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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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마녀의 산(Witch’s mountain)
“…습격은 우리가 당한 것 같군.”
드리안이었다. 그 말을 듣고 의아해하던 김정인도 곧 침중한 낯빛이 되었다. 훈련으로 발달시킨 기감(氣感)에 먹빛처럼 칙칙한 기운들이 다수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뒤이어 사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적습이다!”
“이미 포위됐으니 방진을 만들어!”
자경대원들은 멜릭을 중심으로 신속히 움직였다. 깜짝 놀라긴 해도 당황하는 자들은 없었다. 모두 굳은 얼굴로 무기를 꼬나 쥔 채 멜릭을 중심으로 방진을 형성했다.
진의 한 축을 담당하기 위해 달려나가는 김정인의 어깨를 드리안이 붙잡았다.
“이들은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 온 베테랑들일세. 초보자인 자네가 끼면 오히려 방해만 돼. 자네는 예비조네. 위태로운 곳이 생기거든 그때 나가도 늦지 않아. 케샤, 윤희지, 신소율. 자네들도 마찬가지고.”
“알겠습니다.”
김정인은 방진 한가운데서 어둠에 휩싸인 숲 속을 노려봤다.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들이 기분 나쁜 기성을 토해내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놈들이 가까워질수록 역한 썩은 내가 점점 지독해졌다. 마침내 놈들 중 하나가 철퍽거리며 완전히 공터로 넘어왔을 때, 일행 모두는 괴물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어그러진 사람의 형상을 한 괴물의 모습은 부패할 대로 부패한 시체였다. 시커멓게 변색된 피부는 움직일 때마다 촛농처럼 흘러내리고 두 눈이 있어야 할 자리는 움푹 꺼진 시커먼 구멍이 대신하고 있었다. 심지어 속속 걸어 나오는 놈들 중에는 머리가 반쯤 날아가거나 다리도 없이 흐느적거리며 기어오는 것들도 있었다. 괴물들이 몸을 질질 끌며 지나갈 때마다 썩은 체액이 발자취처럼 남는 게 꼭 거대한 달팽이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런 달팽이가 있다면 정말 징그러울 거야.’
윤희지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전의를 가다듬었다. 놈들은 아마 좀비 같은 부류인 것 같았다. 말로만 듣다가 직접 보니 확실히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혐오스런 몰골이었다. 속이 급격히 메스꺼워졌지만, 윤희지는 괴물들을 노려보는 눈에 힘을 잔뜩 주었다.
‘저런 괴물조차 똑바로 보지 못한다면 난 여기서 살아갈 자격조차 안 되는 거야.’
팔짱을 끼고 전방을 주시하던 멜릭은 생각지도 못한 좀비 무리의 등장에 크게 놀라고 말았다. 허구한 날 괴물들과 마주하는 그가 새삼스레 놈들의 끔찍한 생김새에 충격을 받을 리 없었다. 단지 좀비들을 이곳에서 보게 된 것이 그의 상식선에서 비정상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괴물들은 겉보기엔 마구잡이로 설치는 것 같아도 엄연히 출몰지역이 나뉘어져 있었다. 그 사실에 빗대본다면, 그가 아는 선에서 좀비가 마녀의 산에 나타난 것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좀비 같은 언데드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나 동물의 사체가 필요했다.
‘어떤 놈인지는 몰라도 실종자들의 사체로 좀비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더군다나 이건 그냥 떼거리로 덤비는 게 아냐. 명백한 포위전술이다.’
놈들 같은 저급한 언데드들은 지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기본적인 지능조차 없는 놈들이 노골적인 포위전술을 구사한다는 것은…….
“지휘관이 있는 것 같소.”
드리안 또한 멜릭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리고 거기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냥 좀비가 아니군. 놈들은 내가 이제껏 보지 못한 놈들이야.”
부패한 시체가 걸어 다닌다고 해서 다 똑같은 좀비라고 생각하는 건 오산이다. 엄연히 좀비들도 등급이 있고, 종류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출현한 녀석들은 드리안의 오랜 경험 속에서도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멜릭은 방패를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엄중히 경고했다.
“미지의 적이다. 그냥 좀비라고 생각하지 마라!”
“옛!”
일행도 방진을 보강하기 위해 역할을 분담했다.
“케샤 씨, 희지 씨는 틈이 보이는 곳을 마법으로 지원해주시고, 소율이는 나와 함께 대기. 드래프트 때처럼 하면 돼.”
“예스.”
“그렇게 할게요.”
“오케이, 알았어요. 오빠.”
세 여성은 각기 개성 있게 답한 뒤 한껏 몸을 긴장시켰다.
지척까지 접근한 좀비들이 게걸스럽게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멜릭이 지휘하는 자경단의 방진은 굳건했다. 너덜너덜한 성대로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걸레짝 같은 몸뚱이를 마구잡이로 휘둘러 오는 놈들의 파상공세를 큰 무리 없이 막아내고 있었다. 그렇지만 몰려드는 괴물들의 수가 워낙 많아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 같았다.
