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2)
0002 / 0777 ———————————————-
1# 노 탤런트(No talent)
1# 노 탤런트(No talent)
“끄으응!”
머리가 터져버릴 것처럼 아팠다. 노구덕은 비몽사몽간에 크게 앓는 소리를 냈다. 그의 오감이 서서히 깨어나면서 주변의 술렁거림을 하나 둘 인지하기 시작했다.
“어마! 이 아저씨 정신 차린 것 같아요!”
제일 먼저 들린 것은 다소 방정맞은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하. 삼십분 뒤에도 꿈나라였으면 뺨을 쳐서라도 깨웠을 건데.”
그 다음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불퉁한 남자의 음성. 이어 그에 따지고 드는 여성의 음성까지.
“나이 드신 분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에요?”
“참나. 나이가 벼슬도 아니고… 여기서까지 나이 따지고 싶어? 그나저나 젊은 놈은 왜 안 일어나는 거야? 이제 조금만 있으면 데드라인이라고. 안 되겠어. 두들겨서라도 깨워야지.”
“잠깐만요…. 아! 이쪽도 일어났어요!”
뚜렷하게 들리진 않지만 여러 사람이 북적대는 모양새인 건 알겠다. 노구덕은 일단 숨을 천천히 고르며 감긴 눈을 조심스럽게 떴다. 불투명한 시야에 서서히 윤곽이 잡히며 복닥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냈다. 정면의 젊은 남녀 중 두어 사람이 다가오는 게 보였지만, 노구덕은 거기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을 정도로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이곳이 어디인지, 왜 여기에 있는지, 저들은 누군지. 하나도 아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여긴 어디지? 병원인가? 난 분명… 차에 치였었는데…?’
평소와 다름없이 편의점에서 소주와 마른 오징어를 사고 집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밤이 깊어 대로변을 지나는 차도 별로 없었다. 모처럼 쉬는 날과 좋아하는 축구팀의 생중계 시간대가 들어맞아 살짝 들뜬 기분으로 보행자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녹색 신호에 맞춰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는데… 갑자기 주변이 확 밝아지며 바로 옆에서 붕붕거리는 자동차 엔진소리가 들렸다. 설마 하며 고개를 돌렸을 땐 바로 코앞에서 헤드라이트가 번쩍이고 있었다.
꼼짝없이 죽었구나 싶어 눈을 질끈 감은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 그건 피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성난 황소처럼 질주하던 차의 속도를 감안했을 때, 차에 치였다면 최소 반송장이 되었어야 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온 몸이 멀쩡했다. 손, 발, 몸… 적어도 확 와 닿는 통증은 없었다.
“아저씨, 정신이 좀 드세요?”
“으… 응?”
노구덕을 상념에서 깨운 건 흰 블라우스에 착 달라붙는 청바지를 입은 여자였다. 나이는 어림잡아 이십대 초반 정도. 차림새로 미루어 보아 여대생인 것 같다.
그는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봤다. 암만 봐도 간호사로는 보이지 않는다. 경찰이나 보험회사 직원은 더더욱 아니다. 이러나저러나 혼자서 끙끙 고민하기 보단 그녀에게 답을 구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아가씨, 여긴 어디지? 병원인가? 혹시 누가 날 여기로 업고 왔어?”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설명 듣고 오셨을 거 아니에요?”
도리어 황당하다는 눈으로 되묻는 젊은 여자. 뜻밖의 반응에 당혹스럽기는 노구덕도 마찬가지였다.
“설명이라니? 난 그런 것 못 들었어. 차에 치일 뻔한 것 까지는 기억나는데…. 대체 여긴 어디야?”
“네에?”
이젠 숫제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이다. 그러자 주위에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사람들도 여자와 비슷한 얼굴로 저마다 한마디씩 던져댔다.
“거봐, 내가 이 아저씨 이상하다고 했잖아. 나이가 너무 많다고. 시험과는 상관없는 외부인이 분명해.”
“맙소사, 정말 외부인? 그게 가능해? 어휴, 어쩐지 인원이 한명 많더라니….”
“그럼 이 아저씨는 어떡해요? 곧 드래프트(Draft)에 참가해야 될 텐데…. 데드라인을 넘기면 이 방은 없어진다고 했잖아요. 드래프트에 데리고 가야되는 것 아니에요?”
“미쳤어? 저 아저씨가 뭘 할 수 있겠어? 혹시라도 성적에 반영되면, 네가 책임질 거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안 데려가면 저 아저씨는 죽는다구요!”
“그만. 그만 합시다. 지금 이렇게 시간 낭비할 때가 아닙니다.”
