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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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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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아와의 면담이 끝나고, 노구덕은 곧장 위층에 마련되어 있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아직 환한 대낮이었지만, 일단 지금은 여장을 풀고 침대에 누워 푹 쉬고 싶은 생각밖에는 들지 않을 정도로 피로했다. 여행하면서 쌓인 정신적 피로감도 그렇지만, 데모나에 관한 일 때문에 머릿속이 뒤엉킨 실타래처럼 헝클어진 듯했다.
‘그 여자는 위험해요. 자칫 그 여파가 주인님뿐 아니라 아이리스 전체에 미칠 수도 있다고요.’
소피아의 경고가 좀처럼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노구덕은 미역처럼 흐느적거리는 발걸음으로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오너!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늘 복귀하신 겁니까?”
“예. 도리안 헌터, 오랜만이군요.”
“아, 오셨어요? 다친 덴 없으시고요?”
“하하… 덕분에 멀쩡합니다. 노엘 씨도 잘 지내셨습니까?”
“네. 저야 항상 잘 지내고 있죠.”
“상기는 뭐 하고 있습니까?”
“그이는 진솔이와 연구실에 있어요. 불러올까요?”
“아니요, 됐습니다. 저도 오늘은 방에서 꼼짝 않고 쉴 생각이라서요.”
“호호… 하긴, 쉬는 것도 일하는 것 만큼이나 중요하죠. 그럼 푹 쉬세요.”
계단을 오르면서 도리안, 노엘 등 반가워하는 헌터들과 인사를 나눈 노구덕은 두 갈래로 갈라진 복도에 다다르자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 선택지는 네 개. 본인의 방과 세 여인의 방 사이에서 갈등하던 노구덕은 별안간 크게 한숨을 내쉬며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본인의 방이 있는 방향이었다.
사내란, 가끔 다 필요 없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을 때가 있다. 지금의 노구덕이 꼭 그랬다.
“허어, 방금 복귀한 건가?”
발밑을 바라보고 걸어가던 노구덕은 전면에서 들려오는 늙수그레한 음성에 고개를 들었다. 낡은 사제복을 조촐하게 차려입은 백발의 노인, 허문수가 빙그레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문수 형님.”
“얼굴이 편치 않은 것 같으이. 체력이 장사인 자네가 여독 때문에 피곤할 리는 없을 테고… 뭔가 나쁜 일이라도 있는 겐가?”
“하, 그렇게 보였습니까?”
노구덕은 허탈하게 중얼거리며 얼굴을 쓸어내듯이 문질렀다. 방금 마주친 허문수가 대번에 알아차릴 정도라면, 어지간히 죽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쁜 일이라기보다는… 고민거리가 생겨서 그럽니다.”
“흐음, 남에게는 말 못할 고민인가보군.”
노구덕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데모나의 진의(眞意)가 의심스럽다. 이런 고민을 누구와 나눌 수 있단 말인가. 소피아는 데모나를 배척하고 있고, 실렌이나 신소율은 별 도움이 안 되고, 임유진은 데모나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할 게 뻔했다. 마녀의 산에서 도움을 받은 이후로, 임유진은 데모나를 더없이 신뢰하고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속을 알 수 없는 데모나에게 돌직구를 던져본다? 역시 어불성설이었다.
그는 데모나의 과거사와 바이론과의 관계를 모두 털어놓았을 때, 소피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주인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 제가 너무 단정적으로 얘기한 것 같네요. 확실히 그 부녀 관계에는 어떤 사연이 있는 것 같아요. 저도 나름대로 그 바이론이란 남자를 찾아볼게요. 그의 행적을 찾아 그 여자와의 관계를 명확히 하기 전까지는… 가능하면 그녀를 자극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무슨 행동을 할지 모르는 여자니까요.’
‘그래…….’
‘하지만 주인님, 이것만은 알아두세요. 그 여자가 바이론이란 남자의 딸이라고 하셨죠. 아무리 증오에 사무쳐도, 원망한다고 하더라도… 혈육이란 쉽사리 떨쳐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 마지막 말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을까. …역시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너무 오래 끌어안고 있지는 말게. 자네는 우리 클럽의 버팀목 아닌가.”
그게 말처럼 쉽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하.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만, 장담은 못 드릴 것 같습니다….”
“허허허, 그야 그렇지. 하지만 자네 주위에는 고민을 나눌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글쎄요, 그래도…….”
“타인을 자네의 잣대로 재단하는 건 좋지 않은 버릇일세.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주위에 있다면, 그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기보다, 가끔은 먼저 다가가 보게나. 작은 변화가 좋은 결과를 가져다줄지 누가 알겠나?”
“…명심하겠습니다.”
