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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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소녀의 마음
“어디 가시려고요?”
“근방에서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이러고 잘 수는 없을 것 같으니….”
노구덕은 떨어진 곳에서 망부석처럼 서 있는 박지현을 가리켰다.
“저쪽도 좀 부탁해, 유진아.”
“네… 맡겨두세요.”
순간, 왠지 모르게 부러운 빛을 머금은 임유진의 눈빛이 흐느끼고 있는 신소율을 스쳐지나갔다.
‘나도… 휴, 아니야. 응석부릴 수는 없지.’
아이처럼 칭얼대는 건 어린 여자애의 특권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임유진은 짧은 숨을 내쉬며 노구덕과 신소율을 배웅했다.
“너무 멀리 가시면 안돼요.”
“그래.”
“오너~ 소율아~ 불장난은 적당히! 내일 일정에 지장을 주면 안된다구요. 알았죠~?”
장난기 가득한 실렌의 목소리를 간단히 무시한 노구덕은 신소율은 안은 채로 크게 도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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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가 내려앉은 평야를 한 마리 메뚜기처럼 훌쩍훌쩍 뛰어넘어, 아이리스 캠프의 가장 큰 모닥불이 손톱만한 크기로 보일 정도가 되었을 때, 노구덕과 신소율은 어느 야트막한 언덕의 정상에 서 있었다.
“읏차.”
초감각을 발동해 주위에 아무런 위험요소가 없음을 확인한 노구덕은 가져온 부싯돌과 째깍째깍 부딪쳐 작은 화톳불을 만들었다.
작은 불씨가 서늘했던 코밑을 뜨끈뜨끈하게 녹여오자, 한결 여유가 생긴 노구덕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여기라면 괜찮겠지… 쩝. 이런 식으로 장작을 낭비하다니.”
“…장작이야 데모나 언니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잖아요….”
“부탁을 할 때마다 욕을 들어먹어서 문제지.”
“내가 대신 부탁하면 되죠. 그건 그렇고, 아저씨… 불 잘 붙이네요. 나는 몇 번 해도 잘 안되던데.”
아직 목소리는 젖어있었지만, 신소율은 어느새 훌쩍임을 멈춘 상태였다. 춤추는 불꽃을 비추고 있는 탓일까. 소피아처럼 붉게 물든 동공이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쯔쯧… 힘만으로 하려니까 안 되지. 중요한 건 요령이야. 시범 보여줄까?”
“됐어요…….”
서리를 품은 밤처럼 착 가라앉은 목소리. 그에 노구덕은 눈치 없이 쓸데없는 소리를 내뱉은 자신을 자책했다. 지금 부싯돌 다루는 법이나 가르칠 상황이던가. 이럴 때는 변명을 하기보다 순순히 시인하는 것이 바가지를 덜 긁히는 길이었다.
“…미안하다.”
“…흥!”
기다렸다는 듯 뿜어져 나오는 대찬 콧바람. 시작이 좋지 않았다.
“나, 요새 많이 서운하거든요?”
“…그래.”
“유진이 언니한테 반지 준 거는 그렇다고 쳐요. 그럼 다음 차례는 당연히 나잖아요! 그런데… 그런데 오매불망 기다리던 내 차례를 건너뛰고 세 번째를 챙겨줘요? 이게 말이나 되냐고요!”
“…….”
“내가 쩨쩨하게 보일까봐 이런 말까진 안하려고 했는데, 최근에도 정말 너무한 거 아녜요? 늦바람이 무섭다더니, 조강지처들을 버려두고 실렌 언니만 싸고 돌지 않나! 유진이 언니면 인정하겠는데, 대체 내가 실렌 언니보다 부족한 게 뭐예요! 내가 더 어리고, 복근도 잘 빠졌고, 가슴도 잠재력을 따지면 이쪽이 더 위인데!”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비난에 노구덕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할 말이 없기도 했고, 맞장구를 쳐주면 조금이나마 그녀의 울화가 풀리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런데 신소율은 그게 또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버럭 성을 냈다.
“아저씨가 무슨 예스맨이에요? 영혼 없이 고개만 끄덕이지 말고, 뭐라고 말 좀 해봐요!”
노구덕은 작전을 변경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구차하게 변명하느니 예스맨 작전으로 일관하려고 했는데, 어째 더 화를 돋운 것 같았다.