무리 속에서 가벼운 다툼이 일었지만, 키 큰 남자가 중재자로 나서면서 일단락되었다. 키가 훤칠한 남성도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십 대의 젊은 나이로 보였지만, 푸른 색 와이셔츠와 짙은 회색의 캐주얼 수트를 떡하니 빼입고 있어 겉보기보다 중후한 느낌을 주었다. 거기에 콧잔등 위에 걸려 있는 고급스런 은색 안경이 더해지니 전형적인 화이트칼라 업종의 엘리트가 연상되었다.
“저는 하태경이라고 합니다.”
자신을 하태경이라 밝힌 남자는 노구덕과 그 말고도 방금 깨어난 한 명을 한 데 모이게 했다. 다른 이들이 그의 지시에 군말 없이 따르는 것으로 보아 은연 중 그가 리더 역할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
젊은 남녀 사이에 빙 둘러 싸이게 된 노구덕은 아직도 얼떨떨한 기분이었지만, 대충 돌아가는 분위기로 미루어 보아 눈앞의 하태경이라는 남자가 자초지종을 알려줄 것 같아 잠자코 있기만 했다.
하태경은 먼저 노구덕 옆의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실례지만, 그 쪽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김정인입니다.”
대꾸하는 남자는 노구덕과는 달리 혼란스러운 기색 없이 침착한 낯이었다. 하태경은 김정인의 반응에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김정인 씨. 헌터, 드래프트에 대해선 알고 계시죠?”
“예.”
하태경 입장에서는 짧지만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입 아프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럼 남은 문제는 그와 김정인을 번갈아 쳐다보며 불안스레 눈을 굴리는 노구덕이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노, 노구덕이라고 하는데… 여긴 대체…?”
하태경은 안경을 고쳐 올렸다. 임시지만 어쨌든 리더를 맡은 이상, 노구덕의 처우에 대해 일차적인 결정을 내려야 했다. 노구덕이 이곳까지 들어온 경위는 알 수 없으나, 일단 이곳에 온 이상 되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버리고 가느냐, 마느냐인데, 사실 답은 뻔했다.
‘데리고 간다.’
이것은 그의 의향이라기보다 무리의 성향에 따른 결정이었다. 데드라인이 지나면 이곳 ‘준비의 방(Ready room)’은 사라진다. 그곳에 남아 있는 사람, 도구도 방과 같이 소멸하게 되는 것이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노구덕이 그렇게 죽을 걸 뻔히 알면서, 버려두고 갈 정도로 비정한 자들은 아니었다. 개 중 몇몇은 혹시 모르겠지만.
하태경은 뜻 모를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앞으로 약 한 시간 뒤, 이 방은 사라집니다. 노구덕 씨가 이곳에 남아 있다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뭐, 뭣! 죽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노구덕은 펄쩍 뛰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어깨를 짓누르는 강한 힘에 그대로 다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건장한 체구의 청년이 양 손으로 어깨를 내리 눌렀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으라는 뜻이 담긴 일종의 시위다. 노구덕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이…이건 무슨 짓이야? 뭘 하려고?”
그가 겁에 질린 듯하자 하태경이 청년을 향해 눈짓했다. 청년은 순순히 팔에서 힘을 풀며 노구덕의 어깨를 놓아주었다.
“노구덕 씨. 침착하고 잘 들어주십시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설명할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준비를 끝내고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여유가 된다면 나머지 이야기는 그 곳에서 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질문도 하지 마시고, 지금부터는 제가 시키는 대로만 해 주시면 됩니다. 자세한 속사정은 일단 이 방에서 나간 뒤에 알아도 늦지 않습니다.”
“…….”
여전히 무슨 상황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따지고 들기에는 하태경이나 나머지 사람들이 풍기는 분위기가 꽤나 심각했다. 노구덕도 사십이 넘도록 살면서 닦아 온 눈치가 있는지라, 여기서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것임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것을 본 하태경은 자신의 설명이 어느 정도 들어 먹힌 것으로 여겼는지 만족한 얼굴로 말했다.
“시간이 촉박합니다. 따라 오시죠.”
노구덕과 김정인은 하태경의 인솔에 따라 방의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정사각형 모양의 방은 큰 강당 정도의 넓이였는데 각 모서리마다 각종 비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하태경이 그들을 데리고 간 곳에는 칼, 활, 몽둥이 등 보기만 해도 흉흉한 각종 무기가 철제 진열장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김정인 씨. 이곳에서 무기를 고르시면 됩니다. 그리고 노구덕 씨는… 명상을 하십시오.”
쇠몽둥이 하나를 만지작거리던 노구덕은 뜬금없는 소리에 어리둥절 되물었다.
“무슨 소리야? 명상이라니?”
“우리는 이곳에 들어오면서 모두 헌터로써 활동하기 위해 모종의 힘을 받았습니다. 이곳 용어로는 임파워링(Empowering)이라고 하죠. 명상은 내면세계로 들어가 저널(Journal)에 접속해 부여받은 힘과 현재 나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수단입니다. 노구덕 씨는 외부인이라 임파워링되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저널을 확인해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야….”
