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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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딕툼의 맹주
당치도 않는 과격한 요구였다. 할 말을 잃은 노구덕은 풍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게 될 리가 없잖아. 왜 그렇게 소피아를 싫어하는 거야?”
“너야말로 왜 그렇게 저년에게 관대한 건데? 흥, 매일 밤 봉사라도 받고 있는 거야?”
“무슨 말을! 저는 아직 처녀라고 분명히…….”
또다시 이어지는 지루한 말싸움. 노구덕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생각해보면 데모나는 소피아를 처음 받아들일 때부터 탐탁치 않아했다. 당연한 일이다. 당시 소피아는 아이리스를 분열시키기 위해 암중으로 클럽을 뒤흔들었고, 끝내 김정인과 노구덕이 갈라서는 계기를 만들었으니까. 나중에는 이성빈을 부추겨 신소율을 극한 상황으로 몰아넣기도 했다. 지금은 그럭저럭 많이 희석되었다고는 해도, 당시 멤버들 중 소피아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하물며 호불호가 명확한 데모나라면야. 더군다나 소피아가 함정에 빠트린 신소율은 임유진, 임가희 모녀와 함께 까칠한 데모나를 허물없이 대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으니 특히 악감정을 가질 만도 했다.
“김정인이었다면 볼 것도 없이 그년을 죽였을 거야.”
소피아를 받아들일 때, 데모나가 그를 힐난하며 했던 말이다. 노구덕은 그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데모나의 입장은 그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녀가 보기엔 자기 여자가 강간당할 뻔했는데도 관용을 베푸는 노구덕이 이상해 보이겠지. 소갈머리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노구덕이다. 그는 김정인이 아니다. 확실히 김정인이라면, 만약 소피아 때문에 윤희지가 죽을 뻔하거나 겁탈 당할 위기에 빠졌다면 재고의 여지없이 그녀의 목을 베었을 것이다. 실제로 김정인은 소피아의 다리를 절단한 장본인이었고, 이후에 그녀를 제거하려고 했다. 노구덕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했을 뿐.
방식의 차이였다. 분명 노구덕은 소피아의 처우를 두고 몇 번이나 저울질을 했다. 죽일 것이냐, 살려서 쓸 것이냐. 충동적으로 죽일 뻔한 적도 몇 번이나 있었지만, 결국 답은 살려서 쓰자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피의 권속’이란 확실한 통제수단이 있었으니까. 속마음까지 읽을 수 있는 견고한 ‘목줄’이 없었다면, 노구덕도 마음을 바꿔먹었을지도 몰랐다.
노구덕은 은연중 인정하고 있었다. 자신은 아이리스를 프라임리그까지 키워낼 능력이 없다고. 나름 오랜 세월을 살아온 만큼, 스스로의 그릇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아이리스를 크게 키워낼 능력이 있었다면, 지구에서 대기업 부장에게 굽신거리는 그저 그런 중소기업체의 사장으로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족한 그에게 있어, 유능한 책략가인 소피아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재능 충만하고 뭐든지 자신감이 넘치는, 실제로 해내고야 마는 김정인과는 달랐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사정. 남들이 보기엔 속없는 인간이라 여겨질 수도 있었다. 데모나도 그 중 하나일 테고. 하지만,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의 입장을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 설득하고, 이해해주길 바라는 수밖에.
생각을 정리한 노구덕은 한숨 쉬듯 말했다.
“데모나.”
“왜.”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내는 단답형 대답이었다.
“네가 소피아가 싫어하는 것도 이해는 가. 하지만 소피아는 이제 우리 동료야. 너도 말했잖아? 소피아의 정보망을 써서 뭔가를 알아봐 달라고. 정말 소피아를 적이라고 생각했다면 이런 부탁은 하지 않았겠지.”
“뭐…….”
“저는 괜찮아요.”
데모나가 씨근덕거리며 뭐라 말하기 전, 졸린 듯 나른한 음성이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고개를 돌려보니 평소와 같은 웃음을 머금고 있는 소피아가 보였다.