“상황이 좋지 않군.”
전황은 점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미 방진 서쪽이 무너져 멜릭이 방패를 앞세운 채 합류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두 여성 마법사는 마법을 쓰지 않았다. 드리안의 제지 때문이었다. 그는 이번 기회를 십분 활용해 독니를 감춘 채 숨어있는 끄나풀의 정체를 밝혀낼 참이었다.
‘아직은 버틸만해. 끄나풀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힘을 낭비할 순 없지.’
덕분에 죽어나는 것은 자경단원들이었다. 그들은 방진 중앙의 마법사들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릴 만큼 치열하게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육중한 타워실드가 번쩍 쳐들릴 때마다 두세 마리의 좀비들이 어김없이 허공으로 나가떨어졌다. 양 손으로 방패를 통째로 들어 내리치는 방패 강타 공격이었다. 그러나 전열의 괴물들이 곤죽이 됐음에도 사방에서 몰려든 좀비들이 꾸역꾸역 그 자리를 메웠다. 반면 몇 번 방패 강타를 사용한 멜릭은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헐떡이고 있었다.
쿵!
타워실드가 바닥에 내리꽂히며 고정되었다. 방패를 벽으로 삼은 멜릭은 그 뒤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도끼와 메이스를 든 자경단원이 엄호를 위해 그 옆으로 바짝 붙어 섰다.
벌컥거리며 물을 한 모금 들이마신 멜릭은 다시 수통을 요대에 채워 넣었다. 한숨을 돌리자 방진 중앙에서 손가락만 빨고 있는 마법사들이 보였다.
순간 답답함에 짜증이 치민 멜릭은 벼락같은 노성을 내질렀다.
“멍청한! 뭐하는 거요! 어서 전투지원을 하지 않고! 이대로는 방진이 무너진다고!”
누구 덕에 욕을 거하게 얻어먹은 두 마법사는 억울한 눈으로 드리안을 쳐다봤지만, 드리안은 그 시선을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자경단원들을 살피는 중이었다. 전황이 심각해지고 있는데도 발을 빼며 도망칠 궁리를 하는 자는 없었다.
‘아직은 아닌가?’
긴가민가하는 마음이었지만, 더 이상 마법사들을 제지할 명분은 없었다. 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케샤와 윤희지는 빠르게 주문을 외우며 대단위 마법을 준비했다.
멜릭이 등지고 있는 방패에서 연신 쿵쿵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멍청한 좀비 놈들이 하릴없이 방패만 두들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좀비의 무른 타격으로는 절대 이 타워실드를 뚫을 수 없었다. 제 놈들 손이나 걸레짝처럼 뭉개지겠지.
“병신 같은 놈들. 신종이라도 대가리가 깡통인건 똑같군.”
멜릭은 좀비들을 조소하며 전장 상황을 살폈다. 상대가 저급한 괴물인 덕에 아직까지 큰 부상자는 나오지 않았다. 아까 이곳 진형이 무너지며 한 명이 팔을 다치긴 했지만 뒤로 물러나 간단한 처치만 하고 어느새 다시 다른 쪽으로 합류해 싸우고 있었다. 그 탓에 헐거워진 방진의 틈은 신소율이 뛰어드는 것으로 채워졌다.
‘더 버티기 힘들겠는데……. 일단 벗어나야겠어.’
대체 어디서 이만한 수가 벌떼처럼 몰려나온 걸까. 보이는 것만 백여 구가 훨씬 넘는 숫자다. 숲 속에서 들리는 질척이는 기척까지 고려하면 그 수효가 얼마나 될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실종자들이 좀비가 된 것이라 여겼는데, 이건 알려진 실종자들의 수를 아득히 넘어간다.
구름처럼 많은 좀비 떼. 무엇보다 성가신 것은 중간 중간 섞여 있는 크라울러(Crawler)였다. 상반신만 남아 양 팔로 벌레처럼 기어 다니는 좀비의 한 종류. 좀비보다 약한 괴물이지만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놈들을 상대하기 위해선 신경이 아래로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판. 지금 상황이 딱 이랬다.
얼핏 보기엔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멜릭은 여유가 있었다. 단단히 믿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익스플로젼(Explosion)!”
콰아앙!
묵직한 폭음이 터지며 좀비 무리 한쪽이 완전히 쑥대밭이 되었다. 충격의 중심에 있던 놈들은 형체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루가 되어버렸고 근방에 있던 놈들은 온몸이 갈가리 찢겨진 채 바닥에서 꾸물거렸다.
단 일격. 그것이 포탄에 직격당한 것처럼 무시무시한 결과를 만들어냈다. 이것이 바로 멜릭이 믿고 있던 것이었다. 과연 대단위 마법의 위력은 엄청났다. 타이밍을 못 잡고 미적거릴 때에는 영 미덥지 못했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마법사는 마법사였다.
