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170)
0170 / 0777 ———————————————-
40# 전복(顚覆)
**주의**
본편은 약간의 잔인한 묘사가 들어있으니, 주의하고 감상해주시기 바랍니다. 싫어하시는 분은 스킵하시거나 바로 아래만 내려 보셔도 무방합니다.
“박도훈 헌터라면…….”
“아, 그 사람……!”
박도훈의 영상수정이라는 말에 좌중의 술렁임이 한층 심해졌다.
한때 정무문, 호크 레인저스, 세인트나이츠의 선두권 바로 아래에서 리그 순위다툼을 벌이던 블랙 랩터. 그 블랙 랩터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것은 리더 박도훈이 주축이 된 1군이었다. 특히 박도훈은 성격이 호탕하고 책임감이 강해 인망도 높았던 헌터. 때문에 매년 숱한 헌터들이 사라지고, 잊혀짐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았다.
물론, 일부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의 이름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트로이카 삼인방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말도 안 돼! 조사단이 레귤러에 도착했을 때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저게 박도훈, 그 자의 것일 리 없어!”
“설령 저게 진짜라고 해도 중요한 증거를 1년 동안 은닉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중죄입니다! 거기다, 노구덕 저자가 영상수정에 무슨 조작을 가했을지 누가 압니까!”
카라케스와 이진양은 어떻게든 위기를 면피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서 그들의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항변 따위는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공증인으로 나섰기 때문이었다.
“저 영상에는 일말의 조작도 없어. 내가 보증하겠다. 하하, 애초에 헌터하우스의 영상수정을 마음대로 편집할 수 있을 리 없지. 만약 성공했다 하더라도 코드의 변화는 불가피할 터. 영상수정의 코드는 틀림없는 진짜였다. 이건 오라클 백전대장이 직접 확인했으니 믿어도 좋아. 그렇지?”
“예. 말씀하신 대로.”
연맹위원 마티아스와 오라클 백전대장의 보증 앞에, 그들의 변론은 순식간에 힘을 잃고 사그라졌다. 기력이 빠진 카라케스와 이진양은 새까맣게 죽은 얼굴이 되어 마른 나뭇가지처럼 비틀거렸다.
넉넉한 볼살을 푸들푸들 떨던 이진양은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마지막까지 트집을 잡았다.
“저 영상수정의 출처는… 어떻게 된 겁니까. 1년 전, 조사단이 사건을 파헤치고 있었을 때에는… 저런 건 없었지 않습니까.”
“당연한 걸 묻는군. 1년 전에는 누군가 일부러 저 영상수정을 숨기고 은폐했기 때문에 발견이 되지 않은 게 아니겠나.”
“대체 누가…….”
“그거야 영상이 밝혀지길 꺼려하는 사람이겠죠. 이를테면 블랙 랩터의 헌터 세 명을 사고를 가장하여 죽음으로 몰아넣은 범인 말입니다.”
마지막 질문에 답한 사람은 노구덕이었다. 그는 히죽 웃으며 박도훈의 영상수정을 재생장치의 투입구에 끼워 넣었다. 영상수정이 삽입된 재생장치는 이내 환한 광선을 뿜어내며, 미리 준비되어 있던 하얀 스크린에 큼지막한 영상을 그려내었다.
“…이 영상을 보시면 범인이 누군지, 왜 그가 이 영상을 1년 동안 가지고 있었는지 알게 되실 겁니다.”
노구덕의 말을 들은 관중들은 눈에 한가득 힘을 준 채, 일분일초를 놓칠세라 역동적으로 빛을 발하는 스크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밝게 빛나던 스크린은 이윽고 몇몇 사람들의 얼굴을 화면에 담아냈다. 녹스의 폐허를 탐험하는 블랙 랩터 탐사대였다.
‘도훈 씨, 조금 피곤해 보여요. 어제 늦잠 잤죠?’
‘하하, 혜영이 눈은 속일 수가 없네.’
‘어휴, 이 쇠고집! 그렇게 일찍 자라고 말했는데도…!’
‘S등급의 레귤러잖아. 최선을 다하는 건 당연한 거지.’
‘쯔쯔쯧… 부부싸움은 좀 들리지 않는데서 하라고. 안 그래도 옆구리가 시린데 말이야.’
‘부, 부부싸움이라니! 그런 거 아니거든!’
‘그래, 타우로. 그건 좀 심했다. 나랑 혜영이 나이차가 몇인데…….’
