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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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각자의 속사정
28# 각자의 속사정
고즈넉한 밤하늘이 비치는 창가를 사이에 두고, 두 중년인이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우람한 몸집을 지닌 오크와 다소 마른 듯한 체구의 사내는 아이리스의 중년 동갑내기인 노구덕과 장상기였다.
장상기가 영입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허심탄회한 취중진담을 나누며 서로의 과거를 털어놓고 친구가 된 두 사람은 이렇게 시간이 날 때면 간간이 술자리를 가지곤 했다.
“…노엘 씨랑 서로 보는 눈이 심상치 않던데… 솔로탈출 축하한다.”
“실없는 소리 하지마라. 아직은 서로 알아가는 단계일 뿐이야.”
“오호라. 아직은…?”
“쯧.”
달갑지 않은 주제였는지, 작게 혀를 찬 장상기는 노구덕의 빈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오닉스의 화산’ 탐사에서 복귀한 것이 오늘 오전. 그리곤 오후 내내 장비를 정비한 탓에 몸이 노곤했으나, 그가 그런 몸으로 술이나 한잔 하자는 노구덕의 청에 응한 것은 이 자리를 빌려 그에게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 오는 내내 제수씨에게 왜 그런 거냐?”
“응?”
“눈도 거의 마주치지 않고, 별로 말도 하지 않았잖아. 노골적으로 피하는 게 보여서 보기 불편했다. 제수씨도 이유를 몰라 하는 것 같았고. 섭섭해 하는 게 얼굴에 다 드러나더라. 도대체 왜 그런 거야?”
“으음…….”
노구덕은 바로 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장상기가 뭔가 할 말이 있는 낌새를 보이는가 싶더니, 그게 임유진에 대한 얘기였던 모양이다. 지금의 그로서는 피하고 싶은 화제.
“이번 탐사에서 제수씨가 없었다면 예상 밖의 피해를 입었을지도 몰라. 한 레귤러에서 그렇게 강력한 카름이 두 마리나 동시에 나타나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니까. 아마 여느 탐사대 같았으면 헌터 한둘 정도는 죽거나 다쳤겠지. 우리가 무사할 수 있었던 건 제수씨 덕이야. 안 그래?”
장상기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이번 탐사의 제일 전공은 임유진, 바로 그녀였다. 그가 다 알만한 얘기를 꺼낸 이유는 뻔했다.
‘이런 혁혁한 공을 세운 임유진을 너는 왜 홀대하느냐?’
이 말을 돌려 말하는 것이리라.
확실히 노구덕은 복귀 내내 다른 멤버들이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임유진을 피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녀가 말을 걸면 짧은 단답식으로 답했으며, 일부러인지는 몰라도 임유진이 있는 쪽으로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돌아오는 길 동안 줄곧 자신만의 상념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노구덕 또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연유가 있었다.
“…그렇지. 유진이… 오늘 대단했지. 바로 그게 문제야.”
“뭐?”
“오늘 내가 유진이를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는 줄 알아?”
“……?”
“난 죽었다 깨어나도 저렇게 되지는 못하겠지. 그렇게 생각했어. 내가… 남편이 되어서 마누라한테 열등감을 느꼈단 말이야.”
열등감. 자격지심. 마그마 웜의 사체를 딛고 오연히 서 있는 그녀를 지켜보며, 노구덕의 머릿속에 팽배했던 감정들이었다.
“열등감이라니…….”
장상기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비단 그것은 노구덕만 느낀 감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태생부터가 ‘강함’을 부귀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게 헌터란 자들 아니던가. 오늘 임유진이 보여준 신위는, 헌터라면 어느 누구라도 동경할만한, 질투할만한 힘이었다.
노구덕은 무기력함이 느껴지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와 비슷한 일이 예전에도 있었지. 상기 너, 김정인이라고 알지?”