기실 임파워링이니, 헌터니, 저널이니 하는 말들을 온전히 이해한 건 아니지만, 해봐서 손해될 건 없다니 순순히 따르는 노구덕이다. 그는 하태경이 시키는 대로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가지런히 깍지 낀 손을 두 종아리가 교차하는 지점에 얹었다.
“명상은 아주 쉽습니다. 노구덕 씨의 평소 모습, 전신 모습을 반복적으로 떠올리면서 되새기면 됩니다. 그럼 내재된 시스템이 자연스레 반응할 겁니다. 그런 다음 저널에 출력된 기록을 확인하고 기억해 두시면 됩니다. …어디까지나 임파워링이 되었을 때 얘기지만요.”
친절한 미소와 함께 하는 말 치고는 끝말이 조금 미묘하다. 노구덕은 조금 언짢은 기분으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하태경이 말한 대로 자신의 모습을 마음속에 천천히 그려내었다.
젊었을 적 풍성했던 머리는 잦은 격무와 스트레스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매끈한 민대머리가 되었고, 나이가 들수록 늘기 만한 건 주량이요, 뱃살뿐이라. 올챙이처럼 볼록 튀어나온 아랫배는 단지 떠올리기만 하는 데도 절로 한숨을 자아내게 만든다. 거기에 나잇살이 덕지덕지 붙은 퉁퉁한 팔다리까지. 대한민국 어느 아저씨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몸매다. 그나마 내세울 거라곤 소싯적 대학교 축구팀에서 골키퍼로 활약했을 정도로 큰 키와 크고 널따란 어깨 정도일까. 허나 그런 것도 죄다 군살에 파묻힌 지금으로서는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다.
‘그래도 젊었을 때는 잘나갔었는데…….’
암만 그리워 해봐야 호시절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게 쩝쩝 입맛을 다시는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멍하니 서 있던 배불뚝이 아저씨의 몰골이 천천히 허공에 스며드는 것처럼 흐릿해지더니, 그 전면에 컴퓨터 디스플레이 같은 반투명한 창이 홀로그램처럼 나타났다. 노구덕이 어엇하며 놀라는 동안 직사각형의 창속에 또렷한 글씨로 무언가가 줄줄이 출력되기 시작했다.
[저널 번호(Journal Number) : K903-32439] [이름(Name) : 노구덕] [종족&인종(Tribe&Race) : 인간(Human)] [클래스(Class) : – ] [재능(Talent) : – ] [특성(Characteristics) : – ]“뭐야, 이게……?”
화면을 본 노구덕의 첫마디였다. 이름은 그렇다쳐도 저널 번호? 재능? 특성? 이게 다 뭐란 말인가. 그 옆의 공란은 또 뭐고? 기록을 확인하라는 하태경의 첨언과는 다르게 확인이고 자시고 할 건더기도 없다. 이름 석 자 말고는 죄다 비어있으니까.
“어휴.”
현 상황에 대해 어떤 지식도 없는 노구덕이지만 직감적으로 이 기록 내용이 좋은 쪽이 아니란 건 알았다.
‘다른 사람들은 이게 나처럼 비어있지 않단 소린데…….’
확인하고 기억할 ‘내용’이 있으니 저널을 보라고 했을 터. 거짓말이라도 해야 되나 고민하던 차, 누군가 의식 밖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침착하고 절제된 음성을 들어보니 하태경이다.
슬며시 눈을 뜬 노구덕은 앞에서 빤히 바라보고 있는 하태경과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헛기침을 했다. 하태경은 그에 아랑곳 않고 얼른 대답을 듣고 싶은지 노구덕을 재촉했다.
“어떻습니까? 저널이 있던가요?”
“크흠, 흠…. 그게 있기는 있더라고. 저널 번호인가 뭔가… 그게 몇 번이었더라?”
저널 번호가 언급되었다는 건 저널을 보았다는 말. 하태경과 주변 이들은 모두 의외라는 얼굴이었다. 그들이 알기로 드래프트에 참가하는 인원은 각 조당 10명. 그런데 11번째, 즉 외부인인 노구덕이 저널 번호를 부여받았다는 건 확실히 뜻밖이었다.
노구덕이 저널 번호를 떠올리려는 시늉을 하며 우물쭈물 대자 하태경은 손사래를 치며 말을 끊었다.
“저널 번호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재능, 특성을 확인하셨다면 그에 맞는 무기를 고르시면 됩니다. 예컨대 검술 재능이 있다면 검을 드는 게 유리하겠죠. 만에 하나 마력이나 기타 이능 계열에 재능이 있다면 이 완드(Wand)를 드시면 됩니다.”
“어, 그, 그게……. 비었는데.”
=====================
코멘트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