“조건을 받아들이죠.”
“소피아, 진심이냐?”
“네에. 평생 데모나 씨에게 존대를 하고, 데모나 주인님이라 부르면 되는 거잖아요? 어려울 거 없죠. 그렇죠? 데모나 주.인.님?”
“…맞아.”
찜찜한 얼굴의 데모나는 순순히 제안을 받아들인 소피아가 미덥지 못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그 찜찜함을 덜어내려는 듯, 소피아를 내려다보며 가볍게 도발했다.
“생각보다 프라이드가 낮은 녀석이었네.”
“우후후… 노예에게 프라이드가 무슨 소용이에요?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죠.”
“…흥.”
특유의 도도한 코웃음을 보인 데모나는 왠지 모르게 신경질적인 음성으로 말했다. 뭔가 이걸 빌미로 소피아를 더 깎아내릴 작정이었는데, 본인이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니 기분이 상한 듯했다. 박수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니, 김이 새버렸으리라.
“…한 시간 뒤에 다시 오도록 해. 하던 건 끝내놔야 하니까.”
통보하듯 말한 데모나는 그대로 창고 안쪽의 실험실로 들어가 버렸다. 가만히 그걸 지켜보고 있던 노구덕은 살짝 경직된 목을 풀어 소피아가 있는 쪽으로 돌렸다.
“정말 괜찮은 거냐?”
“네… 뭐.”
소피아는 희미하게 웃는 것으로 설명을 대신했다. 그러나, 나른함 속에 감추어진 잿빛 동공을 마주한 노구덕은 그녀의 속내를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 붉은색 동공이 회색빛으로 보인 건 기분 탓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피의 권속으로 심령이 연결되어 있기에 그 속내를 알 수 있었다.
‘이 녀석, 처음부터 데모나의 말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있었군.’
조금 의미는 다르지만,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라고 말한 소피아의 말은 진심이었다. 어차피 죽을 작정이니, 뭘 해도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삶에 미련이 없는 인간은 관대해진다. 소피아가 데모나에게 베푼 것도 그런 관대함의 일종이었다.
데모나는 소피아의 그런 사정을 전혀 모르니까. 궁금해 하지도 않겠지만.
“…주인님, 머릿속은 가급적 보지 않으셨으면 했는데요.”
“미안하다. 의도한 건 아니었어.”
“어쩔 수 없죠. 후후.”
최근 들어 그와 소피아 사이의 심령연결이 더욱 끈끈해졌다. 연결 범위도 늘어났고, 소피아에게 통증을 주지 않아도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때문에 소피아와 말하다 보면 무의식 중에 그 마음이 투시되곤 했다. 소피아의 어쩔 수 없다는 말은 그런 의미였다.
“막 두근두근하네요. 제 다리도 치유될 수 있을까요?”
“그거야 모르지. 가능성은 낮지만… 가급적 그랬으면 좋겠네.”
“뭐, 상관없지만요.”
쾌활하게 대꾸한 소피아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앞장섰다. 노구덕은 한동안 제자리에 서서 딸깍딸깍 움직이는 그녀의 의족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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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이이이잇!”
난폭한 광기로 번들거리는 붉은 눈, 가시처럼 곤두선 머리카락, 징그럽게 돋아난 송곳니와 갈퀴 같은 손톱. 스퀘어 전역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최하급 흡혈귀의 형상이다. 이성이 없고 오로지 흡혈본능에만 충실한 짐승들. 흔히 ‘펑크 블러드’라 불리는 혈청을 품고 있으며, 흡혈귀 사회에서는 일원 취급도 받지 못하는 천민계층이었다.
“귀엽게 생겼네요.”
“…그러냐? 독특하군…. 취향은 존중한다만.”
“어쨌든 동족이니까요.”
