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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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녹스의 폐허
38# 녹스의 폐허
녹스(Nox)는 먼 옛날, 고대 서부왕국의 번창했던 도시의 이름이었다. 한때는 상주하는 인구수가 수만 명에 이를 정도로 크게 번성했던 도시였지만, 예고 없이 찾아온 대홍수로 인해 통째로 몰살을 당한 곳이었다.
이제는 과거 도시의 지하에 건설되었던 하수도만이 남아, 과거 번성했던 도시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곳. 지금은 그마저도 오래 전 발생한 이레귤러에 의해 괴물들의 서식지가 되어버린 장소. 그곳이 딕툼의 S등급 레귤러, 녹스의 폐허였다.
하수도라는 탐사지역 특성상, 이번 탐사대의 인원편성은 기존의 1군에서 약간의 변화를 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봤자 대형 나무줄기를 소환하는 것이 주특기인 데모나의 빈자리를 김진솔이 채우고, 신소율 대신 나타샤가 참여한 정도였지만.
사실 굳이 신소율 대신 나타샤를 데려갈 필요는 없었다. 클래스도 겹치는데다, 숙련도의 차이만 있다뿐이지 익힌 기술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 익힌 벌레교단의 비전을 하루라도 빨리 실전에서 시험해보고 싶다는 나타샤 본인의 강력한 요청도 있었고, 어째서인지 풀 죽은 얼굴로 이번 탐사에서 빠지고 싶다하는 신소율의 말에 떠밀리다시피 그녀들의 청을 들어준 것이었다.
후에 실렌이 귀띔을 해 준 바에 의하면, 신소율이 나타샤에게 X침을 시도했다가, 그 뒤 엄청나게 높아진 훈련강도 때문에 매일매일 초주검 상태가 되어 어기적거린다는 모양이었다. 아마 훈련강도를 낮춰주는 조건으로 모종의 딜(Deal)이 있었던 것 같았다.
‘쯔쯧. 그러게 왜 그런 장난을 쳐서는. 어째 날 보내면서도 그렇게 좋아하는 눈치더라니.’
탐사대를 배웅할 때, 해골처럼 움푹 파인 퀭한 눈으로 희희낙락거리던 신소율을 떠올린 노구덕은 쓴웃음을 지었다.
높은 강도로 훈련하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지만, 고된 훈련을 모두 소화하고 그 결실을 온전히 체득할 역량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빠르게 강해질 수 있는 왕도(王道)였다. 그리고 신소율에게는 그러한 역량, 즉 높은 잠재력이 있었다. 아마 이대로만 간다면, 이번 시즌이 끝나기 전까지 나타샤에 근접, 혹은 비등한 수준까지 강해질 수 있으리라. 그러고 보면, 신소율 또한 노구덕 못지않게 벌레교단의 비전 덕을 톡톡히 본 수혜자였다.
‘아, 나 정도는 아닌가.’
잠깐 쓸데없는 생각을 했던 노구덕은, 이내 출발 전날 소피아와 나누었던 대화를 회상했다.
어제 저녁, 노구덕과 소피아는 블랙 랩터가 참사를 당했던 당시의 영상기록 사본을 구해와 면밀한 분석을 하고 있었다.
내내 심각한 표정으로 영상수정 안을 들여다보던 소피아는 지루하게 앉아 있던 노구덕에게 물음을 던졌다.
“주인님, 조금 이상한 점… 못 느끼셨어요?”
“이상한 점이라고?”
“네. 영상을 처음부터 한번 보세요.”
소피아의 말을 들은 노구덕은 얼른 흘러내린 침을 닦고 눈곱이 낀 눈으로 영상수정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영상 속에서, 블랙 랩터의 탐사대는 흉측한 트롤(Troll) 무리와 싸우고 있었다. 탐사대는 열 명 전원이 방진을 펼친 상태였고, 다른 놈들보다 덩치가 큰 대장 트롤이 이끄는 일곱 마리의 트롤 무리는 탐사대가 형성한 방진 주위를 마구잡이로 난타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트롤이 휘두른 몽둥이에 가슴팍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전사 한 명이 피화살을 뿜으며 나자빠지는 것이 보였다.
‘흐음. 딱히 눈에 띄는 건 없는데.’
이미 몇 번이고 보았던 영상인지라, 노구덕은 별 감흥 없이 그 장면을 보아 넘겼다.
이후로도 몇 번의 위기가 있었지만, 블랙 랩터의 탐사대는 노련한 헌터들답게 방진을 유지하며 트롤 무리를 차근차근 하나씩 쓰러트려나갔다. 처음에 나자빠진 전사처럼 도중에 부상을 입었던 인원들도 동료들의 비호 아래 치유 주문으로 부상을 회복하고 방진에 합류한 상태였다.
