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96
96화
[퀘스트: 황금 발톱을 찾아라!]진행률: (99/???)
완료 보상
―칭호: 시간의 지배자
―아이템: 황금 발톱, 귀환증(집)
진행률이 어마어마하게 올랐다. 아마 다리아와 접촉했기 때문이겠지. 공작의 말대로 다리아가 황금 발톱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면, 마벨우드와 파인먼트 하우스에 던전을 만든 인물이라면 당연한 결과였다.
던전. 분명 어제 파인먼트 하우스에 던전이 나타났다. 사람이 죽고, 다치고. 결국 공략에 성공했다 해도 그것은 분명 재앙이었다. 그리고 그 ‘재앙’이 나인 호더 한복판에 나타났던 것이 바로 어제의 일이다. 어떻게 이렇게 조용할 수가 있지?
정복되지 않은 재앙은 세상을 바꾼다. 그리고 그 재앙이 정복되었을 때, 세상은 또 한 번 바뀐다.
몬스터 사태가 일어났을 때 이 세상은 뒤집혔다. 그 후 헌터가 등장했으니 또 다른 변화가 일어났겠지. 비록 에스페란사가 접한 것은 이미 두 번의 변화가 지나간 후의 세계뿐이었지만.
그런데 파인먼트 하우스에서의 사건은 그와 비견했을 때 결코 작지 않았는데도,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신문 1면에는 시시콜콜한 정계 스캔들뿐. 신문을 마지막 장까지 들춰 보아도 파인먼트 하우스에서의 소동은 기사 한 줄 나지 않았다.
‘덮었나?’
사람이 그렇게 많이 죽었는데, 아무리 저택 내에서만 벌어진 일이라지만 어떻게 이토록 감쪽같이 없던 일로 만들 수 있을까?
13년 후의 헌터 협회도 그랬다. 하지만 힘이 없다, 도와달라, 약한 척은 다 하던 왕실이 벌인 일이라 그런지 심정적인 배신감이 더했다. 궁전 전체가 던전으로 변한 대사건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덮어 버릴 수 있는 힘이 있으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생각의 흐름이 대중없이 넘어갔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또 다른 문제에 대해서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기로 했었지. 에스페란사는 침대에 누운 채로 눈을 깜박였다. 피곤해서인지 머리가 복잡해서인지 늦잠을 잤는데도 도무지 몸을 일으키고 싶지가 않았다.
“에스페란사 아가씨, 아침 식사 안 하시겠어요?”
애니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문틈으로 내밀었다. 매들린은 아가씨 피곤하신 것 같으니 그냥 내버려 두자며 애니의 목덜미를 잡아당겼다. 둘이 투닥거리는 걸 침대에 누워 멍하니 바라보던 에스페란사가 몸을 일으켰다.
내가 차인 것도 아니고, 식사는 해야지.
열 시 남짓 된 시간인데 시더가 이미 식당에 내려와 있었다. 식당 문턱에서 멈칫했던 에스페란사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에 앉았다. 시더가 불쑥 물었다.
“왜 그렇게 의식해요?”
지금 저걸 아침 인사라고 한 건가? 시비가 아니고? 잠깐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어, 좋은 아침……?”
“좋은 아침.”
시비 거는 건 아니었는지 다행히 멀쩡한 대답이 돌아왔다. 시더 클라이번이 원래 멀쩡한 대답을 했던가 하면 꼭 그렇진 않았던 것 같지만. 게다가 잠을 푹 잔 에스페란사에 비해 시더는 조금 피곤해 보였다. 잠을 설친 것처럼. 아마도 평소처럼 늦은 시간에 잠들었기 때문이겠지만.
……그런 것이어야 하는데.
“다친 덴 어때요?”
“괜찮아요. 별로 아프지도 않고.”
“붕대 제때 갈아요. 아니면 포션이란 걸 쓰든지.”
“그 정도 상처는 아니라니까요.”
포션은 더 위험할 때를 위해 남겨 둬야 한다. 에스페란사는 손끝으로 식탁을 똑똑 두드리며 생각했다. 다리아와 부딪혔을 때 에스페란사는 ‘이만하면 이길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다리아도 마찬가지의 판단을 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니 다음번에는 절대 혼자 오지 않겠지. 다리아에 사이러스까지 합세한다면? 사이러스의 전투 방식은 잘 알고 있지만, 대인 전투에서 1 대 1과 1 대 2의 차이는 고작 두 배가 아니다.
게다가 공작을 암살하려던 것이 실패했으니, 더 교묘한 방법으로 찾아올지도 모른다. 대비가 필요했다.