“아아. 모를 수가 있나. 아이리스가 배출한 최고 아웃풋인데. 비록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지금 라이오넬에서 잘 나가고 있는 걸 보면 알겠지만, 그놈도 천재였어. 드래프트 때부터 함께 했으니까… 바로 옆에서부터 쭈욱 지켜보면서 알았지. 이 녀석은 내가 닿을 수 없는 그릇을 가졌다는 걸. 그놈이 유진이와 첫대면에서 뭐라고 했는 줄 알아?”
“흠…. 모르겠는데.”
“자기는 한 달이면 유진이를 이길 수 있을 거라더군. 믿어져? 드래프트 회장에서 이제 막 나온 풋내기가 그런 말을 했단 게.”
듣고 있던 장상기는 피식 입가를 터뜨리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허세겠지. 그래서 그 녀석이 한 달 뒤에 제수씨를 정말로 이겼나?”
“아니. 싸워 보지 않았으니 결과는 모르지. 하지만 아마도 유진이가 이겼을 거야. 나도 알아. 그건 허세였어. 하지만… 만약 정식으로 한 달 내에 유진이를 이기는 걸로 내기를 했다면, 또 모르지. 결과가 바뀌었을지도.”
“설마… 아무리 그래도 신출내기 헌터가 그럴 순 없어.”
“그렇지. 그런데도 혹시나… 하게끔 기대하게 만들었던 녀석이 바로 그 녀석이란 말이야. 그런 허세를 부려도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 그게 김정인이란 녀석의 도량이겠지.”
노구덕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니, 장상기는 김정인이란 헌터에 대해서 괜한 호기심이 생겼다.
“자네 말대로라면 대단한 카리스마인데. 그런 녀석이 사이비교주라도 하면 볼만하겠어. 따르는 여자들도 많았겠지? 소율이가 안 넘어간 게 신기하군.”
“뭐… 그 녀석은 취향이 특이하니까. 안 그래도 정인이 녀석이 아이리스를 나갈 때 자기 여자 한 명도 같이 데리고 나갔어. 윤희지라고… 라이오넬 3군에 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요새는 통 소식을 찾아보기 힘들더라고.”
“3군에서 실력을 쌓고 있거나 어디 임대라도 갔나보지. 그 김정인이라는 놈이 특이한 거지, 보통은 그게 일반적이야. 하여튼 갑자기 그놈 얘기는 왜? 김정인에게 느꼈던 열등감을, 이번에는 제수씨에게 느꼈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허, 못난 사람 같으니.”
평소에는 골렘에만 몰두하는 외골수 마법사답게 과묵한 장상기지만, 술만 몇 잔 들어가면 올케를 대하는 시누이처럼 말이 많아지곤 했다.
“그래. 네 말대로 난 못난 놈이야……. 돌이켜보면 무슨 배짱으로 프라임리그에 올라가겠다고 나불댄 건지… 어쩌면 나도 김정인, 그놈처럼 할 수 있다고… 한순간 꿈에 취했던 게지. 흐흐흐…….”
“…진심이냐?”
노구덕은 흐릿한 눈을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달이 뜨지 않는 밤, 먹먹하게 물든 저 밤하늘이야말로 현재 그의 마음이었다.
“전부 홧김에 했던 말이었어. 그때는 김정인, 그놈 하는 짓이 너무 열 받아서… 지금은 그저 그래. 많이 가라앉았지. 이 나이 먹기까지 무시당하고, 이용당했던 게 한두 번도 아니고… 그것만 특별할 게 뭐가 있겠어?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은 다 그래. 보통은 다들 그렇게 물 흐르듯 넘어가고, 잊어버리며 산다고…….”
누군가에게 무시당해서, 언젠가 그 코를 납작하게 해주겠다고 이를 갈며 다짐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당시의 굴욕은 희미해지고, 그때의 다짐은 아련하게만 남아 나중에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된다. 그게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노구덕 또한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었다. 장상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수긍했다.
“하긴… 이거저거 다 마음에 담아두면 피곤해서 어떻게 살까. 우리 나이쯤 되면, 그런 건 자연히 깨닫게 되지.”
