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94
94화
전문 인력들이 파견된 파인먼트 하우스는 세 시간 만에 그럭저럭 공작의 거처다운 꼴로 돌아왔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는지를 생각하면 경이로울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공작은 거듭 쉬기를 권유했지만 오늘 하루의 일을 끝까지 마치기로 한 커크필드 부인이 차를 내왔다.
이 난리를 겪고도 차가 달콤했다. 에스페란사는 자기도 모르게 에이번데일 저택에서처럼 방만한 자세를 취하려다가, 시더가 눈치를 줘서 겨우 바른 자세를 유지했다.
그래, 지금은 그럴 분위기가 아니지.
“릴리 런더포드 양은 괜찮은가요?”
이 전투에서 사망자를 제외하고 가장 큰 부상을 입은 것은 부상자들 앞을 지키던 그 하녀였다. 공작은 전투가 끝났을 때쯤에는 하녀가 거의 실신해 있었고, 선진 마도 의학 기술을 퍼부어 치료한다고 해도 평생 다리를 제대로 쓸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차라리 절단하고 의족을 쓰는 게 나을 수도 있다고.
이야기를 전부 들은 에스페란사는 고민에 빠졌다.
“그래도 같이 싸웠으니까 나름대로 동료라고 할 수 있겠죠?”
“글쎄요…….”
시더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언제부터 에스페란사가 같이 싸운 사람을 동료로 여겼다고. 장애물이면 모를까. 그 하녀는 제법 도움이 된 모양이지만, 그건 그것대로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나름대로는?”
“그래요, 나름대로는.”
하지만 원하는 답이 뻔하니까. 내키지 않는 티를 내면서도 동조해 주니, 에스페란사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고는 인벤토리에서 병 하나를 꺼냈다. 향수병처럼 생긴 병 안에 해로워 보이는 녹색 물질이 찰랑거렸다.
“이거, 포션이에요. 아예 절단이 됐으면 못 쓰겠지만 멀쩡히 붙어만 있으면 아마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로는 회복될 거예요. 사실 마력 없는 사람한테 써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
지금까지 안 보여 줬다고 뭐라 할까 봐 시더의 눈치를 흘끔 보았지만, 뜻밖에도 그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오히려 보란 듯 오만한 미소를 짓기까지 했다.
“화학엔 관심 없어요.”
“아, 네.”
생물학에도 관심 없어 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쪽에도 관심이 있었다면 그의 연구실도 사람과 몬스터의 키메라가 즐비하던 실비아 험프리의 약혼자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꼴이었을지도 모른다.
“……고맙소.”
공작은 떨리는 손으로 포션을 받아 들었다. 그는 확실히 자기 사람들을 끔찍이 챙긴다. 런더포드라는 하녀에게 사적인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전하는 한 3백 년쯤 전에 태어나셨으면 딱 좋았을 것 같네요.”
생각건대, 그는 훌륭한 전근대 군주가 되었을 것 같았다. 공작은 그 말뜻을 짐작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여자가 그 협박범이죠?”
“이름은 다리아라고 하지.”
“성은?”
“모르오.”
그게 문제였다. 성도 없이 가짜 같은 이름 하나. 숙녀는커녕 하녀도 하지 않을 단발과 사람을 하찮게 보는 시선. 그게 공작이 아는 전부였다.
“다리아와 사이러스.”
사이러스. 머리가 지끈거렸다. 사이러스의 정체에 대해서는 알아내기를 포기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냥 두들겨 패서 황금 발톱만 빼앗으면 되지.
“그대가 말한 ‘던전’을 만드는 힘을 가진 자들이오. 금빛을 내는 휜 칼 같은 것을 쓰는 것을 보았소. 아마 진짜 칼은 아니겠지만.”
휘어진 칼이라. 하지만 짐승의 엄니나 발톱도 그런 모양을 하고 있을 것이다.
‘황금 발톱.’