“…소율아. 그게 말이다, 원래는 네게 먼저 선물을 주려고 했는데… 갑자기 데모나가 탐사 일정을 잡아버려서…… 부득이하게 실렌의 장비를 우선적으로 구입한 거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번 탐사에는 유진이와 실렌의 역할이 중요하잖냐.”
“…….”
노구덕은 탐탁지 않은 얼굴로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노려보는 신소율의 매서운 눈빛을 감내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네 선물은… 탐사가 끝나고 복귀하는 길에 칸다무어의 야시장에서 살 계획이었어. 그 왜, 너도 한번 가보고 싶다고 했잖아. 그 칸다무어 야시장 말이다.”
“…그래서요?”
“…음, 그곳의 VIP용 카탈로그를 어렵사리 구해 놨다. 못 믿겠으면 복귀해서 실렌한테 물어봐도 좋아. 실렌이 가지고 있으니까.”
털을 바짝 곤두세운 암고양이의 눈매가 더욱 가늘어졌다.
“…실렌 언니가 그걸 왜 가지고 있어요?”
“아무래도 나는 여성용 액세서리는 잘 모르겠거든. 이왕 선물로 줄 거면 네 취향에 맞는 게 좋잖아? 그래서 실렌에게 대신 선택을…….”
“이 바보 아저씨가!”
벌떡 일어선 신소율은 그의 정강이를 강하게 걷어찼다.
“어이쿠!”
불의의 일격을 당한 노구덕은 엄살을 피우며 정강이를 부여잡았다. 하지만 곧이어 들려오는 신소율의 서늘한 음성에 바로 자세를 바로 할 수밖에 없었다.
“별로 아프지도 않은 거 알거든요? 똑바로 못 서요?”
“…크음.”
“아저씨, 진짜 여자 맘을 그렇게 몰라요? 좋아요, 차례가 늦을 수밖에 없었던 건 그렇다고 쳐요. 근데 왜 내 선물을 실렌 언니가 골라주는 건데요? 예쁘건 못나건 그게 그리 중요해요? 나는 실렌 언니가 골라 준 선물이 아니라, 아저씨가 직접 고른 선물이 받고 싶은 거라고요. 왜 그걸 몰라요? 그딴 선물 받아봤자, 하나도 안 기뻐! 하나도 안 기쁘다고! 귀찮으면 그냥 귀찮다고 하란 말이야… 우으으… 흑…….”
아슬아슬하게 틀어막고 있던 감정의 둑이 또다시 터졌다. 아랫입술이 하얘지도록 꽉 깨문 신소율의 눈망울은 금방이라도 흘러넘칠 것처럼 습기가 차오르고 있었다. 그 격랑에 휩싸인 모습에, 대충 달래주면 되겠지 하는 안이한 생각을 하고 있던 노구덕은 스스로를 크게 질책했다.
‘이 병신, 머저리 같으니라고…….’
생각이 짧아도 너무 짧았다. 2년차, 제법 숙련된 헌터가 되었다고는 해도 그건 겉모습일 뿐, 그 알맹이는 감성이 풍부한 여린 소녀였다. 쉽게 상처 받고, 사랑을 주지 않으면 언제든지 유리처럼 깨져버릴 수도 있는 그런… 여자아이.
이런 선물…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일일 수도 있다. 적어도 그는 그랬다. 그저 선물 하나씩 돌리면 되겠지… 그런 안일한 생각을 품은 채, 당사자들의 기분 같은 건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특별한 의미가 담긴 선물을 고르는 것마저 다른 사람에게 맡겨버린 자신의 무신경함이, 이 아이에게는 어떻게 비쳐졌을 것인가.
이런 못난 화상도 좋다고 달라붙는 아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상처받지 않는 건 아니잖은가. 노구덕은 솔직히 인정해야만 했다. 그는 그 무조건적인 사랑에 둔감해져 있었던 것이다.
“잘못했다… 소율아, 아저씨가 잘못했어….”
“으허엉… 흐아아아앙…….”
노구덕은 울음을 터뜨리는 그녀를 앞에 두고도 어떠한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가볍게 상대해 주면서 기분이나 풀어주면 되겠지… 그러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오랜만에 관계도 가질 수 있을 테고… 이런 병신 같은 생각은 이미 싹 달아난 지 오래였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자신이 너무나도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어느새 그가 피워놓았던 모닥불은 마른 장작들을 죄다 까맣게 태우고 작은 불씨만을 남겨 놓은 채였다. 신소율을 마주 볼 면목이 없어 무심코 시선을 돌린 노구덕은 문득, 힘을 잃고 볼품없이 사그라든 저 불씨가 꼭 자신과 판박이라는 생각을 했다. 거듭된 행운에 초심을 잃어버리고 초라하게 변해버린 자신과.
