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93
93화
[던전 보스, ‘만티코어’가 나타났습니다!] [보스의 위치가 맵에 표시됩니다.] [하위 몬스터들이 보스의 영향을 받습니다. 지능 +70%, 공격력 +30%, 방어력 +10%, 체력 +10%, 민첩 +40%, 등급 +1] [보스가 하위 몬스터들의 영향을 받습니다. 치명타 피해 +20%] [보스는 물리 공격에 타격을 받지 않습니다.] [보스의 체력이 5% 이하로 하락 시 자체 치유 스킬이 발동됩니다.]땅이 뒤흔들리더니 기괴한 미소를 지은 인간의 얼굴에 사자의 몸을 가진 보스가 나타났다. 마벨우드에서와 달리 에스페란사는 조금도 흥분돼 보이지 않았다. 그런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귀찮게 됐네…….”
열심히 달려가서 두들겨 패면 잡을 수 있는 보스가 있고, 때리면 체력은 줄어들지만 완전히 퇴치하기 위해서는 다른 조건까지 충족시켜야 하는 보스가 있다. 만티코어는 후자였고, 심지어 에스페란사가 상대해 본 몬스터들 중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강력한 몬스터였다.
체력도 강한 데다 자체 회복 버프까지 달려 있는데 제대로 공략하려면 핵을 깨뜨릴 때까지 버텨야 한다. 가뜩이나 강한 놈이 심지어 공략 방법까지 지랄맞으니 유저들 사이에서 밸런스 패치 좀 하란 소리가 얼마나 나왔는지 모른다. 그리고 게임사는 단순하게 만티코어의 등장 확률을 줄여 버렸지. 그 덕에 만티코어를 보는 것도 장장 3년 만이었다.
깍깍깍깍, 목을 꽉 조인 듯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예배실 안을 가득 메운다. 그와 동시에 보스의 발밑에서부터 녹색 진물을 뚝뚝 흘리는 몬스터들이 일어났다. 거대한 보스의 몸을 반절 가까이 가리는 괴물이 열 마리 남짓. 그리고 지금은 그 열 마리를 상대할 만한 인력이 없다.
한 번에 해치워야 한다.
에스페란사는 인벤토리에서 낫을 꺼내 쥐었다. 날을 따라 마력이 일렁거리는 낫을 횡으로 휘둘렀다.
크아아악! 거친 비명과 함께 열 마리 중 아홉 마리의 몸뚱어리가 반으로 잘려 나갔다. 마지막 한 마리의 머리를 총격으로 날려 버린 에스페란사는 잠시 숨을 골랐다. 마력이 쭉 빠져나가자 한순간 휘청거릴 정도로 어지러웠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쉴 틈도 없이 보스를 상대해야 하는 것이 부담이 되기는 했지만, 못 버틸 정도는 아니다. 그보다…….
“이거. 받아요.”
인벤토리에서 방어구를 쏟아서 시더의 손에 올려 준 에스페란사는 총을 어깨에 기댄 채 달려 나가며 말했다.
“그거 다 당신이 해요! 그리고 예배실을 뒤져서 성서나 아니면 성물 같은 거, 보이는 대로 찾아서 쏴 버려요!”
만티코어는 가장 귀한 것, 가장 소중한 것, 가장 성스러운 것을 핵으로 삼았다. 부수는 것조차 괴로워지도록.
그러니 박물관 같은 곳에 만티코어가 나타나면 공략은 망했다고 보면 된다. 하루 종일 문화재 하나하나 건드려 가며 확인해야 하니까. 잘못해서 멀쩡한 문화재를 부수기도 십상이다. 물어줘야 할 필요는 없지만 기껏 던전을 처리해 주고도 미안해진다.
하지만 다행히 여긴 예배실이고, 공간은 크지 않았다. 그만큼 만티코어가 일반인을 공격할 가능성이 훨씬 높아졌단 얘기도 되지만, 만티코어의 핵이 된 물건을 찾는 것은 수월해진 셈이다.
아무튼 성스러운 거면 뭐든지. 다만 혼자 부술 수 있는 크기의 물건으로, 부술 수 있기 때문에 더 괴롭도록. 악취미가 아닐 수 없다.
지시를 들은 시더는 지체 없이 움직였다. 만티코어가 날카로운 울음을 뱉으며 발톱과 꼬리를 휘둘렀다. 걸을 때마다 늪에 빠지는 것처럼 팔다리가 무거워졌지만, 방어구 탓인지 견딜 만했다.
지축이 기울어지며 예배실 뒤쪽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왼쪽으로 쏟아졌다. 시더는 에스페란사가 하던 것처럼 쏟아지는 몬스터 시체를 밟고 만티코어가 버티고 서 있는 앞쪽으로 다가갔다.
아까 서 있던 독서대 아래에 성서가 있는 것을 보았다. 이 방에 혼자 부수거나 처리할 수 있는 성물이라고는 그것뿐이었다.
만티코어가 입을 벌리자 새까만 독이 흘러나왔다. 살을 녹여 버릴 것 같은 맹독이 에스페란사의 등 뒤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향해 넓게 퍼져 나갔다.