물론 농담이겠지만, 소피아의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펑크 블러드를 복용했다는 점에서는 소피아도 최하급 흡혈귀가 맞지만, 그녀는 눈앞의 이놈처럼 이성이 없는 짐승이 아니다. 펑크 블러드 자체와 그 일부를 받아들인 것의 차이겠지.
“카르믹스톤을 먹은 지 얼마나 지났지?”
“십 분 정도 됐으려나요.”
“기다리기 지루하군. 충격을 좀 줘볼까.”
“그럴 필요 없어. 내부를 뒤흔드는 약을 먹였으니까. 슬슬 효과가 나타나겠지.”
팔짱을 끼고 묵묵히 서 있던 데모나가 말했다.
“키야아아아악–!”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단단히 결박되어 있던 흡혈귀가 사지를 몸부림치며 발광하기 시작했다. 변이의 징조였다.
우둑! 우두둑!
흡혈귀의 변이는 트롤보다 알아보기 쉬웠다. 송곳니가 더욱 길쭉해지고, 붉은색의 눈동자가 먹을 칠한 듯 새까맣게 물들었다.
육체적인 힘이 강해진 탓에, 놈을 구속하고 있는 구속구가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처럼 늘어나며 비명을 질러댔다. 중급의 흡혈귀를 무리 없이 묶어둘 수 있는 구속구가 고작 최하급 흡혈귀의 몸부림에 늘어나다니. 카르믹스톤의 힘은 다시 봐도 대단했다.
“…최소 중급 이상의 물건이 튀어나오겠군. 언제쯤 죽이면 되지?”
“조금만 더 기다려.”
노구덕은 놈의 앞에 서서 전신의 근육을 크게 부풀리고 있었다. 이미 데모나의 피로 사전 예열도 끝내놓은 상태. 놈이 변이를 끝마치는 즉시 일격에 골통을 박살낼 심산이었다. 그는 허문수와 실렌의 축복이 들어간 은(Silver) 건틀렛을 끼고 있었는데, 내구력이 약한 일회용이지만 그 주먹의 위력과 타격 거리를 감안하면 상급의 흡혈귀라도 치명상을 면치 못할 터였다.
데모나는 놈의 흉측한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놈의 변이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끼이이이–!”
“조금만…….”
“끄륵, 끄르르르르!”
“조금 더, 더, 더…… 구더기! 지금!”
“우아압!”
퍼억!
장전을 끝마치고 발사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던 노구덕의 대포가 허공을 갈랐다. 순은으로 둘러싸인 노구덕의 철권은 피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뚝뚝 혈광을 발하고 있던 흡혈귀의 머리통을 단숨에 수박처럼 으깨어놓았다.
“끄르르릉!”
“어머.”
노구덕의 주먹이 놈의 안면과 충돌하기 직전, 소피아는 톱날처럼 빼곡히 박힌 이빨이 노구덕의 주먹을 물어뜯는 광경을 보았다. 놈도 바보가 아닌 이상 노구덕이 공격해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을 터. 저 큼지막한 주먹을 흡혈귀 특유의 날카로운 이빨과 치악력으로 막아낼 의도였을 것이다.
…허나, 반전은 없었다. 이토록 가까운 거리, 충왕각인과 비틀쉘의 묘리가 점철된 노구덕의 주먹은 일개 변종 흡혈귀가 막아내기엔 너무 무지막지한 위력이었다. 상급인지, 중급인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새로운 차세대 흡혈귀로 다시 태어난 녀석은, 불쌍하게도 힘을 얻자마자 머리통이 흔적도 없이 날아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머리를 잃은 놈의 몸체는 한동안 꾸물꾸물 움직이다, 데모나가 관처럼 생긴 기구로 혈청을 채취함과 동시에 퍼석거리는 먼지가 되어 허물어졌다.
잿더미로 변한 놈의 사체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채취한 혈청을 관찰하던 데모나는 살짝 아미를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애매하네.”
“애매하다니? 실패야?”
데모나는 머리를 흔들어 노구덕의 불안을 일소시켰다.
