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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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반등(反騰)
“자네도 슬슬 현장직에서 빠질 나이 아닌가. 평생 크래들타운 변두리로만 내돌려지다가 은퇴할 셈인가? 아니, 몸이나 성해서 은퇴할 수 있으면 차라리 다행이겠군.”
“…….”
“자네야 자기 소신만 지키며 살면 그만이겠지만, 제수씨와 아이들은 무슨 죄란 말인가?”
“으으음…….”
“이미 자네의 삶은 자네 혼자만의 것이 아니야. 신중하게 생각하도록 하게. 말단직에서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신념을 운운하느니, 고위직에 올라 제대로 뜻을 펼치는 게 더 사내다운 삶이라고 보네.”
‘…그럴 리 없지.’
언어도단이었다. 노구덕은 말을 하면서 속으로 쓴웃음을 흘렸다. 그가 멜릭에게 권하고 있는 것은 엄연한 불의(不義)였다. 멜릭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그 또한 불의에 가담한 공범이 된다.
높은 곳에서 밝은 신념을 떨친다? 구변은 좋다. 하지만 한 터럭이라도 어둠에 물든 자가 외치는 정의는 그 자체로 가치를 상실한, 공허한 울림일 뿐이다. 노구덕도, 멜릭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다만 서로의 체면과 입장 때문에 겉으로 드러내어 말하지 않을 뿐. 이에 대한 반론을 펴지 않는 것을 보면, 이미 멜릭의 마음은 반쯤 기울어졌다고 볼 수 있었다.
‘어차피 성인군자로 살 생각은 없었으니.’
애꿎은 친구를 끌어들인 것 같아 미안하기는 했다. 하지만 선택은 어디까지나 멜릭의 몫. 만일 그가 이 제안을 거부할 경우, 미리 물색해 놓은 대체자를 그 자리에 앉히면 그만이었다. 사실, 소피아가 추천한 1순위는 멜릭이 아닌 그 대체자였다. 그럼에도 굳이 노구덕이 멜릭에게 이런 제안을 한 것은, 그 같은 인물이 크래들타운 같은 소도시에서 묻혀 지내는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이었다.
멜릭은 한참의 장고 끝에,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와 인연을 맺은 게 내 삶에서 불행이 될지, 행운이 될지… 도통 알 수가 없군.”
“그 말은…….”
반색을 한 노구덕이 입을 연 순간, 테이블 주변 공간을 감싸고 있던 방음막이 출렁이며 장대한 체구의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짧게 친 희끗희끗한 머리에, 각진 턱을 굳게 다문 호방한 인상의 노인은, 주름진 얼굴과는 달리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불쑥 방음막 안으로 들어선 노인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는 노구덕과 멜릭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인상만큼이나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와하하핫! 아이리스 오너가 기를 쓰고 추천하는 인사가 누군가 했더니, 크래들타운의 아웃사이더 멜릭이었군!”
“에, 에드먼드 부청감님!”
갑작스런 거물의 등장에 크게 기함한 멜릭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바짝 얼어서는 경례 자세를 취했다. 소도시의 자경단 부대장과 중도시의 치안청 부청감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방음막 너머, 테이블로 쏠리는 몇몇 이들의 시선을 느낀 에드먼드 부청감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손을 들었다.
“이 회동을 동네방네 소문이라도 낼 셈인가? 그만하고 자리에 앉게.”
“예, 옛!”
“이 사람, 사석이니 좀 편하게 있으면 안 되나?”
땀을 뻘뻘 흘리며 엉거주춤 자리에 앉는 멜릭을 두고, 노구덕은 정중하게 에드먼드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부청감님.”
“하하하! 이거 너무 늦어서 미안합니다. 아이리스 오너.”
그는 빙그레 웃는 낯으로 노구덕의 악수를 받았다. 기본적으로 헌터, 특히 클럽의 고위 관계자와 도시의 관료는 직위에 상관없이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였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공대를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에드먼드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멜릭을 보며 농담조로 말했다.
“보아하니 저 친구는 제가 온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군요.”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황망히 손을 내저은 멜릭은 노구덕 쪽을 쳐다보며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다.
“흐흐. 그만하고 자리에 앉으시지요. 이러다 저 친구 체하겠습니다.”
“어이쿠! 이거 내가 큰 실수를 했군요. 기껏 값비싼 진미를 먹었는데, 그러면 안 되지!”
멜릭은 너스레를 떨며 부청감과 농담을 주고받는 노구덕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정녕 저 오크가 마녀의 산에서 빌빌대던 그 노구덕이 맞단 말인가? 미들리그에 올라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치안부청감과 농담 따먹기를 하는 사이가 되다니. 갑자기 노구덕이 다른 세계의 사람으로 보였다.
“…그건 그렇고, 설마 그 대쪽 같던 멜릭이 이런 자리에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그려.”
