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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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탐사,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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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벅뚜벅 걸어 임유진의 방문 앞에 선 노구덕은 작게 심호흡을 하며 노크를 했다.
똑똑.
“유진아, 나야. 들어갈게.”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임유진은 신소율이 나갈 때 보았던 모습 그대로, 상체만 일으킨 채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민낯이지만 변함없이 아름다운 자태. 그러나 그 푸른 눈동자에 서린 빛은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위태롭기만 했다.
절로 안타까운 마음이 인 노구덕은 묵묵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임유진은 노구덕이 들어왔음에도 힘없이 고개만 돌렸을 뿐, 여전히 침묵을 지키며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한없이 작아 보여서, 노구덕은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상처가 많은 여자였다. 한때는 헌터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지만, 이후에는 끝없는 나락으로 굴러 떨어져 근 십 년 간 딸아이와 함께 힘든 삶을 살아왔다. 처음 그와 맺어질 때만 하더라도… 임유진은 스스로의 육체를 그에게 제공함으로써, 그가 가희의 듬직한 대부(代父) 역할을 해주기를 바랐다. 그건 섹스를 빌미로 한 거래이지, 사랑이 아니었다. 아마 그때의 임유진은, 한계에 달해 있었으리라. 여자로서의 정조를 자기 손으로 내다 버릴 만큼, 그녀는 고된 삶에 지쳐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안고 있는 마음의 상처는 그 강대한 무력과는 별개였다. 여전히 그 마음의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한, 임유진은 평생 두 번 다시는 그 패기 넘치던 시절의 붉은 봉황으로 되돌아갈 수 없을 터였다.
그럼에도… 선뜻 말이 나오지 않는 건,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임유진의 수척한 얼굴을 보자 그때의 영상이 되살아났기 때문이었다. 소울 트랩 속에서 보았던, 박준혁과 사랑을 속삭이며 달콤한 신음을 흘리던 임유진의 얼굴이. 탄탄한 놈의 몸을 받아들이던 희고 젊은 여인의 육체가 도저히 눈앞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소울 트랩이 사납게 할퀴고 지나간 것은, 임유진의 마음뿐만이 아니었다.
“…유진아.”
애써 그녀의 이름을 부른 노구덕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기껏 쥐어 짜낸 목소리는 가래라도 끓는 것인 양 탁하기 짝이 없었다.
“당신…….”
그래도 효과는 있었다. 임유진은 시들어버린 꽃 같은 눈을 들어, 복잡한 빛을 띠고 있는 노구덕의 얼굴을 응시했다.
“…보셨나요?”
밑도 끝도 없는 물음. 그러나 그 진의(眞意)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문득, 노구덕의 목젖이 위아래로 크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래.”
노구덕은 순순히 시인했다. 분명, 임유진은 구출 당시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마 자기가 어떻게 구출되었는지, 그 경위조차 모르고 있을 터. 그럼에도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여자의 본능인 것일까, 아니면 구출 당시의 기억이 희미한 잔상으로 남아 기억되고 있는 것일까.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숨길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일 테니까.
…그게 좋았다. 임유진에게나, 노구덕 자신에게나.
“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죠?”
“…….”
이번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임유진은 그의 무거운 침묵을 대답 대신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슬픔으로 덧씌워진 그녀의 눈가가 파르르, 세찬 떨림을 보였다.
그리고 지속되는 정적. 노구덕은 불현듯 이 공기가 참을 수 없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고개를 떨군 임유진의 모습도, 그걸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도… 난생 처음 본 낯선 풍경처럼 익숙하지가 않았다.
노구덕은 조용히 속으로 자문했다. 임유진과의 거리가 이토록 멀었었나?
그때, 망부석처럼 앉아있던 임유진이 정적을 깼다.
“반지… 돌려드릴게요.”
“뭐…?”
노구덕은 멍청한 눈으로 내밀어진 그녀의 손바닥을 쳐다봤다. 깨끗한 손바닥 위에는 그가 선물한 ‘아비가일의 소망’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
반지를 빼는 낌새도 느끼지 못했건만… 이미 그가 오기 전부터 미리 반지를 빼놨던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인지한 노구덕의 눈에 참을 수 없는 분노의 기색이 어렸다.
“지금 뭐하는 짓이야?”
단언컨대 노구덕이 그녀에게 화를 내는 것은 그녀와 맺어진 이래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담담하게 반지를 내밀던 임유진의 어깨가 크게 움츠러드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임유진은 내민 손을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받을 수 없어요. 전 이런 반지를 받을 자격이 없는 여자예요.”
