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92
92화
어거스텀 궁전, 여왕의 알현실. 대공이 여왕을 끌어안은 채 쏘아붙였다.
“제발 그만하시오.”
이마까지 가리는 후드를 벗은 여자가 비린 웃음을 지었다. 특이하게도 턱까지 오는 까만 단발을 하고 있는 여자는 오스던의 국왕 부부 앞에서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주눅이 든 것은 국왕 부부 쪽이었다.
“얼마든지 그만할 수 있습니다, 전하. 폐하께서 결단을 내려 주시기만 한다면요.”
“고작 그 땅 하나 때문에 갈리스턴을 죽이겠다고? 다리아, 그는 짐의 사촌이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수족이기도 하지요. 그걸 몰라서 이러겠습니까? 폐하, 결단을 내리시지요. ‘고작 그 땅 하나’를 못 내놓아서 사촌을 잃으실지.”
여왕은 사납게 눈을 치켜뜬 채 입술을 달싹거렸다. 혈육에 대한 정과 수족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한쪽에, 군주로서 지켜야 할 도덕심을 다른 한쪽에 놓은 저울은 좀처럼 기울어지지 못하고 흔들거렸다.
“결정을 좀 더 쉽게 해드리지요. 사이러스.”
다리아의 뒤에 서 있던 사이러스가 다가왔다. 체격이 큰 그는 두 걸음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짙은 위압감을 자아냈다. 그러나 여왕은 알고 있었다. 진실로 위험한 것은 저 전투 기계 같은 사이러스가 아니다. 여왕보다 조금 작은 키에 호리호리한 몸을 가진 다리아야말로 맹독이었다.
그러나 이미 손을 대어 버렸다. 그 이후로는 벗어날 수 없는 수렁이었다.
“보십시오.”
사이러스가 기계를 내밀었다. 다이얼이 세 개 달린 화면에 화질이 나쁜 영상이 떴다. 마치 사진을 누렇게 찍은 것처럼 아무 움직임 없는, 널찍한 복도였다.
여느 호화로운 저택에나 있을 법한 붉은 톤의 카펫과 띄엄띄엄 걸린 그림들. 하지만 색이 거의 날아가 버린 상태에서도 여왕은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잘 아시는 곳일 겁니다. 유년 시절을 보내신 곳 아닙니까?”
파인먼트 하우스의 2층 복도. 여왕이 아는 한 늘 흠 없이 우아한 장소였다. 그러나 낡은 종이 같은 영상이 지지직, 소리를 내며 흔들렸을 때 기이한 불길함이 느껴졌다.
“이제 나오는군요.”
다리아의 입술이 비뚜름하게 치켜 올라갔다. 그와 동시에 복도 끝에서부터 사람들이 달려왔다. 두 명은 여자, 한 명은 남자. 어쩌면 아는 얼굴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그들은 뒤따라온 괴물에게 뼈째 삼켜졌다.
영상에는 소리가 없었다. 그러나 마치 들은 것만 같았다. 나약한 인간의 발소리, 그 소리를 묻어 버리는 괴물의 발자국과 비명, 울음, 그리고 우드득, 이 사이로 뼈가 부러지는 소리까지도.
“우욱!”
여왕이 입을 틀어막고 헛구역질을 했다. 사이러스가 영상을 끊었다. 다리아가 뱀처럼 속삭였다.
“폐하. 가엾은 세 사람이 폐하와 공작 전하의 잘못된 선택에 휘말려 죽는 모습을 똑똑히 보셔야지요. 고작 비위가 좀 상한다는 이유로 보지도 않고 외면하셔야 되겠습니까? 모두 폐하의 책임인데.”
“그만들 하시오! 폐하, 진정하십시오. 보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대공이 다리아의 말을 끊으며 여왕을 감싸 안았다. 여왕은 그의 품 안에서 연신 헛구역질을 했다. 눈에 고인 눈물을 대공이 재빨리 엄지로 닦아 냈다. 저들이 보지 못하게. 그러나 그것뿐이다.
대공은 해리엇 2세의 남편이었으나 위협에서 여왕을 지켜 줄 수는 없었다. 여왕의 몸을 푹 가리는 그의 넓은 등은 아무런 힘도 없다. 다리아가 분노에 못 이겨 여왕을 찌르려 하기라도 한다면 그 쓸모없는 등에 잠시나마 효용이 생길 것이나, 지금은 그저 여왕의 공포를 잠시 가려 주는 가림막에 불과했다.
여왕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숨을 곳이 없다는 것을. 숨을 크게 들이쉰 여왕이 물었다.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의 목숨까지 빼앗아야 했소?”
“폐하께서 처음부터 말을 잘 들으셨다면 그들도 살아 있었겠지요.”
