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98
98화
나인 호더 전체에서 선진 마도 공학 기술이 가장 집약적으로 사용된 곳을 꼽자면 바로 이 왕립 마도 공학 대학, 그중에서도 특히 필슨관을 꼽을 것이다. 5년 전, 필슨 경의 후원으로 지어진 이 건물의 건축에는 최첨단 마도 공학 기술이 동원됐고, 특히 2층의 대강의실은 그 위명에 걸맞게 최고의 학자들이 강의를 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이번 주부터 나흘째 이어지고 있는 이 강의는 그중에서도 학생들이 가장 기다리고 있던 강의였다.
스물다섯 살의 젊다 못해 새파랗게 어린 나이에 시대를 대표하는 마도 공학자의 반열에 오른 천재적인 학자의 강의. 그것도 고작 나흘밖에 들을 수 없는 강의였다. 처음에는 30명 정도의 유망주들을 대상으로 한 소수정예 강의로 기획되었던 이 강의는 학생들의 분노 어린 항의로 인해 2백 명이 들어갈 수 있는 대형 강의실에서 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뭐, 귀찮게 됐죠. 사람이 많으면 질문이 많이 들어오니까요.”
마차에서 간략히 상황에 대한 설명을 하던 시더는 이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하지만 학생들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름대로 마도 공학 대학에 교수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양반이 석사생을 받기는커녕 특별 강의로 때우고 넘어가는 게 한두 해 일이 아닌 모양이니까. 그렇다고 이름을 자르자니 다른 대학에서 채어 갈 것이 뻔하니 학교로서도 별수가 없었다.
“2백 명이라고는 해도 왕립 마도 공학 대학에 입학할 정도면 나름대로 학계에서 한자리할 사람들이긴 해요. 내가 당신 나이를 열일곱이라고 설정한 이유도 그것 때문인데, 다들 나이가 꽤 어리거든요.”
천재들은 원래 그렇지. 게다가 수학, 과학 쪽의 천재들은 특히 더 그렇다. 어릴 때부터 비상하게 굴다가 월반을 거듭해서 성인이 되기도 전에 대학을 졸업하는 경우. 그러니까.
“스무 살에 박사가 된 누구처럼요?”
시더가 짐짓 엄숙하게 말했다.
“스무 살에 박사는 거의 없어도 스무 살에 석사 정도는 발에 차이도록 많죠.”
“아, 네.”
떨떠름한 대꾸가 돌아오자 시더는 낮게 웃었다.
“아무튼, 또래 친구들이 제법 많을 거예요. 그렇다고 친구를 너무 늘려오진 말고.”
“내 친구 기준은 꽤 까다로워요.”
“물론 그러시겠죠.”
뻔뻔스레 자기를 가리키며 대꾸한 그는 에스페란사를 먼저 필슨관 정문 앞에서 내려주고, 마부에게 필슨관 뒷문에 마차를 세우도록 지시했다. 같이 내리면 시선이 쏠릴 테니까.
조금 헤매 가며 찾아온 강의실은 벌써 사람으로 빼곡했다. 에스페란사가 빈자리를 찾는 사이 필슨관 뒤쪽으로 들어온 시더가 강단으로 들어왔다. 빽빽하게 앉은 사람들 사이에서 겨우 자리를 찾아 앉고 나니, 그제야 강의실의 생김새가 눈에 들어왔다.
기계 팔로 출석을 확인하는 구릿빛의 오토마톤들이 돌아다녔고, 칠판과 분필 대신 커다란 금속판이 있었다. 스크린과 컴퓨터가 있을 법한 자리를 차지한 금속판은 마치 21세기 현대 기술을 비슷하게 따라 한 것 같아서 신기했다.
에스페란사가 강의실을 구경하는 사이, 규칙적인 지팡이 소리와 함께 강단 중앙에 멈춰 선 시더 클라이번이 강의실을 둘러보았다. 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남장까지 한 에스페란사를 발견했을까? 그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무적인 기색을 띠었다.
“오늘이 마지막 강의입니다. 두 시간, 휴식 없이 진행하겠습니다.”
인사도 없이 그것으로 첫 마디를 시작한 시더는 교탁 위의 금속판에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벽면의 커다란 금속판에 글씨가 한 박자 늦게 나타났다. 단순한 기호가 이어진 회로였다.
‘저런 건 중학교 때 이후로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기호는 전혀 다르지만, 그래도 몇 가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단순한 C형 회로입니다. 현대적 해석기관은 C형 회로를 기본으로 사용합니다. 여기에 변형으로 드 로렌 기어를 삽입하고.”
시더가 교탁 위의 회로에 뭔가를 그리자, 3초 정도 후에 벽면에 뜬 회로에도 새로운 기호가 나타났다. 드 로렌 기어가 뭔진 모르겠지만 지금 새로 끼워 넣은 게 그거겠지.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학생들의 눈이 팽팽 돌았다.