“백작님, 나가실 시간입니다.”
밀런이 슬쩍 다가와 회중시계를 보여 주었다. 시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요?”
어쩐지 일찍 일어났더라니.
“……좀 늦을 거예요.”
“무슨 일이길래요?”
“별건 아니에요. 나중에 봐요.”
나중에? 에스페란사가 눈을 깜박거리는 사이 시더는 먼저 식당을 나가 버렸다. 저번처럼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
오후 내내 시더는 돌아오지 않았다. 혼자 저녁을 먹고 서재에서 뽑아 온 책 몇 권을 협탁에 둔 채 응접실에서 노닥거리던 에스페란사는 책을 탁 소리 나게 덮었다.
“진짜 오래 걸리네.”
혼잣말이었는데, 옆에서 리본을 만들던 애니가 책 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더니 눈치를 보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올라가게. 애니, 너도 이만 가서 자.”
들킨 건 저쪽인데 왜 내가 더 신경 쓰고 있지? 원래 이런 건가? 툴툴거리며 계단을 오른 에스페란사는 시더를 기다리다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듣기로는, 시더는 밤늦게나 돌아왔다고 했다. 그런데 심지어 그 말을 해 준 것이 본인도 아니었다. 그리고 연달아 새로운 소식을 들었다.
“나갔다고요?”
“네. 아침에 나가셨습니다.”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얘기를 못 들으셨습니까?”
집사는 도리어 이상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관계가 옛날같지 않다는 티를 낸 것 같아 민망해졌다. 그러나 집사는 별일도 아니라는 듯이 말해 주었다.
“수상 각하와 약속하신 강의를 하러 마도 공학 대학으로 가신 겁니다.”
“그건 얼마나 하는 건데요?”
“사흘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시간은 하루에 두 시간인데, 아마 신사 클럽에 들렀다 오시느라 늦으시는 것이겠지요.”
시더가 좀처럼 신사 클럽에 가지 않는다는 건 집사도 알고 에스페란사도 알았다. 그런데 클럽에 갔다고?
‘진짜 날 피하나?’
자기가 먼저 모른 척하자고 했으면서!
차라리 그런 말을 안 했으면 이해했을 텐데. 아니, 그는 그렇게 불편해 보이지도 않았다. 혼신의 힘을 다해 불편함과 어색함을 이겨 내고 겨우 에스페란사와 얼굴을 마주하는 티를 냈다면 어쩔 수 없었겠지만, 평소와 정말로 똑같았는데.
그래, 사흘이라고 했지. 사흘만 지나고 보자. 그 후에는 변명거리도 없을 테니까.
그렇게 사흘이 지났다. 사흘 내내 시더 클라이번은 아침 일찍 나가서 새벽이 다 돼서야 들어왔다.
역시 날 피하는 거지.
* * *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난 에스페란사는 눈을 뜨자마자 방 밖으로 나가서 난간에 매달렸다. 1층에 있는 시더는 이미 외출복 차림이었다.
“또 간다고?”
난간을 밟고 3층 높이를 뛰어내렸다. 치마가 붕 떴다 가라앉았다. 하녀들이 작게 비명을 질렀지만, 에스페란사는 여유롭게 착지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남들이 비명을 지르건 말건, 시더는 잠깐 놀란 티를 냈을 뿐이었다. 늘 그랬던 마냥 태연한 아침 인사를 하면서. 에스페란사가 잠옷 치마를 툭 털며 대답했다.
“네. 그런데 강의는 어제 끝났다면서요?”
“하워드가 잘못 알았나 보네요. 오늘까지예요.”
“날 피해요?”
참지 못하고 불쑥 묻자, 시더가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의식하는 건 당신 쪽인 것 같은데.”
아니라고는 할 수 없었다. 시더를 생각할 때마다 그 때 보았던 눈빛을 같이 떠올리고 있었으니까. 지금 그의 눈은 여느 때와 같이 약간의 온기와 웃음기를 머금고 있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그간 의식하지 못했을 뿐, 혹시 지금의 이 눈빛도 어떤 징조였던 것은 아닌가? 친구로서의 다정한 걱정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전부……. 그런 의심이 머릿속에 싹틀 때였다. 시더가 그 생각을 끊어 내며 물었다.
“다친 덴 어때요?”
“……멀쩡해요.”
시더는 펑퍼짐한 잠옷에 가려진 다리에 잠깐 시선을 주었다가 엄격한 상급 고용인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얼른 눈을 들었다. 하지만 그 짧은 사이에도 붕대에서 배어 나온 약이 치마에 묻은 것을 보았다. 입술이 완만한 호선을 그렸다.
