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90
90화
겨우 도달한 계단 앞에서 두 마리의 키마이라를 만났다. 에스페란사는 순식간에 두 마리의 목을 따는 데 성공했으나 그와 동시에 계단 디딤판이 둘로 갈라졌다.
“에스페란사!”
계단 위와 아래가 멀어졌다. 계단 위에 서 있던 시더가 손을 뻗었지만, 에스페란사의 손끝을 붙잡기도 전에 시야가 일그러졌다. 공간이 통째로 잘려 나간 듯 계단 위의 공간이 새까맣게 변했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깔깔깔깔 웃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늘고 교활한 목소리. 에스페란사는 이를 악물었다.
‘보스다.’
만만치 않은 놈에게 걸려들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체 꼼꼼한 성격인 사이러스가 치밀한 갈리스턴을 제거하기 위해 만든 던전이니 당연하지.
빌어먹을 사이러스. 여기서 나가기만 해 봐라, 죽여 버릴 테니까.
[01:19:23]남은 시간은 1시간 20분.
방금 전까지는 이만하면 여유롭다고 생각했던 시간이 촉박하게 느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더와 함께 계단 위에 있었다. 계단 아래에 있었던 건 본래 일행 맨 뒤에 있었던 에스페란사와 키마이라에게 붙잡힌 하녀를 구하기 위해 달려왔던…….
갈리스턴 공작과 도끼를 든 하녀.
두통이 엄습했다. 몇 없는 전투원이 전부 이쪽에 모였잖아!
“적어도 전하는 저쪽으로 갔어야죠!”
공작이 억울하단 듯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에스페란사는 뵈는 것이 없었다.
가뜩이나 저쪽엔 전투원도 없는데! 본래 고상하게 머리만 굴리면 됐을 시더 클라이번이 전투까지 혼자 전담하게 생겼다. 그 한 몸이라도 무사히 빠져나온다면 좋겠지만, 운이 나쁘면? 아까처럼 미노타우로스급의 몬스터를 만나기라도 하면?
공작 때문에 휩쓸린 다른 사람들에게 에스페란사는 아무런 빚이 없다. 살리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최선을 다한 후 결과가 나쁘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시더는, 시더는 에스페란사 때문에 던전에 들어온 것이다.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죽을 수도 있어.’
마음이 조급해졌다.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이 사람들을 전부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시더는 살려야 했다.
“일단 저쪽 사람들을 찾으러 가요. 먼저 여기가 어딘지 확인부터…….”
“미스 헌터, 진정하시오.”
공작이 에스페란사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 같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런더포드 양, 초콜릿 가진 것 없나?”
“전하께서 어떻게 아셨는지 모르겠지만…… 앨리스가 준 것이 하나 있어요. 좀 녹은 것도 괜찮다면요.”
릴리 런더포드가 에스페란사의 손 위에 반쯤 녹은 초콜릿을 얹어 주었다. 초콜릿 껍질을 까서 입 안에 넣은 에스페란사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미스 헌터. 에이번데일과 연락할 수단은 없나?”
“아. 맞다.”
인벤토리 안쪽에서 한쪽밖에 없는 귀걸이가 나왔다. 시더도 이 마도구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을까? 사실 반쯤 도박이었다.
귀걸이를 끼우려던 손이 미끄러워 자꾸 엇나가자, 릴리가 어딘가 능숙한 손길로 대신 끼워 주었다. 마력을 불어넣자, 주파수를 맞추는 듯한 소음이 나다가 곧 조용해졌다.
“여보세요?”
‘여보세요’라니, 이게 전화도 아니고.
―에스페란사. 그 정중한 인사는 뭐죠?
아. 연결됐다. 방금 전까지 들었던 목소리인데도 오랜만에 들은 것처럼 반가웠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몸에 힘이 풀렸다.
“어디 다친 건 아니죠? 괜찮아요?”
에스페란사가 물었다. 시더가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이야말로.
* * *
‘계단 아래’ 사람들이 어떻게든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과 달리 ‘계단 위’ 사람들은 주저앉아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다. 시더 클라이번은 하필이면 에스페란사와 떨어져 관심도 없는 떨거지들과 함께 던전 중심부까지 가야 하는 현 상황에 불만이 많았다.
‘버리고 갈까?’