정곡을 찔려버린 것 같았다. 데모나를 비롯해 임유진, 신소율, 실렌… 노구덕이 그녀들에게 품고 있던 생각을 정확히 읽어낸 것 같은 허문수의 말에, 노구덕은 망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잣대로 재단하고 있다라…. 그럴지도 모르겠군.’
조용히 허문수의 조언을 되새긴 노구덕은 한결 편해진 얼굴이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허문수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형님. 덕분에 속이 좀 후련해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참 용하십니다. 혹시 관상 같은 거라도 볼 줄 아시는 겁니까?”
“어허, 이 사람. 멀쩡한 사제를 선무당으로 만드는군. 흰소리 말고 어서 갈 길이나 가보도록 하게. 다 늙은 사내 단 둘이 오래도록 서서 낄낄대는 것만큼 꼴불견도 없으니.”
“흐하하… 하긴, 그것도 그렇습니다. 그럼… 복채는 안 드려도?”
“예끼! 복채는 무슨! 그냥 실렌, 그 아이나 잘 챙겨주도록 하게.”
“그거라면 걱정 마십시오.”
만족스럽게 손을 휘휘 내저은 허문수는 느릿한 걸음으로 그를 지나쳐 사라져버렸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배웅하듯 가만히 서서 지켜보고 있던 노구덕은 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저벅저벅, 고요한 복도를 울리는 그의 걸음 소리는, 무거운 추를 벗어던진 듯 이전보다 한결 경쾌해져있었다.
‘씻고 난 뒤에는 뭘 하지… 시원한 맥주에 짭조름한 육포나 가져오라고 할까. 음 좋아, 그게 좋겠군. TV라도 있으면 소원이 없을 텐데.’
새삼 예전의 생활을 그리며 문을 열어젖히려던 노구덕은 손을 멈칫거렸다. 안에서 낯익은 기척이 느껴진 탓이다. 그는 눈을 굴려 방문에 걸려 있는 명패를 확인했다. ‘노구덕’. 분명 자신의 방이었다. 노구덕은 진한 한숨을 내쉬며 문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방 안에는 주인보다 먼저 온 선객이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있었다.
불청객의 정체는 신소율. 방금 막 샤워를 마쳤는지, 눈처럼 하얀 피부에 발그레한 홍조를 띤 그녀는 촉촉한 물기가 남아 있는 검은 머리를 찰랑거렸다.
“아빠! 오셨어요? 늦으셨네~ 기다리다 잠들 뻔했어요.”
“그 아빠란 호칭 좀 안 쓰면 안 되냐?”
“에이, 왜 그래요? 하루이틀도 아닌데.”
“오해의 소지가 있잖아.”
“오해라니, 단둘이 있을 때만 가끔 이러는 건데 뭐 어때서요? 달링~ 허니~ 이런 것보다 훨씬 유니크하고 좋잖아요.”
‘뭐 어때요가 아니라 이미 문제가 생겼으니깐 그렇지.’
간만에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고 했는데, 다 틀린 것 같았다. 노구덕은 그래도 말이나 꺼내보자는 심정으로 말했다.
“방으로 돌아가라. 오늘은 피곤해서 그냥 쭉 자련다.”
“에엑? 아직 대낮이잖아요!”
“그 옷차림에 그게 할 말이냐?”
이불을 걷어차며 일어난 신소율은 춥지도 않은지 얇은 파자마차림이었다. 통이 널널한 긴 팔에 긴 바지. 외양으로만 보자면 딱히 야한 차림은 아니었으나… 그 안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다면 얘기가 다르다. 흔히 유두핏이라 일컬어지는, 부드러운 실크 재질의 상의 위로 드러난 앙증맞은 젖꼭지도 그렇고, 하늘하늘한 옷차림 사이로 비치는 탄력적인 몸매의 윤곽은 오히려 나체로 있는 것보다 더한 매력을 발산했다.
거기에 결정적인 포인트는 희디 흰 목덜미에 꼭 알맞게 끼워져 있는 검은색의 가죽밴드 목걸이였다. 이게 또 사내의 지배욕을 자극하는 아이템으로, 신소율의 목에 채워 놓자 꼭 목줄을 단 애완용 고양이를 보는 듯했다.
물론 저건 단순 매니악한 플레이를 위한 밴드목걸이가 아니었다. 저 목걸이는 복귀 길에 들른 칸다무어의 야시장에서 구입한 물건으로, 신소율이 직접 고른 마법 물품이었다. 기억나는 능력으로는 있는 듯 없는 듯한 깃털 같은 무게, 착용자의 목둘레에 맞춘 크기 조절과 체온 조절, 안락한 착용감… 등이 있었다. 그다지 전투에 도움 되는 능력은 없었지만, 본인은 무척 만족하는 것 같았다.
