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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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흑막(黑幕)
…아득해졌던 시야가 제자리를 찾은 것은 몇 분 가량이 지나서였다. 소피아는 나타샤가 자신의 어깨를 붙잡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소피아 씨, 괜찮아요?”
“네… 별로… 아무렇지도 않아요.”
느릿하게 나타샤의 손길을 뿌리치는 소피아. 흐릿한 화면으로도 그녀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었는지, 란돌프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가 안정을 취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소피아는 갑작스럽게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왜… 저렇게 보는 거지? 자매라서? 내가 동요할 걸 기대하고 있는 거야? …하, 난 왜 이러는 건데? 날 몇 번이나 죽이려 했던 사람이라고. 오늘도 나와는 말도 섞기 싫어했던 사람이야. 뭔 일을 당하든지 알 게 뭐야?’
오만 가지 잡생각이 머릿속을 모기처럼 윙윙 맴도는 것 같았다. 지그시 이를 악물고, 관자놀이를 꾹 누른 소피아는 영상 속의 집사를 채근했다.
-…란돌프, 계속하세요.
-소피아 님, 괜찮으십니까?
-계속하라고 했잖아요!
소피아가 갑자기 버럭 언성을 높이자, 란돌프와 나타샤, 이두식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당황하면서도 진한 염려가 섞인 눈길. 그것이 소피아의 기분을 더욱 가라앉게 만들었다.
‘짜증나….’
-말해두는데, 제가 란돌프에게 연락을 한 건 언니를 구하거나 비트레이를 돕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오히려 그 반대… 비트레이의 속사정을 파악하고, 틈이 있다면 비트레이를 무너뜨릴 생각이죠.
-…알고 있습니다. 소피아 님은 비트레이를 나온 뒤부터, 쭉 비트레이를 적대하고 계시니까요. 라이오넬에 계실 때도 그랬죠.
그 말을 듣자, 밑에서부터 들끓던 심정이 그나마 진정되는 것 같았다. 낮게 한숨을 내쉰 소피아는 조급하게 말했다. 더는 이런 쓸데없는 화제로 시간을 잡아먹고 싶지 않았다.
-맞아요. 난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언니와 마찬가지로.
-계속하겠습니다. 오너는 그 뒤로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됐습니다. 아마 내부에 있는 범인을 잡아내지 못한 것이… 크게 작용했겠지요. 특히 주요 용의선상에 올랐던 헌터들의 행동을 수시로 감시하고 의심하기 시작했지요. 심지어 어떤 때는 대놓고 네가 범인이 아니냐고 캐물을 때도 있었습니다. 이에 헌터들이 반발을 하면서, 오너와 헌터들의 사이는 걷잡을 수 없이 틀어지게 됐습니다.
비참하게 아이를 잃어버린 그리드. 그 찢어질 듯한 심정은 이해가 가나, 비트레이의 헌터들이 생사람을 쥐 잡는 듯이 잡는 걸 좋게 볼 리 없었다. 클럽의 주인과 헌터들은 주종관계가 아닌 계약관계. 특히 이런 상위리그의 경우, 분쟁이 발생했을 시 헌터들의 권리를 클럽의 이익보다 우선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꽤 많았다. 쉽게 말해서, 부당한 이유로 시달림을 당한다면 얼마든지 그만두고 다른 곳으로 떠날 수 있다는 것이다. 실력있는 헌터들을 원하는 클럽은 지천에 널려 있으니.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소피아는 뭔가 이상한 점을 찾아냈다.
‘가만, 그런데 왜…? 이해가 안 되는데… 아직 확실하진 않으니 더 들어볼까….’
그 이후의 이야기라고 해봐야 별 건 없었다. 결국 그렇게 그리드와 헌터진의 사이가 멀어져서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끝. 란돌프는 덕분에 클럽 내의 분위기도 최악이라는 사족도 덧붙였다.
이상의 얘기를 소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란돌프. 제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닙니다. 어차피 쉬는 시간이었으니까요.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연락하도록 할게요.
-알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소피아 님.
란돌프와의 통신을 마무리한 소피아는 역순으로 수정을 조작해 원래대로 되돌려 놓은 다음, 나타샤와 이두식을 돌아보았다. 너무나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은 때문인지, 나타샤는 아직도 어떤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반면 이두식은 곧장 손을 뻗어 소피아가 내려놓은 공예품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드의 아이 이야기를 할때는 은은한 분노를 내비치던 그였지만, 역시 직접 관계된 일이 아닌 것에는 큰 감흥이 일지 않는 모양이었다.
“…소피아 씨, 내 의견 한번 들어보겠어요?”
“네. 뭔가 생각이 있다면 가감 없이 말해도 괜찮아요.”
나타샤는 곧게 편 검지손가락을 좌우로 까닥까닥 흔들어보였다.
“이거… 그거 같은데요. 클럽 흔들기.”
예상했던 말이었기에, 소피아는 담담히 고개를 주억였다.
