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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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꽃을 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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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라고는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어두컴컴한 공간이었다. 노구덕은 무언가에 이끌린 듯이 그 칠흑의 통로를 터덜터덜 걷는 중이었다. 의식은 약에 취한 듯 멍했고, 시야는 백태가 낀 것처럼 희뿌옇게 물들어 있었다.
얼마나 정처 없이 걸었을까,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던 통로의 끝에서 봉화처럼 선명한 불빛이 반짝였다. 흐리멍덩한 눈알에 그 불빛이 보일 리 없었다. 그런데도 노구덕의 몸은 저절로 그 방향을 향해 움직였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불빛이 내뿜는 광도는 점점 강해졌다. 성인 키만한 불빛의 크기를 어렴풋이 식별할 수 있게 되었을 즈음에는, 그 강렬한 불빛에 눈이 멀어버릴 지경이었다. 마치 작은 태양을 눈앞에 둔 것 같았다.
그러나 노구덕은 눈을 감지 않았다. 그는 빛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빛은 실재하는 빛이 아니라 의식의 투영이 만들어낸 환상이었으니까. 현실이었다면 그 막대한 광량을 견디지 못하고 눈이 타버렸을 것이다.
마침내, 빈껍데기 같던 노구덕의 눈에 서서히 초점이 잡히기 시작했다. 마네킹처럼 어정쩡하던 자세도 자연스럽게 균형을 되찾았다.
의식을 되찾은 노구덕이 맨 처음 인지한 것은 코앞에서 휘황하게 반짝이고 있는 불빛이었다. …다시 보니 그건 불빛이 아니었다. 뚜렷한 형체 없이 빛나던 불빛은 어느새 완연한 사람의 형상을 갖추고 있었다.
오밀조밀하게 자리 잡은 그 이목구비는 그가 아는 누군가와 무척 닮아 있었다. 노구덕은 저도 모르게 그 사람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불렀다.
“…소피아?”
“소피아. 이제 잘 시간이야.”
“……?”
소피아는 뜻 모를 말을 하며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의아해진 노구덕은 점차 거리를 좁혀오는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다, 그 여인이 소피아가 아님을 깨달았다. 많이 닮기는 했지만 군데군데 다른 점이 있었다. 결정적인 것은 소피아보다 다소 나이가 들어 보인다는 것.
그 점을 제외하면, 그녀는 사내의 애간장을 끓게 만드는 매력을 지닌 여인이었다. 그러나 노구덕은 무의식중에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유리알처럼 반짝이는 눈에 일렁이는 독랄함을 엿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발 보다는 그녀의 손이 더 빨랐다.
덥썩.
“헉!”
그녀의 팔에 목줄기를 잡혀버린 노구덕은 긴박한 신음을 내뱉었다.
“소피아? 왜 뒤로 물러서는 거니?”
“아줌마. 이, 이거 좀 놓고 얘기합시다. 대체 뉘시길래…… 꺼어억!”
그의 말은 도중에 끊길 수밖에 없었다. 느닷없이 여인이 두 손으로 목을 졸랐기 때문이다. 그 가녀린 팔에서 나오는 악력은 통나무 같은 노구덕의 목을 걸레처럼 쥐어짤 정도로 거셌다. 아무리 발버둥치고 팔을 떼어내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노구덕은 숨이 턱 막히는 와중에도 충왕각인을 발동시키려 했지만, 그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여느 때라면 그의 뜻이 가는대로 척척 힘을 북돋아 주었을 각인이 지금은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반응이 없었다.
‘이… 미친년. 뭔 여자가 힘이 이리 세? 으으으…….’
“소피아, 표정이 왜 그러니? 언니가 싫어?”
“끄으으으으…….”
정상적인 대답이 나올 리 없었건만, 여인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홀로 문답을 주고받았다.
“그래. 싫겠지. 나만 없으면 권좌는 네 차지가 될 테니까. 호호호!”
“안됐네. 내가 순순히 죽어줄 것 같아?”
“이 요사스런 계집애! 하다못해 이젠 준혁 씨에게 꼬리를 쳐?”