어차피 현실적으로도 다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그는 에스페란사가 아니었다. 전투를 할 수 있는 사람들만 선별해서 데려간다고 하더라도 에스페란사가 없는 상태에선 생존율이 떨어진다. 그런데 부상자를 다 끌고 가라고? 어림도 없다.
여기까지 온 목적이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었던 에스페란사와 그는 달랐다. 시더는 에스페란사가 아니었다면 애당초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던전이야 있든 말든, 사람이야 죽든 말든 알 게 뭔가.
그리고 생존에 예민해진 사람들은 그의 그런 기색을 누구보다 빨리 알아챘다.
“설마 저희를 버리고 가실 건 아니죠?”
시더는 잠깐 고민했다. 몇몇 눈에 띄는 얼굴들이 있었다. 저 사람들이 없어지면 분명 에스페란사가 행방을 묻겠지.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확실히, 부상자를 두고 가는 것은 별로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적어도 당장은.
“그럴 리가.”
생각을 마친 시더가 기계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 빚은 듯 우아한 낯에 서린 웃음을 본 사람들은 전부 그가 머릿속으로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 알 수 있었다. 척추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일단 던전 중앙부까지 가는 게 좋겠네. 에스페란사도 그쪽으로 가고 있을 테니까.”
“전하를 찾지 않으실 겁니까?”
유일한 상급 고용인이라는 이유로 고용인들의 대변인 자리를 떠맡은 커크필드 부인이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무슨 수로 찾겠나? 그쪽은 자기 한 몸은 알아서 챙길 수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어.”
그러면서 그는 던전 하나를 단신으로 상대하던 사람의 걱정을 하고 있었다…….
시더는 모순된 생각에 양심의 가책 하나 느끼지 않은 채 계단을 올랐다. 사람들이 하나둘 주춤주춤 따라왔다.
3층까지 오르는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더가 마지막 계단을 밟았을 때, 귓가에서 그가 익히 아는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조심스럽고 정중한 목소리였다. 놀라울 만큼 기분이 좋아졌다.
“에스페란사. 그 정중한 인사는 뭐죠?”
쉽게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전혀 웃을 상황이 아닌데도. 그들은 서로에 대한 걱정을 숨기며 시답잖은 소리를 몇 마디 주고받다가, 던전 중심부에서 만나기로 합의를 보았다.
3층에 있는 시더의 일행은 던전 중심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걸어서 10분 안에도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고 커크필드 부인이 말했다. 운만 따라 준다면 몬스터를 하나도 만나지 않고 지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리가 없지.
예배실로 통하는 복도는 하나뿐이었고, 그 앞에는 사자의 몸을 한 몬스터가 마치 수문장처럼 앉아 있었다.
“저, 저걸 어떻게 뚫어요?”
하녀들은 서로 손을 꼭 붙잡은 채 거대한 몬스터를 흘끔거렸다. 그들은 몬스터가 있는 방향으로 차마 꺾어 들어가지 못한 채 복도 뒤에서 발만 굴렀다.
시더는 아까 상자를 주웠던 하녀를 찾았다.
“이름이, 앨리스 양이라고 했던가? 혹시 이 근처에서는 뭐 주운 것 없나?”
“아무리 제가 뭘 잘 줍는다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그럴 시간이 없었다. 시더는 고민에 빠졌다. 에스페란사라면 망설임 없이 뚫고 갔을 것이다. 시더도 혼자였다면 전투 쪽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 많이 죽어 버리면, 에스페란사는 던전에서 나간 후에도 이 사람들 생각을 하지 않겠는가? 그들만의 유쾌하고 편안한 공기에 불편한 일이 끼어들게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저 얌전하고 엉덩이 무거워 보이는 괴물을 인명 피해 없이 치워 낼 방법이……. 그때, 그의 시선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커크필드 부인. 부인의 안경은 마도구입니까?”
“예. 전하께서 제 60번째 생일날 선물해 주신 물건이지요. 이것은 왜?”
“추적 기능이 있겠군요? 그럼 기어는 어떤 걸, 아니지. 일단 줘 보세요.”
커크필드 부인은 매우 못마땅한 얼굴로 안경을 내밀었다. 시더는 다른 고용인들에게서도 그들이 가진 자잘한 기계 장치나 에스페란사가 공유한 무기를 빼앗았다. 그리고 복도에 주저앉아 그것들을 분해하기 시작했다.