대답 없이 그들을 노려보는 눈조차 기껍다는 듯이, 다리아는 어깨를 크게 으쓱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지는 것은 여왕뿐이었다. 다리아와 사이러스는 공작이 죽어 버려도 상관없었다. 여왕을 움직일 수 있는 말은 아직 세 개나 더 남아 있었으니까. 그리고 고맙게도, 그들은 성가신 갈리스턴에 비해 나약하고 멍청하다.
“정말이지 고집불통이시군요. 국왕으로서의 자존심이 사촌의 목숨보다 중요하시다면, 그를 버리십시오. 충성스러운 갈리스턴이야 기꺼이 목숨을 내놓겠지요.”
여왕의 핏발 선 눈을 가소롭다는 듯 바라보던 다리아는 이번에는 짐짓 선하게 웃어 보였다. 섬찟했다.
“그럼 다음번엔 어떻게 될까요? 아, 사랑스러운 멜리사 공주의 방에 덫을 놓아야겠군요. 그다음엔? 루이 왕자? 아니면 대공 전하?”
대공의 팔을 붙잡고 선 여왕은 멜리사 공주의 이름이 나올 때부터 덜덜 떨고 있었다. 분노가 아니었다. 순전한 공포였다. 시청 부지를 순순히 내놓지 않는다는 이유로 갈리스턴 공작의 저택을 무덤으로 만들어 버린 저 여자는 여왕의 자녀들에게도 똑같이 할 수 있었다.
저 여자의 눈에 우리는 사람이 아니다. 등골이 서늘하도록 그 사실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선택은 빠를수록 좋을 거랍니다, 폐하.”
“제발, 살려 주게. 아이들은 안 돼!”
여왕이 완전히 굴복했다. 하지만 다리아는 퇴로를 열어 주지 않는 맹수였다. 아무것도 막아 줄 수 없는 대공의 등을 옆으로 밀치고, 나약한 여왕에게 다가갔다.
“좋습니다, 폐하. 이렇게 하죠. 여기 서명하시면 갈리스턴까지 구해드리겠습니다.”
“뭐라고?”
“지체하신다면 제가 구하러 가기도 전에 죽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길지 않은 계약서였다. 모두 여왕이 아는 이야기였으나, 여왕은 중간에 영혼을 판다는 조항이라도 있을까 두려운 듯 손을 떨면서도 계약서를 꼼꼼히 살폈다. 처음부터 불공정한, 노예 계약 수준의 계약서인데도 조항 하나하나 빠지지 않고 읽어 내렸다. 그러나 ‘제15조. 갑은 이 요구하는 법안 및 정책의 실현을 위해 전적인 협조를 제공한다.’에 이르렀을 때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휙 치켜들고 다리아를 노려보았다.
“짐은 의회와 내각의 일에 간섭하지 않소!”
다리아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간섭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왕실이 은밀하게 끼치는 영향력이 없지 않다는 사실도. 그러한 영향력은 어디까지나 물밑에서만 존재해야 되는 것이므로, 외부에 공개된다면 크나큰 비난을 면할 수 없다. 그때의 곤혹은 다리아가 나눠 질 것이 아니었다.
여왕의 분노는 합당했으나, 상대는 그저 따분하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발을 굴렀다. 거기엔 어떤 이해도 없었다.
“여유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폐하? 조항이 실현 가능한지 고민하시는 사이에 불쌍한 갈리스턴은 폐하를 원망하며 죽어 가고 있겠군요. 어느 괴물이 갈리스턴의 뼈와 살을 씹어 먹고 있을까.”
다리아가 섬뜩한 얼굴로 속삭였다. 여왕은 손을 덜덜 떨면서도 계약서를 끝까지 검토했다.
그래, 사촌은 아무리 중해도 군주로서의 책임감보다는 못하단 말이지. 아무리 동생이니 수족이니 하면서 당장 안고 죽을 것 같이 굴어도 신하일 뿐이란 말이지.
왕족들이란. 죄책감을 느낄 틈도 없는 이기심. 다리아의 입꼬리가 빙그레 올라갔다. 이기적인 자들을 다루는 방법은 따로 있었다.
“템프턴 수상이군요.”
창밖을 내려다본 사이러스가 말했다. 여왕의 손이 펜을 더 깊게 말아 쥐었다. 다리아가 빙그레 웃었다. 굳이 오늘이어야 했던 이유가 있었다. 오늘은 수상 레이먼드 템프턴이 여왕을 알현하는 날이었다.
레이먼드 템프턴.
여왕의 정적이자, 열등감의 근원. 그는 세 살 아래인 여왕보다 오래 집권한 수상으로, 그 존재 자체로 군주의 상징성에 대한 위협이었다. 전통적 가치의 수호자인 왕실과 사사건건 대립하는 개혁적 인물이었으며, 동시에 외무장관 시절 왕실에 파오룬 합병이라는 최고의 영광을 선사한 인물이기도 했다.
