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97
97화
집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내려왔다. 그러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시더가 미간을 찡그렸다.
“백작님, 백작님이 열네 살 때 입으시던 여름 정장은 너무 작습니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확실합니다. 그해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한 뼘이 넘게 크셨으니까요.”
그랬던가. 기억을 더듬어 보던 시더는 곧 수긍했다. 그래서 그다음 해에는 여름옷을 전부 새로 맞춰야 했었다.
“다행히 선대 백작님께서 입으시던 옷은 치수가 맞는 게 있습니다만.”
선대 백작? 시더가 명백한 불쾌감을 표시하며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런 누더기를 누구에게 입히려고?”
“누더기라니요!”
“40년도 넘은 옷을 누더기라고 안 부르면 뭐라고 부르겠나. 에스페란사, 40년 된 유물을 걸치고 싶진 않죠?”
“관리를 잘해서 10년 전 옷과도 비견할 만합니다!”
집사는 자존심이 상한 듯 밀어붙였다. 하지만 시더도 완강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래, 아주 새것처럼 깨끗하다고 치고. 어쨌든 내 옷 중에 치수가 작은 걸로 가져오게. 그 무렵에 미리 맞춰 둔 옷이라면 그런대로 맞겠지. 급한 대로 손을 보면 되니까.”
결국 주인의 명령을 이길 수 없었던 집사가 못마땅한 얼굴로 몸을 휙 돌렸다. 그 와중에도 문 닫는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에스페란사가 닫힌 문을 힐끔거리다 물었다.
“선대 백작이면 당신 아버지 아니에요? 왜 그렇게 싫어해요?”
시더는 웃으며 답했다.
“당신이 아버지 옷 입는 게 싫어요.”
“아, 네에.”
어쩐지 다시 어색해진 것 같았다. 시더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데, 에스페란사는 예전처럼 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시더는 에스페란사가 어색해해도 별로 아쉬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게 섭섭할 일인지 안심할 일인지도 모르겠다. 깊게 생각하기를 포기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옷을 관리하던 하녀가 내려와서 옷을 찾았다며 에스페란사를 데려갔다. 시더는 손을 휘휘 흔들었다. 즐거워 보였다.
아, 그래. 즐겁다 이거지.
휩쓸리느라 정신이 없던 에스페란사도 그냥 즐기기로 결정했다.
‘지금이 아니면 남장 같은 걸 해 볼 일이 언제 있겠어?’
발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만화 주인공도 아니고 남장하고 학교에 잠입이라니. 그것도 나이를 스물일곱 살이나 먹고! 창피하면서도 우스웠다.
“갑자기 의욕이 넘치시네요?”
“재밌잖아?”
“남자 옷 입는 게요? 아가씨, 정말 이래도 괜찮은 건가요?”
안 되는 건가? 21세기 현대보다도 옷차림이 자유로운 헌터로 이 세계를 살아왔던 에스페란사는 사실 옷에 대한 사회적 금기에 무지한 편이었다. ‘숙녀가 딱 붙는 바지를 입는 것’은 이 시대 통념상 안 되는 걸 알았지만, 남장을 하면 남자 취급을 받을 테니 상관없지 않을까? 들키지만 않는다면.
잔다르크는 바지를 입었다는 이유로 화형을 당했다지만, 지금은 마력으로 비행선과 군함을 띄우는 시대가 아닌가.
“에스페란사 아가씨, 아가씨가 남자 옷을 입는다고 남자처럼 보일 리가 없잖아요.”
하녀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뭐, 어떻게든 해 보자.”
남자처럼 안 보이면 그것도 재밌겠지. 그렇다고 잡아서 화형을 시키지는 않을 것 아닌가. 잡으려 한들 잡을 수도 없을 테고.
하녀들이 가져온 시더의 옷은 10년 전 옷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했다. 착용감도 거의 없었다.
