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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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새로운 적
47# 새로운 적
쭈뼛쭈뼛 나선 여인을 알아본 몇몇 인물들의 표정이 기괴하게 변했다.
그녀는 와일드팽에게 잡혀 있었던 소매치기 여인이었다. 신소율이 끼어들자마자 볼일 다 봤다는 듯 홀연히 인파 속으로 사라진 여인. 김정인은 어디론가 숨어버린 여인을 용케 찾아 이곳까지 끌고 온 것이다.
“저 여자는 아까 그…….”
“소매치기 아냐?”
군중의 소요를 들은 하유라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살짝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네년이 소매치기라고?”
십존 서리여왕의 물음에 당면한 여인은 기겁할 듯 놀라서는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아, 아닙니다! 저는 소매치기가 아… 아니에요!”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리는 목소리. 서리여왕 하유라는 다시 한 번 확인하듯이 물었다.
“소매치기가 아니다?”
“네, 넷!”
“거짓을 고한다면 죽이겠다.”
“저… 절대 거짓말이 아닙니다! 제가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그냥 부탁받은 대로 행동한 것뿐이에요!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요!”
“부탁?”
서리여왕 하유라의 새하얀 얼굴이 비스듬히 모로 기울여진 순간, 여인을 향해 가공할 암격이 날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김정인의 허리춤에서 강렬한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깡!
“히이익! 흐으으으…!”
털썩 주저앉은 여인은 백지장처럼 창백해진 얼굴로 뒤로 엉금엉금 기었다. 방금 전, 김정인의 검이 조금만 늦게 움직였다면 여인의 머리는 날달걀처럼 으깨졌을 터. 바들바들 떠는 낯짝에 암울한 공포의 기운이 드리워졌다.
여인을 구해낸 김정인은 깊게 침잠한 눈으로 공격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건 자백이라고 봐도 되겠습니까?”
“자백?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난 그저 떠오르는 루키의 실력을 보고 싶었을 뿐이야! 과하하하하하!”
암격을 날려 여인의 목숨을 노린 장본인, 늑대왕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얼토당토않은 변명이었지만, 이곳에서 그의 말에 토를 달 수 있는 사람은 서리여왕 하유라 밖에 없었다.
‘과연 십존인가.’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으나, 늑대왕의 암격을 막아낸 김정인의 손목은 아직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별다른 준비도 없이 날린 참격이 이 정도다. 그것도 실력의 극히 일부에 불과할 터. 어째서 이들을 십존이라 부르며 우러러보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열세를 드러낼 때가 아니다. 김정인은 속내의 동요를 감추며, 공포에 질린 여인을 안심시켰다.
“괜찮습니다. 하던 얘기, 마저 하십시오.”
“바, 방금 못 봤어요? 절 죽이려 했다고요!”
“안심하세요. 제가 있는 한, 당신이 저보다 먼저 죽을 일은 없을 겁니다.”
그 말이 심기를 거스른 것일까. 늑대왕의 얇은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어찌 보면 광오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발언. 오직 김정인만이 보여줄 수 있는 배포였다.
“미력하지만 나도 돕도록 하지. 몸을 날려서라도 막아주겠어.”
노구덕과 김정인의 눈이 마주쳤다. 여인을 사이에 둔 두 사람은 서로 아무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흡… 후우웁…….”
믿음직한 덩치를 가진 오크와 십존의 암격을 막아낸 검사. 두 사람이 양 옆에 철탑처럼 버티고 서자, 여인은 길게 심호흡을 했다. 제법 안정이 되었는지 아까보다는 한결 안정된 숨소리였다.
“서리여왕 님. 증언을 계속해도 되겠습니까?”
“흥.”
여전히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하유라였지만, 여인의 증언을 막을 명분은 없었다. 그녀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김정인은 여인에게 살며시 눈짓을 보냈다. 이내 딱딱하게 말라붙은 여인의 입술에서, 이번 사건의 진정한 전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소피아가 처음 의심했던 대로, 여인이 그 시각 와일드팽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던 것은 모두 계획된 연출이었다. 여인은 그 일을 하는 대가로 거액의 돈을 받았으며, 신소율이 먼저 뛰어들지 않았다면 자신 쪽에서 그녀에게 도움을 청하려 했다고 털어놓았다. 즉, 여인을 사주한 자는 애초부터 아이리스를 노렸던 것이다.