“1번, 9번, 36번, 73번 기어 대신 각각 도슨 3번, 7번. 맨 앞의 학생, 36번 대신엔 뭘 삽입할까요? 또 도슨 3번? 뭐, 좋아요. 73번 대신에 1번 회로를 삽입해도 마력 평형은 유지됩니다. 우리의 기본 회로는 더 많은 정보를 처리할 수 있겠죠. 마력 분배는…….”
어느덧 회로는 말도 못 하게 복잡해졌다. 에스페란사는 눈을 깜박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학구열에 불타던 학생들은 어느덧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나만 이해 못 하는 게 아니었네.’
계산을 하는 짧은 시간조차 필요하지 않다는 듯이 다이얼을 돌리자 각 부품을 뜻하는 기호 위에 붉은색으로 숫자가 깜박였다.
“이렇게. 하지만 이대로라면 너무 비효율적이죠. 증폭기가 필요합니다. 마력 증폭은 두 가지 방법으로 가능합니다. 단순하게 마정석을 추가하는 방법도 있고 증폭기를 달 수도 있죠. 연구비가 부족하다고 치고, 증폭기를 삽입해 봅시다.”
일평생 연구비가 부족한 적이 없었을 시더 클라이번은 능청스럽게도 그렇게 말했다. 배려 없는 속도에 머리를 싸매던 학생들이 방심하고 하나둘 피식 웃었다.
그러나 방심의 대가는 컸다.
시더가 말하는 대로 중간에 복잡한 회로 하나가 추가됐다. 그러자 회로 뒷부분의 마력량도 전부 변했다. 눈이 빠지도록 그것을 받아 그리고 있는 앞줄의 우등생들과, 논리를 따라가기에도 바쁜 대부분의 사람들.
그리고 처음부터 구경이 목적이었던 고로 필기는커녕 펜을 꺼내지도 않고 멀뚱히 지켜만 보는 에스페란사까지.
“넌 아무것도 안 적어?”
옆자리에 앉은 학생 하나가 물었다. 턱을 괴고 강의를 관람하던 에스페란사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돌렸다.
“아, 놀랐다면 미안. 그냥 아무것도 안 적길래 물어봤어.”
그렇게 말하는 남학생은 나이가 스무 살 남짓으로 앳되어 보였는데, 그의 노트는 빼곡한 약자와 필기체로 점철되어 있었다. 어떻게든 정신없이 변하는 회로를 따라 그려 보려던 노력이 중간부터는 성의 없이 ‘C형 회로 참조해서 다시 그려 볼 것’ 정도의 주석으로 변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에스페란사가 자기 노트에 시선을 주는 것을 깨달은 그는 빨개진 얼굴로 노트를 가렸다.
“왜 보고 그래. 아니, 저걸 어떻게 다 따라 그리겠어.”
“그러게.”
목소리를 숨기기 위해 낮게 툭 던지자, 소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렇지? 난 또 내 옆에 클라이번 같은 천재가 앉았나 했잖아. 그런데 넌 우리 과 학생이야? 못 보던 얼굴인데.”
“아닐걸.”
자기가 어느 과라고 밝히지도 않은 소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눈에 띌 것 같은데 처음 보는 얼굴이라 설마 했어.”
에스페란사는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서 소년을 툭툭 쳤다.
“있잖아, 너 이 강의 첫날부터 들었어?”
“응? 응, 그렇지. 기대하던 강의라서.”
“이 강의, 맨날 이 시간에 두 시간씩 한 거 맞지?”
“맞아.”
에스페란사가 이마를 일그러뜨렸다. 고작 두 시간짜리 강의. 그것도 오후 세 시에 시작하는. 그런데도 아침 일찍부터 나가서 새벽까지 들어오지 않은 것은.
‘날 피한 거 맞잖아.’
허구한 날 집에만 박혀서, 하는 일이라곤 취미 생활뿐인 양반이 일 때문에 바빴다고 하는 말을 전부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더가 정말로 에스페란사를 피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입맛이 썼다.
소년은 에스페란사가 왜 그러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물었다.
“넌 마지막 강의만 듣는 거구나? 그럼 이해하기 힘들 텐데. 난 첫 강의부터 들었는데도 따라가기가 벅차거든.”
시더 클라이번은 좋은 선생은 아니었다. 학생들은 그의 사고 속도는 물론이거니와 연산 속도도 따라가지 못해서 이해는커녕 따라 적기만도 바빴다. 차라리 저 손에 최첨단 장비가 아니라 분필을 쥐여 주었더라면 적어도 필기 시간은 벌 수 있었을 텐데. 에스페란사는 무심코 혀를 찼다.
“여기까지.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는 2차 회로입니다. 간단하죠.”
산발적인 탄성이 터져 나왔다. 수군거리고, 신기한 것 보듯 보더니 박수를 치려는 학생까지 있었다. 그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딱, 하고 지팡이 짚는 소리가 났다.
“내가 방금 묘기라도 부렸나요?”
언짢은 목소리에 웅성대던 소리가 싹 사라졌다.
“방금 보여 준 건 여러분도 전부 할 수 있어야 하는 작업입니다. 적어도 여러분이 마도 공학자로 살고 싶다면 말입니다.”