탁.
마침내, 간헐적으로 빛을 발하던 마지막 불씨마저 힘을 다했다. 그나마 밤을 밝혀주던 온기가 사라지자,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초겨울 밤의 살을 에는 듯한 추위였다.
묵묵히 앉아있던 노구덕은 걸치고 있던 외투를 벗어, 양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는 신소율에게 덮어주었다.
“소율아… 이만 내려가자.”
“…….”
신소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릎 틈 사이로 훌쩍이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미동 없이 앉아있을 따름이었다.
“이번 일은… 정말 미안하다. 이제 와서 이런 말하기엔 별로 믿음이 가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두 번 다시는…….”
“…믿어요 …훌쩍…….”
“…응?”
깜짝 놀라 시선을 돌리니, 어느새 얼굴을 들고 그가 있는 쪽을 빤히 응시하고 있는 신소율이 보였다. 그녀의 하얀 낯은 눈물과 콧물로 너저분해진 상태였지만, 전혀 추하게 보이지 않았다.
“많이… 진짜 많이… 훌쩍… 서운하지만요…. 아저씨도… 훌쩍… 많이… 바빴으니깐… 이해는… 훌쩍… 되는데… 그치만…….”
연신 훌쩍거리며 힘겹게 말을 잇는 신소율의 모습을 바라보는 노구덕의 심장은 바늘에라도 찔린 것처럼 참을 수 없이 욱신거렸다. 그는 그녀의 앞에 무너지듯 한쪽 무릎을 꿇고는 아기 새처럼 가녀린 몸을 두 팔을 벌려 껴안았다.
“…미안하다.”
“…훌쩍.”
그저 미안하다는 말 외에 무슨 할 말이 있으랴. 그때 신소율의 가느다란 팔이 두꺼운 허리를 둘러 등을 살포시 감싸 안는 게 느껴졌다.
깊게 포옹한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꾹 안은 채, 시린 손마디에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힘을 풀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공지에 써 있듯 별도의 임시 공지가 없으면 그날 화는 새벽이나 아침에 올라가는 것이니, 기억해 주세요!
이번 화는 일요일에 올라갔어야 하는 화입니다.
소제목 변경했습니다. 큰 파트 안에 작은 에피소드로 올리려고 했는데, 그냥 따로 소제목을 붙이는 게 나을 것 같더군요. 분량이 다소 짧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한번쯤 이런 식으로 주인공이 자기반성을 할 계기를 주고 싶었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단 조금 짧은 에피소드이긴 합니다만… 삐졌다고 무조건 섹스로 해결하려는 못된 버릇은 지양하는 게 좋겠죠. 히로인들이랑 오래오래 잘 살려면요.
독자 여러분도 호감도 100 찍었다고 방심하시면 안됩니다. 여자 마음이란 언제 돌아설지 몰라요..
오늘 화는 저녁에 따로 올라갑니다. 어쩌면 12시 넘기고 올라갈지도 모르겠네요.
힘든 월요일 모두 잘 넘기시길 바랍니다.
은신설야 / 너무 괴롭혔네요 이번화는 ㅎㅎ
향향공주 / 섹스로 모든 걸 해결할 수는 없다고요!
우낄푸핫 / 데모나는… 글쎄요 아직은 좀 기다려야 할 것 같네요.
에보커 / 소율이 많이 웁니다 ㅠㅠ
호야[虎夜] / 다른 사람 보는 느낌이겠죠? ㅎㅎ
으뜸볍신처리하기2 / 그런 생각을 했던 안일한 주인공! 반성하세요!
월병인 / 주인공의 자성을 촉구합니다
임대가르시아 / 감사합니다 ㅎㅎ
북치네 / 저번화에 언급되었듯 주인공도 박지현을 호락호락 놓아줄 생각은 절대 없습니다! 하지만 북치네님 리플을 보니 확실히 좀 느슨해 보이기도 하네요. 그래도 아직은.. 느슨한 면이 있는 것도 좋겠죠. 아직은요..
코드표 / 이미 엉엉 울게 되었습니다..
아토므스크 / 생각보다 일이 심각해져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