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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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탐사, 그 후
“팬텀스티드….”
박지현은 묘한 흥분이 어려 있는 어조로 그 단어를 되뇌었다. 물론 이제 갓 스퀘어에 들어온 신출내기 헌터가 팬텀스티드가 뭔지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울림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파문처럼 일어나는 듯했다.
“후우…….”
말은 필요 없었다. 박지현은 조용히 눈을 감고, 하얗게 비워져 있는 머릿속 도화지에 천천히 하나의 형상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역동적으로 꿈틀거리는 근육을 뽐내는, 검은 빛깔의 윤기 나는 털을 가진 흑마(黑馬). 언젠가 경마장에 보았던, 앞발을 높이 쳐들며 투레질하는 거대한 말의 형상이 선연하게 뇌리에 아로새겨지는 순간.
별안간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듯하더니, 그녀의 코와 입에서 검푸른 안개가 빠르게 스며 나왔다. 마치 방금 전 들이켰던 구슬 가루들이 색만 바뀌어서 도로 토해지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아…!”
몹시 놀란 박지현은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코와 입에서 휘리릭 뿜어져 나온 연기가 어느새 거대한 말의 형상을 이룬 것이다. 그것도 그녀가 상상했던 이미지와 거의 흡사한 형태로.
-히히히힝!
사납게 치솟은 갈기를 휘날리며, 난폭한 콧김을 뿜어내는 군마는 그 눈마저도 동공을 찾아볼 수 없는 핏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털빛은 전체적으로 검은 빛깔에 군청색 기운이 윤기처럼 흘렀고, 전신에 반투명한 흑색의 기류를 휘감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예사 말이 아니었다. 아마 저 삼국시대를 풍미했던 명마 적토가 현생한다면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말 주제에 위용이 넘치는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이 늠름한 자태를 드러냈을 때부터 줄곧 한 곳만을 빤히 응시하고 있다. 그곳에는 넋을 잃고 홀린 듯한 눈으로 말을 쳐다보고 있는 박지현이 서 있었다.
“팬텀스티드… 우리 식으로 부르자면 망령군마라 불리는 언데드입니다. 죽은 말의 영혼을 명부에서 되살려, 일종의 계약을 맺고 소환수로 삼는 주문이지요. 언데드이기 때문에 체력의 제한도 없고, 죽음을 도외시하여 주인을 지킬 정도로 용맹하다고 합니다. 방금 전 박지현 헌터가 치른 의식은 이 녀석과의 주종계약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로써 이 녀석은 박지현 헌터의 것이니…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이름이라도 지어 주는 건 어떻습니까?”
노구덕의 부드러운 음성에 비로소 정신을 차린 박지현은 그녀답지 않게 어쩔 줄 몰라 했다.
“이, 이건… 너무…….”
감당하기 힘든 선물이다. 그러나 박지현이 뒷말을 이어가기도 전에 노구덕이 선수를 쳤다.
“영혼의 계약은 무를 수 없습니다. 반품 및 환불이 안 된다는 말이지요. 애마와의 첫 대면을 그런 식으로 회피할 겁니까?”
“…감사합니다.”
결국, 박지현은 거의 수직으로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했다. 지금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감사 표현이었다. 그만큼 이 팬텀스티드는, 그녀의 마음에 쏙 드는 선물이었다.
“어휴우우….”
박지현은 살포시 심장어림에 손을 얹었다. 흥분감으로 가슴이 마구 두방망이질하는 게 느껴졌다. 두근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한 박지현은 이내 입을 꾹 다물고 여전히 제 자리에서 투레질을 하는 팬텀스티드에게 걸어갔다.
-푸르르…!
녀석의 지척에 다가서자, 더운 콧김이 수증기처럼 뿜어지는 것이 보였다. 이토록 생동감이 넘치는 녀석이 죽은 말의 영혼이라니. 박지현은 무심코 손을 뻗어 팬텀스티드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거대한 말을 소중히 어루만지는 그녀의 손길에서는, 추호의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푸륵, 푸륵….
“그래… 착하지….”
꽤나 흉폭하게 생긴 팬텀스티드는 의외로 성질이 온순한 것인지 얌전히 박지현의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오히려 간혹 코로 두루두루 고른 숨을 내쉬는 게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박지현 또한 생전 말을 관리하거나 교감을 나누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팬텀스티드와 거리낌없이 어울리는 모습이 무척이나 즐거워보였다.
그것을 지켜보던 가이탄은 흐뭇하게 말을 꺼냈다.
“잘 어울리는군요. 팬텀스티드가 본래 저리 온순한 소환수였던가요?”
“말했잖아. 상성은 좋은 편이라고. 지능이 비슷한 것들끼리 서로 이끌린 모양이지.”
“허허… 그건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서로 마음이 맞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역시 오너의 혜안은 대단하군요.”
