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188)
0188 / 0777 ———————————————-
46# 사자대면(四者對面)
“서리여왕 하유라….”
1년 만에 다시 만난 서리여왕은 변함없이 도도했고, 끝없이 오만했으며, 살이 에도록 싸늘했다.
이미 주위의 구경꾼들은 대로에서 멀찍이 물러나 있었다. 십존의 두 명, 서리여왕과 늑대왕이 대치했다. 게다가 이곳은 여왕의 사유지. 연맹의 권한이나 법이 먹혀들지 않는 곳이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두 사람이 싸움이라도 벌이는 날에는… 등이 터지는 정도로 끊나지는 않으리라.
중앙에는 그대로 엉거주춤 얼어버린 와일드팽과 노구덕이 서 있고, 좌측에는 늑대왕이, 우측에는 서리여왕이 세모꼴을 이루며 자리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서리여왕 하유라.
“가리발디.”
가리발디, 늑대왕의 본명이었다. 늑대왕 가리발디는 입을 함지박만하게 벌리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오오… 하유라! 오랜만이군. 변함없이 이 몸의 가슴을 불타게 하는 아름다움이야! 어때, 오늘 밤 이 몸과 어울려 보는 건?”
“쓰레기와 어울리는 취미는 없어. 네게 용무가 있어 온 게 아니니 저리 꺼져.”
“과하하하핫! 역시 유쾌한 여자야!”
하유라는 배를 잡고 웃는 가리발디를 무시한 채, 그 서늘한 눈빛을 어정쩡한 자세로 얼어있는 와일드팽에게로 옮겼다.
“너, 이 쓰레기. 감히 내 영토에서 무슨 짓이지?”
서리여왕의 눈총을 받은 와일드팽은 황급히 자세를 바로 하고는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뒤에 늑대왕이 버티고 있다지만 상대 또한 당당한 십존의 일인. 그것도 가장 성격이 사납다고 일컬어지는 서리여왕이다. 형의 후광을 봐서 적당히 상대해 줄 위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 아니… 어, 그게… 이 자가…….”
하유라는 우물쭈물하는 와일드팽에게 냉랭한 조소를 날렸다.
“병신 같은 건 형이나 동생이나 똑같군.”
“뭣……!”
발끈한 와일드팽은 고리눈을 뜨며 하유라를 노려봤다. 아무리 상대가 십존이라고는 하나, 늑대왕의 형제라는 자긍심으로 살아온 그에게 있어 방금 발언은 결코 흘려들을 수 없는 것이었다.
“왜,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나? 아니꼬우면 덤비든지.”
“크윽…!”
짐승의 눈가에 핏대가 툭 불거져 나왔다.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건 알지만, 이런 치욕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는다면 그의 체면과 자존심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터. 그건 죽음보다 더한 일이었다.
그가 이를 세우며 달려들려는 찰나, 익숙한 음성이 그를 가로막았다.
“참아라, 동생아.”
“형님….”
와일드팽의 안색이 구원자라도 만난 듯 환하게 밝아졌다. 계산대로 늑대왕이 나선 것이다. 그는 한층 의기양양해진 얼굴로 서리여왕을 쳐다보았다. 그 모습이 꼭 호랑이를 등에 업은 여우 같았다.
서리여왕 하유라가 그런 꼴을 그냥 보고 넘길 리 없었다.
“주인 앞이라 꼬리를 세우는 건가? 개새끼가 따로 없네. 하긴, 그러니까 쓰레기란 거겠지.”
“……!”
두 눈을 부릅뜬 와일드팽은 주먹을 떨며 분노했으나, 한 손을 치켜든 늑대왕의 제지에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그는 두어 걸음 물러서며 하유라를 원독에 찬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코웃음 뿐.