그리하여 삼십 분 쯤 시간이 지났을 땐, 남은 트롤 무리는 대장 트롤을 합쳐 세 마리가 전부였다. 반면 탐사대는 대부분의 헌터들이 상당히 지쳐 있긴 해도 건재한 전력이었다. 누가 봐도 탐사대의 완승이 확실시되는 상황.
반전은 거기서 시작되었다.
앞으로 일어날 상황을 알고 있는 노구덕은 눈에 더욱 힘을 주었다.
‘쿠와우우우–!’
느닷없이 트롤 한 마리가 커다란 울음을 토해내며 이리저리 몸을 뒤틀었다. 꼭 발정한 수말을 보는 것 같았다. 몇 초가 지난 후, 광란을 멈춘 놈은 입에서 침을 질질 흘려대며 단독으로 탐사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뭐, 뭐야? 광폭화인가?’
‘타우로! 네 쪽으로 간다! 막앗!’
‘그래봤자 트롤 한 마리야! 당황하지 마!’
당황한 헌터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러나… 광란을 멈춘 놈은 단순한 트롤 한 마리가 아니었다.
꽈아앙! 우지직!
‘끄허어… 츠아아악!’
‘타우로!’
강판을 몇 겹으로 겹친 타워실드가 허망하게 꿰뚫렸다. 믿을 수 없게도, 단순한 주먹질로 방패를 뚫어버린 놈은 그 속에 웅크리고 있던 전사의 가슴팍을 넝마처럼 헤집어놓았다. 시뻘건 핏물이 튀기며 근육이 드러나고, 그 안의 가슴뼈가 박살이 났다. 순식간에 펄떡이는 심장을 놈에게 강탈당한 전사는 끔찍하게 일그러진 낯으로 털썩 무릎을 꿇었다. 즉사였다.
탐사대의 서열 2위이자, 부대장을 역임하고 있던 타우로의 죽음을 목격한 블랙 랩터의 탐사대는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다.
‘타, 타우로가 죽었어!’
‘어떻게 저럴 수가…!’
‘말도 안 돼! 대장 트롤보다 훨씬 세잖아!’
‘타우로오오–! 사제! 사제들은 뭐하고 있어!’
견고하던 방진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제 기능을 상실한 뒤에는, 일방적인 사냥의 시작이었다. 탐사대 최고의 방어력을 자랑하던 전사가 단 일격에 방패와 함께 격살되었다. 탐사대에는 피에 취해 제멋대로 날뛰는 트롤을 막을만한 헌터가 아무도 없었다. 공포에 질린 헌터들은 동료들을 내버리고 각기 살길을 찾아 왔던 길로 죽을 힘을 다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동료들의 살길을 열어주기 위해 자리를 지키는 이가 있었다. 탐사대의 대장인 박도훈이었다.
‘제길! 내가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보겠어!’
‘도, 도훈 씨? 죽을 셈이에요? 혼자서 무슨 수로 저 괴물을 상대해요!’
마법사 로브를 입은 여인의 말에, 박도훈은 품속에서 꺼낸 스크롤을 거칠게 찢어버렸다. 그러자 붉은 빛무리가 일며, 그의 온몸에서 수증기 같은 검푸른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그것을 본 마법사 여인은 저도 모르게 절박한 외침을 토해냈다.
‘레이지 주문! 정말 미쳤군요!’
‘혜영아, 실랑이 할 시간이 없다. 너도 어서… 크으으윽!“
까아앙!
박도훈은 채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사납게 달려오는 트롤과 맞서야 했다. 타우로의 죽음에서 힌트를 얻었는지, 그는 정면으로 트롤의 공격을 맞받지 않고 요리조리 놈의 공격을 흘리거나 피해내는 식으로 시간을 끌었다. 실로 절묘한 검술과 몸놀림이었다. 가이탄을 2군으로 밀어내고 블랙 랩터의 1군 리더를 맡은 실력자다웠다.
‘도훈 씨…!’
우두커니 서서 박도훈과 트롤의 치열한 접전을 지켜보고 있던 마법사 여인은, 갑자기 아랫입술을 꽉 깨물더니 영상수정이 있는 곳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녹화용 수정을 착용하고 있었던 헌터와 시선을 맞춘 것이었다.
‘밀튼 씨. 뒷일을 부탁해요.’
‘예? 이혜영 헌터!’
‘도훈 씨만 남겨놓고 갈 순 없어요! 죽어도 같이 죽을 거예요!’
악에 받쳐 소리친 여인은 이를 악물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허공에 두 개의 마법진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듀얼 스펠을 전개하는 듯했다. 가까이 접근한 나머지 트롤들과 홀로 맞서는 가녀린 여마법사의 뒷모습은 비장하면서도 처량하기 짝이 없었다.
‘제… 제기랄…….’