오래전, 그의 청혼을 거절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여왕은 그 누구보다도 그를 의식하고 있었다.
해리엇 2세는 결코, 레이먼드 템프턴에게 지금의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을 것이다. 개인으로서도, 군주로서도. 다리아는 그 열등감을 살살 파헤쳤다.
“오늘 수상을 접견하는 날이라고 하셨던가요? 오늘은 저도 그 대단한 레이먼드 템프턴과 만나게 되겠군요.”
“……그런 일은 없을 거요.”
여왕이 이를 갈았다. 레이먼드 템프턴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궁전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수상은 언제든지 여왕을 알현할 수 있었으므로, 여왕의 시녀들은 그를 이 알현실까지 데려올 것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10분이나 남았을까?
“그야 모르죠. 폐하께서 서명하시는 속도로 보건대, 템프턴 수상은 좀 더 기다려야 할 테고, 대기실에 앉아 시간을 때우는 수상과 제가 더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를테면 공화당 당수 실종 사건의 진위에 대하여…….”
“다리아!”
“폐하. 일평생 떠받들어져 오신 분이라 그런가, 가끔 착각을 하시는 모양이군요. 이게 무슨 동등한 거래라도 되는 것처럼.”
여왕의 손에서 계약서를 빼앗아 간 다리아는 신경질적으로 페이지를 넘겨 마지막 페이지의 서명란을 펼친 뒤 다시 여왕의 손에 던져 주었다.
“잔말 말고 서명이나 해.”
다리아의 목소리가 사나워졌다. 여왕은 몸을 푸르르 떨었다. 당장이라도 목을 쥐고 꺾어 버릴 것 같았다. 다리아가 탁자 위에 발을 쾅 올렸다. 흙 묻은 낡은 군화가 탁자를 짓눌렀다. 여왕의 손과 한 뼘도 채 떨어지지 않은 거리였다. 맹수처럼 이를 드러내고 웃은 다리아가 말했다.
“폐하께서 안 하시면, 아드님이 하시게 되겠죠. 그편이 좋으시다면야.”
여왕의 얼굴은 분노와 공포로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러나 먹잇감을 보는 듯한 다리아의 시선 아래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덜덜 떠는 손이 천천히, 종이를 꽉꽉 눌러 가며 서명했다. 잉크가 종이를 축축하게 적셨다.
캐슬다인 공국의 지대 중 절반을 증여하고, 국가 소유의 땅을 여왕의 사비로 구입해 양도하고, 앞으로도 다리아가 요구하는 법안의 통과, 인력의 소개, 다리아의 연구와 사업에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내용의 계약서는 그대로 다리아와 사이러스의 손에 들어갔다.
또 하나의 족쇄가 목을 꽉 조였다.
“약속대로 갈리스턴은 살려드리겠습니다. 그가 아직 살아 있다면 말이지요. 귀여운 멜리사 공주님도 당분간은 평안하시겠군요. 축하드립니다. 그럼 템프턴 수상과 즐거운 접견 되시길.”
만족스레 웃은 다리아는 허리를 짐짓 과장스럽게 굽혀 인사하고, 그대로 창문을 열어 몸을 던졌다. 사이러스가 혀를 차며 다리아를 뒤따랐다.
대공과 여왕, 둘만 남은 응접실에서 여왕이 멍하니 자기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에드먼드를 구하시지 않았습니까? 잘하셨습니다. 잘못한 서명은 되돌릴 수 있지만 죽은 사람은 되찾아 올 수 없습니다.”
“……되돌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소.”
대공이 여왕의 등을 잠자코 끌어안았다.
“폐하, 템프턴 수상의 접견 시간입니다.”
시종의 목소리에 두 사람은 몸을 일으켰다. 여왕이 엉망이 된 얼굴을 수습하는 동안 대공은 알현실에서 나왔다.
템프턴 수상과 마주친 대공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인사하는 수상을 무시하고 지나쳤다. 수상은 의아한 낯을 했다가 뒤에 서 있던 비서관에게서 보고서를 넘겨받으며 나직하게 지시했다.
“해머튼 비서관, 캐슬다인 공국의 지대 사용 흐름을 추적하도록 하십시오.”
“예, 각하.”
“그리고…….”
문이 열렸다. 검은 머리칼을 내리뜨린 여왕은 언제나와 같이 딱딱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손의 떨림은 막지 못해 반대 손으로 피가 안 통하도록 붙잡은 채였다.
불쌍한 해리엇.
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걸까…….
확실한 것은, 해리엇 2세의 이상 행동과 왕실을 들락거린다는 정체 모를 손님들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에 확인해야 할 곳은?
갈리스턴.
수상이 손을 가볍게 움직였다. 상관이 여왕의 맞은편에 앉는 것을 확인한 비서관은 재빨리 궁전을 빠져나가 파인먼트 하우스가 있는 피셔 거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