떨어진 곳에서 그녀의 고백을 듣고 있던 신소율은 넋이 나간 듯 멍한 표정이었다.
“당신에게 돈을 주고 그런 일을 시킨 사람이 누굽니까?”
“그건…….”
여인은 곧장 대답을 하는 대신, 불안에 젖은 동공을 움직여 어느 한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형편없이 일그러진 얼굴을 한 와일드팽이 서 있었다.
“이 개 같은 년이… 소매치기 주제에 주절주절 잘도 나불대는구나!”
살벌한 살기에 노출된 여인은 창백하게 질린 채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와일드팽은 그런 그녀를 노려보며 무어라 고함을 치려고 했지만, 시기적절하게 끼어든 김정인의 말에 분을 삭이며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 한 사람이 제게 접근해 왔습니다. 그 사람은 아이리스에 지독한 원한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아이리스에 대한 가능한 모든 정보를 넘기는 대가로 큰돈을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제 전 소속 클럽은 아이리스입니다. 아마 그 때문에 제게 접근한 것이겠죠.”
찰나지간, 김정인의 시선이 노구덕의 얼굴을 스쳐지나갔다. 눈을 마주친 것도 같았지만, 노구덕은 이번에도 묵묵히 서 있기만 했다.
“저는 그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가까운 시일 내에, 그 사람이 아이리스를 상대로 무언가를 획책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오늘 일도 그 계획의 일환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크으음…!”
김정인에게 지목당한 와일드팽은 불편한 신음을 흘릴 뿐, 아무런 반론도 펼치지 못했다. 누가 봐도 허를 찔려 당황한 얼굴. 애당초 그는 표정관리에 능숙한 위인이 못되었다.
김정인과 여인의 증언에 이은 와일드팽의 반응은 사실상 자백이나 다름없었다. 끼어들 기회를 놓쳐버린 늑대왕은 가만히 가마에 앉아 입맛을 다셨다. 그는 김정인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나지막한 음성으로 동생을 질책했다.
“멍청한 녀석… 일을 하려거든 걸리지나 말 것이지.”
“…죄송합니다. 형님.”
“저 녀석이 말한 네 공모자가 누구냐? …아니다. 그건 나중에 알아봐도 되겠지.”
전전긍긍하고 있는 동생과는 달리, 늑대왕의 얼굴은 궁지에 몰린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여유로웠다.
“하유라. 아무래도 내 동생이 실수를 한 것 같다.”
이런저런 억지를 쓰며 노구덕을 몰아붙였던 때와는 달리, 보는 이가 허무하게 느낄 정도로 쿨한 인정이었다. 하긴, 지금은 억지를 부리고 싶어도 그게 불가능한 상황이니 늑대왕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
서리여왕 하유라는 늑대왕 가리발디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무시한 채, 무서운 눈으로 김정인과 노구덕을 노려보고 있었다.
‘벌레 같은 것들이……. 마음에 안 들어.’
직접 판결까지 내린 마당에, 갑작스런 증인의 등장으로 판이 뒤집어졌다. 그녀에게 있어 노구덕이 유죄냐, 무죄냐 하는 것은 하등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를 기분 나쁘게 하는 것은 간만에 찾은 재미있는 장난감을 잃어버리게 생겼다는 것. 오직 그것이었다. 자신의 땅에서 자신의 의도대로 할 수 없다는 것, 그게 그녀의 심사를 뒤틀리게 만들었다.
한동안 새파란 안광을 쏟아내던 하유라는 바람이 세차게 날릴 정도로 홱 몸을 돌렸다. 그 바람에 그녀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은색 단발머리가 허공에 붕 떴다가 살포시 가라앉았다.
“가리발디.”
“응?”
“내가 꺼지라고 했을 텐데.”
“아아, 그랬지. 소원대로 꺼져 줄 테니 이만 화 풀라구. 하여튼 동생 일은 미안하게 됐다. 내 나중에 따로 사람을 보내지.”
딱!
능청스럽게 말한 늑대왕이 손가락을 튕기자, 선두에 서 있던 오우거 기수가 방향을 반대로 틀었다. 그와 함께 네 명의 노예들도 오우거의 뒤를 따라 가마의 방향을 돌렸다. 노구덕이 기사회생으로 화를 면한 것에 비하면, 어이가 없을 정도로 손쉬운 뒷마무리였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것이 명성의 차이고, 힘의 차이고, 권력의 차이인 것을.
노구덕은 다시 한 번 이곳이 철저한 강자존의 세계임을 실감했다.
