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89
89화
열린 문 너머에서 하녀들과 하인들, 커크필드 부인과 공작이 반갑게 조우했다. 두 시간 안에 던전 중앙부까지 가야 된다는, 그들에게는 다소 난해한 설명도 곁들이며. 공작은 늙은 시녀장이 다친 곳은 없는지 살뜰히 살피며 거듭 당부했다.
“다쳤거나 움직이기 힘들면 반드시 도움을 청하게. 누구도 폐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커크필드 부인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그러겠다고 말했지만, 에스페란사가 보기에도 부인은 끝까지 도움을 청할 것 같지 않았다.
“생각보다 많네요.”
눈으로 인원수를 확인한 시더가 입을 열었다. 그 말대로였다. 공작을 제외하고 이 자리에 모인 고용인들은 대략 열 명 정도. 파인먼트 하우스의 고용인이 몇 명이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백 명을 넘지는 않을 것이다. 커크필드 부인 일행과 오다가 죽은 사람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찾아야 할 사람은 더 적을 테고.
“이대로만 가면 생각보다 금방 끝날지도 모르겠어요.”
무심코 그렇게 말했던 에스페란사가 아차 하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시더가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이런 말은 하는 게 아닌데.”
“왜요?”
“부정 타요.”
장난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미신은 의외로 잘 들어맞는다.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쳤습니다. 던전의 보스가 당신을 인식합니다.]예를 들면 이런 식으로. 보스의 인식이라는 것이 C급 던전 정도에서는 큰 의미가 없지만 A급 던전의 보스는 인간 이상으로 뛰어난 지능을 가진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보스가 어떤 몬스터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걱정해 봐야 소용없지.
“일단, 할 일부터 해야겠어요.”
인벤토리에서 무기가 쏟아져 나왔다. 시더는 기시감을 느끼고 낮게 웃었다.
“전부 하나씩 가져가요!”
움찔거리며 다가오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공작이 눈을 크게 떴다.
“귀한 것일 텐데, 나눠 줘도 괜찮겠소?”
“빌려 주는 거예요.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시 수거할 테니, 훔쳐 갈 생각은 하지도 말아요.”
마벨우드에선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았는데, 솔직히 말하면 공작은 믿음이 가지 않았다.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부 수거할 수 있게 보증하겠소. 없어진다면 모든 노력을 다해서 찾아 주도록 하지.”
에스페란사는 눈을 가늘게 뜨는 것으로 그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으나, 공작은 말없이 커다란 도끼를 들어 릴리 런더포드의 손에 쥐여 주었다.
공작의 성격을 보아 하녀 본인의 성향에 맞춘 선택일 것이다. 굉장한 취향이로군. 에스페란사가 혀를 찼다. 다른 하녀들은 평범하게 총을 골랐다. 하인들은 검을 집어 들고 괜한 폼을 잡으며 휘둘러 보았다. 물론 그들의 자세는 대체로 형편없었다.
“크로울리, 자네는 참전 경험이 있지?”
“예? 예, 전하.”
“그럼 총을 쓰게.”
검을 들고 가는 하인 하나를 붙잡아 장총을 내어 준 공작이 커크필드 부인에게는 작은 권총을 주었다. 노부인이 어색해하자, 쏘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전하는요?”
“이게 있으니 됐소.”
그는 손에 들린 권총을 보여 주었다. 에스페란사는 이마를 찡그렸다.
“잔말 말고 가져가요. 이게 어디서 온 물건인지 아시잖아요?”
공작이 에스페란사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허리를 굽혀 총 하나를 집어 들었다.
“미스 헌터, 나를 싫어하는 줄 알았소만.”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리고 제 쪽은 그럴 만하다고 생각하는데.”
시더가 나직이 혀를 찼다. 에스페란사가 눈을 흘기자, 보란 듯이 웃음 지었다. 공작은 멈칫, 에스페란사를 바라보다가 다소 뻔뻔하게 물었다.
“알고 있었소?”
“티를 내셨죠.”
시더가 대신 대답했다. 공작은 손으로 뺨을 더듬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듯이.
“티를 냈다고? ……대단히 실례했군.”
사과는 하지만 부정은 않는다. 에스페란사는 기가 막혀 고개를 내저었다. 공작은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여전히 허둥지둥하는 고용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자, 그럼. 에스페란사, 무기를 뺐으니 자리가 좀 남겠네요.”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손에 빈 열쇠 상자와 자물쇠를 쥐여 주었다. 자연스럽게 그것들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에스페란사가 눈을 흘겼다.
