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9
9화
“이제 끝났죠? 가 봐도 돼요?”
“잠깐, 이번엔 정말 별것 아니에요.”
고작 피 몇 방울 뽑는 게 뭐라고, 당장 들어가서 자고 싶을 정도로 피곤했다. 피가 뽑혔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혼을 쏙 빼놓는 저 사기꾼의 태도 때문이다.
“뭔데요.”
뚱한 어조에 시더는 머쓱한 얼굴로 다시 통로 안쪽으로 들어가 뭔가를 가지고 나왔다.
“내 낫?”
손잡이의 가죽이 깨끗하게 벗겨져 있다는 것 말고는 에스페란사가 알던 그 낫이었다. 복잡한 톱니바퀴와 파이프 회로의 가운데에 마정석이 박혀 있었다. 시더는 그 둥근 마정석을 떼어 내고 손잡이를 다시 붙였다.
“잡아 볼래요?”
이번에는 에스페란사가 알던 바로 무기였으므로, 의심 없이 무기를 붙잡았다.
“휘둘러 봐요.”
“이게 실내에서 휘두를 수 있는 게 아닌데요?”
연구실 다 날아가도 괜찮냐는 질문에 시더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그럼 개방만 해 볼까요?”
발밑으로 둥근 바람이 불었다. 낫의 날을 따라 새까만 기운이 감돌았다. 손잡이를 쥔 손을 따라 손목까지 그 기운이 휘감겼다.
늘 비스듬히 팔짱을 끼고, 방관하듯 바라보던 시더의 눈빛에 경외가 들어찼다.
“‘진짜’ 마법사.”
그가 속삭였다. 바람의 한가운데 있는 에스페란사는 미처 듣지 못했다. 바람의 궤적이 넓어지자 쌓아 놓은 종이들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에스페란사는 깜짝 놀라 개방을 멈췄다.
공중에 떠 있던 종이가 조용히, 바닥을 쓸듯 내려앉았다. 에스페란사를 휘감았던 기운도 사라졌다. 마치 마정석을 가루로 뿌린 듯하던 그 기운.
“에스페란사.”
“네? 아, 네.”
원래대로 돌아온 에스페란사가 낫을 내려놓았다. 시더가 빙그레 웃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해부 안 해요. 피 안 줘요. 실험 절대, 절대 안 해요.”
뭐라고 하든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의 눈에, 마정석 없이 스스로의 마력으로 마법을 사용하는 ‘진짜 마법사’의 존재가 일렁거렸다.
“아뇨, 당신의 목표에 관해서 말이에요. 황금 발톱?”
“도와주게요?”
“성심껏, 최선을 다해서 도와줄게요.”
에스페란사는 낫을 쥘 때와 달리 의심을 감추지 못했다.
“피 안 줘요.”
“더 달라고 안 할게요. 이걸로 충분하니까. 물론 준다면 기쁘게 받겠지만…….”
“안 준다니까요.”
시더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괜찮아요.”
아까까지는 단순히 흥미였다. 13년 후의 인간과 13년 후의 발전된 마도 공학에 대한 흥미. ‘시더 클라이번’의 존재를 배제하고도 고작 10여 년에 어마어마한 발전을 이룬 세상, 완전히 변해 버릴 세상에 대한 관심.
하지만 눈앞의 여자는 마법사다. 진짜 마법사. 스스로의 몸에 흐르는 마력으로 자유롭게 마법을 사용하는 자. 그 자신을 위시한 마도 공학자들과 달리, 마정석의 도움을 받아 마력을 채우지 않아도 되는 진짜.
마도 공학이 지향하는 궁극의 자리에 서 있는 여자가 입술을 오물거리며 투덜댄다. 그리고 장미 꽃잎 같은 연약한 입술 위에, 이제야 보인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찬 보랏빛 눈동자. 말끝을 늘이고 눈동자를 굴리는 행동으로도 감출 수 없는 본질이.
앞으로 무엇을 해 볼까. 1년 남았다고 했나? 그는 그 1년이 지난 25년보다 다채로울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에이번데일 저택의 고용인들은 손님이 머물기 시작하며 변한 일상에 적응해 가는 중이었다.
“예전보다는 훨씬 낫지.”
“예전이 너무했지.”
주인인 백작은 연구에 빠져서 새벽 늦게 잠들었다가 늦은 오전, 심지어는 오후에 일어났다. 그리고 끼니를 때우는 수준의 식사만 하고 다시 연구에 빠지거나 저택에서 할 수 있는 간단한 취미 생활을 즐기고, 꼭 필요한 일정이 있을 때만 밖으로 나갔다.