“일전에 가이탄이 물어본 적이 있어. 왜 오너로 만족하지 못하고 굳이 헌터일을 하느냐고… 그때는 대충 얼버무려서 대답했지만, 사실 이쯤에서 멈추고 싶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야. 그냥 다 접어버리고, 마누라들 데리고 조용히 살고 싶다고 몇 번이고 고민했지.”
“남은 급료만 제대로 지불하면 당장 아이리스를 해체해도 난 뭐라 안 해.”
“인마, 너한테 돈 주기 싫어서라도 해체는 안한다.”
두 사람은 시답잖은 농지거리를 주고받으며 픽 실소를 터뜨렸다.
“분노도 희미해졌고, 의지도 약해졌다면, 뭐가 문제지? 그냥 네 마음 가는 대로 하면 되잖아. 클럽을 해체하든, 지금처럼 미들리그에서 안주하며 살든.”
그 대답은 바로 나왔다.
“그야 유진이를 실망시킬 순 없으니까.”
“허. 제수씨는 네가 이대로 산속에 들어가 나무꾼이 된다 해도 기꺼이 따라갈 여자야. 그걸 몰라서 하는 소리야?”
“알지. 하지만… 날 믿는다고 했거든. 그런데 이제 와서 다 내팽개치면 날 얼마나 근성 없는 놈으로 보겠어? 설령 그러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찝찝해서 못 견디겠지.”
“그래서 억지로 하기 싫은 일을 한다? 쯧쯧. 엄청나게 불순한 의도로군.”
노구덕을 타박하는 장상기의 음성에는 미약한 실망감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항상 멋있고, 돋보이고 싶은 사내의 심정을 어찌 모를 것인가.
“난 그릇이 작은 놈이야. 그래서 정인이 녀석과도 화합하지 못하고 떠나보내야만 했지. 유진이도 그렇게 잃어버리는 건 아닌지… 요즘 자주 그런 생각이 들어. 자의든, 타의든 간에… 어쩌면 유진이가 내 곁을 떠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 솔직히… 내겐 너무 과분한 여자잖아?”
“잘 알고 있네.”
“흐흐흐… 보물을 가지는 것보다 지키는 게 더 힘들다고 하더니, 그 말이 딱 맞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노심초사하게 된다고. 내겐 유진이가 그런 존재야. 오늘도 봤지? 그건 약과야. 자그마치 십존에 다다를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여자라고.”
노구덕은 약간 붉어진 눈으로 마른 입술을 잘근잘근 짓씹었다. 장상기는 얼핏 그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초조함의 일부를 엿본 느낌이었다.
‘애처가도 이 정도면 중증이군. 아니… 제수씨 정도면 그럴 만도 하지. 이 녀석, 이러다 의처증이라도 생기는 거 아냐?’
헌터로서 뛰어난 것도 아니고, 남성으로서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남자가 모든 면에서 완벽한 여자를 아내로 맞았다. 아내가 너무 뛰어나니 상대적으로 남자는 작아질 테고, 주변에서는 끊임없이 아내를 노릴 터. 당연히 하루하루가 걱정, 불안, 초조의 나날일 것이다. 그러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심정적으로는 그의 마음이 십분, 백분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노구덕을 본인을 위해서라도 이런 갈팡질팡하는 심리 상태는 바람직하지 않았다.
“생각을 좀 바꿔보는 게 어때?”
“…생각을 바꿔?”
“그래. 넌 아직도 한국에서의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지금 너는 전혀 다른 세계의… 미들리그 클럽 오너인데도 말야. 네가 여전히 한국의 그저 그런 아저씨로 남아있다면 당연히 제수씨는 과분한 여자야. 하지만 프라임리그를 목표로 하는 신흥 클럽의 오너라면 말이 다르지.”
노구덕은 무슨 소리냐는 듯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뭐냐, 그게. 말장난 하는 것도 아니고.”
“말장난이 아냐. 사실을 말하는 거지. 넌 이미 헌터로서 절반은 성공했어. 자기 클럽을 가졌으니까. 돈도 많잖아. 100만 골드… 하다못해 10만 골드도 평생 만져보지 못하는 헌터들이 널린 마당에. 평생 미들리그, 스몰리그만 전전한 내 입장에서 보면 넌 정말 배부른 소리를 하는 거다.”