“주제도 모르는 쓰레기 같으니. 한번만 더 날 그런 눈으로 쳐다본다면, 바로 그 건방진 눈알을 뽑아버리겠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 주위로 매서운 한풍이 휘몰아쳤다. 그 무시무시한 위세에 찔끔한 와일드팽은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것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지금 이 자리에서 서리여왕 하유라에게 위압당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건 같은 반열인 늑대왕 가리발디밖에 없었다.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가리발디, 너도 마찬가지야. 감히 퀸즈가든에서 행패를 부리다니, 꽤나 자신이 있는 모양이구나.”
“아니, 행패를 부린 건 내가 아니라 이 녀석인데…….”
뒤에 움츠러든 와일드팽을 바라보던 가리발디는 이내 의미 없는 변명이란 걸 깨달았는지 쓴웃음을 머금었다. 어쨌거나 천둥벌거숭이 동생을 방치한 이상, 그에게도 일정부분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생이 소란을 부린 건 사과하지. 실은 나도 방금 와서 사정을 잘 모르거든. 여기 이 사람과 약간의 트러블이 있었던 모양인데… 사랑스러운 동생아, 사정을 좀 설명해주지 않으련?”
말을 하던 가리발디는 힐끔, 노구덕이 있는 쪽을 곁눈질했다. 와일드팽에게 짓눌려 패색이 짙었던 노구덕은 들판의 허수아비처럼 멀거니 서서 그와 하유라의 대화를 경청하고 있었다.
야수화를 풀어버린 와일드팽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최대한 억울하다는 제스처를 취하며 노구덕과 있었던 일을 늑대왕에게 일러바쳤다. 물론, 그 입에서 흘러나온 사건의 전말은 전적으로 그의 입장에 유리하게 각색된 것이었다.
거리를 지나치고 있었는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거금을 넣어둔 호주머니가 없어졌고, 마침 수상쩍은 여자가 도망치듯 가고 있어 그녀를 붙잡았다. 그런데 실랑이를 벌이던 도중 웬 여자가 나타나 자신을 성추행범으로 몰며 여자를 놓아주라 종용했다. 자기 체면도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여자를 놓아주었지만, 그 여자는 계속해서 자신을 매도했다. 결국 참다 참다 못해 그 여자가 소매치기였다는 걸 밝히고,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그런데 그 여자의 남편이라는 이 자가 대신 나서더니,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그래서 가벼운 훈계를 내려주려고 했을 뿐이다…….
“…이렇게 된 겁니다.”
와일드팽의 설명을 들은 늑대왕은 가마 위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 있었군. 그럼 이건 딱히 동생 혼자만의 잘못이라고 볼 수 없겠는데? 쌍방의…….”
“거짓말! 다 거짓말이잖아!”
도중에 말이 끊긴 늑대왕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버르장머리 없는 아가씨군.”
홧김에 나선 신소율은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이를 악물고 늑대왕의 눈빛을 받아냈다. 아니, 받아낸 것이 아니라 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었던 것뿐이다. 신소율은 졸도할 것처럼 흔들리는 정신줄을 간신히 부여잡고 몸을 추스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상상을 초월하는 기세에 숨이 턱 막혀버렸다.
‘숨 막혀…….’
마치 누군가가 목을 강하게 조르는 것 같았다. 더는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려는 찰나, 신소율은 문득 주위 공기가 한결 편해진 것을 느끼곤 어렴풋한 시선을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널따랗고 거대한 등판이었다. 그녀에게는 무척이나 익숙한, 듬직한 남자의 뒷모습. 신소율은 왈칵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아저씨….’
어느새 늑대왕과 신소율 사이에 끼어든 노구덕이 그녀를 대신해서 십존의 기세를 받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끄응, 단지 눈빛만으로 이 정도라니… 이거 정말 장난이 아니군.’
피부가 찌릿찌릿 저려오면서 몸의 솜털이 모조리 곤두서는 것만 같았다. 기세 좋게 끼어든 것은 좋았지만, 무심코 충왕각인을 발동할 뻔했다. 한순간 늑대왕에게 빌미를 줄 뻔한 노구덕은 깊게 침음했다.