예상했던 바였지만 새삼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에스페란사는 버릇처럼 시더의 셔츠 소매를 쥐다가 눈치를 보고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시더는 별걸 다 신경 쓴다는 얼굴로 에스페란사의 손을 쥐어 다시 그의 손목 위에 얹었다.
공작이 미간을 일그러뜨렸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이 많은 얼굴이었다. 에스페란사가 입을 삐죽거렸다.
“그래서, 그들은 어디서 찾을 수 있죠?”
“모르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요? 대체 어떻게 만난 건데요?”
“그들이 우리를 찾아왔소. 재작년 겨울부터 지금까지 쭉.”
첫 만남은 눈이 발목까지 쌓인 혹독한 겨울날이었다.
그때 왕실은 상황이 좋지 않았다. 지금이야 재작년 말의 보궐 선거로 한숨 돌렸지만 당시 템프턴 내각은 공화당과 연립 정부를 이루고 있었고, 그 이름에 걸맞게 공화당의 주류는 왕실 폐지론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내각의 3할이 왕실 폐지를 주장하고 있었고, 3년 전 궁전 보수에 들어간 비용이 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 왕실의 지지도는 연일 하락세였다.
“사실 오스던은 더 이상 왕실이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소. 오스던이 제국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당시 장관이던 템프턴의 공이고, 그가 수상의 자리에 오른 것은 폐하의 왕위 계승보다도 4년이 일렀소. 그 전까지의 왕실은…….”
속된 말로 개판이었다.
“허약한 길버트, 방탕한 갈리스턴, 철없는 셔버리.”
갈리스턴 공작이 자조하듯 말했다. ‘방탕한 갈리스턴’은 그의 아버지였다. 어린 에드먼드 새턴이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스스로를 검열했는지는 몇몇 측근들만 알 것이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갈리스턴의 핏줄이었지만.
여하간, 길버트 3세에게는 죽어 준 것이 차라리 고마운 동생들이었다. 왕은 동생들이 벌여 놓은 사고를 수습하다 죽어 버렸고, 왕의 장례식 내내 언론은 죽은 공작들의 추잡스러운 스캔들을 앞다투어 보도했다. 공화당 고위 간부들은 여왕의 즉위식을 전면 보이콧했다. 그게 7년 전의 일.
그리고 다리아가 나타났던 시점. 즉위 후 5년 동안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상황에 여왕의 인내심은 폭탄 심지처럼 닳아 없어지고 있었다.
“공화당은 왕실 폐지를 위한 단체 행동을 기획하고 있었소. 그 정보를 입수하기는 했지만 템프턴이 은근히 뒤를 봐준다는 소문이 자자한 상황에서 가뜩이나 모난 시선을 받던 왕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고…… 그때 나타난 것이 다리아였소.”
동화 속 소원을 들어주는 요정처럼, 기묘한 옷차림의 다리아가 여왕의 발코니에 나타났던 그 날. 안개가 자욱한 밤에 발코니 난간에 선 여자가 잠옷 차림의 여왕에게 손을 내밀었다.
‘무슨 고민이 있으시기에 늦은 밤까지 잠을 못 이루실까요? 누가 귀하신 폐하를 슬프게 만들었을까요?’
홀렸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다정히 눈물을 닦아 준 여자는 그림자 속에 녹아 사라졌다. 그리고 여왕의 손에는 계약서 한 부가 남았다.
“계약서요?”
대단히 철저한 요정이네.
공작은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티아라를 내어 주는 조건이었소. 폐하께서 왕위에 오르신 후에도 즐겨 사용하시던 물건이었지.”
그로부터 약 일주일 뒤, 공화당 당원들은 남부 더스크햄으로 가기 위해 기차를 탔다. 제법 요란하게 기자들을 불러 사진도 찍고, 그들의 꺾이지 않는 신념을 홍보도 하고. 그러나 여덟 시간 후 더스크햄에 도착한 기차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말로 아무도.
“유령 기차 사건이라고 했지. 다른 승객들부터 승무원, 심지어는 기장까지 전부 사라진 기차가 유유히 더스크햄 중앙역으로 들어와 멈추는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 있었소. 그리고 기차 안에는 도박판과 깨진 술병, 마약류까지. 공화당에서 먼저 덮을 수밖에 없는 꼴이었지.”