“음….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 미안하다.”
“내게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 자신감을 가지라고. 지금이야 저울추가 제수씨 쪽으로 조금 기울어 있다지만, 그거야 차차 맞춰나가면 될 일이야. 프라임까지 갈 필요도 없어. 당장 다음 시즌에 아이리스가 빅리그로 올라가면 상황은 완전히 역전될 테지. 빅리그 클럽 오너라니. 그건 일반 헌터들에게는 꿈이나 다름없다고. 혹시 알아? 네가 빅리그 오너가 되어서, 어디 연맹의 감투라도 쓰게 될지.”
장상기는 이왕에 내친걸음, 사방에 침을 튀겨가며 열심히 입을 놀렸다
“그리고…….”
“상기야, 됐다. 그만해도 돼. 충분히 알아들었으니까.”
“…그래서, 의욕이 좀 생기냐?”
장상기의 조심스런 물음에, 노구덕은 다소 김 빠진 듯한 미소로 화답했다.
“바보냐. 내 나이가 몇인데… 겨우 말 몇 마디에 으쌰으쌰 할 것 같았으면 고민하지도 않았을 거다. 그래도 뭐, 위로는 됐다. 고맙다.”
“고맙긴 무슨……정신 차렸으면 제수씨한테 가 봐라. 여기서 시간낭비하지 말고.”
노구덕은 느릿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안 그래도 그럴 참이다. 우선 다른 용무부터 마치고.”
“다른 용무? 제수씨 위로해주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냐?”
“그건 아니지만… 결심이 약해지기 전에 후딱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나 같은 인간은 내일이면 또 마음이 변할지도 모르거든. 상기야, 미안하지만 나가면서 두 명 좀 불러줄래? 방 밖에 사용인이 있을 테니, 내 대신 말만 전해주면 돼.”
“호출이냐? 누구?”
“소피아와 데모나. 내가 급히 찾는다고 전해줘.”
장상기에게 부탁하는 노구덕의 얼굴은, 지금까지 술을 몇 병이나 비운 사람 답지 않은 진지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 작품 후기 ============================
재밌게 보셨다면 추천/코멘 부탁드립니다.
구덕이가 뭔가 모종의 결단을 내렸네요.
다음편은 이르면 오늘 자정, 늦으면 오늘 새벽쯤에 올리겠습니다.
좋은하루 되세요!
애독자C / 마누라가 너무 능력있어서 탈… 그래도 나름 소규모 기연(?) 얻어서 여기까지 온 건데요!
점심밥 / 전 셔터맨이 되고 싶은데…ㅠ
장마와방 / 아들 딸 구별말고 10명만 낳아서 클럽 1군으로?
느린시간 / 여러가지 복합적인 감정이죠!
에보커 / 평범한 사람이니까요…
카론느 / 사기급 벌레정수라! 뭐가 있을까요?
이상향을꿈꾸며 / 쓰랄 – 프라임급 / 노구덕 – 미들리그 평타… 갈길이 멀군요
판광(난나야) / 지렁이가 복수의 심장을 가졌다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月夜之主 / 그런 걸로는 위안이 안될듯 ㅠㅠ
유령캐 / 아직 많이 부족하지요
은신설야 / 지렁지렁 감사합니다!
리바이버스 / 꾸준히 강해지고는 있어요. 속도가 좀 느려서 그렇지…
코드표 / 지금도 ‘평화주의자’ 디버프를 가진 상태라는게 함정이네요..
콜마 / 오크도 심각한데 촉수까지! 인간임을 포기??
서스카렌 / 크으… 굿마인드!
골드메달 / 마누라 단속만 잘해도..
kred / 구덕이가 뭔가 모종의 결심을 했군요
때구니™ / 언젠가는 많이 강해질 겁니다 ㅠㅠ 계속 약한채로 놔두진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