‘겉보기엔 영락없이 변태 플레이용 목걸이 같은데……. 저기에 식별표만 달아 놓으면 딱 그거군. 애완용 개나 고양이들이 달고 다니는 목줄.’
하필이면 왜 저런 걸 골라서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 건지.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그의 취향인줄 알 게 아닌가. 어린 아내를 둔 업보라고 해야 할까. 이래저래 고생이 많은 노구덕이었다.
“하여튼 난 씻으러 간다.”
“내가 씻겨 줄게요!”
“됐다. 마음만 받으마.”
“히잉….”
몸을 배배 꼬며 아쉬워하는 신소율을 뒤로 하고, 노구덕은 무심하게 욕실로 들어갔다. 방금 전 신소율이 사용한 덕분에, 겨울임에도 욕실 안은 뜨끈뜨끈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에 더해서 센스 있게 욕조에 받아 놓은 더운 물까지. 그 옆에 유난히 튀어나와 있는 거품입욕제를 보니 어떤 앙큼한 계획을 세웠는지 알만했다. 딱 잘라 거절하지 않았다면 예까지 따라와 몸으로 씻겨주는 서비스를…….
‘아니, 그만하자. 오늘은 그런 것 없이 그냥 쉬기만 하는 거다.’
“어, 시원하다.”
더운 물에 몸을 푹 담그자, 피로에 찌뿌둥해져 있던 육체가 물에 풀어버린 달걀 노른자처럼 노글노글 물러지는 것 같았다.
허나 그것도 잠시, 투명하게 비워졌던 머릿속은 이내 당면한 현실문제로 다시 차곡차곡 채워지기 시작했다.
‘천생 쉬지는 못할 팔자로군.’
물에 잠긴 노구덕은 아예 목만 남겨두고 욕조에 드러누웠다. 그러자 그 막대한 부피를 견디지 못한 물들이 욕조 밖으로 출렁이며 흘러넘쳤다.
‘위원회와의 적대 관계는 둘째치고, 만약 그 여자가 자기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카름으로 변해버린 모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면… 가장 위험한 건 주인님이에요.’
‘내가? 왜?’
‘그 남자는 부인의 나머지 사체로 모종의 실험을 진행했어요. 그렇게 탄생한 것이 히드라. 그리고 히드라는 실패했죠. 하지만 변종트롤을 만들어낸 걸로 보아, 그 남자는 포기하지 않았단 걸 알 수 있어요. 그럼 이미 소모해버린 매개체는 어떻게 충당할까요?’
‘사체의 나머지 부분이 있을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저라면, 한번 실패한 매개체보다는 차라리 히드라의 핵을 쓰겠어요. 자, 여기서 또 문제. 그 히드라의 핵은 지금 어디에 있죠?’
‘그건…….’
‘맞아요. 주인님의 눈… 혹은 체내 어딘가에 이식되어 있죠. 사람의 몸에 이식함으로써 생체핵의 부패를 막고, 결정화를 막는다. ‘보관함’으로서는 더없이 이상적인 조건이네요. 이거라면 그녀가 주인님에게 보이는 그 이상할 정도의 집착을 설명할 수 있어요.’
“후우.”
얼굴을 감싸쥔 손마디 사이로 뜨거운 물이 눈물처럼 뚝뚝 떨어져 내렸다.
‘문수 형님 말처럼 혼자 안고 있다간 죽도 밥도 안 되겠어. 역시 이건…….’
그때였다. 별안간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욕실 밖이 어수선해지며 시끄럽게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 너… 갑자기 여긴 왜 왔어? 유진이 언니랑 같이 있는 거 아니었어?”
이건 신소율의 목소리고.
“나도 할 거야!”
이 쨍쨍거리는 음성은… 임가희의 목소리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노구덕의 관자놀이가 한 차례 꿈틀거렸다. 가희가 왔다는 것은…….
“얘가 뭘 한다는 거야? 가희야, 오늘은 이만 가주면 안 돼? 나중에 내가 아빠 대신 놀아줄게.”
“싫어!”
살살 달래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단단히 작심하고 온 가희를 돌려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이내 터져 나오는 당돌한 외침.
“나도 소꿉놀이 할 거란 말이야!”
“소꿉놀이? 꺄아아악! 내 옷은 왜 잡아당기는 거야! 이거 안 놔? 찢어져!”
“후우우우…….”
목만 내놓고 있던 얼굴이 정수리만 남겨 놓고 완전히 물속으로 침잠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남자의 고독을 즐기기엔 영 글러먹은 날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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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의 배터리가 얼마 없는 관계로, 리리플은 퇴근 후에 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로써 5일 2연참 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