광역기 너무 싫다!
“아, 좀!”
아까보다 더 짧게 잡은 낫을 휘둘러 가시 범위 안의 독 기운을 전부 쳐낸 에스페란사는 아직 움직일 수 있는 전투원들에게 뒤를 맡기고 총을 붙잡았다.
시체를 밟고, 사악한 것이 흘러나오는 입에 총구를 처박고 쏘았다. 만티코어가 총구를 씹어 버릴 시간도 없었다. 춤추듯 유려한 움직임.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하나하나 파괴를 위해 쌓아 올린 탑이었다.
“전하, 그쪽을 잡아 주십시오.”
부상자를 최대한 안전한 곳에 숨기고 그 앞을 지키던 공작이 고개를 들었다.
“아, 그래.”
이 작은 예배실 안에서, 마치 전쟁과는 다른 세상에 있는 듯 그곳만 동떨어져 있었다. 예배실 전체를 장악하던 만티코어는 어느덧 에스페란사 하나만을 상대하기에도 벅차 뒤로 밀려났다.
다리아와 사이러스도 이런 힘을 가지고 있었다. 기차를 달리게 하고 비행선을 날게 하는 오스던의 마력과 같으면서도 전혀 종류가 다른 듯한 힘이었다. 그도 모자라 그것을 마치 몸속에서 뽑아 낸 것처럼 자유롭게 다루며 단신으로 군함에 필적하는 무력을 냈다.
‘군함인들 저것보다 강할까?’
권력으로 통제할 수 없는 힘. 탐욕을 품으면 걷잡을 수 없어질 파괴력. 왕실은 그것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통치하지 않는 왕이라도, 그들의 조상이 아주 오래전 신민들과 맺은 계약의 흔적에 의해 군림하고 있었으므로. 그러한 공적인 명분에 사감이 섞이자 경계는 금세 경멸로 변했다. 그 점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조심해요!”
어찌 틈을 잡았는지, 만티코어가 긴 발톱을 휘둘렀다. 휙,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부상자들을 한 손에 꿰뚫어 버릴 듯했다. 공작을 비롯한 사람들은 그것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마력탄을 쏘았다. 그러나 마력탄은 두꺼운 거죽에 튕겨 나갈 뿐이었다. 풍압에 몸이 뒤로 밀렸다. 깔깔거리는 소리가 귀에 맴돌아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시야가 흐려지며 에스페란사의 모습이 이지러졌다.
젠장, 공간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마치 계단을 가르고 길과 길을 나눴던 때처럼.
공작이 이를 악물고 마지막 남은 탄알을 장전한 순간이었다. 휙 날아온 커다란 검이 만티코어의 발을 뚝 잘랐다. 새파란 열기를 머금은 검이 그대로 바닥에 깊숙이 박혔다. 물과 기름처럼 나뉘던 공간도 곧 제자리를 찾았다. 공작은 무거운 몸을 곧게 세우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정작 검을 던진 당사자는 이번엔 시더에게로 향하려는 만티코어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소리가 요란한 총탄을 쏘아대느라 그쪽을 돌아볼 여력도 없었다.
상태 창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체력이 뚝 떨어졌다. 지금 걸린 디버프만 몇 개인지 모른다. 귀를 어지럽히는 날카로운 울음소리 때문에 정신계 디버프까지 걸려서 집중력이 계속 떨어졌다. 언제 찔렸는지 모를 허벅지의 통증도 집중력을 방해했다.
‘그래도 얼마 안 남았어.’
만티코어가 부상자들을 공격하는 사이 시더는 독서대가 있는 강단까지 도착했다. 에스페란사는 더 요란하고 휘황찬란한 마력으로 괴물의 관심을 끌었다. 시더의 케인 건이 성서에 닿았다.
에스페란사의 피에 담긴 마력을 연료 삼아 총 내부의 부품들이 거칠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마정석 세 개가 통째로 비었다.
쾅!
성서에서 시커먼 기운이 흘러나왔다. 만티코어가 고통에 몸을 뒤틀었다.
지금이다! 에스페란사의 총구에서 터진 마력이 예배실 안을 새파랗게 채웠다. 눈이 멀 것 같은 빛과 거대한 폭발음. 거의 일시에 핵과 육체가 동시에 파괴된 만티코어는 고장 난 악기 같은 비명을 지르며 사그라졌다.
[던전 보스, ‘만티코어’를 처치하였습니다! 보상이 적립됩니다.]아. 끝났다. 예배실의 깨진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하얀 햇빛이 들어왔다. 그리고 거대한 괴물의 사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날카로운 유리 위에 서 있는 검은 단발의 여자. 손에 든 대검에 흰 마력이 넘실거렸다. 에스페란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총을 쏘기 직전, 시야 한쪽 구석에 보였다. 저 여자는 던전 공략이 끝나기 직전에 들어왔다.
헌터?
아니, 그때 그 여자다. 여왕의 협박범. 그리고…… 이 던전을 만든 장본인. 고작 공작 하나를 죽이겠다고, 수십 명을 파인먼트 하우스에 묻어 버리려고 한 바로 그 사람.