…긴장한 기색 없이 시시콜콜한 잡담을 주고받는 것으로 보아 탐사 초반부인 듯했다. 블랙 랩터 탐사대는 아이리스 탐사대와 마찬가지로 기다란 종진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영상을 마주보고 있는 헌터들이 부르는 호칭에서 이 영상수정의 소유주가 노구덕의 말대로 박도훈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시간관계상 영상 전부를 감상할 수는 없으니, 바로 하이라이트로 넘어가도록 하지요.”
노구덕은 재생장치를 조작해 일부 구간을 건너뛰도록 했다. 잠시 후, 까맣게 가려졌던 스크린이 다시 움직임과 동시에, 가장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흉측하게 일그러진 트롤의 낯짝이었다.
‘쿠워어어어억!’
“에그머니나! 저게 뭐야!”
“트롤인가?”
관중들 중 트롤을 처음 접하는 평범한 시민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반면, 트롤을 잡아 본 경험이 있는 헌터들은 잠깐만 놀랐을 뿐, 소문으로만 돌던 변종 트롤을 볼 수 있는 기회라 여겼는지 이전보다 더욱 흥미진진한 얼굴로 영상에 몰입했다.
“저게 변종 트롤인가?”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아. 평범한 트롤이야.”
“변종은 언제 나오는 거지?”
짤막한 전투 장면이 나올 때마다, 블랙 랩터 탐사대는 별 무리없이 트롤들을 처치하며 전진해나갔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탐사대의 역량에 감탄하기보다 변종 트롤이 빨리 출현하기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쯔쯔쯧….’
객석의 반응을 살피고 있던 노구덕은 입맛이 썼다. 아무리 영상 속의 탐사대가 날고 긴다고 해도, 탐사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끔찍한 비극뿐이다. 다시 말해서, 변종 트롤의 등장은 헌터들의 죽음이라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영상을 끝까지 돌려본 노구덕으로서는 씁쓸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에라이,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감성적이었다고. 나도 똑같은 놈인데 뭘.’
노구덕이 궁상을 떠는 와중에도, 재생장치는 부지런히 영상을 출력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상 속의 장소는 비좁은 하수도에서 꽤 넓은 공터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블랙 랩터 탐사대와 트롤 무리의 격돌. 시점은 다르지만 소피아와 몇 번이고 돌려보았던 그 장면들이었다.
‘이제 곧이군.’
전력이 건재한 탐사대와 겨우 세 마리뿐이 남지 않은 트롤들. 거기까지 본 노구덕은 슬며시 눈을 감았다. 이미 질리도록 보았기에 이후의 상황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쿠와우우우–!’
‘뭐, 뭐야? 끄허허어… 아아아아–!’
‘타우로오오–!’
영상 속에서 튀어나온 끔찍한 절규와 함께, 다소 지루해하던 관중들은 찬물 세례라도 맞은 것처럼 급격히 조용해졌다. 마침내 소문만 무성하던 변종 트롤이 등장한 것이다.
“타워실드가 한 방에 뚫리다니…?”
“미, 미친… 말도 안 되는 괴물이야. 저건 오우거 이상이라고!”
“어떻게 트롤이 저럴 수 있지?”
직접 녹스의 폐허를 탐사하는 탐사대를 제외하면 열람할 수 없었던 당시의 영상이 적나라하게 공개되자,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나름대로 관록이 쌓인 헌터들마저 경악성을 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화면 속에 나타난 변종 트롤의 힘이 무시무시했기 때문이었다.
단단하기 그지없던 블랙 랩터의 방진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방어의 중심축이던 타우로가 허망하게 살해당하자, 변종 트롤의 괴력에 압도당한 헌터들은 제 살 길을 찾아 토끼처럼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박도훈과 이혜영이 후미에 남아 퇴로를 확보하는 것이 보였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일부 사람들은 아는 얘기였다. 당시 생존자였던 밀튼의 영상이 남아 있었으니까.
문제는 이 다음이었다.
‘꺄아아아악!’
‘혜, 혜영아! 크으읏!’
이혜영이 수세에 몰린 것을 본 박도훈은 급히 몸을 빼려 했으나, 그 시도는 사납게 몰아치는 변종 트롤의 공격에 무산되고 말았다.
‘도, 도훈 씨! 아, 아… 오지 마! 오지 말란 말이야!’