데모나는 말대가리와 근육뇌가 잘 만났다며 또다시 비아냥거리고는, 복귀 채비를 하겠다며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후흐흐흐….’
한편, 팬텀스티드 카드가 제대로 먹혀들자, 노구덕은 회심의 미소를 흘렸다. 바로 이것이 그가 준비한 박지현 영입의 비장의 카드였다.
원래는 팬텀스티드가 아니라 그보다 급이 떨어지는 언데드인 본스티드(Bone steed, 해골군마)로 박지현을 회유할 계획이었고, 그에 관해 출발 전부터 데모나와 얘기를 끝내 놓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막상 유적을 뒤져보다 팬텀스티드가 봉인되어 있는 구슬을 발견한 노구덕은 계획을 바꾸었다. 팬텀스티드를 과감히 박지현에게 투자하기로. 이왕 인심을 쓸 거면 크게 쓰랬다고, 어차피 아이리스에 달리 팬텀스티드의 능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헌터도 없었기에 내릴 수 있었던 결단이었다.
‘거기에 마침 마상용 랜스(Lance)도 확보했으니… 능력만 제대로 개발하면, 아주 쓸 만한 헌터가 되겠군.’
유적에서 얻은 무기 중에는 마상용 창으로 보이는 장창도 있었다. 자세한 능력은 알 수 없으나, 마녀회의 유적에서 애지중지 보관하고 있던 장비라면 두말할 나위가 없는 성능일 터. 박지현 육성계획은 이제 탄탄대로나 마찬가지였다.
슬슬 말을 꺼낼 타이밍이 되었다고 판단한 노구덕은 팬텀스티드와 오붓한 한 때를 보내고 있는 박지현에게 다가갔다.
“어떻습니까? 선물은 마음에 드나요?”
“예! 덕분에 정말… 좋은 친구를 얻었어요!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대장!”
처음 드래프트 회장에서 만났을 때의 껄렁한 태도와는 백팔십도 달라진 모습을 선보이는 박지현이었다. 값비싼 선물의 힘은 이토록 대단했다.
“크흠… 그거 다행이군요. 그래서, 이름은 뭐라고 지었습니까?”
“아, 이름이요… 그건 아직…….”
박지현은 어색하게 볼을 긁적였다. 하긴, 이 짧은 시간에 마음에 드는 이름을 떠올리는 건 그녀에게 너무 무리한 주문일 수도 있었다. 그거야 어차피 두 인마(人馬)가 알아서 할 일인지라, 노구덕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박지현 헌터도 대충 눈치 챘겠지만 이번 유적 탐사는 대외적으로 비밀리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만큼 클럽 내에서도 중요한 탐사였고, 정예 멤버들로 탐사대를 구성했죠. 그 결과, 탐사대는 이 유적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헤실헤실 밝게 웃고 있던 박지현의 표정이 살짝 경직되었다. 갑자기 그의 분위기가 진지해진 탓이다.
“아, 예…. 저도, 조금은 느끼고 있었어요.”
“이토록 중요한 유적 탐사에… 왜 박지현 헌터에게 동행 제안을 했는지, 그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경직된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설마하니 그는… 만약 아이리스에 들어오지 않겠다고 말한다면, 살인멸구(殺人滅口)를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박지현의 뇌리에 순간, 그러한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노구덕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의 예상을 한참 빗나가는 것이었다.
“그만큼 박지현 헌터를 간절히 원하기 때문입니다.”
“저를…?”
“예. 우리 탐사대와 동고동락하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혹시 불길한 생각을 하셨다면…….”
그가 눈을 정면으로 쳐다보며 말꼬리를 늘이자, 내심 뜨끔해진 박지현은 서둘러 도리질을 했다.
“그게 아니라… 조금 뜻밖이라서….”
“흠, 탓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어요. 현실적인 얘기를 피할 필요는 없겠지요. 아무것도 모르는 새내기라고는 하나, 외부인에게 클럽의 극비사항을 공개하는 건, 그만큼 위험부담이 따르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박지현 헌터에게 팬텀스티드를 건네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팬텀스티드의 영혼의 각인은 주인이 죽더라도 끝까지 유지됩니다. 주인이 죽는다면 팬텀스티드도 사라지지요.”
박지현은 긴가민가한지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그래요?”
“정 못 미더우면 거기 그 녀석에게 물어봐도 됩니다. 어느 정도는 사람 말을 알아듣는 녀석이니까요. 안 그러냐?”
노구덕이 가리킨 것은 박지현의 뒤에서 고갯짓을 하고 있는 팬텀스티드였다. 녀석은 줄곧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던 것인지, 노구덕이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끄덕 움직였다.
이렇게까지 하니, 믿기 싫어도 믿을 수밖에 없다. 아니, 박지현은 노구덕의 말을 그다지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불길한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것도 처음 한순간뿐이었다. 이제껏 같이 지내면서 본 노구덕은 그런 식으로 사람의 뒤통수를 후릴 만큼 비열하고 사악한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다.