“한 번도 입으신 적 없는 옷이래요. 미리 맞춰 뒀는데 너무 커 버리시는 바람에…….”
하녀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에스페란사의 몸에는 제법 큼직하지만 시더가 입는다고 생각하면 우스울 정도로 작게 느껴지는 옷이었다. 드라마 주인공들이 하듯이 가슴에 붕대를 두르고 옷을 갈아입어 보았다.
“좀 남자 같아?”
“머리를 그렇게 늘어뜨리고요? 여기 가발도 가져왔어요!”
가발을 가져온 건 애니였다. 소문이 났는지 시간이 남는 하녀들이 모조리 몰려 왔다. 다들 아주 신났다.
“자기들도 즐기고 있으면서, 나한테만 뭐래.”
“기왕 하실 거면 즐기는 게 낫죠. 잠깐만요.”
가발 안에 긴 머리를 쑤셔 넣다 보니 머리가 좀 커 보이는 것 같은데. 에스페란사는 곱슬거리는 금발 가발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사실 이 집에 가발이 있었다는 것도 신기하긴 했다. 은근히 없는 게 없는 저택이기는 하지만, 이 집 주인의 편중된 취향에 금발 미소년 가발 같은 게 있을 리 없는데.
“전 백작 부인의 취미 생활이죠.”
하녀 하나가 엄숙하게 말했다. 아, 전 백작 부인. 에스페란사가 가볍게 탄식했다. 그분에게는 신세 진 게 꽤 많았다.
“자, 아가씨. 옷핀 꽂을 거예요. 가만히 계세요.”
애니가 옷핀을 들고 왔다. 눈앞에 칼을 들이대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에스페란사지만 왠지 옷핀은 좀 무서웠다.
옷이 전체적으로 커서 줄일 곳이 꽤 많았다. 그 무렵의 시더와 키가 대충 비슷한데도 그랬다. 어깨가 크고 소매도 조금 길었다. 베스트도 비슷하게 고치고, 재킷의 소매와 길이도 줄이기로 했다.
상의가 끝난 다음엔 바지가 남아 있었다. 애니가 허리에 부지런히 옷핀을 꽂았다. 오른쪽 허벅지 통을 줄이고, 기장도 잘라야 했다. 이쯤 되면 옷을 새로 만드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이걸 다 할 시간이 있어? 다들 다른 일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럭스 부인이 빼주셨어요. 바느질 잘하는 애들은 전부 이쪽으로 오라고요.”
에스페란사 또래의 하녀들은 주방 일에서 빠지는 게 얼마나 좋은지 아냐고 재잘거리며 마법 같은 솜씨로 수선을 했다. 스물일곱 먹도록 중학교 가정 시간에 반짇고리 키트로 더듬더듬 하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에스페란사는 요정 대모 같은 바느질 솜씨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됐어요!”
손이 여유로운 하녀들은 어디선가 신사 모자와 정장 구두까지 찾아왔다.
금발 고수머리 가발에 시더의 정장까지 입으니 시더의 남동생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런 10초 만에 들킬 설정 같은 건 안 할 거지만.
모자를 푹 눌러쓰자 하녀들이 깔깔 웃으며 옷맵시를 잡아 주었다.
“좀 남자 같아?”
“음. 으으음. 일단 백작님께 가 보세요.”
“맞아요. 그건 백작님께 여쭤보세요.”
그래서 남자 같다는 거야, 안 같다는 거야? 투덜거리며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가는데, 뒤에서 애니의 환호인지 놀림인지 모를 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걸음은 신사도 아니고 기사 같아요!”
물론 에스페란사는 늘 이렇게 걸었었다.
응접실 문 앞에 서니 괜히 긴장이 됐다. 문을 두드려야 되나? 다른 때라면 하지 않을 고민을 하느라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내리길 반복했다.
“안 들어올 건가요?”
문 안쪽에서 시더가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당신 발소리는 남다르잖아요.”