“…5년 노역형은 철회한다. 으득!”
마지막으로 이 가는 소리가 들린 것은 착각이었을까. 노구덕 일행은 보지도 않고 전언을 남긴 하유라는 그대로 몸을 띄워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휴우우. 다행이다… 정말로…….”
기력이 다한 신소율이 털썩 주저앉을 뻔한 것을 이두식이 부축했다. 직접 십존과 맞서진 않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누구보다 마음을 졸였을 그녀다. 그렇게 쌓인 정신적 피로감도 상당할 터. 신소율은 잔뜩 지친 기색으로 노구덕과 김정인이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고마워요, 정인 오빠.”
“…그래.”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신소율은 말할 힘도 없었고, 김정인도 신소율에게 볼일이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정한 오빠는……?”
“어? 어디 갔지? 아까까지만 해도 여기 있었던 것 같은데?”
실렌과 이두식이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이정한은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였다.
한참 동안 사방을 둘러보던 실렌은 이정한이 도망갔다고 결론을 내렸다.
“괜한 일에 말려들기 싫어서 도망쳤나 봐. 아마도.”
“…그럴까요?”
“그럴 가능성이 높지. 상대는 십존이야. 겨우 드래프트 동기라는 인연으로 맞서기엔 너무 벅찬 상대라고. 뭐, 나중에 인연이 되면 다시 만나겠지. 굳이 탓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네…….”
한편, 노구덕과 김정인은 여전히 증인으로 내세운 여인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서 있었다. 노구덕은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의 머릿속은 터질 듯 복잡하게 돌아가는 중이었다.
‘정인이 녀석이 왜 날 도와준 거지?’
이미 서로 얼굴을 붉히며 갈라졌던 사이다. 이제 와서 다시 친해지고자 하는 것은 아닐 터. 김정인의 성격을 봐도 그럴 인물은 아니었다.
‘아니면, 희지가 뭐라고 언질을 준 건가?’
이건 가능성이 조금 있었다. 이번에 구원군으로 온 것은 김정인 혼자다. 언제나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있는 윤희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막판에 그에게 독설을 퍼붓긴 했어도, 윤희지는 신소율이나 임유진과는 그다지 나쁜 사이가 아니었다. 관계개선을 원한다면 김정인보다는 그녀 쪽이 어울릴 테지.
‘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어쨌든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노구덕은 고목처럼 서 있는 김정인에게 한손을 내밀었다.
“…도와줘서 고맙다. 덕분에 살았어.”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디까지나 묵은 빚을 청산한 거니까요. 이걸로… 형님과 저 사이엔 어떤 빚도 없는 겁니다.”
“뭐?”
묵은 빚이라니, 뭘 말하는 걸까? 잠시 김정인의 말뜻을 곱씹던 노구덕은 미간에 깊은 주름을 만들며 얼굴을 구겼다.
“아하, 이걸로 뺑소니 빚은 퉁 치겠다, 이거냐?”
“…조금 부족합니까?”
김정인의 물음에, 노구덕은 지그시 혀를 찼다.
“어이가 없어서, 원. 하여간 넌 마음에 안 드는 놈이야. 멋대로 사람을 끌어들이고, 멋대로 도움을 주고… 그렇게 자기만족에 빠져 살면 즐겁냐?”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진심이었다. 김정인은 정말 스스로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왜 노구덕 앞에만 서게 되면 자신이 이런 태도를 취하게 되는지. 방금과 같은 이해타산적인 언행은, 평소 그의 모습이라고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지 노구덕에게 지고 있는 마음의 빚을 청산하고 싶은 것도 사실. 김정인에게 있어 노구덕은 평생의 오점이자, 지우고 싶은 낙인이었다.
노구덕은 복잡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김정인에게 대뜸 한마디를 던졌다.
“네가 정 그렇게 말한다면 고맙다곤 하지 않으마. 대신 부탁이 하나 있다.”
“예.”
“거절하지 않는 거냐?”
“들어보고 판단하겠습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대답. 노구덕은 고개를 끄덕였다.
“별 거 아냐…. 그냥 나와 한번만 싸워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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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보셨다면 추천/코멘 부탁드립니다.
하하… 차기 십존 두 명… 이지만 (?)이라는 함정이 있습니다. 어떻게 될지는 아직 모르는 거죠.
간만에 연참이란 걸 해보네요. 전 다시 일하러 가겠습니다. 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