…까놓고 말해서, 그녀의 안목으로 노구덕이란 인간의 진면목을 통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지만… 뭐 어떠랴. 중요한 건 함께 탐사를 하면서 이 정도의, 그러니까 충분히 긍정적으로 여겨질 정도의 ‘신뢰’를 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조금씩 쌓아올린 신뢰는, 때로 의사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도 하는 법이다.
박지현은 한결 차분해진 얼굴로 노구덕을 바라보았다. 이전까지 있었던 내적 갈등이 모두 사라진 편안한 기색이었다.
“대장… 어음…, 아이리스 오너.”
“예, 말씀하십시오.”
“아까, 자정까지 말미를 달라고 했었죠. 그건 취소할게요. 이런 선물까지 받았는데 입 싹 닫는 건 제 성미에 맞지 않아요. 그러고 싶지도 않고요.”
“그 말은…….”
박지현의 고개가 힘차게 끄덕여졌다.
“네. 아이리스에 들어갈게요. 아니, 아이리스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박지현은 제안의 수락이 아닌, 도리어 그녀 자신이 을(乙)의 입장으로 돌아가 공손히 부탁하는 자세를 취했다.
“저는 가방끈이 짧은 무식한 여자지만, 항상 마음에 품고 길잡이로 삼는 금언 정도는 있어요.”
노구덕은 이 아가씨가 무슨 말을 하려나, 호기심에 가득찬 눈으로 그녀의 입을 주시했다.
“무사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했어요. 아이리스 오너가 제게 분에 넘치는 대우를 해주셨으니, 저도 신명을 다해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크흠.”
주먹을 불끈 쥐고, 당차게 외치는 박지현의 모습은 흡사 어떤 사극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어쨌든 그 비장한 분위기에 호응하지 않을 수는 없었던 터라, 노구덕은 뭔가 떨떠름한 기분을 떨쳐내듯 겸연쩍은 얼굴로 머리를 주억였다.
“…환영합니다. 박지현 헌터.”
…속으로 터져나오는 실소를 필사적으로 참으면서.
‘그거 말이 좀 다른 거 아닌가?
아마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신을 기쁘게 해 주는 이를 위해 화장을 한다(士爲知己者用, 女爲悅己者容)라는 격언의 변형인 듯한데, 노구덕으로서는 이왕이면 후자를 택해 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안 되지, 안 돼. 또 이런 천벌 받을 생각을… 너는 세 명으로도 벅차다, 구덕아.’
근래 신소율, 임유진과 크고 작은 트러블을 겪었던 것을 상기한 노구덕은 황급히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떻게 된 게 꽃 같은 아내들을 두고 있으면서도 불쑥불쑥 이런 망상이 치솟는단 말인가. 이래서 오크는 글러먹은 종족이라고 하는가 보다.
노구덕이 가벼운 번뇌에 고심하는 사이, 안색이 환해진 박지현은 가이탄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축하합니다. 박지현 헌터. 이제 정말로 동료가 되었군요.”
“예! 고맙습니다. 가이탄 스승님. 앞으로도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하하! 물론입니다. 늘그막에 재미있는 소일거리가 생긴 것 같군요.”
박지현의 씩씩한 분위기에 전염된 것인지 가이탄 또한 낯빛이 무척이나 밝았다. 허문수와 실렌 같은 관계랄까. 노구덕은 벌써부터 영입 시너지가 보이는 것 같아 꽤 뿌듯한 기분이었다.
이로써 마녀회의 유산과 박지현의 영입이라는 두 개의 성대한 결실을 거둔 탐사대는, 그날 저녁을 기해 마침내 아이리스로의 귀환길에 올랐다.
============================ 작품 후기 ============================
재밌게 보셨다면 추천/코멘 부탁드립니다.
4편으로 끝낼 파트였는데 조금 길어졌네요.
오늘 중으로 소피아를 등장시킬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모두 좋은 하루 되시길!
월병인 / 천하무적! 박지현 성격이라면 그렇게 지을 법도…!
은신설야 / 네?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아무 말도 안했습니다!
북치네 / 쉿! 그 말을 해서는 안돼요!
괴수1983 / 하하.. 나중에 박지현이 죽지 않고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렇게 될 수도?
호야[虎夜] / 여자들만의 비밀입니다! 알려고 하지 마세요! 오타수정완료
가식적썩소 / 오타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zeromax / 햅쁴이…? happy인가요? 행복하세요! 저도 건필하겠습니다!
콜마 / 그런 능력은 너무 사기적인 능력이라 봉인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성의 구더기가 되면 십존도 그냥 쪄먹을지도
우낄푸핫 / 네 영입 확정! 지금 영입했습니다!
향향공주 / 구더기가 나름 연륜이 있어서 이렇게 넘어가는 거지 젊은 애들 같았으면 눈깔이 아주 뒤집어지지 않았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