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99
99화
대학 도서관답게 시더의 2층짜리 서재보다도 책이 훨씬 많았다. 로비 한가운데 4층짜리 원목 책장이 건물 모양을 따라 동심원을 그렸다. 학생들은 제각각 책상에 앉아 두꺼운 책을 탐독하거나 부지런히 책장을 넘기며 과제에 열중하고 있었다.
돌아다니며 슬쩍 책의 종류를 확인해 보니 마력학, 마도 화학, 마도 공학에 관련된 서적이 이 도서관의 8할을 차지했다. 그중 상당수는 최근에 편찬된 논문집이나 학술지였다.
놀라울 정도로 재미없는 도서관이다. 대학 도서관이라면 모름지기 통속 소설도 좀 모아 놓고, 어디에서도 안 팔릴 것 같은 쓸데없는 책도 있고, 수백 년 전에 편찬된 유물 같은 책들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마도 공학의 역사가 얼마나 짧은지, 관련 분야의 서적까지 전부 합쳐도 2백 년보다 오래된 게 없다.
에스페란사는 서가를 돌아다니며 책을 훑어보았다. 물론 대부분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외계어나 다름없는 전문 용어가 빼곡한 책보다는 차라리 잘못된 곳에 꽂혀 있는 책을 혼자서 운반하는 트레이 오토마톤이 더 신기해 보였다.
청소년용 마도 공학 서적을 하나 뽑아서 손에 든 에스페란사는 저자 이름 순서대로 정렬된 서가를 유심히 살피다가 경쾌한 걸음으로 안쪽 서가로 향했다.
“오, 책이…….”
진짜 없네.
역사상 가장 대단한 마도 공학자니 마도 공학의 틀을 세웠니 오토마톤의 발명가니, 녹슨 검의 수훈자니 해서 책도 많이 썼을 줄 알았다. 하지만 ‘클레벌리’와 ‘클리프트’ 사이에는 고작 다섯 종의 책이 있었을 뿐이다. 각각의 책이 거의 열 권씩 꽂혀 있었다.
‘그런데 책장이 왜 이렇게 비어 있지?’
에스페란사는 문득 고개를 기울이며 무릎을 굽혀 책장을 자세히 살폈다. 책 한 질당 책장 한 칸을 차지하고 있는 걸 보니 본래는 스무 권 남짓이고 반절은 대출된 상태인 것 같았다.
새파랗게 어린 나이를 생각하면 훌륭한 것이겠지만, 에스페란사가 들어 온 그의 이름값에 비하면 초라하게 여겨지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논문 쓰는 걸 싫어하나? 뭐, 누가 좋아하겠냐마는.
“석사 논문이네.”
교수들한테 석사 논문 얘기하면 싫어한다는 말을 본 적이 있는데, 시더 클라이번 같은 사람도 자기 석사 논문을 부끄럽게 생각할까? 에스페란사는 킥킥 웃으며 여덟 권 남은 논문 중 한 권을 뽑아 들었다.
사람들이 얼마나 빌려 보았으면 책장이 너덜거렸다. 타자기로 쓴 글씨는 약간 바래 있었고 판화로 찍은 것인지 정교하게 그려진 회로와 구조도에 잉크 자국이 조금 번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특유의 자신감이 절제된 서문에서부터, 끝도 없는 참조문헌까지 슬슬 넘기며 보았다. 그러다 점점 책장 넘기는 속도가 빨라졌다.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에스페란사가 논문을 들고 서가에 기대 대충 훑어보는 동안에도 학생 두어 명이 와서 책을 가져갔다. 그러고 보니 이 커다란 서가에서 이쪽만 텅텅 비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자기 일도 아니면서 괜히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흠. 자네, 신입생인가?”
고개를 들어 보니 나이 지긋한, 교수로 추정되는 백발의 남자가 서 있었다. 파오란 냄새가 짙게 풍겼다. 에스페란사는 자기도 모르게 콧등을 찡그렸다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신입생이 읽기에는 어려울 텐데. 자네 지도 교수가 읽어 보지 말란 말은 안 했나?”
“예?”
무슨 말이지? 시더 클라이번, 강의하기 싫다고 너무 뺀질거려서 연구자들 사이에서 밉보였나? 따돌림이라도 당하는 건가?