“진짜 날 짐꾼으로 아는 거야, 뭐야.”
“그럴 리가 있나요. 그보다 이제 슬슬 중앙 복도로 나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상태 창 상단의 제한 시간은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었다.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구해 던전 중앙부까지 가려면 바삐 움직여야 했다. 시더는 계기판을, 에스페란사는 맵을 바라보았다.
* * *
궁전은 큰 정원을 둘러싼 내부가 하나의 복도로 연결되어 있는 구조였다. 예배실은 현관에 가까운 자리였지만 3층에 있었기 때문에 계단을 먼저 찾아야 했다. 계단은 중앙 복도와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멀지는 않다. 또다시 길이 꼬이지만 않는다면, 그들은 금방 예배실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든 생각인데, 이 사람들을 최대한 빨리 예배실에 넣어 놓고 우리끼리 나와서 다른 사람들을 찾는 게 쉽지 않을까요?”
“그것도 괜찮겠네요. 적어도 우리끼리 있으면 비상사태에 대처하기 쉬울 테니까.”
“문제는 던전 중앙부…… 그러니까 예배실에 몬스터가 나올 경우인데. 보통 중앙부는 안전하긴 한데요.”
에스페란사가 시더를 흘끔거리자, 그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날 거기 두고 갈 생각은 하지도 말아요.”
바로 그 말을 하려던 에스페란사는 입을 다물었다. 던전의 난이도에 비해 쓸 만한 인원이 너무 없다. 고작 시더 클라이번 하나를 데리고 사람들도 구하고 중앙부도 지키고, 이게 무슨 중노동이란 말인지.
하지만 일단은 던전 중앙부까지 가는 게 먼저였다. 열 명이 넘는 인원이 한꺼번에 움직이는데도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시더와 에스페란사만 간혹 상황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 장난 같은 대화에 자신들의 생사가 걸려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각자의 무기를 좀 더 꽉 그러쥔 채 귀를 기울였다.
중앙 복도에 들어선 순간, 에스페란사가 침음을 흘렸다.
“으아아악!”
“비, 비켜!”
복도 끝에서부터 비명을 지르며 달려오는 사람들. 그리고 그 뒤를 쫓아오는 거미 몬스터, 아라크네.
일행의 맨 뒤에 있던 에스페란사가 중앙 복도에 들어섰을 때에는 이미 여섯 명 중 두 명이 거미의 손에 목숨을 잃은 후였다.
거대 거미가 입으로 끈끈한 거미줄을 뿜으며 복도를 질주했다. 진짜 거미라면 입에서 거미줄이 나오지 않겠지만 아라크네는 편리한 몸을 지녔다.
그리고, 다리가 여덟 개였다.
무려 여덟 개.
‘미친 거 아냐?’
거미 다리는 원래 여덟 개인데 뭐가 문제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싫은 건 싫은 거였다. 생리적인 불쾌감이 치밀어 올랐다. 작게 봐도 징그러운 벌레를 복도를 꽉 채울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로 보자니, 그 크기만큼 징그러웠다.
그러니까 빨리 죽여야지. 징그러운 꼴 더 안 보게.
입술을 앙다문 채 총을 장전한 에스페란사는 마력을 끌어 올렸다. 보스급 몬스터인 미노타우로스도 아니고 고작 아라크네다. 거미줄이 성가실 뿐,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한 방에 끝내 버려야지.
계기판에 붙은 마정석을 갈아 끼우느라 한발 늦은 시더가 그 모습을 보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렇게 흥분했어요?”
에스페란사의 발을 구두코로 툭 건드린 시더가 총을 들며 말했다.
“흥분 안 했어요!”
“당신답지 않은데.”
“아, 진짜. 저 꼴도 보기 싫은 것 좀 치우고 나서 말해요.”
아하. 거미를 싫어하는군. 누가 좋아하겠냐마는.
“일단 사람들부터 해결해야겠네요. 잠깐 근접전 괜찮죠?”
그 말이 끝이었는데도 시더가 머릿속에 그린 그림이 눈앞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고개를 끄덕인 에스페란사가 총을 인벤토리에 던져 넣었다.
시더의 케인 건이 거미줄을 뿜어내는 아라크네의 입을 명중시켰다.
거미가 주춤한 순간 뛰어오른 에스페란사는 복도 반대쪽의 거미에게로 돌진했다. 날카로운 검격이 거미줄을 잘라 냈다. 에스페란사가 거미를 상대하는 사이, 팔다리가 묶인 채 허우적거리던 사람들이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겅중겅중 달려왔다.