강단 한편의 안락의자에 앉은 시더는 지팡이로 바닥을 두어 번 두드리며 말했다. 학생들 사이에서 볼멘소리가 툭툭 튀어나오다 이내 조용해졌다. 적어도 동의하는 사람이 적은 건 알겠다.
“마도 공학은 젊은 학문입니다. 지금까지 쌓아 온 지식보다 앞으로 쌓아 갈 지식이 더 많아요. 오직 퇴보 없는 발전만 남아 있기 때문에, 기본적인 작업에 낭비할 시간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기본을 도외시해서도 안 되죠.”
사교용 미소 하나 갖추지 않은 말이 매서웠다.
“고작 잔디깎이 오토마톤이나 만들 수 있는 단순한 회로에 머리나 쥐어뜯고 있다면, 남이 만든 기계를 따라 만드는 것밖에 못 하겠죠. 그건 공장이 더 잘하는 일이고 말입니다.”
말이야 쉽지, 이 자리에 잔디깎이 오토마톤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으으, 뭐가 간단하다는 거야. 어떻게 저기다 저 회로를 삽입하겠다는 생각이 1초 만에 튀어나오냐고.”
에스페란사 쪽으로 몸을 완전히 틀고 불평하던 소년은 지팡이를 쿵 짚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금속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울상을 지었다.
“벌써 다 지워졌잖아? 혹시 내용 기억해? 조금이라도!”
“전혀 몰라. 하나도 기억 못 해.”
소년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시더는 눈을 가늘게 흘기고는 일어나서 금속판을 밀어냈다. 금속판 뒤에는 평범한 칠판이 있었다.
“마저 하죠. 증폭된 마력의 주파수에 맞추려면 황동보다 마력투과율이 높은 물질이 필요합니다. 이 정도 마력 수준에선 상아도 나쁘지 않죠.”
시더는 분필을 들고 이미 사라진 금속판 위의 회로를 간단하게 다시 그려냈다.
“여기에 어떤 변환기를 추가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단순한 기본 회로는 작게는 잔디깎이에서 크게는 공간 이동까지도 가능해지는 기계 장치가 되겠죠. 어디까지나 이론적으로는 말입니다. 하지만 일단은 간단한 것으로 해 볼까요.”
에스페란사는 관람의 목적에 맞게 턱을 괴고, 시더가 간단하다고 주장하는 회로를 마저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흠 없이 우아하게 떨어지는 정장 소매와 분필을 든 채 거침없이 써 내려가는 손에 시선이 머물렀다.
아까는 저 손으로 에스페란사의 크라바트를 묶어 주고, 턱이나 뺨을 가볍게 스치곤 했다. 시더 클라이번을 아는 사람으로서 말하건대 그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설마 그래 놓고 다시 피하지는 않겠지.
이기적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이 세계에서 에스페란사가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는 그 하나뿐이었으니까.
사실 놀랄 일도 아니었는데 놀란 것도 그래서였다. 두 사람은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성인이고, 하루 중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다. 은밀한 비밀을 공유하고 있고, 그에 대한 묘한 동지 의식도 지니고 있다. 몇 번의 역경을 함께 이겨 냈으며, 평소에도 싸울 일 없이 신기할 정도로 잘 맞는 편이었다. 그런 상대에게 연애감정을 느끼는 것은 정말이지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다.
그는 젊고, 아름답고, 총명하고, 적어도 에스페란사에겐 썩 다정했다. 조건만 따진다면 연애 상대로 더할 나위 없다. 오히려 시더를 소중히 생각하지 않았다면 가벼운 호감으로 쉽게 응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만약 돌아가야 하는 처지가 아니었다면, 혹은 그를 현실 세계에서 만났다면. 어느 쪽이든 지금과는 다른 상황이었다면.
시더가 분필을 내려놓고 몸을 돌렸다. 어느덧 칠판을 가득 채운 기호투성이의 회로와 머리가 핑핑 돌아가다 못해 끈을 놓아 버린 듯한 학생들. 그리고 비뚜름한 웃음으로 교탁에 기댄 채 에스페란사를 올려다보는 눈빛. 눈이 마주쳤다. 에스페란사는 하던 생각이 들킬까 봐 얼른 시선을 피했다.
“다들 제정신이 아닌가 보네요. 10분 휴식.”
예정에 없던 휴식 시간을 선언하자마자, 시더의 앞으로 구름 떼 같이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에스페란사는 혀를 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도 질문하게?”
“아니.”
질문은 무슨. 한 시간 동안 에스페란사가 이해한 것이라곤 교탁 위의 회로를 만지면 칠판을 덮은 금속판 위의 회로도 같이 바뀐다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면?”
“자체 휴강.”
21세기 신문물을 처음 접한 순진한 학생이 입을 떡 벌렸다. 에스페란사는 어깨를 으쓱이고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여기서 한 시간 더 듣고 있어 봐야 시간 낭비밖에 안 되겠다는 판단이 섰다.
그럼 이제 수업이 끝날 때까지 뭘 하지?
내부 지도를 흘끔거리던 에스페란사는 다음 목적지를 도서관으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