애초에 다른 근접계열의 지원 없이 이만큼이나 버틴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트롤 두 마리에게 둘러싸인 이혜영은 사색이 되어 애타게 도움을 청했으나, 박도훈 또한 궁지에 몰려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결국, 지칠 대로 지친 그녀는 대장 트롤에게 팔 하나를 붙잡히고 말았다.
“놔… 까아아아아아아악—!”
찌이이이익! 찌직!
가녀린 팔이 그대로 몸에서 뽑혀나가며, 생으로 찢어진 부위에서 다량의 피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산 채로 팔이 뽑힌 이혜영은 입에 거품을 물고 눈을 허옇게 까뒤집었다.
대장 트롤은 오줌을 지리며 바들바들 경련하는 이혜영을 휙 내던지고는 울컥울컥 피를 토해내는 그녀의 오른팔을 우득우득 씹어 먹었다.
“안 돼애애! 커허허헉!”
별안간 영상이 크게 흔들리며 시야가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자 복부를 깊숙하게 관통한 변종 트롤의 팔뚝이 눈에 들어왔다.
“끄으으……!”
최후를 예감한 것일까. 갑자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피범벅이 된 박도훈의 복부를 보여주던 영상수정의 화면이 여러 번 뒤집어졌다. 아마도 박도훈이 장착되어 있던 영상수정을 뽑아 어딘가로 던진 모양이었다. 잠시 후, 정신없이 바닥을 구르던 영상수정의 초점이 다시 잡히며 전장의 모습이 드러났다.
콰득! 콰드득!
우물우물!
그곳은 때 아닌 식인(食人)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대장 트롤은 숨이 멎은 박도훈의 옆구리살을 한 움큼 떼어내서 우물거리고 있었고, 다른 한 놈은 바닥에 널브러진 이혜영의 사체를 몽둥이로 잘게 다지고 있었다. 무자비한 몽둥이 찜질이 가해질 때마다 섬뜩한 파육음이 들려왔다. 이미 그녀의 사체는 생전의 아름다운 모습은 어디에도 없는, 그저 뼈와 살이 제멋대로 뒤섞인 고깃덩이일 뿐이었다.
그런데, 변종 트롤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나머지 놈들은 포식을 즐기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지만, 유독 변종 트롤만은 포식에 동참하지 않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면서 간헐적으로 거친 숨소리를 내뱉는 것이, 꼭 무언가를 꾹 눌러 참고 있는 것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 뒤, 나머지 트롤들이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포식을 끝냈을 즈음이었다. 망부석처럼 서 있던 변종 트롤의 몸에 거미줄처럼 빨간 균열이 생기더니, 놈은 툭 불거져 나온 눈을 새빨갛게 부릅뜨며 강렬한 포효를 내질렀다.
“크아아아아아–!”
그 순간, 놈의 몸이 풍선처럼 급격히 부풀어 오르며 요란한 폭발을 일으켰다.
콰아아아앙!
놈의 몸에서 비롯된 폭발은 반경 4, 5미터 부근에 있는 모든 것들을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삼켜버렸다. 포만감에 취해 있던 동료 트롤들은 찍 소리도 내지 못하고 가루가 되었다. 세 마리의 트롤이 있던 곳에 남아 있는 것은, 바닥을 질퍽하게 적신 거대한 피웅덩이가 전부였다.
다행히 폭발에 휘말리지 않은 영상수정은 피바다가 되어버린 공터의 전경을 빠짐없이 담아내고 있었다.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여전히 같은 영상만 반복되는 걸로 보아서는, 주변에 남아 있는 트롤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분명히 아무도 없을 터인 썰렁한 공터에, 갑자기 저벅거리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틀림없는 인간의 인기척이었다.
“…이런. 하마터면 이걸 못 보고 지나칠 뻔했군.”
덥썩.
나지막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오며, 영상수정의 시야가 위로 훌쩍 치솟았다. 정체모를 사내가 영상수정을 집어든 것이었다.
“그 상황에서 영상수정을 남길 생각을 하다니, 과연 박도훈이야. 아주 노련해.”
빙글.
이내 그의 손아귀에서 한 바퀴 구른 수정이 실실 웃고 있는 사내의 안면을 비춘 순간, 숨 죽이며 영상을 감상하고 있던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답답한 신음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영상수정을 빙글빙글 돌리며 웃고 있는 남자. 그는 다름 아닌 딕툼 헌터하우스의 마스터 오레돈이었던 것이다.
============================ 작품 후기 ============================
재밌게 보셨다면 추천/코멘 부탁드립니다.
다음편.. 다음편을 어서 쓰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