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95
95화
말을 잃었다. 응접실에서부터 발밑까지 이어진 붉은 핏자국. 깊은 상처를 질질 끌고 걷는 사람에게서나 나올 법한 흔적.
이러니 시더가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사자인 에스페란사도 입이 벌어지는데.
“저기, 그 정도로 아픈 건 아닌데.”
“그걸 나보고 믿으란 건가요?”
하지만 사실이었다. 헌터의 몸은 고통에 둔감하다. 어쩔 수 없었다. 현실 수준의 고통을 전부 똑같이 느낀다면 누가 게임을 하겠는가? 그것도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지기 일쑤인 전투 게임을.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고통을 즐기는 것은 아니다.
설정상으로는 마력 활용이 어쩌고 했던 것 같은데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았다. 아무튼 통각 센서가 반쯤 꺼진 것 같은 몸이라 피가 철철 흘러도 쓰라릴 뿐 보이는 것만큼 아프지는 않다. 사실 아까부터는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
“언제 다친 건데 아직까지 피가 저렇게 흐르는 거죠?”
“아마도 전투 막바지에 다친 것 같은데.”
입술을 삐죽거리면서도 대답은 꼬박꼬박 했다. 시더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에스페란사를 노려보았다.
“진짜 안 아프다니까요. 마력이랑 관련된 무슨 작용이라는데, 자세히는 모르겠고.”
시더가 냉랭하게 되받아쳤다.
“어디까지나 당신의 주장이지, 내가 당신을 해부해서 알아볼 순 없는 일이잖아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이걸 당신도 알아야 하는데.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 시더가 다시 눈을 치떴다.
“구급상자 있어요?”
“아마도? 그냥 붕대 정도겠지만요.”
“아까 그 포션이라는 건?”
“있긴 한데 몇 개 없어서 이런 데 쓰긴 아까울 것 같아요.”
13년 전으로 떨어질 줄 알았으면 인벤토리를 꽉꽉 채워 놨겠지. 아니면 아예 게임 접속을 안 했거나.
“걱정은 고맙지만, 진짜로 별로 안 아파요. 집에 가서 대충 지혈하면 될 것 같아요.”
“웃기지 말아요. 내 마차에 피를 줄줄 흘리면서 타려고요?”
이 정도로 구박당하니 좀 서러웠다. 처음 만났을 때쯤에는 숨 쉬듯이 이런 소리를 들었던 것 같지만, 최근에는 친구가 된 탓인지 제법 다정했는데. 에스페란사는 불퉁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치만, 여기서 뭘 어쩔 수도 없잖아요.”
“잠깐 서 있어요. 아프면 앉아 있든지.”
시더는 복도를 잠시 오가더니, 멀지 않은 곳에서 빈방 하나를 찾아냈다. 그러고는 서 있던 에스페란사를 데리고 들어갔다.
쓰지 않는 곳 같았지만 꼬박꼬박 청소를 했는지 방 자체는 깨끗했다. 시더는 굳이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고, 문을 잠그고, 철사와 지팡이를 이용해 간단한 장치도 해 놓았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중 잠금이에요.”
“아, 네.”
묻지도 않았는데 어찌 알았는지 딱딱한 어투로 답을 던진 시더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앉을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다.
“저기 앉아요.”
“저건 협탁이잖아요.”
그것도 꽤 높은.
“달리 앉을 데가 없으니 어쩌겠어요. 진작 말했으면 푹신한 소파에 앉혀 줬을 텐데.”
“나 그만 좀 혼나면 안 될까요?”
시더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말괄량이 조카라도 된 듯한 기분이다.
“그래서, 에스페란사. 다친 데가 어디죠?”
에스페란사는 잠시 망설였다.
“당신이 하게요?”
“달리 누가 있어요? 다시 말하지만, 당신이 진작 말했다면…….”
“지금이라도 사람을 부르면 되잖아요.”
“아, 고작 붕대나 감을 거면서 공작의 하인들을 부르려고요? 왜 나를 못 믿는 건지 모르겠는데 붕대 감는 것쯤은 눈 감고도 할 수 있어요.”
“진짜 눈 감기만 해 봐요.”
“안 감아요. 눈 한번 깜박이지도 않을 테니 걱정 말아요.”