그래, 기사 같단 말이지. 13년 후에서는 ‘헌터 같다’고 말했을 테고. 어깨를 들어 올렸다 내린 에스페란사가 문을 열었다.
시더는 턱을 괴고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비록 한 번도 입어 본 적 없는 옷이긴 하지만 그의 옷에 감싸인 에스페란사가 그의 응접실로 들어오는 모습을. 역시 아버지의 누더기를 입히지 않은 건 좋은 선택이었다. 에스페란사는 어린 시더 클라이번의 옷과 제법 잘 어울렸다.
“생각보다 철저하네요. 어디서 난 건지 모를 가발도 썼고.”
“당신 어머니의 수집품이라는데요.”
“아……”
드물게도 말문이 막힌 시더가 헛웃음을 지었다. 에스페란사가 씩 웃었다.
“좀 남자 같아요?”
“음.”
목을 울리는 짧은 소리로 대답을 회피한 시더는 협탁 위에 있던 크라바트를 들고 다가왔다. 부드러운 손끝이 셔츠 칼라를 들어 올렸다. 에스페란사는 고개를 뒤로 뺐다.
“내가 할 수 있어요.”
“과연.”
입을 다물었다. 평생 고무줄로 조이는 교복 넥타이 정도나 해 본 에스페란사가 매듭이 복잡한 크라바트를 묶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가만있어 봐요. 내 목에도 안 하는 걸 해 주는 거니까.”
숨 쉬듯이 자랑 아닌 자랑을 한 시더는 자기 목에도 안 하는 크라바트를 손수 매 주는 사람치고는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예쁜 매듭을 지어 주었다.
속눈썹이 빽빽하게 음영 진 눈을 흘끔거리던 에스페란사는 그가 별안간 눈동자만 들어 올려 웃음 짓자 깜짝 놀라 몸을 뒤로 물렸다.
남의 심장 소리가 가까이서 들리는 기분이 이상했다. 얼굴은 책이나 뒤적거릴 때보다도 말끔하고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한데, 한 뼘 거리의 심장은 쉴 새 없이 뛰고 있다니.
부드러운 실크의 모양을 잡고 떨어진 손이 에스페란사의 뺨을 쥐고 턱을 들어 올렸다.
“예쁜데.”
못 들은 척 눈을 피하려는 에스페란사를 향해 보란 듯이 입꼬리를 올린 시더가 말했다.
“괜찮아요. 여자보다 예쁜 남자도 많으니까. 미소년이라고 하면 되죠. 나이는 열일곱 정도?”
단숨에 열 살을 후려치네. 반쯤 나갔던 정신이 돌아왔다.
“너무 양심이 없는 것 같은데.”
“성별도 속이면서 고작 열 살 가지고? 누가 물어보지만 않으면 상관없잖아요.”
하긴.
들키지만 않으면 상관없지. 어차피 대학 강의실에 들어가겠다고 남장까지 한 마당에 말이다.
그러나 왕립 마도 공학 대학, 필슨관 2층의 강의실 앞에 도착한 에스페란사는 생각을 바꾸었다. 상관없는 게 아니었다.
여자가 있잖아?
블라우스에 짙은 색 치마라는 단조로운 차림을 한 여학생 몇 명이 두꺼운 전공 서적을 들고 지나갔다. 남학생에 비해 매우 적은 수였지만 적어도 강의실에 들어가지도 못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금발의 열일곱 살 미소년 차림을 한 에스페란사가 생각했다. 시더 클라이번은 사기꾼이다.
‘어쩐지, 남장 운운할 때 너무 웃는다고 했어.’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남장을 안 했지! 에스페란사는 중간부터는 자기도 즐겼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이를 꽉 물었다. 집에 돌아가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면서.
하지만 지금 당장은 학생으로서 교수 시더 클라이번이 하는 수업을 들으러 들어가야 했다. 에스페란사가 강의실 문을 열어젖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