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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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밀회(密會)
이렇게 실렌의 과거사를 듣고 보니, 그녀의 지난 행적들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7년차 헌터이면서도 어느 클럽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방황했던 실렌. 평범한 실력의 헌터였지만, 그녀는 여성 헌터 가운데서도 발군의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말인즉슨, 자리를 잡으려는 마음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는 의미다.
하지만 실렌은 그러지 않았다. 오너들의 집요한 구애를 뿌리치고 7년이 넘도록 떠돌아야만 했던 데에는 그녀의 무의식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두려움과 불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 언니들처럼 되고 싶지 않았어요. 여자가 아니라 헌터로서 성공하고 싶었죠.”
하지만 그녀의 재능은 평범했다. 언령이란 재능을 가졌지만, 그런 특별한 재능은 상당한 운이 받쳐주지 않는 이상 개발조차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실렌에게는 좋은 스승도, 행운이 곁들여진 기회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조금 예쁠 뿐인, 그저 그런 헌터로서 여러 클럽을 전전했고, 그 와중에 남부를 떠나 서부까지 오게 되었다.
“그렇게 서른이 되고 보니… 제 가능성에 대해 회의가 생겼어요. 재능도, 운도 없는 헌터는 발버둥 쳐봐야 피라미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걸… 지난 7년의 경험 끝에 알게 되었죠. 어차피 여기서 멈추고 나아가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마지막 남아 있는 무기로 행복을 찾고 싶었어요. 여기서부터는 말 안 해도 되겠죠?”
“흠…. 그래.”
노구덕은 고개를 끄덕끄덕 움직였다. 그 얼굴에는 조금 미안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가 7년간 고이 간직했던 순결을 어떤 식으로 잃었는지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서로 오해가 겹쳐 일어난 일이었기에 누구의 탓을 할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미안한 건 미안한 거였다.
그 기색을 읽었는지 실렌은 바다를 닮은 푸른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걱정마세요. 이제는 오너를 원망하지 않으니깐. 그 일은 자업자득이었어요.”
“그 전에는 원망했다는 소리냐.”
“당연하죠. 오줌까지 지린데다… 너무 아팠다고요.”
그때의 추억(?)을 함께 떠올린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음소리를 냈다.
“미안하다. 그때는 소피아 일도 있어서… 이래저래 쌓인 게 많았거든.”
“들었어요. 소피아 씨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지금의 그녀를 보면 솔직히 상상이 안 되지만요.”
하긴, ‘말 잘 듣는 개’가 되어버린 지금의 소피아에게서 그때의 여유만만하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무리였다. 유들유들한 건 지금도 마찬가지였지만, 어쩐지 패기가 없다고 할까. 전에 비하면 맥이 확 빠진 듯한 느낌이었다.
“예전에는 곧잘 농담도 잘 했는데 말이야… 요새는 별로 그런 것도 없고. 뭔가 싱거운 느낌이야. 음, 어느 쪽이 믿음이 가냐면 당연히 지금이긴 하지만.”
“일이 많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죠.”
“그건 아닐 거야. 라이오넬에 있을 때도 비슷한 업무량을 소화했다고 하니까. 어쩌면 언니 일 때문일지도 모르지.”
“언니 일이요…? 아, 그 비트레이 오너 말이죠? 흐으음…”
가족들에 관한 이야기를 한 직후여서 그런지, 실렌은 평소에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소피아의 개인사에 흥미를 보이는 눈치였다.
“왜, 궁금해?”
“조금… 많이요. 듣고 싶긴 하네요.”
“내 얘기는?”
“그건 나중에라도 들을 수 있잖아요. 근데 소피아 씨 얘기는 지금 꼭 듣고 싶단 말이죠. 그리 똑똑한 사람이 왜 친언니랑 원수지간이 되었는지… 저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니까요.”