그래, 고작 붕대 감는 건데. 에스페란사가 입술을 짓씹었다. 계속 눈치를 주며 거부했던 이유가 있었다. 평소엔 말하지 않은 것도 금방 알아차리던 사람이 웬일인지 지나치게 완강했다. 어쩔 수 없지.
협탁에 엉덩이만 걸치듯 기댄 채로 몸을 깊게 숙인 에스페란사가 천천히 치맛자락을 들어 올렸다.
크게 뜨인 잿빛 눈동자가 흔들리다가 황급히 발목에 머물렀다.
“에스페란사? 지금 뭐 하는…….”
말끝이 흐려졌다. 방어력 증가 옵션이 붙은 치마 아래에는 두꺼운 페티코트도, 실크 스타킹도 없었다. 핏자국마저 가려 줄 정도로 짙은 치마가 발목을 타고 종아리를 스쳐, 무릎을 넘어, 허벅지까지 올라가는 동안 시더는 숨도 쉬지 못했다.
굳어 버린 남자를 흘끔 올려다본 에스페란사는 치마를 한편으로 모아 쥐었다. 숙녀라면 남편이 아닌 누구에게든, 심지어 가족에게도 보여서는 안 되는 맨다리가 허벅지 반절까지 드러났다.
그리고 곧게 뻗은 다리 위를 수놓은 선명한 핏자국. 홀린 듯 치맛자락의 움직임을 따라가던 눈매가 일그러졌다.
무릎에서 반 뼘 정도 위에 붉은 상흔이 있었다. 큰 상처는 아니지만 제법 깊었다. 그냥 찔린 상처였다면 지금쯤 피도 멎고 아물기 시작했을 텐데 마력으로 낸 상처라 그런지 아직도 피가 솟았다. 시더가 몸을 굽혔다.
“이런 상처를 가지고 안 아프단 소리를 했단 말이죠.”
“정말 괜찮은데.”
“붕대 어디 있어요?”
더 이상 아까와 같은 충격은 보이지 않았다. 카펫 위에 서슴없이 무릎을 꿇은 남자가 에스페란사의 신발을 벗기고 발을 그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단단하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조금 뜨거웠다. 발끝이 오므라들었다.
“가만히 있어요.”
냉랭하게 빈정거리던 어조가 조금 누그러들었다. 손끝이 이따금 허벅지의 맨살을 스칠 때면 에스페란사는 흠칫 놀라길 반복했으나 시더는 눈 하나 깜짝 않았다. 정말로 상처 처치에 불과한 것처럼. 실상 그것뿐이었지만.
질척한 약물이 맨살 위까지 넓게 퍼졌다. 차가워서 몸을 떨자 시더는 상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어쩌다 이렇게 다쳤어요? 마벨우드 때도 멀쩡했으면서.”
“그때는 고작 히드라였고! 이번엔 만티코어였던 데다가 던전 등급도 높았잖아요.”
“그럼 던전 등급이 높을 때는 매번 이랬어요?”
그건 아니었다.
“그, 첫날 입었던 바지가 방어력이 높아요. 치마는 성능이 좀 떨어지고.”
하지만 헌터가 없는 이 세계에서는 바지를 입고 다니기 어려웠다.
“그럼 그냥 바지 입어요.”
전엔 잡혀갈 거라고 하더니.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붕대를 당기는 손이 조금 더 강해졌다. 에스페란사는 그의 머리 위에서 키득거렸다.
“잡혀가면 어쩌려고요?”
“누가 당신을 잡아가겠어요?”
“경관들이?”
커다란 손이 다리를 감싸고 붕대를 단단히 고정했다.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무릎에 숨결이 스쳤다. 놀란 에스페란사가 몸을 굳혔다.
“작위라는 게 쓸데없는 짐이 된 지 백 년이 넘었다지만…….”
손을 떼어 낸 시더는 여전히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래도 경관이 숙녀분을 끌고 가려고 할 때 큰소리칠 수 있을 정도는 되죠.”
사실 반박할 말은 많았다. 그러다 같이 끌려간다든지, 당신 없을 때 끌려가면 어쩔 셈이냐든지. 웃으며 덧붙일 수 있는 말들.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장난기 섞인 말과 달리 온기 가득한 눈빛에 녹아 있는 선명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냥 알 수 있었다. 가득 찬 잔에 한 방울이 넘치듯이. 심장이 덜컹거렸다. 손끝에 걸린 옷자락이 구겨졌다.