“다 지난 일을 가지고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그럼 나는 뭐 깨끗한가? 그 자격이란 건 누가 정하는 건데? 그렇게 치면 이 세상에 자격 있는 사람이 어디 있다는 거야? 엉?”
그의 언성이 높아질수록, 늘어뜨린 임유진의 고개도 점점 아래로 숙여졌다.
“하지만… 하지만… 으흑…….”
임유진의 음성이 점차 젖어들었다. 흐느끼고 있는 것이다.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하던 임유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두 줄기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당신도 알잖아요? 그럼 그걸, 그걸 잊을 수 있겠어요? 아니요, 그럴 수 없을 걸요.”
“…….”
“절 볼 때마다 생각날 거예요. 평생 그 기억에 시달려야 한다고요. 이젠… 돌이킬 수 없단 말이에요! 우으으… 흑…….”
처절하게 외친 임유진은 양 무릎에 얼굴을 묻고 소리죽여 울었다. 그녀의 비통한 절규에, 노구덕은 목구멍이 꽉 막혀 버린 듯했다.
머리로는 어서 그렇지 않다고, 임유진을 위로해 주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그의 입술은 실로 꿰매진 것처럼 도통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녀의 말이 하등 틀린 게 없다는 것을, 그는 이미 실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죽은 박준혁의 망령이 흙 속에서 되살아나, 두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 스며든 듯했다. 서로가 그걸 아는 이상, 입 발린 소리로 위로해봤자 무슨 위안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임유진은 겉으로 보기에 다시 없을 현모양처이자 순종적인 여자로 보였지만, 실상 그것은 그녀의 본성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노구덕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그런 역할을 자처했을 뿐, 실제 임유진은 질투가 많고, 그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여인이었다. 신소율과 실렌을 받아들일 때에도 가장 불안해했던 그녀가 아니던가.
그런데 이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과거에 이미 지나간 일? 그건 어떤 의미도 없었다. 세상에 어느 남자가, 자기 아내가 다른 남자와 뒹구는 걸 면전에서 보고도 아무런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있을까. 지금은 바로 실감나지 않겠지만, 결국 그 기억은 끊임없이 되살아나 노구덕을 괴롭힐 테고, 그 여파는 고스란히 그녀에게 미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애정은 점점 식어가겠지.
‘또다시 버림받는 건 싫어….’
임유진은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결정을 한 것이다. 점점 멀어져가는 그를 마음 졸이며 지켜보느니, 차라리 처음부터 단념하자고. 눈치껏 자리에서 빠져주면, 그러면 적어도 그의 아내는 못 되어도… 조력자로서 남아 있을 수는 있겠지. 그러면 가희도 아버지를 잃지 않아도 될 것이다. …반지를 건넨 것은 그 일환이었다.
“후우…….”
흐느끼는 임유진을 앞에 둔 노구덕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솔직히 그의 기분도 엉망인지라, 누굴 위로하고 말고 할 기운이 나질 않았다. 거기에 임유진이 이런 극단적인 면모를 내보이니 힘이 쭉 빠져버린 탓도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신소율 때도 그랬지만, 바쁘게 앞만 보고 달려 나가다보니 정작 자기 집안일에 소홀히 한 것이 새삼 느껴졌다. 그래서 옛 성현들도 큰일을 하려면 가정부터 잘 다스리란 말을 했나 보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고 하지 않던가.
박준혁의 일도 그랬다. 차라리 상처가 되었을지언정, 일찍부터 짚고 넘어갔더라면 이렇게 크게 다가오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박준혁이 소피아의 손에 죽었을 때도, 노구덕과 임유진은 서로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조용히 그 일을 넘겨버렸다. 딴에는 서로를 배려한 일이었지만, 결국은 스스로가 상처 입고 싶지 않아 의미 없는 겉돌기만 반복했을 뿐이었다. 노구덕도, 임유진도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 같아 두려웠던 것이다.
그렇게 쉬쉬하며 덮어두기만 했던 일이, 지금 이렇게 썩을 대로 썩은 고름이 되어 터져버렸다.
‘하필 그 소울 트랩인지 뭔지에 걸리지만 않았어도…….’
…라고 생각하던 노구덕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정말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노구덕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진아, 난 말이다…. 네 생각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지금도 그래. 지금도… 눈만 감으면 박준혁, 그놈의 면상이 떠오르고, 그 옆의 네 얼굴도 같이 떠올라.”