우선순위에서 밀려버린 노구덕은 까칠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남 얘기를 시시콜콜 떠드는 건 취미가 아니지만… 소피아 녀석은 남이라고 하기에도 뭣하니까… 그래도 다른 사람에게 떠들고 다니는 건 안 돼.”
“당연하죠.”
노구덕은 실렌에게 소피아에게 얽힌 사연을 말해주었다. 동부의 비트레이를 발전시켜 나감에 따라 그리드가 소피아를 극심하게 경계하게 된 일, 그녀의 등쌀을 견디지 못한 소피아가 비트레이를 나와 라이오넬에 들어간 것… 그리고 아이리스의 분열을 획책한 일과 그 결과로 노구덕의 노예가 되어 ‘죽음의 계약’을 맺게 된 일까지. 최대한 짧게 간추려 말한다고 했지만 수십 분을 훌쩍 잡아먹는 장황한 이야기였다.
평소의 노구덕이라면 이렇게 자세한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실렌의 이야기를 듣고 난 이후이기 때문일까. 그는 조금 감성적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된 거야.”
중간 중간 어이없음, 분노, 동정 등… 다양한 표정변화를 보여주던 실렌은 긴 숨을 토해내며 감상을 전했다.
“…어, 음… 뭐라고 해야 할지… 쉽게 믿기지 않네요. 언제나 능글맞게 일하는 그 소피아 씨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니…….”
사제라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그녀에게는 소피아가 말하는 ‘죽고 싶다.’는 얘기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진정성이 없게 느껴졌을지도.
“정말로 죽기를 바란다면, 그렇게 쉽게 죽음을 입에 담을 수 없어요. 사기꾼들이 말이 많은 것과 같은 이치죠.”
“…그거 맞는 비유냐?”
“맞는 비유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하여튼 제 생각은 이래요.”
실렌은 잠깐 호흡을 가다듬었다.
“흐유… 진짜 죽을 사람 같으면, 조용히 죽을 자리를 찾아가요. 굳이 사방팔방 떠들지 않는다구요. 제가 봤을 때, 소피아 씨는 애정결핍이에요.”
“…애정결핍?”
“그렇게 어이없는 표정으로 보지 마세요. 저는 진지하다고요?”
노구덕은 두 눈을 껌벅이며 실렌을 바라보다가, 비틀어진 표정을 바로 고쳤다.
“아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말이지. 소피아… 그 녀석이 애정결핍이라고?”
“애정결핍이란 표현이 적합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진심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거죠. 이런 유형은 보통 동정이나 관심을 끌기 위해서 극단적인 말을 입에 담는 경우가 많아요.”
갑자기 머리가 아파진 노구덕은 미간을 꼬집듯이 주물렀다. 그도 실렌과 같은 생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 가설은 성립할 수 없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건 말이 안 되는데. 소피아와 나는 심령으로 이어져 있어. 그 녀석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모를 리 없지. 적어도 그 녀석이 살 의지가 없는 건 확실해.”
“그런 걸 자기최면이라고 하죠. 의식적으로 반복한 말들을 어느새 진짜라고 믿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소피아가 관심을 받고 싶어 한다는 거냐? 누구한테? 뭘 위해서?”
“글쎄요… 그건 저도 모르죠. 하지만 전에 얘기하는 걸 봤을 땐, 소피아 씨는 의외로 속정이 깊은 사람이었어요. 아, 그때가 언제냐면… 오너가 소드시커와 대련을 할 때요. 그때 소피아 씨가 비트레이 오너를 걱정하는 듯한 말을 했거든요. 바로 부정하긴 했지만, 제 직감은 속일 수 없죠.”
노구덕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실렌의 이 조언을 가벼이 흘려 들어서는 안 된다고, 그의 본능이 강하게 경고를 하는 것만 같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또한 소피아를 그저 한번 쓰고 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연맹 위원이 되면 그녀를 놓아준다고는 했지만, 그건 그냥 시간벌이일 뿐, 어떤 구실을 만들어 붙여서라도 붙잡아 두고 싶은 것이 그의 진심이었다. 소피아는 그만큼 대체불가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인재이니까.