“로드 에이번데일,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저 괴물을 상대할 수 없다면 쫓아 버리는 수밖에 없지요.”
대답은 그게 끝이었다. 대부분의 장비는 에스페란사의 인벤토리에 있어서 그가 가진 것은 상비하고 다니는 스티뮬러와 다용도 공구 한 자루뿐이었다. 그러나 에스페란사의 마법 무기에는 대부분 시더의 손길이 닿아 있었고, 그는 어디에 어떤 부품이 있는지, 그리고 그 부품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십여 분이 지나고, 척 보기에도 엉성한 몰골의 조립형 오토마톤이 바닥에 섰다.
“하찮게 생겼다…….”
앨리스가 무심코 중얼거렸다가 입을 턱 막았다. 시더는 눈썹을 한 번 치켜올리고 무시했다. 모양이 웃긴 건 그도 알고 있었다. 마정석을 끼우자, 네 개의 다리가 팔딱팔딱 움직였다. 그는 다시 오토마톤을 분해해 몇 가지 부품을 바꿔 끼웠다.
그렇게 오토마톤을 완성한 뒤 그가 한 일은, 품 안에서 파오란 궐련을 꺼내는 일이었다. 마치 파오란 한 대가 절실했다는 듯이. 그리고 그 위에 정말로 불을 붙였다. 고용인들이 입을 떡 벌렸다.
“들키면 어쩌려고요!”
“쉿.”
온유하고 무심한 백작의 눈매는 매캐한 파오란 연기에 가려져 흐려 보였다. 사람들에게 가볍게 주의를 준 후 연기를 딱 한 모금 들이켠 그는 오토마톤의 꼬리에 파오란 궐련을 끼웠다. 나란히 세 개나. 오토마톤을 내려놓자, 팔딱팔딱 뛰어간 기계가 움직이는 대로 연기도 희뿌옇게 퍼졌다.
복도 반대편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가는 오토마톤의 꼬리에 붙은 불이 알싸한 연기를 내뿜었다. 입으로 추정되는 벌어진 구멍에서는 마력탄이 탕탕 소리를 내며 터져 나왔다.
“다들 문 뒤로.”
그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던 사람들은 명령이 떨어지자 줄에 묶인 인형처럼 삐걱삐걱 문 뒤로 몸을 숨겼다.
가만히 자리를 지키던 몬스터는 복도 저편에서부터 다가오는 매캐한 냄새를 맡고 코를 벌름거렸다. 크르릉, 사람과 흡사한 얼굴로 낮게 울며 사자 꼬리를 느리게 흔들었다. 얼굴을 사납게 일그러뜨린 몬스터가 몸을 일으켰다. 거대한 그림자가 갈림길에 섰을 때, 사람들은 입을 틀어막고 기척을 죽였다. 제발, 제발.
사람과 같은 눈을 가진 맹수가 이쪽을 한번 흘끔 보더니, 연기가 가득하고 총탄 쏘는 소리가 시끄러운 반대편 복도를 향해 몸을 돌렸다. 꼬리털 한 올까지 전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자, 그제야 모두 겨우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살았다!”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은 안도감이 일행을 휩쓸고 지나갔다. 이 모든 일을 해낸 장본인만이 태연히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 귓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짐 덩어리들이 떨어져 나가고 나니 아주 신났군요?”
여간 비뚤어진 게 아닌 내용과 달리 목소리는 사근사근 달았다.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몬스터가 있던 자리를 거침없이 밟고 지나가며 통신에 집중했다.
―신난 것까진 아니고, 그쪽엔 별일 없어요?
“덕분에요. 난 지금 예배실 앞이에요. 문이 닫혀 있는데…….”
―앗, 저게!
문장 허리를 뚝 잘라 먹는 감탄사와 함께 마력탄이 터지고, 우르르르 건물이 무너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괜찮아요?”
―좋아요! 아, 전하, 자기 앞가림이나 똑바로 해요!
아, 좋다고.
―잠깐만요, 좀 있다 얘기해요!
목소리가 뚝 끊어지고, 그다음에는 가쁜 숨소리만 났다. 배경에 깔린 괴수의 포효와 이름 모를 하녀의 기합 소리, 공작의 말소리와 부딪히고 터지고 쏟아지는 소리가 더 컸지만, 그런 건 신경 쓸 거리도 아니었다.
예배실 문을 열어젖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