주문을 외우던 마법사는 두 명. 이제 한 번만 더 이와 같은 마법이 발동한다면 손쉽게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크림슨 오브(Crimson orb)!”
고대했던 시동어가 들렸다. 멜릭은 이제 곧 초토화될 놈들을 비웃으며, 길을 낼 준비를 했다.
그런데, 뒤쪽에서 날아온 것은 적들을 몰아치는 마법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남자의 신음성이었다.
“너, 너! 크으으윽!”
핏물이 울컥울컥 새어 나오는 복부를 틀어 쥔 드리안은 사자처럼 눈을 부릅뜨며 뒤로 물러났다. 그는 힘없이 떨리는 손으로 암습자를 가리키며 뭐라고 소리치려 했지만, 이내 꼽추처럼 몸을 굽히며 피가 섞인 기침을 토해냈다. 억지로 벌어진 입 속에서 검게 죽은 피가 한 사발은 넘게 쏟아졌다. 한 눈에도 알아볼 수 있는 치명상이었다.
“죽어! 이 개자식아! 윈드 블레…… 꺄아악!”
드리안을 기습한 케샤는 모두가 넋을 잃을 틈을 타 드리안을 완전히 끝장내려 했으나, 바람을 가르며 파고든 한 줄기 섬광에 의해 팔이 길게 베이며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녀를 막아낸 것은 예비조인 김정인이었다. 케샤의 배신은 그에게도 충격이었는지, 검은 동공이 평소와는 비할 바 없이 확대되어 있었다.
“케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케샤는 드리안의 숨통을 끊어놓지 못한 게 분한 듯, 바드득 이를 갈았다. 김정인만 없다면 개처럼 달려들어 드리안의 목줄기를 물어뜯어버릴 것 같은 기세였다. 그녀는 원한, 증오, 분노가 버무려진 눈으로 드리안을 쏘아보며 미친년처럼 웃어젖혔다.
“호호호! 무슨 짓이냐고? 그게 궁금해?”
순간, 드리안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며 미약한 숨소리와 뒤섞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죽여…….”
“저놈이 혁진 씨를 죽였어! 자기가 암살을 사주한 게 들통날까봐 입막음을 했지!”
쿵!
케샤의 말은 여차하면 그녀의 팔까지 베려던 김정인의 마음을 크게 뒤흔들어 놓았다. 동시에 근처에서 놀란 토끼눈을 하고 있던 윤희지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혁진, 그들이 아는 사람 중 혁진이란 이름을 가진 이는 주스트 마지막 시합에서 노구덕과 맞대결을 했던 임혁진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임혁진이 드리안의 손에 죽었다니? 암살? 입막음? 단박에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동떨어진 단어들이었고, 폭탄선언이었다.
김정인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피거품을 입가에 묻힌 채 힘겨운 숨을 헐떡이고 있는 드리안이 보였다.
“드리안 씨? 저게 무슨 말입니까? 암살 사주라뇨?”
“그 말을, 믿나? 크으윽! 그, 그녀를, 죽이게! 어서!”
“케샤의 말이 모함이란 말입니까?”
“그녀를 죽여!”
드리안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쥐어짜듯 케샤를 죽이라는 말만 반복했다. 항상 깔끔했던 얼굴이 비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케샤의 마법에 직격당한 복부의 상처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폭로 때문이었다. 처참해 보이는 겉모습처럼 그의 속은 타다 못해 숯덩이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케샤, 저 망할 년이 임혁진 그 놈과 내연 관계였을 줄이야! 그런데 대체 어떻게? 어떻게 안 거지?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저 계집의 입을 막아야 돼!’
사람의 본질을 동물에 비유한다고 하면 드리안은 여우, 혹은 늙은 너구리에 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다 죽어가는 데도 그 이후를 염두에 두며 상황을 모면할 수를 궁리하고 있었다.
그 사이 김정인은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케샤가 던진 한마디가 끊임없는 메아리가 되어 울리고 있었다. 그는 바보가 아니다. 드리안과의 대담(對談)에서도 알 수 있듯 영리하고 눈썰미가 좋았다.
임혁진, 암살, 사주, 살인멸구. 삼류 시나리오에 자주 나올 법한, 뻔한 상황이다. 그의 두뇌는 저 단어들을 조립하여 이미 하나의 가정을 내놓고 있었다. 하지만 의문이 완전히 풀린 건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남아 있었다.
“왜? 왜 그랬습니까?”
“궁금해? 내가 전부 말해주지! 저 자는……!”
쾅!
득달같이 소리 지르던 케샤의 머리통이 박격포에 맞은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깨 위가 텅 비어버린 라틴계 미녀의 육체는, 머리가 날아가 뒤에도 한동안 숨을 쉬듯 움찔움찔 거리더니, 이내 목에서 뿌연 피보라를 내뿜으며 앞으로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