정신병자처럼 혼자 웅얼웅얼 지껄이던 여인의 얼굴은 점점 무섭게 일그러지더니, 나중에는 두 눈에 시꺼먼 증오를 담은 악귀의 형상으로 변해버렸다.
그녀는 눈자위가 튀어나올 것처럼 부릅뜬 눈으로 지독한 저주를 퍼부었다.
“너만… 너만 없어지면 돼! 죽어! 죽어버려! 이 망할 년! 괴물 같으니!”
‘이 정신 나간 년이 뭐라고 나불대는 거야? 암만 봐도 괴물은 너잖아!’
끝내 여인의 손을 떨쳐내지 못한 노구덕은 가물가물하던 의식의 끈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의 의식은 또다시 끝을 알 수 없는 무저갱 속으로 깊숙하게 가라앉았다.
이후로도 비슷한 일이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낯선 공간에서 눈을 뜨면, 어김없이 그 여인이 나타났다. 어떤 말을 주고받든, 어떤 장소에서 깨어나든 결과는 항상 하나로 귀결되었다. 노구덕은 셀 수도 없을 만큼 다양한 수법으로 여인에게 살해당했다.
“소피아, 요새 많이 바쁘지? 내가 직접 탄 차야. 마시고 힘냈으면 좋겠어.”
마시지 않으려고 해도 저절로 손이 움직였다. 실상 그는 눈만 뜨고 볼 수 있을 뿐, 몸은 전혀 의지와 상관없이 행동했다.
아니나 다를까, 독이 든 차를 마신 그는 피를 한사발이나 토하며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감겨오는 망막에 최후로 맺힌 상(像)은, 배꼽을 잡고 속 시원한 웃음을 터뜨리는 여인의 모습이었다.
독살은 그나마 점잖은 방법이었다. 어떤 때는 납치가 되어 수십 명의 남자에게 윤간을 당한 뒤 사지가 잘린 채 사창가에 버려졌던 적도 있었고, 암살자에게 산 채로 조각조각 토막이 나 돼지 먹이로 던져진 적도 있었다.
노구덕은 죽음을 거듭할 때마다 이것이 소피아가 실제 경험한 일임을 깨달았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지금 그는 소피아가 현재까지 살아온 인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물론 죽음은 실제가 아니다. 이 중 대부분은 현실 속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소피아가 꾼 악몽이었다. 그녀의 인생을 낱낱이 체험하다보니 궁금하지 않아도 알게 되었다. 언젠가, 그녀가 언니의 집무실에서 우연히 발견한 낡은 노트. 그것이 이 악몽의 시작이었다. 그 내용을 상기한 노구덕은 자신의 일이 아님에도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지독한 년. 제 동생을 두고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
그 노트에는 지금껏 마음속으로 묻어두었던 소피아에 대한 원망, 두려움, 불안감이 일기 형식으로 빼꼭하게 적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소피아를 탈 없이 죽일 수 있을지, 수도 없이 많은 암살계획이 구체적인 내용으로 서술되어 있어 당장이라도 무리 없이 시행할 수 있을 정도였다.
결국, 그녀가 꾼 악몽들은 언제라도 현실이 되어 나타날 수 있는 일들이었다.
수많은 악몽들이 지나가고, 반복되는 죽음에 점점 무뎌져갈 즈음, 장면이 전환되며 색다른 광경이 나타났다.
화려하게 만발한 꽃밭 위에서 성숙한 소녀와 앳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가 즐겁게 뛰노는 모습이었다. 여자 아이는 서툰 솜씨로 엮은 들꽃왕관을 들고, 까치발을 들어 언니로 보이는 소녀의 머리에 살포시 올려주었다. 한쪽에 서 있던 노구덕은 한눈에 그것이 소피아와 그 언니임을 알아보았다.
‘이런 때도 있었군.’