‘왜? 언제부터?’
그러나 눈빛만으로도 하지 않은 말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시더의 얼굴에 낭패감이 스쳤다.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시선만 엇갈렸다. 던전, 사이러스, 왕실.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던 모든 진지한 문제들이 단숨에 녹아 사라졌다. 남은 것은 시더가 한순간 실수로 드러냈던 눈빛뿐. 그러나 입술을 지그시 짓누른 채 초침 소리를 세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윽고 시더가 입술 사이로 찬 숨을 뱉어 냈다.
“난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요.”
몸을 일으키며 덧붙였다.
“그러니 들을 대답도 없어요.”
그 눈빛은 그의 혼잣말이었을 뿐이다. 우연찮게 엿들었을 뿐이라면 모른 척,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그럴 수 있을까?
“일어날 수 있겠어요?”
에스페란사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붕대를 감기 전에도 멀쩡하게 걸어다녔다는 걸 잊었을 리가 없을 텐데. 시더 역시 겉으로만 멀쩡할 뿐이었다. 지팡이 짚는 소리가 간혹 엇박으로 났다. 두 사람은 허둥지둥 파인먼트 하우스에서 빠져나왔다.
“지금 돌아가십니까? 정찬을 준비하려 했는데요.”
현관 앞에서 마주친 커크필드 부인이 기겁할 소리를 했다.
“오늘은 정찬을 하기 좋은 날이 아닌 것 같네요. 아무쪼록 다친 사람들이 무사히 회복할 수 있길 바라요.”
전혀 이어지지 않는 두 문장을 오로지 궁전에서 빠져나간다는 목적만을 위해 속사포처럼 뱉어 냈다. 근처에서 노닥거리던 마차를 부르고,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둘 사이는 끔찍하게 어색했다.
눈동자가 아닌 척 슬쩍 시더를 살폈다. 그 역시 창문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지만, 시선이 닿았다 사라지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입가가 굳어 있었다. 없었던 일로 하자고 해서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
전투가 끝나면 으레 들었던 들뜬 기분도, 오늘 알게 된 왕실의 충격적인 비밀들도, 전부 하릴없이 거친 파도에 쓸려 내려갔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시더와의 관계가 어그러지면 퀘스트 수행이 어려워진다든지, 그의 저택에서 머물고 있다는 사실 같은 것은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런 것은 어떻게든 해결될 수 있다. 신경 쓰이는 것은 따로 있었다.
이대로 어색해지다가, 데면데면 끝나는 건가?
그런 관계를 몇 번 겪은 적이 있다. 회복할 수도 끊을 수도 없이 어설프게 붙잡고 있다가 결국 이도 저도 되지 않는 관계. 그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때는 그래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끝내고 싶지는 않아.’
솔직한 마음은 그랬다. 하지만 그런 어설픈 마음으로 대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않을까?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상처받았을까?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맴돌던 생각이 끝내 말을 마치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어느덧 마차가 저택에 도착했다. 똑바로 닿지 못하고 미끄러지던 눈이 여느 때 같은 웃음을 머금었다.
“모르는 척해요.”
마차에서 뛰어내리자 청량한 바람이 뺨을 간질였다. 에스페란사가 망설이다 물었다.
“……그래도 괜찮아요?”
그건 너무 비겁한 짓이 아닐까?
“끌어안고 키스라도 하겠다면 거절하진 않겠지만.”
얼굴이 뜨거워졌다. 미친 거 아냐!
“안 해요!”
“거봐요.”
그는 어깨를 으쓱이고 앞서서 저택으로 들어갔다. 정말 이래도 괜찮은 걸까? 명확한 거절보다 이 어설픈 상태가 나은 걸까?
에스페란사는 돌아갈 사람이다. 그러기 위해서 던전과, 왕실과, 황금 발톱과, 이 복잡다단한 사건들에 몸을 던진 것이 아닌가. 시더가 그 사실을 잊었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걸 안다면, 어째서?
‘당신은 대체 나랑 뭘 어쩌고 싶은 거지?’
말 없는 등을 바라보며 생각했지만, 어떤 답도 얻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