“넌 누구지?”
여자가 물었다. 에스페란사는 멀찍이 보이는 여자의 얼굴에서 경계심과 더불어 낭패감을 읽어 냈다. 왜 여기까지 왔을까. 공작이 죽었는지 확인하려고? 아니면 뒤늦게라도 살려 주려고? 어느 쪽이든 여자가 의도한 바는 실패했다. 에스페란사는 어깨를 작게 으쓱이며 대답했다.
“날 몰라? 난 널 아는데. 내가 이겼네.”
두 여자의 눈에서 동시에 불꽃이 튀었다. 에스페란사는 여자가 있던 자리를 향해 총을 쏘았다. 그와 거의 동시에, 만티코어의 시체를 밟고 높게 뛰어올라, 창을 마저 깨고 뛰쳐나갔다.
“에스페란사!”
만티코어의 핵을 깨느라 기력을 반쯤 소진했던 시더는 3층에서 뛰어내리는 에스페란사의 뒷모습을 보고 기겁해서 예배실 밖으로 나갔다.
예배실 밖은 마치 던전 같은 것은 없었던 것처럼 평화로웠고, 사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 예배실에 도착하지 못한 사람들은 전부 죽은 것이다. 그러나 그 섬뜩한 진실을 곱씹기에는 에스페란사가 너무 빨랐다.
“대체 어디로, 전하, 여기서 정문으로 가는 제일 빠른 길이 어딥니까?”
“……왼쪽 복도 끝의 계단으로.”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시더도 모습을 감추었다. 던전 공략의 두 공신들이 사라지자, 남은 것은 폐허가 된 예배실과 전보다 상황이 더 악화된 부상자들, 그리고 부상은 없었지만 당장 쓰러지고 싶어하는 고용인들뿐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명령권자인 그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
“헨리, 의사를 불러오게. 최대한 많이. 그리고 일손도. 불러온 다음엔 자네도 쉬게.”
헨리 베이먼이 주춤주춤 움직였고, 공작과 커크필드 부인과 비교적 멀쩡한 사람들은 부상자들을 안전한 침실로 옮겼다. 침상의 수가 부족해 공작의 침실까지 동원되었다.
파인먼트 하우스 내부에서 사람들이 그 나름의 이유로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에스페란사는 궁전을 거의 빠져나왔다. 우아한 정원을 가로지르며 두 사람은 팔다리가 얽힐 정도로 가까워졌다가, 검이 닿지도 않을 만큼 멀어졌다. 여자의 검이 총신에 부딪혀 철판 긁는 소리를 냈다.
그렇게 여자와 합을 주고받은 건 고작 세 번. 그 세 번이면 알 수 있었다. 이 여자는 어마어마하게 강하다. 13년 전의 세상에서는 가장 강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만큼은 아니야.’
쉽지는 않겠지만 이길 수 있겠다는 계산이 섰다. 그리고 여자와 눈을 마주쳤을 때, 여자는 정반대의 결론을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파인먼트 하우스 앞에는 대로가 있었다. 주춤한 에스페란사와 달리 여자는 거침이 없었다. 대로를 쌩쌩 달리는 증기 마차가 길을 가로막자 밀고, 넘어뜨리고, 급기야는 뚫어 버렸다. 그렇게 길을 건넌 후 커다란 건물 위로 순식간에 뛰어올랐다. 여자가 도움닫기용으로 쓴 2층 발코니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부서졌다.
에스페란사는 이를 악물었다. 쫓아갈 수가 없었다. 대로에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마벨우드와는 달리 나인 호더엔 장애물투성이였다. 저 여자처럼 앞을 가로막는 걸 다 쳐내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눈앞이 하얘졌다. 사냥감이 도망치는데 보고만 있는 건 사냥꾼의 도리가 아니다. 이미 파인먼트 하우스도 다 밀어 버린 꼴인데 까짓것 길 좀 뒤집어지는 것 정도야 괜찮지 않을까? 산타 줄리아나도 일직선으로 뚫어 버렸는데, 딱 한 방이면 충분할 텐데. 불쑥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그만!”
그때, 뒤에서 들려온 날카롭고 단호한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방금, 저걸 뚫으려고 한 건가? 미쳤나 보다.
8차선 도로에 증기 마차가 달리고 있었고, 양산을 쓴 숙녀와 우산을 짚은 신사가 부서진 증기 마차의 잔해를 보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4층짜리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그중 2층 발코니가 떨어진 건물은 병원이었다.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놓쳤어요.”
멍하니 손바닥을 내려다본 에스페란사가 말했다.
“괜찮아요.”
그렇게 말해 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다. 굳었던 입가에 미소가 서렸다.
“하지만 누군진 알겠어요.”
알겠다고만 했을 뿐 누구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시더도 알 것 같았다.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이제 그들이 에스페란사의 존재를 인지하게 되었다는 것. 별로 좋은 결과는 아니었다.
“이만 집으로 돌아가자고 하려 했지만…… 공작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듣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