제아무리 하인들이 주인을 만날 일이 없는 것이 정상이라지만 일반적인 그 나이 대의 남자 귀족들이 갈 법한 클럽, 승마장, 심지어는 무도회에도 거의 참석하지 않는 괴짜 주인을 모시다 보면 주인이 정말 살아있기는 한 것인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그에 비해 지금은 숙녀분이 머물기 시작해 자연히 일은 많아졌지만 적어도 주인의 생존은 확인할 수 있으니 고용 불안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손님이라는 명목으로 머물고 있는 미스 에스페란사 헌터는 소탈하고 무던해서 모시기 편했다. 식사를 1인분 더 챙기고 방을 하나 더 청소하는 정도였다.
유일하게 불만을 가진 하인들이 있다면, 사격장을 담당하는 하인들이었다. 그들은 예년보다 열 배 가까이 바빠졌다. 사격장을 쓰는 일이 열 배 정도 늘었다는 뜻이다.
“또 명중이네요. 이걸 하는 의미가 있긴 해요?”
두 손으로 다 들기도 버거울 거대한 총을 대강 어깨에 올리고 조준도 없이 쏘았는데도 중앙에 적중했다. 보이지도 않는 거리에 설치한 과녁은 중앙만 뚫려 있었다.
에스페란사는 최저 출력으로 줄여 놓은 총을 내려놓으며 뻐근한 어깨를 두드렸다.
[전투 모드 OFF]시야 위쪽에서 반짝이던 글씨가 곧 사라졌다.
“감각이 무디어지면 안 돼요. 다시 원상회복하기까지 꽤 걸리는데, 지금 할 수 있는 거라곤 이것밖에 없으니까.”
2년 전인가, 일이 있어서 몇 달 동안 접속을 못 했던 적이 있었다. 다시 돌아왔을 때 랭킹은 당연히 떨어져 있었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떨어진 랭킹을 복구하는 데 3개월이나 걸렸다는 사실이었다. 고작 그 몇 달 간 사람들이 특별히 강해진 것이 아니라 에스페란사의 전투력이 떨어진 것이었다.
‘사이러스가 엄청 놀랐었지.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됐느냐고.’
재활 아닌 재활을 도와준 것도 그였다. 다시 전투에 감을 찾을 때까지. 똑같이 서버 오픈 때부터 게임을 했는데 누구는 게임 속 세상에서 태어난 것마냥 처음부터 능숙하고, 누구는 잠깐 쉬었다고 맥을 못 추질 않나, 그때까지 메뉴에 뭐가 있는지도 제대로 모르고…….
하지만 그때의 경험은 지금 같은 비상사태에 도움이 되었다. 에스페란사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다. 지금처럼 무엇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스스로의 능력뿐이다. 확실히 가진 것이 있는데 그걸 썩히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거. 최대 출력으로 하면 어떻게 돼요?”
“던전 밖에서는 써 본 적 없어요. 던전 안에서는, 그 때 무슨 성당을 무너뜨렸더라. 나인 호더 중앙에 있는 거.”
“산타 줄리아나?”
“아, 그건가. 통째로 날아갔어요. 그 안에 있던 튀폰 열 마리까지 싹.”
그리고 에스페란사도 거의 전투 불능 상태가 됐었지. 당시에는 랭킹 4위에 있던 사이러스와 함께 공략을 진행했었는데, 소수 정예랍시고 단둘이 들어갔던 터라 정말 아찔했다. 보상은 좋았지만.
“하지만 자주 쓸 순 없겠죠. 한 번 쓰면 얼마나 버텨요?”
“못 버텨요. 끽.”
마력이 바닥나서 던전 공략 끝날 때까지 누워 있어야 된다. 못 참고 로그아웃을 하면 가벼운 페널티가 가해진다. 그래서 귀환증이 좋은 것이다. 페널티 없이 던전 밖으로 나갈 수 있으니까. 그렇게 좋은 거니까 과금 아이템이었지.
“저런.”
혀를 찬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총을 받아 보았다. 분해해 보고 싶어 하는 눈치인데.
“당신은, 이거라도 물고 있을래요?”
에스페란사가 빤히 쳐다보자 거슬렸는지, 품에서 궐련으로 된 파오란을 꺼내 준다.
“파오란 안 피워요.”
어차피 헌터의 몸은 물질 남용 장애에 걸리지 않으니 게임 안에서만은 파오란을 피우든 마약을 하든 헌터들 마음이었지만, 에스페란사는 그 매캐한 냄새가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래요?”
