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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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대결전
열린 고치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리드를 알아본 것은 소피아뿐만이 아니었다. 그리드가 딱히 두문불출하는 인물도 아니고,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오키도에는 그리드의 얼굴이 새겨진 수배전단이 숱하게 뿌려지지 않았던가.
당연히 이곳에 모인 이들 중 그리드의 인상착의를 모르는 이들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때와 장소가 문제였다. 오키도를 수라장으로 만든 카름 아트로포스, 그 속에서 어째서 그녀가 튀어 나오냔 말이다.
그 때문인지, 그리드를 알아본 헌터들의 반응은 제각기 엇갈렸다.
“이럴 수가… 비트레이 오너?”
“허허… 이런 괴사가 있나. 카름의 정체가 비트레이 오너였단 말인가?”
그리드의 얼굴을 보고 어처구니없어 하는 이들과,
“아니… 아직 단정 짓긴 일러요. 도플갱어처럼 얼굴만 본뜬 것일 수도 있잖아요?”
“그래요, 우릴 방심시키기 위해서….”
쉬이 믿지 못할 상황에 의혹을 품는 자들. 어찌 되었건 대체로 놀랍다는 반응들이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가장 크게 동요한 이는 역시 소피아이리라. 다른 이들의 놀라움을 모두 다 합쳐도 그녀의 심정에 비할 수는 없었다. 나른하게 늘어져 있던 눈꼬리가 바짝 치켜세워지고, 크게 홉뜬 눈망울은 연신 파문을 일으키며 불안하게 일렁였다.
“어째서 언니가….”
혹시, 만약에, 만에 하나… 매번 치솟는 불길한 가정들을 그렇게 미루어두며 최대한 낙관적으로 생각하려 했건만, 신은 무정하게도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경우를 내놓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고치에서 태어난 저 존재는 분명히 그리드였다. 이건 혈육으로서의 감이라고 해도 좋았다.
“왜, 대체 왜…?”
그래서…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저건 그리드이되, 그리드가 아니다. 소피아의 영리한 두뇌는 스스로가 원망스러울 정도로 냉정하게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저건 그리드의 가죽을 뒤집어 쓴 또 다른 카름이자, 벌레교단과 바이론이 합작으로 만들어낸 흉악한 실험의 부산물이었다. 외양은 의심할 여지없는 인간이나 결코 인간이라 정의할 수 없는 존재.
“왜 이렇게 된 거야…? 그냥, 물어보고 싶었을 뿐인데.”
소피아는 무심코 오른손을 들어 저 멀리 조그맣게 보이는 그리드의 얼굴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검지 손가락 끝에, 조개처럼 꼭 다물려 있는 그리드의 입술이 걸렸다. 이제는 아마도, 다시는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지 않을 터인 언니의 입술.
만발한 장미의 색을 꼭 빼닮은 그 입술을 멍하니 쳐다보던 소피아는 독백하듯 말했다.
“…우리 언니… 살릴 수 없겠죠? 주인님, 제가 언니를 살려달라고 애원하면, 살려 주실 수 있나요?”
노구덕은 우묵한 눈동자로 소피아의 옆얼굴을 쳐다보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순 없어. 이유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네가 잘 알 거라 생각한다.”
“…그렇겠죠.”
“몸조리하고 있어라. 저… 괴물은 우리가 상대할 테니.”
고개를 떨군 소피아에게서 시선을 거둔 노구덕은 큰 목소리로 외쳤다.
“모두 정신 차리십시오! 저 카름에게 더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헌터들을 포함한 모든 이들의 이목이 노구덕의 얼굴로 모였다. 기적처럼 놀라운 힘으로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던 아이리스의 지원대. 그 장을 맡고 있는 노구덕은 은연중 이곳 헌터들의 리더로 여겨지고 있었다. 더욱이 혼돈의 정령을 소환하여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었던 소피아까지 그의 휘하에 있다는 게 알려지면서, 엉뚱하게도 아이리스는 본거지인 서부가 아닌 동부에서 때 아닌 유명세를 얻고 있었다.
‘저 자가 아이리스의 오너 노구덕…? 겉보기엔 그냥 우락부락한 오크인데?’
‘쳇, 운 좋게 능력 있는 헌터들을 밑에 둔 주제에 잘난 체 하기는.’
‘고작해야 미들리그에 속한 놈이….’
사람 심리가 으레 그러하듯, 그를 질시하는 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노구덕 본인은 몰라도 그가 이끌고 온 멤버들인 임유진, 데모나, 실렌의 활약은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기에, 지금은 그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노구덕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이번 일이 끝나면 볼일이 없는 자들. 굳이 좋게 보여야 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그래도 저걸 없앨 때까진 피차 협력하자고.’
“원거리 클래스는 정해진 위치에서 엄호를! 사제들은 후방에서 지원을 부탁합니다! 유진아, 가자!”
“네!”
노구덕은 자기 뒤를 따르라는 등, 고압적으로 들릴 수 있는 말은 하지 않았다. 간단히 할 말만 남긴 그는 데모나에게서 또다시 빌린 주술가면을 품속에 넣은 뒤, 임유진과 함께 땅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어머? 혼자 가는 거예요?”
“이, 이봐! 같이 가자고!”
“오오오오! 가자! 싸우자!”
그러자 잠시 얼빠진 얼굴을 하던 헌터들은, 자기들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이끌리며 그의 뒤를 따라 줄줄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수십 명의 헌터들이 뒤를 따르고 있었지만, 노구덕과 임유진의 신경은 오로지 정면의 그리드에게 쏠려 있었다.