‘하지만 아직 뚜렷한 방법은 없지. 만약 실렌의 말이 맞다고 한다면, 소피아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도 몰라.’
소피아가 조건을 충족시켰을 때, 그때 가서 입을 싹 씻어버리고 모른 척을 해버린다면 소피아와의 관계를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다. 피의 권속으로 이루어진 관계이니만큼 겉으로는 따를지 몰라도, 일의 능률은 형편없이 떨어지게 되리라. 그건 노구덕이 원하는 게 아니었다.
“비트레이 오너라… 정말 소피아가 언니와의 관계개선을 희망하고 있다면, 보통 힘든 일이 아니겠는데. 넌 비트레이 오너… 그리드를 못 봤겠지만, 그 여자도 정신 말짱한 인간은 아니야. 사람 면전에 대고 얼굴가죽을 벗기겠다는 폭언을 퍼붓는 여자니까.”
“그건 좀 곤란한 걸요.”
“곤란한 정도가 아니라니까. 소피아랑 대면시키면 바로 머리채를 쥐어뜯고 싸우려고 할 걸. 소피아와 그리드를 화해시킨다? 솔직히 그리드를 세뇌라도 시키지 않는 이상, 난 불가능하다고 본다.”
노구덕이 본 그리드는 지독한 피해망상에 빠져, 타인에 대한 증오를 삶의 낙으로 삼는 악의(惡意), 그 자체였다. 그게 언변으로 구제될 성격이었으면 진즉에 소피아가 무슨 수를 썼을 터. 그 소피아마저 포기하고 도망칠 정도라면, 이미 구제불능이나 다름없다는 소리다.
실렌은 그 회의 가득한 말에 묘한 낯빛을 했다.
“…소피아 씨는 비트레이 오너가 유일한 가족이죠?”
“그래.”
“저는 가족을 잃는 슬픔을 잘 알아요. 언니들이 팔려나갈 때는 실감하지 못했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첫째 언니, 셋째 오빠… 마지막 남은 넷째 오빠마저 죽임을 당했을 때에는 머리가 텅 비어버린 것만 같았어요. 생각이란 게 있다면 오직 가족들의 뒤를 따르고 싶다는 것뿐이었죠. 하나 남은 혈육이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한다면… 감히 말해보건대, 아마 소피아 씨의 심정도 그때의 저와 다르지 않을 거예요.”
노구덕은 팔짱을 낀 채 묵묵히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치마가 거의 말려 올라간 채, 허벅지를 훤히 드러낸 상태로 열띤 설명을 하는 실렌의 모습은 우습기 짝이 없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마지막 남은 가족에게 버려졌다면, 그 관계를 회복할 기미조차 없다면… 분명 살아갈 기력도 없어지겠죠. 저라도 그럴 거예요. 세상에 외톨이로 던져진 기분일 테니까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도 이해는 가요. 하지만 오너는 소피아 씨를 이대로 잃기 싫잖아요? 그렇죠?”
“…….”
노구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주는 게 어때요?”
“뭐?”
“해금(解禁)이란 좋은 방법이 있잖아요… 악! 아파요!”
실렌의 통통한 허벅지를 꽉 힘주어 잡은 노구덕은 무슨 가당치도 않는 소리를 하느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붉은 손자국이 남은 허벅지를 문지르며 울상을 짓는 실렌에게 말했다.
“애를 배게 하라고? 내 필요 때문에?”
해금이란, 쉽게 말해서 스퀘어식의 정관수술이었다. 저널을 가진 헌터 남성은 ‘일정 자격’을 갖춰 해금을 하기 전까지 자동적으로 불임 상태를 유지하는데, 해금이란 이 상태를 푸는 것을 뜻했다. 이 불임 상태가 남성 헌터에만 적용되는 이유는 간단했다. 남성 헌터는 상대에 관계없이 후손을 볼 수 있지만, 여성 헌터는 상대가 오직 같은 헌터야만이 임신을 할 수 있으니까.