하긴, 처음부터 사이가 이토록 틀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저렇게 까르르 웃는 천진난만한 소녀들이 그렇게 변한다니……. 한편으로 씁쓸하면서도, 쉬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어린 아이에서 앳된 소녀로, 어린 소녀에서 성숙한 여인으로. 노구덕은 한편의 성장 영화를 감상하듯 소피아의 일생을 직접, 간접적으로 체험했다. 어릴 적, 초경을 맞이해 울상을 지을 때는 소피아에게 저런 시절도 있었구나 싶어 피식거리기도 했고, 박준혁의 밉살맞은 면상이 보일 때면 울화가 치솟기도 했다.
그렇게 차차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비트레이를 오키도의 절대자로 우뚝 세운 그녀가 라이오넬로 이적하고, 그곳의 밑바닥에서 기어 올라와 라이오넬의 실질적 지배자가 되었을 무렵에는, 노구덕조차 그녀의 집념과 능력에 경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최근에 이르러 아이리스를 대상으로 음모를 획책하고, 얼마 전 이성빈과 함께 사단을 일으킨 일까지 두루 살피는 과정 속에서, 노구덕은 소피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런 일을 벌였는지를 모두 알 수 있었다.
‘그랬었나…….’
인간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과, 찾아볼 수 없는 삶에 대한 애착. 그녀의 정신 상태는 더 이상 탈 건더기도 없는 회색 잿더미와도 같았다. 더 이상 의지할 곳도, 생에 대한 미련도 없었으니 이런 짓을 할 수 있었으리라.
비로소 그녀의 심정과 처지를 이해하게 된 노구덕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피아를 용서할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그녀의 사정이 딱하기는 하나, 그것과 신소율이 받은 상처는 별개였다.
그저 그간 궁금했던 점이 해결되었으니 조금 후련한 기분일 뿐.
‘더 이상 볼 건 없군.’
이제 되었다고 마음먹은 순간, 그의 눈앞이 다시 한 번 크게 뒤틀렸다.
잠시 후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차리자,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는 임유진의 조각 같은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구덕 씨? 정신이 드세요?”
“어… 조금 어지러운 것뿐이야.”
“머릿속은 어때? 뭔가 변한 게 있어?”
데모나는 그의 상태에는 일절 관심도 없다는 듯, 대뜸 자기 관심사부터 물었다. 노구덕은 경황 중에도 그녀의 말에 따라 무언가 달라진 것은 없는지 차근차근 점검해 보았다.
“…별로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은데.”
“흠. 네가 워낙 둔탱이라 효과가 느리게 나타나는 걸지도 몰라. 저기 흡혈귀가 있는 쪽을 보면서 아무거나 떠올려 봐. 뭔가 낯선 거라든지…….”
소피아는 아직 깨어나지 못했는지 무릎 사이에 고개를 처박고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눈매를 가늘게 좁힌 노구덕은 다시 한 번 생각에 집중했다. 그녀의 과거를 알게 된 탓인지 몰라도, 새삼 눈에 들어온 소피아의 모습이 처량해 보였다.
‘너도 참…… 불쌍한 녀석이다.’
의식의 세계에서 보고, 겪었던 소피아의 지난 과거를 새록새록 떠올린 노구덕은 슬며시 치미는 동정심을 억누르며 머릿속을 더듬는 일에 집중했다. 그러나 아무리 수고를 들여도 역시 뭔가 달라진 점은 찾을 수 없었다.
‘이거 실패한 거 아냐?’
문득 머리가 지끈거려 잠깐 쉬어야겠다고 생각한 찰나.
꽈앙!
‘허억!’
귓전 바로 앞에 대고 대포를 쏘아올린 듯한 엄청난 굉음이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그와 함께 머리 한쪽이 터져나간 듯 시원한 느낌이 들더니,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생소한 지식들이 뇌를 터뜨릴 기세로 파도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
노구덕은 엄청난 지식의 파도에 휩쓸려서는 정신없이 몸을 허우적거렸다.
‘이, 이건 뭐야? 으아아아!’
마법, 정령에 대한 각종 원리와 주문부터 시작해서 갖은 권모술수와 궤계를 비롯한 속임수, 사람을 부리는 법, 전쟁과 전술에 대한 제반 지식들이 끝도 없이 쏟아졌다. 그 한도 끝도 없이 밀어닥치는 지식의 양에, 이러다가 머리가 뻥 터져버리는 건 아닌지 염려가 될 정도였다.