‘아니, 근데, 자기 연구 열심히 하고 성과도 좋고, 의회 일에 백작 일에 이것저것 바쁜 사람인데 그 정도는 감안했어야지. 그렇게 아니꼬우면 자르든가? 제발 와서 강의 한 번만 해 달라고 빌빌대는 게 누군데, 자기들이 뭐라고 따돌려?’
아무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꼬장꼬장한 늙은 교수들이 시더의 논문을 읽지 말라고 한다니, 기분이 팍 상했다. 자기도 모르게 기분 상한 티를 냈는지, 늙은 교수가 달래듯 말했다.
“자네도 어린 나이에 마도 공학 대학에 입학했으면 학교에서 손에 꼽히는 수재였을 테지만,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네. 신입생들은 들어오자마자 클라이번처럼 세기의 연구를 해낼 수 있을 줄 알지. 하지만 장담컨대 이 연구를 반이라도 이해하는 신입생은 내 30년 교수 생활 동안 세 명밖에 못 봤네.”
교수는 얼굴에 주름을 잡으며 웃는 얼굴로 조곤조곤 말하고 있었지만, 하는 말 하나하나가 비수였다. 에스페란사가 만약 정말로 대학자가 될 꿈을 꾸고 입학한 신입생이었다면 상처를 받거나 오기가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행히 에스페란사는 마도 공학에는 쥐톨 만큼의 재능도 없었다. 착각도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이런 글은 말이지, 헛바람이 든 사람을 망치기 딱 좋다네. 그래서 교수들은 좋은 뜻으로 말하는 건데도, 보다시피 다들 몰래몰래 읽는 모양이지만 말이야.”
어색한 얼굴로 책을 꼭 쥔 에스페란사를 보고 웃은 노인이 논문 표지를 툭툭 두드렸다.
“그래도 천재는 대단한 천재지. 허허, 사실 내가 그의 박사 논문 심사위원이었다네.”
에스페란사는 문득 저 교수가 지금까지 늘어놓은 말이 모조리 이 한마디를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가 옛날이야기를 조르는 손녀들을 보는 할머니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와. 좋으셨겠어요.”
“특별히 좋을 것은 없고, 남들이 모르는 소소한 일화 정도는 알고 있지.”
교수는 결국 사서의 눈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도 안 궁금할 법한 시더 클라이번의 논문 편찬기 같은 것을 읊어 주고 갔다. 역경도 고난도 없는, 드라마로 만들면 시청률이 1.3% 정도 나올 것 같은 이야기였다.
홀로 남은 에스페란사가 고개를 기울였다. 박사 과정 지도 교수도 아니고 심사위원을 한 게 초면인 학생에게 떠들 정도로 자랑스러운가?
‘내가 그 남자랑 산다고 했으면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자기 머리로 생각한 문장의 묘한 어조를 상기한 에스페란사가 걸음을 뚝 멈추었다.
‘진짜, 들킨 건 저쪽인데 왜 나만 의식하는 거야?’
정작 저쪽은 태연하기만 하고 말이다. 한참 에스페란사를 피한 걸 보면 그도 의식을 안 하는 건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평소와 행동이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그렇다는 건, 아마도 그전이나 지금이나 줄곧 같은 감정이었다는 뜻이겠지.
정말, 언제부터?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멀뚱히 서서 뺨을 만지작거렸다.
“지나갈게요.”
덩치 큰 남학생 둘이 책을 양손에 가득 든 채 지나갔다. 복도 한가운데 서 있던 에스페란사는 깜짝 놀라 옆으로 비켜 주었다.
“밤에 연구동에 나오던 유령 있잖아, 그거 요즘 또 나온대.”
“악, 야, 나 오늘 당번이라고. 이상한 소리 하지 마. 괜히 신경 쓰이게.”
“진짜야. 터너네 연구실에서도 누가 봤대. 그 월터 디그비 알지? 그 이마 넓은 애. 걔가 봤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커먼 사람 둘이 교수님 방으로 들어가는데, 교수님 비명 소리 같은 게 들리더래. 걔가 완전히 굳어서 해 뜰 때까지 거기에 서 있었는데, 그 사람들 나오질 않더래…….”
듣고 있던 학생이 으스스한 이야기를 떠든 학생의 멱살을 붙잡았다.
“나 오늘 당번이라니까!”
두 사람이 실랑이를 하면서 멀어졌다. 에스페란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커먼 사람 둘?”