“호오?”
늑대왕의 눈에 이채가 어리는 걸 확인한 노구덕은, 간신히 입을 열어 말했다.
“제 아내가 경솔하게 행동한 것은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이런 일은 양쪽의 말을 모두 들어봐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부디 아량을 베푸시어, 제게도 사정을 말씀드릴 기회를 주십시오.”
노구덕의 간곡한 청을 들은 늑대왕은 피식 웃어버렸다.
“거절한다. 난 내 동생을 믿으니까.”
“그건 네 생각일 뿐이지. 이곳은 나의 정원, 판결은 내가 한다. 오크 늙은이, 네게 기회를 주지. 자신 있으면 어디 제멋대로 지껄여 봐. 만약 거짓말을 한다면… 내 손으로 직접 그 더러운 낯짝을 찢어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서리여왕 하유라는 정말로 한다면 하는 인물이다. 살이 떨릴 법 한데도, 노구덕은 일단 발언권을 얻어낸 것에 만족했다. 실제로 그는 약간의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괜찮다. 아직까지는…….’
짧게 심호흡을 한 노구덕은 침착한 음성으로 조금 전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방금 전 와일드팽이 했던 말과는 사뭇 상반되는 것이었다.
당시 와일드팽은 누가 보더라도 여인을 핍박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신소율이 섣불리 끼어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소매치기를 당했다고 하지만, 실제 여인이 소매치기라는 증거도 없으며, 그가 정말 소매치기를 당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신은 와일드팽과 늑대왕의 입장을 존중해, 그가 달라는 대로 10만 골드의, 다소 억지스런 배상을 지불했다. 그런데 와일드팽은 이번엔 돈이 든 주머니가 바닥에 떨어졌다는 이유로 트집을 잡았다.
“…어떤 식으로든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습니다. 이건 사견입니다만, 와일드팽 님은 어떻게든 저희 쪽에 시비를 걸고 싶어 안달이 난 모습이었으니까요.”
“뭐라고!”
와일드팽이 험하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노구덕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저로서는 두 분의 현명한 판단을 기다릴 뿐입니다.”
그의 말이 끝났다. 그러나 서리여왕 하유라는 노구덕을 보고 있지 않았다. 노구덕의 어깨 너머, 후드를 뒤집어 쓴 누군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하유라는 이내 하얀 눈썹을 모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때 그 오크였나… 흥.”
아마도 뒤의 소피아를 보고 노구덕 일행을 기억해 낸 모양이었다. 소피아에게서 시선을 뗀 하유라는 다시 노구덕에게 눈길을 주었다.
“교활한 늙은이… 그래서 네 잘못은 없단 거냐?”
“그렇지 않습니다. 확실히 돈주머니를 면전에 대고 던진 것은 심한 짓이었지요. 인정합니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억지로 10만 골드를 지불하게 된 제 입장도 헤아려 주시길 바랍니다. 미들리그 클럽에게 10만 골드가 얼마나 큰 거금인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떨어져 있던 구경꾼들 중 몇몇이 그의 말에 동조하여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대놓고 노구덕의 편을 들지는 못했지만, 확실히 이전 상황의 잘잘못을 가려보면 와일드팽 쪽의 과실이 큰 게 사실이었다. 거기에 와일드팽의 악명, 그리고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그의 태도가 구경하던 이들의 배알을 뒤틀리게 했으리라. 이래서 평소에 잘해야 한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그런 주위의 기류는 늑대왕과 서리여왕에게도 전해졌다. 십존, 누구보다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다. 사람들의 분위기를 읽지 못할 리 없었다.
“…이렇게 말하는데, 네 생각은?”