누구에게 하는 욕설일까. 여마법사에게 밀튼이라 불린, 영상수정의 주인은 발걸음이 차마 떨어지지 않는지 몇 번이고 머뭇거렸다. 하지만, 이내 영상수정에 담긴 박도훈과 이혜영의 전투 장면이 서서히 멀어지는 것으로 보아 그 역시 도주를 택한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영상수정의 방향은 도주로 쪽이 아닌, 최후의 접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을 여전히 향해 있었다.
쾅… 쾅…….
까아앙…….
거리가 벌어지면서 더 이상 두 사람이 전투를 벌이는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두 사람이 생존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눅눅하게 젖은 공기를 타고 아련히 들려오는 쇳소리와 굉음뿐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끼아아아아아…….’
찢어지는 듯한 여인의 단말마를 끝으로, 통로 저편에서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영상수정에 녹화된 내용은 그것이 전부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영상을 감상했던 노구덕은 여전히 감이 잡히지 않는지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모르겠는데? 뭐가 이상하단 건데?”
“휘유우…….”
그 멍청한 얼굴을 마주한 소피아는 나른함이 담뿍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네가 그럼 그렇지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 잠시나마 노예에 어울리지 않는 건방진 낯짝을 선보였던 소피아는, 노구덕이 지그시 주먹을 말아 쥐는 것을 보고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우, 후후… 해답지 공개 들어갈게요!”
“진작 그럴 것이지.”
“…제가 이상한 점을 느낀 구간은 바로 이곳이에요.”
소피아는 노구덕이 보고 있던 영상수적을 조작하여 특정 구간을 반복하여 재생하게 했다. 그 구간이란 바로 마법사 여인, 이혜영이 영상수정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장면이었다.
“어떠세요?”
“…이 여자랑 눈싸움이라도 하란 거냐?”
노구덕의 음성에는 약간의 찝찝함이 담겨 있었다. 영상 속에서 그와 눈을 맞추고 있는 마법사 여인은 무척 매력 있는 미인이었지만, 그녀는 해당 탐사에서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사자(死者). 아무리 미녀라고는 해도 죽은 여자의, 그것도 죽임을 당하기 직전의 영상을 반복해서 보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 여자 말고요, 그 옆을 보시라고요.”
“옆?”
소피아가 손가락은 여자의 어깨 너머, 뻥 뚫린 공간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박도훈과 트롤을 가리키고 있었다. 전장 자체가 촬영자인 밀튼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어 전체 화면의 칠 분의 일, 혹은 팔 분의 일 쯤으로 작게 축소된 탓에 세세한 얼굴표정까지는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싸우고 있는 것이 인간과 트롤이라는 걸 알 정도는 되었다.
소피아는 다시 손을 뻗어 미니어쳐들이 싸우고 있는 것 같은 전투 화면 중 트롤 쪽을 가리켰다.
“이 트롤 말인데요. 점점 강해지고 있는 것 같지 않나요? 크기도 점점 커지고 있는 것 같고요.”
“크기가 커져?”
눈매를 좁히고 그 장면을 주의 깊게 살펴보던 노구덕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정말이잖아?”
소피아의 말은 사실이었다. 잡힌 화면이 작아 그 정도가 미세하긴 했지만, 분명 박도훈과 싸우고 있는 트롤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몸집이 부풀려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처음에는 레이지를 쓴 박도훈의 스피드를 따라잡기에도 버거워하던 녀석이, 점차 그의 움직임에 반응해 간간이 반격까지 하는 게 아닌가. 단순히 몸집이 불어 근력만 늘어난 게 아니라, 반사 신경과 민첩성까지도 향상되었단 얘기였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제 소견으로는, 아예 다른 종(種)으로 진화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트롤 이상의 무언가로… 변하는 거죠.”
“진화?”
“네. 트롤이 낼 수 있는 강함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아무리 봐도 처음 방패를 부순 그 괴력은 일개 트롤의 힘이 아니었어요. 트롤의 뼈와 근육으로 오우거 이상의 힘을 낸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차라리 다른 종… 아니, 베이스는 트롤이니 상위의 종이 되었다고 보는 게 맞죠.”
“…상위의 종이라. 그래서?”
노구덕은 진중한 낯빛으로 소피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카름의 강함, 즉 능력을 결정하는 것은 골격이나 근육의 크기 같은 게 아니라 핵에 담긴 에너지의 총량이에요. 제가 보기에 이 트롤은… 체내의 핵에 직접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 같아요.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주인님, 그래서 말인데요…….”
소피아는 바로 말을 잇지 않고 뜸을 들였다. 평소대로라면 바로 면박을 주었을 테지만, 이번만큼은 노구덕도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 이내, 의미심장한 얼굴을 한 소피아의 붉고 도톰한 입술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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