“제 생각도 같아요.”
“그렇죠? 범인이 오너의 아이를 납치했다는 건 분명 뭔가 목적이 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그 녀석은 주기적으로 아이의 신체 일부를 배달시키기만 했을 뿐,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죠. 그건 이미 그 자체로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 아닐까요?”
“언니와 헌터들 간의 갈등… 말이죠?”
“드러난 결과로 보자면 그래요. 그리고 비트레이가 흔들렸을 때 이익을 얻는 쪽은, 같은 리그 내에서 경쟁을 하고 있는 클럽들이죠. 아마도 범인은 그들 중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 같은데…….”
나타샤의 감은 꽤나 날카로웠다. 그럴듯한 추론에 이두식도 새삼 감탄스럽다는 얼굴로 나타샤를 쳐다보았다.
“누님, 정말 대단합니다.”
“아하하. 뭐, 이 정도야….”
이두식의 칭찬에 콧대를 뾰족하게 세운 나타샤는 기고만장하여 소피아를 바라봤다. 마치 ‘내 추론이 어때? 너도 동감하지?’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타샤 헌터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이 일은 그리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 같아요.”
“…….”
나타샤는 금방 픽 김이 새 버린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성급하게 따지고 들지 않았다. 머리를 쓰는 일에서라면 소피아가 자신보다 낫다는 사실을 훨씬 이전부터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요. 아이가 실종된 지 1년이 지났다고 했으니, 언니가 헌터들과 불화를 일으킨 건 적어도 십 개월 이전이라는 셈인데, 제가 알기로 비트레이 헌터진의 스쿼드는 작년과 별로 달라진 점이 없어요. 그 말은 곧, 분위기가 그렇게 난장판이 되었는데도 두 번의 이적시장이 지나가는 동안 탈퇴를 하거나 이적을 한 헌터가 거의 없다는 거죠.”
“…그건 확실히… 이상한데요. 비트레이 오너가 이전부터 특별히 인망이 높았던 사람은 아니잖아요?”
“네. 제 입으로 말하기는 뭣하지만, 언니는 인망으로 따지자면 평균 이하였죠.”
제멋대로 날뛰는 오너 탓에 언제 헌터들이 클럽을 떠날지 모르는 상황. 그런데도 헌터들의 면면은 그대로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불만을 억누르고 클럽에 붙어있게 만든 것일까? 이 점이 좀 전에 소피아가 느꼈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만약 그 사건이 오키도 내 클럽의 소행이라면, 이 상황은 말이 되지 않아요. 그들이 비트레이의 수준 높은 헌터들을 영입할 기회를 놓칠 리 없을 테니까요.”
실력 있는 헌터들이 대거 빠져나가면, 자연스럽게 클럽의 수준은 떨어지고, 끝내 붕괴한다. 그리드의 상태를 보니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비트레이는 건재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이 사실이 의미하는 건, ‘무언가’가 의도적으로 비트레이를 유지시키고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무언가’는 아마도 납치범과 관련이 있는 개인… 혹은 단체겠죠.”
“…그래서 소피아 씨는 어떻게 하려고요?”
“네?”
소피아가 되묻자, 나타샤는 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뭐, 그런 ‘뭔가’가 있다고 쳐요. 그래봤자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 아니에요? 어쨌든 비트레이는 개판이고, 언제 무너질지 모르니… 우리로선 잘 된 거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남이 대신해주고 있는 셈이니까. 소피아 씨도 그랬잖아요? 비트레이를 무너뜨리고 싶다고.”
“…맞아요.”
약간의 머뭇거림은 있었으나, 소피아는 나타샤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하긴 그 속내가 어떻든 간에, 방금 전에 했던 말을 곧바로 뒤집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그럼 이제 돌아가는 건 어때요? 비트레이는 가만히 내버려둬도 얼마 못 갈 것 같은데.”
“아뇨…. 그럴 순 없어요.”
“설마, 아직까지 미련이 남아있는 거예요?”
나타샤의 찌릿한 시선이 와 닿자, 소피아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비트레이의 사정은 우리와 결코 무관하지 않아요.”
소피아는 얼굴에 의문 부호를 떠올린 나타샤가 질문을 하기 전에 빠르게 말을 이었다.
“요는 언니의 증오가 아이리스, 그리고 절 향해 있다는 거죠. 어쩌면 클럽에 간자를 침투시킨 사람이 저일거라 여기고 있는 걸지도 몰라요.”
“말도 안 되는 억측이에요. 그럴 만한 증거가 어딨다고…….”
“사람이 사람을 증오하고, 살의를 품는 데에는 그럴듯한 정황이면 충분해요. 오히려 심증은 가는데, 증거가 없다면 그 분노는 더욱 격렬해지죠. 원수가 눈앞에 있는데 분을 풀 수 없으니까요. 게다가, 전… 이미 전력이 있어요. 2년 전, 언니의 남편을, 제가, 이 손으로 죽였으니까요.”