“양쪽이 증거가 없는 건 마찬가지야. 그리고 방금 전 오크의 말은 어폐가 있군. 불쌍한 영세 클럽인 듯이 말하지만, 아이리스라면 이번에 돈방석에 오른 그 클럽 아닌가? 10만 골드쯤이야 즉석에서 충분히 낼 수 있었겠지. 선심 쓰듯 돈주머니를 던진 것만 봐도 그렇잖아? 마침 10만 골드가 든 주머니가 있었다는 것도 수상쩍어. 저 늙은이 말대로 10만 골드란 돈을 개인이 가지고 다니는 게 흔한 일은 아니니까. 난 오히려… 의도적으로 내 동생에게 접근한 게 아닌가 의심이 되는데. 가령, 나와 내 동생의 명성에 흠을 내려는 의도로 추측할 수도 있겠지.”
“형님, 돈방석이라뇨?”
“쯧. 이 멍청아, 신문 좀 읽어라. 너는 모르겠지만 저 오크 늙은이는 서부 지구에 대파란을 일으킨 인간이야. 마티아스 위원의 하수인 정도로 보면 돼.”
와일드팽에게 면박을 준 늑대왕은 노구덕을 향해 씨익 웃어보였다.
“내 가설을 어떻게 생각하지?”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10만 골드는 이번에 클럽 헌터들의 장비를 새로이 벌충하기 위한 자금입니다. 클럽 내부에서도 알고 있는 사안이고, 퀸즈가든에 온 것도 그 때문이지요. 정 의심스럽다면 클럽에 연락해 확인시켜 드릴 수도 있습니다.”
“아아, 그거야 사전에 입을 맞추면 간단히 꾸며낼 수 있는 일이지. 나보고 그쪽의 증인을 믿으라는 건가?”
늑대왕 가리발디는 철면피 작전을 그대로 밀어붙일 모양이었다. 노구덕은 그 뻔뻔함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그의 억지에 차분하게 대응했다.
“무엇보다 위명 높은 늑대왕 님과 척을 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불민한 몸이지만, 그 정도 사리분별은 할 줄 압니다.”
“흐음, 과연 그럴지 어떨지. 어쨌든 난 네 말을 믿을 수 없다.”
가리발디의 억지에 노구덕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쓴웃음을 지으며 물러났다. 양쪽 다 이렇다 할 결정적 증거가 없는 마당에, 영양가도 없는 말싸움만 해봤자 유치한 감정싸움으로 번질 뿐이었다.
결국, 상황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간 셈이었다. 이대로 서리여왕 하유라가 노구덕의 편을 들어준다면 이번 일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유야무야 마무리되리라. 그리고 그편이 가장 가능성이 높았다.
모두가 그렇게 될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소피아만은 스며드는 불안감에 편히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이건… 좋지 않아….’
============================ 작품 후기 ============================
재밌게 보셨다면 추천/코멘 부탁드립니다.
이건 연참이 아닙니다. 일요일 올리지 못한 화가 오늘 올라간 것뿐입죠..
호야[虎夜] / 판은 미로 속으로… 엥?
북치네 / 감사합니다!
트릭스타 / 와일드팽은 한명에 못 끼는 건가요..
스르오 /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hohokoya1 / 자신있게 나섰지만, 만사 예상대로는 흘러가지 않는 법이죠..
은신설야 / 넵 감사합니다
춤추는왼손 / 우리 소율이 너무 미워하지 말아주세요ㅠㅠ 이번에 나선 것은 트라우마로 인한 무조건 반사였을 뿐입니다 ㅠㅠ
불타는고기 / 그런걸 해도 하유라한테는 안될듯… 합니다..
카론느 / 이게 이게.. 이렇게 되었습니다
가식적썩소 / 쿠폰 감사합니다! 요새 오타 지적이 없으니 뭔가 허전하군요!
sangtoss / 으윽… 발암이란…니..
마녀예린 / 나비효과 비슷한데.. 작은 눈덩이가 점차 굴러가면서 큰파장을 일으킨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