임유진은 무릎에서 얼굴을 뗐다. 눈물로 흠뻑 젖은 그녀의 두 눈두덩은 벌겋게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미안해요. 제가…….”
“네 탓이 아냐. 이건 누구의 탓도 아니지. 고작 한 번, 젊었을 때의 일이야. 겨우 그런 걸 평생 안고 가야 한다면, 세상에 떳떳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
“하지만….”
“이런 말로는 위로가 되지 않겠지. 나도 안다. 그냥, 이렇게라도 말해주고 싶었어. 그리고… 난 이미 가족에게 한번 버림받은 몸이야. 내가 말했었지. 지구에 있었을 때,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네.”
임유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언제였을까. 아마 그와 첫 관계를 가지기 바로 직전이었을 것이다. 그때도 지금과 상황이 똑같았다. 노구덕은 실의에 빠져 있는 임유진에게 솔직한 속내를 털어 놓으며 위로를 해주었다. 잠시 그때를 회상했는지, 임유진의 눈이 망연히 젖어들었다.
“마누라, 자식들 다 미국에 보내고 결국 연락마저 끊긴 등신 같은 기러기 아빠였지. 그런 내가, 또다시 가족을 내치는 짓을 할 것 같아? 어림도 없는 소리. 쯧.”
작게 혀를 찬 노구덕은 여전히 임유진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직시했다.
“솔직하게 말하마. 나도 그 기억만 떠오르면 자다가도 화가 나고, 열불이 뻗친다. 나도 남자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싫어지거나 하진 않아. 애초에 그런 얄팍한 마음가짐이었으면 가희를 책임지겠다고 하지도 않았을 거다.”
“…….”
“이건 우리 둘이 극복해나가야 할 문제야. 그게 부부니까. 그런데 너는… 솔직히… 이번에는 좀 실망했다. 서운하기도 하고. 내가 마음을 담아 선물한 반지가 네게는 고작 이런 의미밖에는 되지 않았다니… 유진아, 너는… 이런 문제가 생길 때마다 이런 식으로 해결할 거냐? 이번엔 반지, 다음엔 또 뭘 내놓으려고? 가희를 데리고 떠나기라도 할 거냐?”
“아…니요…….”
노구덕은 말을 하면서 침대 한복판에 놓인 반지를 집어 들었다. 다시 회수하기라도 하겠다는 걸까. 그것을 본 임유진의 눈이 급격히 흔들리려는 찰나, 노구덕은 가만히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 이리 줘.”
임유진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의 말에 따라 손을 내밀었다. 겉보기엔 가냘프고 아름다워 보이는 손이었지만, 자세히 보면 곳곳에 굳은살이 생겨 투박해진 손. 노구덕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그 약지에 조심스럽게 반지를 끼워 넣었다. 붉은 반지 자국이 선명히 아로새겨져 있는, 반지가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떨리는 손을 굳게 맞잡은 노구덕은 느릿하게 말했다.
“반지, 또 빼기만 해봐라. 그때는 아주 애들 앞에서 볼기짝을 때려줄 테니까.”
“…….”
“이걸로 됐어. 그러니까 다시는… 그런 말은 하지 말자. 응?”
내용은 가벼운 농담조였으나, 그의 음성은 천리 길을 달려온 사람처럼 지쳐 있었다.
“어흐흑…!”
그리고 임유진은, 십 년은 늙어버린 것 같은 그의 품으로 힘없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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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보셨다면 추천/코멘 부탁드립니다.
다음화는 아주 질퍽질퍽한 내용이 이어질 예정이었으나, 잠깐 고민을 하게 되네요. 쓸지 말지.. 소율이때는 그냥 지나갔으니 이번에는 써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으음.. 단순한 섹스가 아니라 서로 속을 푸는 과정이라고 봐야 하겠죠. 하여튼 그건 12시 이후에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한따가리 / 공부도 좋지만 몸도 챙겨가면서 하세요 ㅎㅎ
북치네 / 유진이에게 따끔한 질책을!
호야[虎夜] / 유진이 새치 대신 구더기 주름살이 더 늘었답니다 오타수정했습니다.
hohokoya1 / 옙!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셨길 바라며 ㅎㅎ
에보커 / 마음고생은 예전에도 심했죠 ㅠㅠ 파란만장한 삶이네요 참
우낄푸핫 / 그건 차후에 나오겠죠?
가식적썩소 / 저도 마음에 두고 있어요. 일상편을 좀 더 늘려야 할것 같기도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