자격 요건을 만족시키지 못한 대다수 남성 헌터들은 거의 다 불임이었다. 이는 표면적으로 무분별한 사생아 확산의 방지와, 혈족으로 이루어진 무력집단의 출현을 경계한다는 의미가 있지만, 그 의미가 무색하게도 ‘해금’을 통한 사생아들은 아직도 스퀘어 전역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임유진의 사례나, 안세영, 안세희 자매를 비롯한 고아원 아이들이 그 증거. 직위와 능력이 인성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좋은 예였다.
노구덕 또한 이제 미들리그 시즌이 끝나고 클럽이 빅리그로 올라가면, 빅리그의 오너로서 ‘해금’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위원회와 연맹이 인정하는 ‘능력을 갖춘 남자’로서 씨를 뿌릴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는 뜻이다.
“으그그… 그런 식으로 생각하시면 안 되죠. 여자인 제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여성에게 자기 아이가 갖는 의미는 생각보다 엄청 크다고요. 유진이만 봐도 알 수 있잖아요?”
혈육으로 생긴 마음의 공백을 다시 혈육으로 채운다. 얼핏 듣기엔 그럴듯한 말이었다. 하지만 노구덕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그건 아냐.”
“오너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죠…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오래 굴러먹은 헌터라 그런지, 아니면 사는 곳이 달라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실렌의 사고방식은 확실히 독특한 데가 있었다.
“그래. 그래도 네 마음만은 받아두마.”
“네… 앗.”
짧게 답한 노구덕은 실렌의 가느다란 몸을 번쩍 들어 올리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정신없이 떠드느라 시간이 다 지나버렸군.”
“아… 시간이 언제 이렇게…….”
벽에 걸린 시계를 본 실렌은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흐트러진 옷 매무새를 가다듬는 실렌을 아쉬운 눈길로 쳐다보던 노구덕은, 카탈로그를 실렌에게 건넨 뒤 랄로가 준비해 놓은 서류철을 집어 들었다.
“나중에 시간이 날 때 한번 골라봐. 소율이에게는 들키지 말고. 이건 가면서 봐야겠군.”
“알았어요.”
고개를 끄덕인 노구덕은 문고리를 굳게 감아쥐었다.
“자, 그럼 하룻강아지들을 잡으러 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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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보셨다면 추천/코멘 부탁드립니다.
소피아, 임신해라! 는 어떻게 될까요..
몇몇 화에서 지나가듯이 언급되었던 ‘해금’.. 혹시라도 궁금하셨던 분들은 이번화에 해결되셨길!
해금 기준은 별거 없습니다. 지위, 능력, 자산 등으로 연맹에 인정을 받으면 됩니다. 보통은 빅리그 이상부터 해금 신청을 할 수 있죠.
말살 / 감사합니다.
14C2A58H2 / 많이 괴롭혀서 울려버릴까요?
북치네 / 뒤로… 죄송합니다.
향향공주 / 그런 거라도 없으면 정말 못해먹겠다! 소리 나오지 않을까요?
MrX / 이런거라니..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신다면 적극 반영토록 해보겠습니다!
은신설야 / 헌터 대부분은 과거가 어둡죠. 현실에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에 스퀘어로 올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요
호야[虎夜] / 오타 수정! 감사합니다!
dmlcks0614 / 과분한 칭찬 감사합니다! 하지만 조회수가 늘어난다고 해도 제가 없는 시간을 쪼갤 수는 없는 노릇이라 아쉽네요 ㅠㅠ 가을이 좀 지나면 시간이 널널해질 것 같아요!
우낄푸핫 / 어떤 식으로 보듬어 줄까요? 이렇고 저렇게?
가식적썩소 / 쿠폰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많이 버려주세요! 오타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