
묵직한 발소리. 정체불명의 돌벽을 떨궜던 그 천장이 이번에는 거대한 괴물을 뱉어 냈다. 황소의 머리. 덥수룩한 털과 길고 날카로운 두 개의 뿔. 미노타우로스다.
‘미로형 던전에 잘 어울리는 몬스터긴 하지.’
하지만 지금 보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D급 던전이었다면 보스로 등장했을 만큼 강력한 몬스터. 에스페란사는 벌벌 떠는 하녀들의 등을 옆으로 떠밀었다. 멍하니 몬스터를 바라보던 공작이 다리에 힘이 풀린 하녀들을 들쳐 업었다.
에스페란사의 머릿속에서 해야 할 일들이 차례대로 차곡차곡 쌓였다.
“다들 저쪽 벽으로 모여요!”
지킬 것은 한자리에 있는 것이 편하다.
시더가 서 있던 벽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지만, 시더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퍼즐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마치 아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에스페란사는 재빨리 총을 쏘았다. 반동과 함께 몬스터가 고통에 젖은 포효를 내질렀다. 우악스러운 손이 자기의 반토막도 안 되는 몸을 향해 휘둘러졌다. 높이 뛰어오른 에스페란사는 그 손 위에 올라타 날카로운 마력으로 황소의 눈을 헤집었다.
총 안의 부품들이 차르르르 소리를 내며 굴러갔다. 푸른 광선이 길게 쏘아졌다. 미노타우로스가 두꺼운 손으로 광선을 쳐냈다. 마력이 끊어지자, 에스페란사는 공중에서 두 번 돌아 바닥에 착지했다. 쿵, 쿵, 발을 구르는 소리에 돌바닥이 울렸다.
미노타우로스의 거대한 손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바위를 높이 들었다. 에스페란사는 황색 털이 수북한 괴물의 허벅지를 노렸다. 잠시간의 대치. 총이 빨랐다.
긴 광선이 허벅지에 박히자, 괴물이 울부짖으며 몸을 마구 뒤틀었다. 손에 들고 있던 바위가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갔다. 하필이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꺄아악!”
“앗! 다들 비켜요!”
총을 쏴서 바위를 부숴 버리려고 했으나, 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괴물이 몸부림치며 에스페란사의 몸통만 한 주먹과 발을 휘둘러대니 피하기만도 급급했다. 그리고 그 짧은 사이에 바위가 문을 가렸다.
하녀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죽겠구나.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거대한 바위가 죽음처럼 쇄도했다.
탕, 탕탕. 비명처럼 세 발의 마력탄이 터졌다.
시야를 가득 메운 그림자가 수십 개의 조각으로 쪼개졌다. 바위의 잔해가 하녀들의 앞으로 부서져 떨어졌다. 바위 잔해가 뺨과 팔다리를 스쳐 지나갔지만, 간발의 차이로 큰 조각을 맞은 사람은 없었다.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미노타우로스에게서 떨어져 사람들 쪽으로 온 에스페란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녀들의 뒤에 서 있던 공작이 총을 내렸다.
“이쪽은 신경 쓰지 마시오.”
크지 않은 목소리였으나, 분명히 들었다. 고개를 끄덕인 에스페란사가 다시 전장으로 돌아갔다. 하녀들은 한발 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죽음의 위기 앞에서 놀란 심장이 펄떡거렸다.
“살았다! 정말 죽는 줄 알았어.”
“저, 전하, 감사합니다……!”
공작은 가만히 입술 위에 검지를 세우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간신히 진정한 하녀들은 다시 가만히 모여 앉았다. 머리 위로 바위가 떨어져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백작에게서는 조금 더 떨어져서, 아까보다 앞서 자리 잡은 공작의 등 그림자에 가리는 자리에.
지독히 현실감이 없었다.
괴력을 가진 괴물과 그를 단신으로 상대하는 여자. 자기 집처럼 익숙한 이 궁전이 갑자기 미로로 변하고, 그들은 그 미로에 갇혀 차가운 돌벽에 등을 대고 있다.