“실패는 아니야. 실험체의 혈청은 확실히 상위종으로 진화했어. 애매해다는 건 그 등급이야. 피의 청도(淸度, 맑은 정도)와 마력량으로 보면… 노블(Noble) 보다는 위고, 트루(True)보다는 아래야. 새로운 혈청이란 거지.”
노블 블러드는 중급의 흡혈귀, 트루 블러드는 상급의 흡혈귀에게서 얻을 수 있는 혈청이다. 말인즉슨, 이번에 죽은 실험체 흡혈귀는 카르믹스톤을 통해 어중간한 중상급의 흡혈귀가 되었다는 결론.
어쨌거나 실험은 성공이었다. 노구덕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어쨌든 고위 혈청은 손에 넣었군. 복용해도 문제는 없겠지?”
“새로운 혈청이라 부작용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딱히 위험해 보이지는 않네. 먹든 말든 마음대로 해. 내 책임은 아니니까.”
데모나는 채취한 혈청을 담은 병을 소피아가 있는 쪽으로 휙 던졌다. 가볍게 병을 받아든 소피아는 데모나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보였다.
“고마워요. 데모나 주인님.”
“됐으니까 이만 다 나가. 난 좀 쉬어야겠어.”
휙휙 손을 내저은 데모나는 만사가 귀찮다는 듯, 노구덕과 소피아가 있는 쪽은 보지도 않고 실험실 구석에 마련된 소파에 몸을 실었다. 소파 아래로 해초처럼 흘러내리는 검은 머릿결을 무심결에 보고 있던 노구덕은 옆에 서 있는 소피아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어쩔래? 바로 복용할래?”
“아니요. 저녁때 제 방에서 복용하려고요.”
흡혈귀가 상위 혈청을 복용해 진화를 꾀하는 법은 간단했다. 그냥 먹으면 된다. 그럼 알아서 신체변이를 일으켜 상위 흡혈귀가 되는 것이다. 저 혈청이 정상적으로 작용한다면, 따로 데모나가 동석할 필요도 없었다.
“뭐, 그것도 좋겠지. 혹시 모르니까 실렌이나 유진이한테 대기해 달라고 해.”
“네에.”
“좋은 소식 기대하마. 가자. 또 한소리 들을라.”
두 사람은 데모나에게 방해되지 않게 살금살금 움직여 지하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날 저녁, 소피아는 마침내 펑크 블러드의 저주(?)에서 벗어나 정령을 소환할 수 있게 되었다. 이스턴 리그에서 위명을 떨치던 혼돈의 정령이 본격적으로 아이리스에 합류한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가 몸에서 의족을 떼어내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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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보셨다면 추천/코멘 부탁드립니다.
이번 파트는 두 가지 일을 한번에 합치려니 부제가 참 애매하네요. 하지만 소피아 부활! 이렇게 써 놓으면 부제 만으로 스포가 되니 그냥 이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댓글 다시는 분들 중에 몇몇분들 아이디가 공백처리가 되는데 이거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요.. 조아라 자체 문제인가…
/ 옛날에 막대에 초코볼 들어있는 아이스크림이 있었는데.. 그런 느낌이려나요
도라이몽 / 노예는 노예답게!
은신설야 / 상하관계라기 보단 그냥 싫어하는 거죠 ㅎㅎ
sangtoss / 어쩔 수 없죠 ㅠㅠ 하지만 그런 스토리 전개는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 그렇습니다. 업글이 되었습니다.
thelastshelter / 이 여자… 나쁜 여자…
호야[虎夜] / 까칠한 여자 취향이신가요? ㅎㅎ
ZERO4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소피아 현재 심정이지 않을까요 ㅎㅎ
우낄푸핫 / 안타깝게도 복구는 실패라고 합니다… 복구관련해서는 이미 예전에 리리플로 답해놓았었죠..
벌레 / 최하층 소피아..
CountOfDark / 넵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