그는 에스페란사에게 내밀었던 궐련을 가져왔다. 주머니에서 특이한 모양의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에스페란사가 눈살을 찌푸리자 키득거리며 웃었다.
“진짜 싫어하는군요.”
“싫다니까요.”
“안 피운다고 했지, 싫다곤 안 했잖아요? ……알았어요, 안 피울게요.”
그는 바로 궐련을 의자 손잡이에 비벼 꺼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별로 믿음직스럽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뭘 봤다고 그를 믿겠는가 말이다.
느슨하게 묶은 머리칼과 귀족적인 옆태에서 풍기는 분위기와는 달리, 시더 클라이번의 말에는 무게가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아직 그가 ‘조금만 더’ 하고 달래 가며 피를 짜내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고작 바늘로 찔러 나오는 피 몇 방울 더 내주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갈 곳 없는 신세에 더부살이하며 호사를 누리고 있는데. 하지만 입으로는 한 방울만 가져가겠다고 해 놓고 병을 채우고 있으면 신뢰가 깨질 수밖에 없지.
어차피 없던 신뢰지만.
“이건, 상당하네요.”
저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칭찬이 나왔다. 어깨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내가 가진 장총 중엔 제일 좋은 거예요. 큰 던전을 공략하러 들어갈 때 쓰는 물건이고. 화력 조절이 세세하지 않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그만한 단점도 없는 물건이 어디 있겠는가? 콩알 같은 걸 쏘아대는 수준에서 던전화된 대성당을 일직선으로 뚫어 버리는 화력까지, 고작 상중하 세 단계로밖에 조절이 안 되기 때문에 단독 무기로는 쓸 수 없어도, 이만한 게 없었다.
“마력 필터가 세 개뿐이네요. 이건 개선할 수 있겠는데.”
“진짜요?”
시더는 자기 것처럼 장총을 등에 짊어지고 고개를 까닥였다. 예의 오만한 미소가 짙어졌다.
“내가 할 수 있다고 하면 정말 할 수 있는 거예요.”
에스페란사는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고 우물거렸다.
“아, 그러시구나…….”
시더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저 뚱한 반응은 재미가 없다가도, 저것이 나름대로 투덜거리는 것이란 걸 알고 나니 또 꽤나 우습다. 이 저택을 맨손으로 날려 버릴 수도 있는 마법사가 하는 불만의 표현이 고작 저런 것이라니.
“일단 오늘은 아니고요. 가야 할 곳이 있으니까. 잊진 않았겠죠?”
맞다. 그게 오늘이었다. 에스페란사는 낮게 가라앉은 회색빛 하늘을 바라보았다.
* * *
오늘은 마법 용품 상점에 들러 보기로 했다. 그곳에 황금 발톱이 떡하니 있을 리는 없지만, 혹시 소문이라도 들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
첫 외출인지라 차림새에도 신경을 썼다. 에스페란사는 재단사가 만든 짙은 자주색 드레스와 같은 색의 모자, 그리고 그보다 옅은 복숭아색 장갑을 착용했다. 몸의 곡선 그대로 달라붙은 드레스는 주인의 눈처럼 화려한 빛을 냈다.
“아가씨, 당장 무도회에 가셔도 되겠어요. 다들 아가씨만 쳐다볼 것 같아요. 진짜, 너무 예뻐요…… 백작님은 이렇게 예쁜 아가씨를 보고 어떻게 제정신이실 수가 있지?”
전 백작 부인의 옷을 관리하던 하녀는 이제 에스페란사의 옷도 관리하고 있었는데, 에스페란사가 생각하기엔 호들갑이 좀 과한 편이었다.
“애니, 아무리 봐도 그 정도는 아니야.”
에스페란사는 초상화 속 귀부인 같은 거울 속 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주 아름답지만, 넋을 잃을 정도는 아니다. 물론 마음에는 들었다.
“아가씨는 스스로에게 너무 박하세요.”
애니가 현관 홀까지 따라 나와 종알거리다, 갑자기 입을 꼭 닫았다. 단정한 구두 소리가 바닥을 울렸기 때문이었다.
‘넋을 잃을 만한 미모에는, 저쪽이 더 가깝지.’
묵직한 검은 프록코트를 걸친 남자의 긴 금발이 코트 자락 위로 늘어졌다. 실크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지팡이까지 든 시더 클라이번은 완벽한 신사로 보였다. 연구실이나 사격장보다는 의회에 앉아 있을 것 같은.
모자챙이 드리운 그림자 아래, 또렷한 입매가 미묘하게 비틀어졌다.
“눈에 띄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