전부 꿈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지만, 이 날 선 긴장감은 진짜였다. 매서운 바람이 치맛자락을 스쳤다. 저 멀리서부터 날아온 에스페란사의 몸이 가볍게 그들의 앞을 막았다. 혹시라도 괴물이 관심을 돌릴까 긴 로브를 휘날려 시선을 모으고, 단숨에 반대편 벽으로 돌진했다. 그 일련의 행동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무용수가 백 번, 천 번을 연습한 동작을 해내듯이.
그르륵, 유인당한 미노타우로스가 목에서 끓는 소리를 냈다. 황소 머리가 뿔로 벽을 거세게 들이받았다. 맞았다면 단숨에 꿰뚫렸을 것이다. 스치기라도 했다면 피가 쏟아졌겠지. 하지만 에스페란사는 머리끝 하나 다치지 않고 절묘한 순간에 몸을 빼냈다. 마력탄이 두터운 털가죽을 향해 쏟아졌다.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힘을 빼고 싶지는 않았지만, C급 던전이었던 마벨우드 던전에 비해서 기본적으로 몬스터는 훨씬 강했고, 에스페란사가 한 번에 퍼붓는 마력은 약했다. 혹시 벽 너머에 누가 있을까 봐, 잘못해서 사람이 맞을까 봐 출력을 줄이고 상대하자니 생각보다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시더가 만든 총은 출력을 미세 조정하는 것이 가능했다. 쓰다 보니 그 방식에도 익숙해졌다. 마력을 조금 더 넣자, 부품이 돌아가는 속도가 그만큼 빨라졌다.
이제 슬슬 끝내야지.
사람들을 등지고 아까보다 명백히 느려진 미노타우로스를 마주 본 에스페란사는 천장을 향해 마력탄을 쏘아 올렸다.
먼지 낀 샹들리에가 정확히 황소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미노타우로스가 유리 조각에 찔려 고통스러워하는 사이. 쾅.
반쯤 터진 머리가 데구루루 굴렀다. 끝이 부러진 뿔이 발에 닿자 앨리스는 소스라치며 친구의 몸에 달라붙었다. 공작이 혀를 차며 황소의 머리를 지팡이 끝으로 밀어냈다.
“런더포드 양. 다쳤군.”
“릴리!”
릴리 런더포드, 스탠드 램프를 들고 공작과 함께 응접실 문 앞을 지키던 하녀는 뺨에 난 생채기를 소매로 쿡쿡 찍더니 배어난 피를 보고 어깨를 으쓱였다.
“아까 튄 돌멩이에 스쳤나 봐요. 괜찮습니다.”
하녀는 터진 황소 머리를 보고도 무덤덤했다. 그러니 아까 그 바윗덩어리를 보고 비명을 질렀을 때는 얼마나 공포에 차 있었단 말인가? 공작이 얼굴을 아는 몇 안 되는 하녀들을 둘러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에스페란사 헌터가 때맞게 찾아오지 않았다면 이 재앙에서 몇 명이나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여왕이 ‘그자들’을 두려워하는 것에는 마땅한 이유가 있었고, 그는 지금에서야 늘 반쯤만 이해했던 그 이유를 뼈에 사무치도록 실감하고 있었다.
“……고생이 많네. 무사히 빠져나가면, 전원에게 특별 유급 휴가를 지급하지. 물론 치료비도.”
“추수감사절에만 먹는 특식도요!”
멜린다 윌리스가 애써 쾌활하게 덧붙였다. 지금 이 공포에서 눈을 돌릴 수 있는 이야기라면 뭐든 좋았다. 그 속내를 짐작한 공작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특식도.”
“와!”
괴물의 그림자에 짓눌리는 듯한 분위기에서 벗어난 하녀들이 반쯤 쥐어짜는 듯한 환호성을 터뜨리다가, 흠칫 옆을 돌아보았다.
덜컥, 묵직한 소리가 났다. 마지막 퍼즐 조각이 맞물리며 상자의 잠금쇠가 열리는 소리였다.
놋쇠로 만든 열쇠를 꺼낸 에이번데일 백작이 돌벽에 걸린 자물쇠를 열었다. 한 뼘 두께의 문이 천천히 밀려났다. 통로 여기저기에 주저앉아 있던 사람들이 홀린 듯 일어났다.
“다 했어요?”
로브를 툭툭 털어낸 에스페란사가 다가와 물었다. 시더는 턱짓으로 열린 문을 가리켰다.
[01:34:24]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하고 상자를 여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13분. 순조로운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