그러나 비밀은 없는 법. 유령 기차 내부의 사진이 암암리에 돌아다녔고, 소문은 점점 불어났다. 결국 보궐 선거가 이루어지고, 공화당은 의석의 절반 이상을 잃었다.
“우리는 악마의 손을 잡은 거요.”
원하던 것을 얻었지만, 원하던 방식은 아니었다. 악마와의 거래는 끝이 좋을 수가 없었다.
공작 전하치고는 감상적인 결론이다. 시더가 코웃음을 쳤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자기 미화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습다면 우습고 위험하다면 위험하게 느껴졌다. 그가 전처럼 말을 끊지 않은 것은 그 이야기를 듣는 에스페란사의 얼굴이 시큰둥했기 때문이다.
“그 일은 우리의 약점이 되었고, 다리아와 사이러스는 점차 많은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지.”
그 이야기를 전부 하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에스페란사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들의 목적이 뭔가요?”
“오스던에 수많은 던전을 만들고, 던전으로부터 사람들을 지켜 주는 대가로 오스던의 부를 착취하고자 하는 것. 나인 호더 위에 그들의 왕국을 짓는 것이오.”
시더가 생각했다. 사감을 반쯤 섞어서.
‘그쪽 이야기를 들어 보면 말이 좀 다를 것 같은데?’
그리고 에스페란사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니까 일종의 식민 지배로군요?”
그 순간 공작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경악, 굴욕감, 그리고 불쾌감. 우리가 ‘그런’ 일을 당하는 건 있을 수 없다는 저변의 당연한 명제가 산산조각 난 모습.
하지만 세상에 ‘그런’ 짓을 당해도 되는 사람들이 따로 있는가? 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같은 짓을 했던 자들이 아닐까? 그것이야말로 인과응보, 권선징악, 마땅히 돌려받아야 할 업보일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이 모든 게 가소로웠다. 어차피 공작에게선 정보를 얻을 만큼 얻었고, 다리아와 직접 만나 서로를 인식했다. 더는 볼일이 없었다.
“이런 일엔 관여하지 않겠어요. 이해했을 거라 믿어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스페란사가 시더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가요, 그냥.”
매정할 정도로 가차 없이 문이 닫혔다. 닫히기 직전, 문틈으로 공작의 한숨이 들린 듯도 했다.
“기분이 나쁜가 보죠?”
“글쎄요. 공작에게 대단한 걸 기대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그 사람의 선의를…… 믿고 있었다고 해야 되나?”
“짐작했다, 정도로 하죠.”
시더가 이유 모를 불쾌감을 드러냈다. 에스페란사는 고개를 떨어뜨리며 웃었다. 하긴, 공작과의 사이에서 믿음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좋아요, 공작의 선의를 짐작하고 있었는데, ‘그래 봤자’였다는 걸 깨달은 거예요.”
“믿을 만한 상대는 아니죠.”
다리아와 사이러스를 처치하고 나면 그다음에는 에이번데일 저택에 몸을 의탁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약점이 노출된 에스페란사의 차례가 될지도 모른다. 왕실의 입장에서는 다리아나 에스페란사나 위험한 인물인 건 마찬가지일 테니까.
“거절한 건 잘했어요. 괜히 정치 문제에 엮여 들기 시작하면 골치 아파지니까. 왕실이 이번에는 당했지만, 보통은 상대방을 그런 방식으로 궁지로 모는 역할이에요.”
에스페란사는 웃느라 잠시 멈춰 섰다. 반걸음 정도 앞서가던 시더가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에스페란사와 마주 보고 웃으려던 그의 얼굴이 차츰 창백하게 굳었다. 눈동자가 마치 빙하가 굳은 것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왜 그래요?”
달래듯 붙잡은 시더의 팔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시선은 에스페란사의 뒤에 고정된 채로. 뭘 보고 있는 거지?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아…….”
“당신. 다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