뼈가 있는 듯한 에드먼드의 말에, 멜릭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졌다. 어쩐지 ‘결국 너도 별수 없구나.’라고 들렸기 때문이다.
사실 멜릭이 크래들타운의 상관들에게 미운오리 취급을 받긴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크래들타운의 일. 에드먼드 자체는 멜릭에게 별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저 크래들타운에 별 희한한 종자가 있구나 싶어 치안총회에서 몇 번 눈여겨봤을 뿐.
“아, 힐난하려는 의도는 아니라네. 그래봐야 내 얼굴에 침 뱉기 아니겠나. 다만 천생무인이라는 자네가 나타난 것이 좀 의외라서.”
“그, 그렇지요….”
멜릭은 식은땀을 흘렸다. 마음이 반쯤 기울어있긴 했지만, 아직 확실한 답변을 주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영부영 돌아가는 꼴을 보니 이미 공모자가 되어버린 것 같지 않은가.
그때, 노구덕이 끼어 들며 멜릭의 입장을 대변해주었다.
“부청감님, 이 친구는 아직 자세한 사정을 모릅니다. 사실 아직 확답을 준 것도 아니지요.”
“으응? 허허, 내가 너무 앞서나간 겁니까?”
“마음은 있는 것 같은데, 확신이 부족한 것 같더군요.”
“흐으음. 확신이라…….”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는 턱수염을 쓰다듬던 에드먼드는 아직도 잔뜩 기합이 들어가 있는 멜릭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은 모르겠고, 우리가 품고 있는 청사진이라면 제시해 줄 수 있지. 어떤가? 한번 들어보겠나?”
“…예.”
거부권이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에드먼드와 노구덕이 대체 무슨 일을 꾸미는지 궁금하기도 한 멜릭이었다.
에드먼드는 말하기 앞서 크게 숨을 들이쉬며 가슴을 부풀리더니, 이내 폐부의 찌꺼기를 모조리 토해내려는 듯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요란하게 호흡을 가다듬은 그는 깍지를 낀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15년. 딕툼의 리그가 세인트 나이츠, 정무문, 호크 레인저스에 의해 3등분이 된 세월일세. 그와 함께 딕툼이란 도시도 세 조각으로 절단이 나버렸네. 리그와 그에 속한 클럽, 그리고 도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니 당연한 거지.”
멜릭도 그 정도 기초 정세는 알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비단 딕툼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그 원인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세 개의 파벌로 분화된 대도시 칼립스의 정계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치안청, 행정청, 그리고 상인조직을 포함한 암상. 도시의 발전을 위해서는 이 세 세력의 협력과 연대가 필수적이지. 하지만 각자 다른 곳에 선을 대고 있는 탓에, 세 세력은 오랜 세월 동안 서로를 배척해왔네. 행정청은 사사건건 치안청의 일에 간섭하고, 치안청은 암상의 상인들을 잡아들였으며, 상인들은 관료들의 비리를 빌미로 협박을 일삼았지. 그 악순환이 십 년이 넘도록 반복되었어.”
“…….”
“그 결과 고통 받은 것은 죄 없는 딕툼의 시민들이었네. 후후,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진 셈이지. 난 더 이상 이런 상황을 묵과할 수 없네. 이 되먹지 못한 악순환의 고리는… 이쯤에서 끊어내야 하지 않겠나?”
멜릭의 눈꺼풀이 점차 말려 올라가며, 작은 눈알이 튀어나올 듯 커다래졌다. 이야기의 진행 방향은 그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지? 이 고착화된 정세를 무너뜨리겠단 말인가? 어떻게? 무슨 수로?’
오래전에 식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가슴에 때 아닌 열기가 찾아들었다. 멜릭은 두근두근 떨리는 심장을 억누르며 에드먼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세 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집을 무너뜨리는 가장 쉬운 방법이 뭔지 아나? 간단해. 기둥 하나를 쓰러뜨리는 거라네. 우리가 하려는 것도 이와 같아. 치안청과 암상이 연합하여 행정청을 무력화시키는 것이지. 물론 무력화시킨다는 것이 행정업무의 마비를 의미하진 않네. 그래서야 거사를 벌이는 의미가 없으니까… 또, 그런 일이 있다 해도 일시적일 뿐이야.”
“그,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가능하지 않다면 계획 따위는 세우지 않았겠지. 그렇지 않나?”
에드먼드의 박력에 압도된 멜릭은 입을 다물고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처음 테이블에 자리하는 에드먼드를 보았을 때만 하더라도, 솔직히 실망감이 컸던 멜릭이었다.