한편, 밖에서 그를 지켜보던 임유진은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소피아가 있는 곳을 향해 머리를 돌린 노구덕이, 별안간 바보처럼 입을 헤 벌린 채 침을 줄줄 흘리는 꼴사나운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데모나는 염려 말고 지켜보라고 했지만,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보아하니 제대로 된 것 같네.”
“…저게?”
별안간 코를 쑤시는 악취에 밑을 보니, 노구덕의 바지가 노랗게 물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다 큰 어른이 똥오줌까지 지렸는데도 데모나는 별 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쓰지 않던 뇌의 공간이 활성화되고 있는 중이야. 온 신경이 머리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몸의 다른 곳이 느슨하게 풀어진 거지.”
“…….”
그 순간, 노구덕의 헤벌레 벌어져 있던 입이 자물쇠처럼 꾹 닫히고, 썩은 생선처럼 죽어 있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의식을 되찾은 그의 낯빛은 마치 득도한 고승처럼 현기마저 느껴졌다.
“대단해.”
의식이 돌아온 그의 첫마디. 단순한 감탄사였지만, 임유진은 그 안에 담긴 깊은 경이와 찬탄을 느낄 수 있었다.
“저널 정보는 어때?”
“그대로야.”
이미 저널을 훑고 왔는지, 그는 막힘없이 대답했다. 데모나는 아쉽다는 듯 아미를 찡그렸다.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인가…….”
노구덕은 어이가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 방대하게 들어찬 지식은 평생을 훑어도 모자랄 만큼 막대한 양이었다. 새삼 소피아의 천재성을 실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런데 이것이 절반의 성공이라니.
“이게 절반의 성공이라고? 난 지금 소피아의 모든 지식을 흡수했어. 갑자기 천재가 되어버린 느낌이라고.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몰라도 된다고 했잖아. 그보다 밑이나 좀 닦지 그래? 꽤 어울리긴 하지만…….”
“그게 뭔……. 허어억!”
그제야 밑에서부터 폴폴 풍겨오는 구린내를 인지한 노구덕의 얼굴이 핼쑥하게 굳어졌다. 유치원생이었을 적 이후로 겪어보지 못한, 끈적이고 질척거리는 묵직한 덩어리가 그의 바지를 황갈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추천은 저의 원동력이 됩니다.
후술하겠지만 이건 노구덕이 똑똑해졌다기보다… 보조메모리 하나를 얻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소피아가 가까이 있으면 그녀의 머리를 열람할 수 있는 거죠. 노구덕의 머리에 소피아 전용 공간이 생겼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리리플은 차후에 반드시 달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새벽쯤에나 다 ㄹ수 있을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누구게? / 소피아 SSD행…
벌레 / ㄳㄳ
헤픈눈물 / 언제든지 다시 들러주세요~
月夜之主 / 는 아니고 흡혈귀를 SSD로 만들었답니다
에보커 / 휴대용 메모리로…
느린시간 / 감사합니다!
장마와방 / 휴식은 중요하죠 항상 감사합니다
가식적썩소 / 이래봬도 마법재능도 있는 데모나인지라..
슈퍼테크닉 / 안에서 안되면 밖에서 끌어오는거지요
카론느 / 예상하신 것과는 조금 다른 방식이 되었네요 ㅎㅎ
국제경제학 / 머리만 일방적으로 열람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그럴껄 / 머리 업글!
coconet31 / 조언 감사합니다. 독자분들의 댓글은 항상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만 크게 영향은 받지 않습니다. 진솔이 활약은 일부러 안짚고 넘어간 것이 아니라 이번 파트가 끝나면 바로 등장할 예정이지요! 소율이와 소피아 관련 의견은 염두에 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에르시리나 / 100연참은… ㅠㅠ 봐주십시오
나를위한글 / 죄송합니다 ㅠㅠ
호야[虎夜] / 항상 그런 마음으로 쓰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