“내가 보고 싶었나 보죠?”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이렇게 자기감정을 숨기지도 않을 줄은. 눈만 크게 뜬 채 아무 말도 못 하는 에스페란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더가 어깨를 으쓱였다.
“……모르는 척하라면서요.”
“당신은 모르는 척하라는 말이죠. 난 그럴 이유가 없고.”
“보통은 반대 아닌가요?”
에스페란사가 난감해하면서 도망치고 시더가 쫓아오는 그림도 어색하기는 매한가지였지만, 보통은 그런 구도로 진행되는 게 자연스럽다. 경험상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는 대개 그랬다. 시더는 허리를 살짝 굽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그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이렇게 지근거리에서 눈을 맞춘 것은.
“그야 당신은 날 좋아하잖아요.”
말문이 막혔다. 에스페란사는 가까스로 대답할 말을 찾았다.
“친구로서요.”
“뭐든 간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그 말을 넘겨 버린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손끝이 닿은 뺨이 움찔 굳었다. 친구인 시더 클라이번의 접촉과는 왠지 다르게 느껴졌다. 사실은 전혀 다르지 않은데도.
“당신은 날 좋아하고, 난 하지도 않은 고백이 거절당했다는 이유로 벌벌 떠는 어린애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당신은 계속 모른 척하며 나랑 친구를 해요.”
이제 미안하거나 곤란하기보다는 불안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럼 당신은요?”
“글쎄요. 난 어떡할까요?”
마땅한 대답 없이 말끝을 흐린 시더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그리고 대뜸 다른 말을 꺼냈다.
“사실 강의 시간까지는 시간적 여유가 있어요. 내가 당신을 피하는 게 아닌지 걱정된다면 차라리 같이 갈래요?”
“대학에요?”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다. 그러고 보니 7년이나 황금 발톱을 하면서 한 번도 대학에 가 본 적이 없었다. 칼리지는 던전 공략 때문에 한두 번 가 본 적이 있었고 여학교에도 몇 번 파견을 갔었는데 정작 대학엔 가 본 적이 없다니. 게다가 마도 공학 대학이다. 뭔지 몰라도 다르긴 다를 것 같았다.
망설임은 짧았다. 에스페란사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시더가 왠지 웃음을 참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요. 그런데 당신의 일반적인 숙녀 복장은 눈에 띄겠네요. 강의실 출입이 금지될지도 모르겠어요.”
빌어먹을 19세기적 성 관념. 마력으로 비행선을 띄우는 시대에 숙녀의 옷차림으로는 강의실에 들어갈 수 없다니. 눈에 띄는 거야 헌터로서 생활하다 보면 늘 그래 왔으니 상관없지만, 강의실 출입 금지는 뼈아팠다.
“그럼 그냥 안 가도 돼요. 아니면 도서관 구경이나 해도 되고.”
“기껏 대학까지 가서, 아쉽지 않겠어요?”
“나도 대학 나왔어요. 대학이 별거라고.”
“마도 공학 대학은 처음이잖아요. 재밌을 텐데. 도서관엔 따분한 책들밖에 없어요.”
은근한 말투로 살살 꼬시는 말에 에스페란사의 생각도 기울었다. 여자 옷을 입고는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은 여전히 기분 나빴지만.
그러나 현실에서는 물론이고 13년 후의 나인 호더만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헌터에게 의복의 종류는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반쯤 벗고 다니거나 엉덩이에 동물 꼬리를 붙이고 다니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니까. 남장이 별건가?
“좋아요, 그럼. 근데 옷이 없잖아요.”
“없긴요. 하워드, 내가 어릴 적에 입던 옷이 아직 남아 있지? 한 열…… 네 살 때쯤 옷이면 될 것 같은데.”
깐깐한 집사 하워드는 주인의 기행에 이미 두 손 두 발 다 든 상태였다. 그나마 조금 더 상식적이라고 생각했으나 실상은 별반 다르지 않았던 에스페란사를 질책하듯 바라보는 것을 끝으로, 그는 얌전히 옷을 찾으러 갔다.
“그럼 좀 기다려 볼까요?”
시더는 여유롭게 몸을 틀어 응접실로 향했다. 에스페란사가 그 뒤를 따라가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원래는 시더에게 화를 내려고 나왔던 거 같은데. 정신을 차려 보니 마주 보고 평소처럼 시답잖은 잡담이나 하고 있었다.
우습긴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당초의 목적은 이룬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