딕툼 치안청의 부청감 에드먼드가 누구던가. 일명 ‘호랑이 에드먼드’라 불리며, 그처럼 말단 자경단원에서부터 시작해서 까마득한 고위직까지 올라간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게다가 나이답지 않은 근육질 몸매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아직까지 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딱 봐도 남자 중의 남자라는 풍모를 가진 인물이 암상과의 뒷거래 같은 일에 동참하다니……. 알게 모르게 에드먼드를 존경하고 있었던 멜릭으로서는, 우상의 치부와 맞딱뜨린 것 같아 조금 침울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지도 못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을 줄이야….’
딕툼의 치안청 또한 사람이 사는 곳. 당연히 파벌이 없을 리 없었다. 그가 알기로, 딕툼 치안청의 라인은 크게 두 개로 나뉘었다.
치안청감 하딘과 치안부청감 에드먼드의 파벌.
전자는 관료학교를 수료한 엘리트들의 파벌이었고, 후자는 병사, 자경대원 등 현장직 출신 관료들의 파벌이었다. 세력비를 따져보면 6 : 4 정도로 하딘의 파벌이 우세했고, 레인저스 오너인 막심도 하딘 쪽에 좀 더 공을 들이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에드먼드의 파벌이 외부의 세력을 끌어들인다? 그것도 오랜 앙숙이었던 암상의 세력을? 이건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상인들을 믿으십니까? 그들은 계산에 따라 얼마든지 뒤에서 칼을 꽂을 수 있는 박쥐 같은 인간들입니다. 어쩌면 부청감님과 접촉한 것을 구실로 부당한 요구를 할 수도 있고요. 부청감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중간에서 중재 역할을 해 줄 사람이 필요했던 거라네.”
“중재자라니요?”
“아이리스 오너 말일세. 지금부터는 아이리스 오너가 설명을 해 주는 게 좋을 듯 싶군.”
“…그러지요.”
에드먼드로부터 발언권을 넘겨받은 노구덕은 그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신중한 낯빛으로 멜릭을 마주보았다.
“자네도 알다시피 난 크래들타운 시절부터 노예사업에 손을 댔고, 최근에는 딕툼의 암상조직으로부터 몇 개의 사업체를 받아 관리하고 있어.”
“암상으로부터 사업체를 받았다고? 그건… 금시초문이군.”
“흠, 내가 말을 안했던가? 하여튼, 그만큼 나도 암상과 사이가 나쁜 편은 아니라 이거지. 왜냐면 그들이 원하는 걸 내가 가지고 있거든. 바로 퀸즈가든으로 통하는 유통망 말이야.”
노예의 것은 곧 자신의 것이라는 지론에 따라, 소피아 소유의 유통망을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꿀꺽 삼켜버린 노구덕이었다.
“…그렇군. 퀸즈가든인가.”
멜릭은 이제 더는 놀랄 기력도 남아 있지 않은 듯, 힘없이 중얼거렸다. 변방의 일개 자경단원인 멜릭도 퀸즈가든의 명성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무려 십존의 일인인 서리여왕 하유라가 직접 간판을 내건 초대형 종합쇼핑센터. 그 말을 들으니 이 모든 상황이 쉽게 이해가 되었다.
“그렇지. 이제 이해가 되나? 퀸즈가든의 유통망이 내 손에 있는 이상, 암상으로부터의 배신은 걱정할 필요가 없단 소리네.”
“…음.”
그는 어지럽게 뒤죽박죽이 된 머릿속을 천천히 정리했다.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지만, 결국 중심이 되는 내용은 하나였다. 치안청과 암상을 아우르는 새로운 세력의 발족. 말을 들어보면 암상 쪽에서도 전부가 노구덕에게 가담한 것은 아닐 터. 그렇다면 이 새로운 세력은 암상의 일부 세력과 치안청 에드먼드의 파벌이 결합한 형태라 할 수 있었다.
‘더해서 리그 5위의 클럽 아이리스까지…….’
비밀동맹을 맺은 이상, 각자의 터전에서 세를 불리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치안청은 암상의 뒤를 봐주고, 암상은 에드먼드 쪽 인물들에게 막대한 뒷돈을 뿌린다. 이런 상부상조를 통해 세를 키워나가면, 머지않아 치안청에서도, 암상에서도 동맹세력이 주류(主流)가 되리라.
그리고 그때가 오면… 십오 년을 이어온 딕툼의 트로이카(Troika) 체제도 끝을 고할 것이다.
마침내, 궁리를 마친 멜릭은 바짝 메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하겠습니다. 그 일, 저도 끼워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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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보셨다면 추천/코멘 부탁드립니다.
이전에 미리 공지했던대로.. 개인사정상 11 12 13 14 일은 사실상 휴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연재를 시작하고 하루도 휴재를 한적이 없는데 그 기록을 여기서 깬다니..
무척 아쉽네요..
정해진 날이 끝나면 다시 연참을 달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죄송합니다 ㅠㅠ 좋은 주말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