죽음을 앞둔 사형수가 고해성사를 하듯 음울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설마 그런 악연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지, 나타샤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실상 상황은 소피아의 가정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그 가정대로라면, 이번에 일어난 대대적인 습격과 그 수법의 잔혹함도 설명이 된다.
“잠깐… 그것도 말이 안 되는 게, 아들이 실종된 건 1년 전이라면서요? 그런데 왜 여태껏 가만히 있다가 지금 와서야 난리를 치는 거죠?”
“그야 언니는… 형부가 누구에게 살해당했는지 모르고 있었으니까요. 얼마 전에야 알게 된 거죠.”
“그건 또 무슨…! 아, 머리 아파.”
머리가 터질 듯이 복잡해진 나타샤는 손을 내저으며 대화를 멈추었다. 이건 사건 개요를 좀 차곡차곡 정리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녀는 어디서 꺼냈는지 종이와 펜을 들고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떠오르는 대로 한번에 휘갈겨 내려갔다.
1. 소피아와 그리드는 사이가 좋지 않다. 그리드는 소피아를 죽일 듯이 미워했다.
2. 소피아는 그리드의 핍박을 견디다 못해 비트레이를 떠났다. 하지만 클럽을 떠나서도 그리드의 견제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전에 비하면 비교적 소극적이었다.
3. 세월이 흐르면서, 그리드의 견제는 미미한 수준으로 떨어졌다. 사실상의 휴전.
4. 그런데 2년 전, 소피아는 그리드의 남편을 살해했다. 그러나 그리드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5. 1년 전, 그리드의 아이가 실종되었고, 신체 일부만 배달되는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범인은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
6. 비트레이는 붕괴 위험에 빠졌고, 그리드는 정신이 이상해졌다. 그 와중에, 소피아가 2년 전 자기 남편을 살해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7. 맹목적인 증오에 빠진 그리드는 소피아가 아들을 납치한 범인이라는 심증을 갖게 되었고, 그 사업체에 대대적인 테러를 감행했다.
일일이 번호까지 붙여가며 쪽지를 완성한 나타샤는 검사라도 받는 것처럼 그것을 소피아에게 내밀었다.
“…대충 상황이 이런 것 같은데, 맞나요?”
“…나타샤 씨, 보기보다 쓸데없는 데 재능이 있군요. 누락된 부분이 많지만 큰 줄기는 제대로 잡았어요.”
“그, 그렇게 대수롭잖게 얘기할 게 아니잖아요! 이건… 아무리 봐도 누군가가 비트레이를 이용해 소피아 씨를… 아니, 아니, 아이리스를 치는 건가? 하여튼! 대체 어떤 놈들이야?!”
“제가 왜 여기 남아야 한다고 했는지, 이제 아시겠죠?”
소피아의 어조는 평소와 다름없이 졸린 것처럼 나른했다. 그 목소리를 접한 나타샤와 이두식은 조급해졌던 마음이 한결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일행 중 뛰어난 두뇌를 가진 책사가 있다는 것은, 이처럼 막막할 때에는 더없이 든든한 버팀목이요, 빛이 되는 법이다.
“…짐작 가는 게 있군요?”
“네. 아마도 제가 생각하는 게 맞을 거예요… 절대 만만치 않은 작자죠. 그 자가 이 일에 개입되어 있다면, 절대 비트레이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아요.”
소피아는 머릿속에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비정한 눈빛 아래 상냥한 웃음으로 가장한, 추악하기 짝이 없는 모리배의 얼굴을.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부친과 막역한 사이였던 자. 자매의 대부가 되어 비트레이의 상층부에 슬그머니 발을 걸치고 있던 자. 소피아가 사라지고, 박준혁이 들어왔을 때 그와 암암리에 연결이 되어 있던 자. 그리고… 그녀가 아이리스에 있다는 것과, 박준혁을 살해했다는 것을 그리드에게 알린 자.
그는 칼립스의 연맹위원 마티아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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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보셨다면 추천/ 코멘 부탁드립니다.
그리드를 비련의 주인공으로 몰아갈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예정되어 있던 스토리일 뿐이에요~
상황이 조금 복잡하게 이해될 수 있어, 나타샤를 빌려 간단히 정리를 해놨습니다. 이해에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네요.
stigma / 코멘트 감사합니다!
cxz778 / 띠요옹!
만능의자 / 어렸을 때부터 부모없이 둘만 의지하다보니.. ㅠㅠ
트릭스타 / 이 정도로 심의에 걸리는 건 아니겠죠… ㄷㄷ
때구니™ / 맞습니다. 나타샤의 정리를 보시면 이해하기 편하실듯 ㅎㅎ
St0 / 감사합니다! 코멘트 많이 많이 달아주세요~!
우낄푸핫 / 반전은 없이 뻔하디 뻔한 그분이시지요
호야[虎夜] / 추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