이 인상착의가 익숙하다고 하면 너무 과민한 반응인 걸까?
아직 수업이 끝날 때까지는 30분가량 시간이 남아 있었다. 에스페란사는 출입이 자유롭고 학생들의 수다를 가장 쉽게 들을 수 있는 곳, 즉 식당으로 향했다. 자리를 찾는 척하며 돌아다녀 본 결과, 유령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두엇 정도 더 있었다. 그들의 설명도 동일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커먼 사람 둘.
몇 달 전까지 교수실에 출몰하다 언젠가부터 사라졌는데 요즘 다시 나타남.
식당에서 산 마도 공학 대학 기념품 초콜릿을 우물거리며 필슨관으로 돌아가는 동안에도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밤에 연구동에서 본 귀신이라니 직접 확인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교수들이 곧이곧대로 말해 줄 것 같지도 않다. 그러니 심증뿐이지만, 만약 마도 공학자들을 찾아다니고 있는 것이 정말 다리아와 사이러스라면, 목적이 뭘까?
‘설리번 박사도 사이러스가 소개해 줬었지.’
헌터 협회는 수많은 마도 공학자들, 마도구 회사들, 공장들과 협력하고 있었다. 다리아와 사이러스가 원하는 것이 던전의 일상화와 헌터들의 등장, 다시 말해 ‘황금 발톱’ 속 세계관의 구현이라면, 마도 공학자와의 접촉은 불가피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시더 클라이번과 접촉하지 않았지? 그는 그때도 최고의 마도 공학자였을 텐데.
필슨관은 강의가 끝난 후 빠져나오는 학생들로 인해 붐비고 있었다. 그쯤에서 생각을 멈춘 에스페란사는 강의실로 돌아가는 대신 건물 뒤로 돌아서 마차를 찾았다.
테일러가 마차 바퀴를 살피고 있는 건물 뒤편. 시더 클라이번은 나무 그늘 아래 서서 불도 붙이지 않은 궐련을 손가락에 끼우고 있었다. 무심한 눈으로 마차 바퀴에나 시선을 두고 있다가, 에스페란사의 걸음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눈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불량 학생.”
말끝을 늘이는 느긋한 말투에는 작은 힐난이 숨어 있었다. 에스페란사는 머쓱해져서 멀찍이 멈춰 섰다.
“수업 중간에 도망치기나 하고.”
다행히 시더는 그리 화가 난 기색은 아니었다. 하지만 놀릴 거리를 찾아서 즐거운 것 같기는 했다.
“옆자리 남학생이랑 잡담이나 하고 말이죠.”
“아니, 내가 그 수업을 들으면서 잡담도 안 하면 뭘 해요? 좀 알 만한 이야기를 하든가.”
에스페란사가 입을 삐죽거렸다. 기껏해야 학부생 내지는 석사생일 학생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채 자기 속도대로 진도를 나가는 모습을 보면, 조금이라도 분야가 겹치지 않는 게 다행이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지금껏 시더가 에스페란사에게는 최대한 일반인도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했다는 건 알겠다.
시더가 낮게 웃으며 물었다.
“이해하게 해 줄까요?”
“아뇨.”
“재밌을 텐데.”
전혀.
이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에스페란사는 영원히 마도 공학에 관심을 가질 일이 없을 것이다. 회로가 뭐 어떻고 기어며 변환기며……. 평생 얽힐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것보다 내가 들은 게 있는데요.”
“그래요? 나도 할 말이 있는데.”
할 말?
“……먼저 할래요?”
“당신 먼저. 그리고 그건 나 주려고 가져온 건가요?”
“아, 맞다. 식당에서 팔더라고요. 근데 입맛에 맞으려나.”
시더는 에스페란사가 내민 초콜릿을 입 안에 털어 넣고 인상을 찡그렸다. 입 안에 쓴맛이 퍼졌다.
“대학에서 새벽까지 연구할 땐 종종 먹었어요.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르는 맛이긴 한데.”
“그럼 왜 먹어요?”
“나 주려고 사 온 거잖아요?”
“별거라고…… 당신이 안 먹으면 테일러 줘도 되고, 애니 줘도 되고.”
“그러니까 말이에요.”
시더가 힘을 주어 말했다. 혹시라도 헷갈리지 않게.
“기껏 나 주려고 사 온 걸 남 주게 둘 이유가 없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