“사, 살았다!”
“다들 무사했구나, 다행이야! 정원사 아저씨랑 에밀리가…….”
커크필드 부인과 하녀들이 사람들을 다독이며 안전한 후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사이 에스페란사는 이미 거미의 피에 젖어 축축해진 검으로 느릿느릿 몬스터를 상대하며 복도 중간까지 유인했다.
그리고 거미가 복도의 반을 건너온 순간.
시더의 케인 건이 아라크네의 앞다리를, 공작의 리볼버가 반대쪽 다리를 절단했다. 순식간에 복도는 죽어 가는 거미가 뿜어낸 거미줄로 가득 찼다.
검을 놓은 에스페란사는 다시 총을 들었다. 제대로 조준도 하지 않고 방출한 마력이 아라크네의 몸을 통과했다.
단 한 번의 저격으로 끝이었다. 에스페란사는 성가신 날파리라도 잡은 듯한 얼굴로 총을 내려놓았다. 총구에 엉겨 붙은 거미줄을 떼어 내던 시더가 못 말리겠다는 듯이 웃었다.
눈이 마주치자, 에스페란사는 대뜸 손바닥을 내밀었다. 맥락 없이 들이민 손바닥을 내려다보던 시더는 의아한 얼굴로 손끝을 붙잡았다. 깃털이 내려앉듯이 조심히. 그러나 잡힌 손끝은 매정히 그의 손을 뿌리치더니 곧 뒤집어 손바닥을 맞부딪혔다. 짝, 경쾌한 소리에 사람들이 흠칫하며 뒤돌아보았다. 놀란 눈에 대고 에스페란사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방금 우리 합이 꽤 훌륭했다는 의미에서.”
“헌터들끼리의 문화인가 보죠?”
시더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얼얼한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잠깐 빨갛게 달아올랐던 손은 금방 제 색을 되찾았다.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가만히 손을 쥐었다 펴 보던 시더는 아닌 척 이쪽을 흘끔거리는 시선들 가운데 유독 곧은 시선 하나를 발견했다. 입매가 뾰족한 선을 그렸다. 그는 에스페란사의 어깨를 감싸 끌어당겼다. 반쯤 품 안에 가둔 꼴이었다.
“왜요?”
“공작이 쳐다봐요.”
“소리가 너무 컸나?”
고개를 들어 올려서 본 시더의 눈은 조소를 머금고 있어 낯설게만 보였다. 그러나 정면을 향하던 눈이 에스페란사와 마주했을 때, 비웃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런가 봐요.”
공작이 눈치를 주는 게 달갑지는 않았지만, 아라크네 시체로 가득 찬 복도를 벗어나고 싶었기에, 에스페란사는 군말 없이 전투 뒤처리에 나섰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복도에서 만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커크필드 부인이 그들을 보살피고 있었다.
“다친 사람은 없어요?”
“없습니다. 다들 놀라긴 했지만…… 걸을 수 있겠니?”
어려 보이는 하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다가 자기 발에 걸려 넘어졌다. 허벅지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공작이 체격이 좋은 하인에게 그를 업으라고 지시했다. 하인은 불만스러워 보였지만, 에스페란사의 눈치를 살피고는 얌전히 몸을 굽혔다.
나머지도 자잘한 상처뿐, 큰 부상은 없었다. 이미 일행을 만나기 전 죽은 사람은 어쩔 수 없다. 공작과 커크필드 부인은 침통한 얼굴로 묵념했다.
일반인과의 던전 공략이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황금 발톱에 전원 구조 퀘스트 같은 게 있었다면 정말 끔찍했을 것이다.
‘하긴, 그런 귀찮은 게 있었으면 나도 이렇게 오래 게임을 안 했지.’
그리고 지금쯤 원래 세계의 집에서 편안히 쉬고 있었을 테고.
* * *
아라크네의 시체를 뒤로하고 중앙부로 향하는 길. 에스페란사의 얼굴은 갈수록 어두워졌다.
그나마 아라크네에게 쫓기던 사람들의 상태가 가장 나았다. 그 이후로 새로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부상자였다. 그나마 전투원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등 위에 사람이 하나씩 얹어졌다. 전투원이 짐수레가 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사람은 늘었지만 전투원은 줄어들었다. 사람들이 점점 지치고 괴로워하는 것이 보였다. 공작은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격려했지만, 그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조금’에 몇 번의 전투가 포함되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
최악의 일은 그다음에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