선공을 취한 것은 임유진이었다. 그녀는 노구덕이 그리드에게 접근하기 전, 열 발이 넘는 불덩이를 생성해 그리드에게 날려 보냈다. 용암과도 같은 수준의 열기를 자랑하는 화염구들은 그 하나하나가 강력한 마력의 응집체로 이루어져, 어지간한 마법사의 주문보다 강력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불덩이들이 벌레교단의 잔당들을 일격필살로 불살라버리는 것을 직접 목도했던 헨더슨은 기가 찬 듯이 중얼거렸다.
“첫인사치고는 너무 과한데.”
저런 공격에 직격 당했다간 웬만한 카름은 뼈도 못 추리고 죽어버릴 터… 그렇게 생각했던 헨더슨은, 곧바로 그 생각을 철회해야만 했다.
“……!”
지면마저 달구는 열기가 지근거리까지 다가오자, 잠에 빠진 듯 가지런히 감겨져 있던 눈꺼풀이 번쩍 열렸다. 특유의 새빨간 동공을 드러낸 그리드의 입가에 얼핏 히죽거리는 미소가 스쳐지나간 것처럼 보인 찰나, 그녀의 손에서 칠흑빛의 마력이 뻗어나가는가 싶더니, 바로 앞에 원형의 방패가 만들어졌다.
쾅! 쾅! 쾅!
여러 개의 불덩이가 연이어 충돌하며 어둠의 방패를 두들기고, 그 여파로 튕겨나간 불똥이 땅거죽을 흐물흐물 녹이며 흙모래를 불태웠다. 그러나 정작 그리드를 보호하는 방패는 흠집 하나 없이 멀쩡했다.
그 범상치 않은 광경에, 노구덕은 기세 좋게 달려 나가던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무턱대고 달려드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았다.
“보통 놈이 아냐. 역시 원거리전으로 간을 봐야 할 것 같은데.”
“네. 그게 좋겠어요.”
사뿐히 옆에 내려선 임유진과, 뒤에 멈춰 선 헌터들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저런 미지의 적을 상대할 때 무턱대고 달려드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하물며 상대가 이쪽의 힘을 흡수하는 타입이라면, 더욱더 조심해야만 했다.
전위에서 신호가 오자, 미리 준비를 해 놓았던 원거리계열 헌터들은 망설임 없이 주문을 발동시켰다.
“플레임웨이브(Flame wave)!”
“포이즌 스팅(Poison sting)!”
“어스 트레머(Earth tremor)!”
강력한 정통 화염계 주문에, 피부와 그 아래의 뼈까지 녹여버리는 독침 세례, 지축을 뒤흔드는 지진까지. 그밖에도 수많은 주문이 한 데 뒤엉킨 폭풍이 되어 그리드를 강타했다.
검은 막에 둘러싸인 그리드의 모습은 폭발과 폭음, 먼지구름에 휘말려 까맣게 흐려지더니, 이내 자취를 감추며 사라졌다. 소피아는 무지막지한 폭격이 퍼부어지는 광경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며 짧은 신음을 흘렸다.
“아…….”
“소피아 씨.”
우두커니 있던 머리가 서서히 돌아갔다. 소피아를 부른 사람은 지원 부대에 속한 실렌이었다.
“네…?”
“괜찮다면, 소피아 씨가 사용했던 증폭 마법진를 재사용하고 싶은데요. 가능할까요?”
“제가 사용했던……? 아.”
소피아의 눈길이 실렌의 얼굴을 떠나 근방의 대지로 옮겨갔다. 그곳에는 윤곽이 희미해진 두 개의 커다란 마법진이 남아 있었다. 몇 시간 전, 혼돈의 정령을 현신시키기 위해 소피아를 보조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마법진들이었다.
“이걸 재사용한다고요?”
“네. 할 수 있나요?”
소피아는 다시 눈을 돌려 마법진을 살폈다. 마법진을 그리는데 사용된 촉매가 모두 타버려 재가 되었고, 핵도 망가지긴 했지만 재사용은 가능해 보였다. 촉매와 핵이야 지휘부에 요청하면 기꺼이 내 줄 터이니, 마법진의 형태만 흐려진 윤곽을 따라 다시 그리면 될 일이다.
“…가능은 해요. 하지만 별로 추천하고 싶지는 않네요. 이런 보조 마법진은 부작용이 커요. 제 꼴을 보면 답이 나오잖아요?”
소피아는 볏짚처럼 푸석한 백색의 머리카락을 들어 보이며 자조했다. 벌꿀색의 풍성함을 자랑했던 그녀의 머리카락은 새하얗게 타버린 잿더미를 보는 듯했다. 보조 마법진의 영향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머리카락을 쥔 손등과, 얼굴 등에도 평소엔 볼 수 없었던 옅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자기 것이 아닌 힘을 무리하게 퍼다 쓴 부작용으로 수명이 깎여버린 것이다.
“…후후. 이 꼴을 봐요. 그리고 그렇게 절박한 상황도 아니잖아요? 유리한 전황에 굳이 실렌 씨가 무리를 할 필요는…….”
“아뇨. 소피아 씨 답지 않네요. 이 싸움,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도 모자라요. 그건 소피아 씨도 잘 알 텐데요. 게다가… 별로 유리해 보이지도 않고요.”
마지막 한마디를 덧붙이는 실렌의 눈은 소피아가 아닌, 저 멀리 전장을 보고 있었다. 소피아는 어느새 천지를 뒤흔들던 폭음이 그친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연히 실렌을 따라 고개를 돌리고는, 전황을 살폈다.
“…하…?”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유성우처럼 휘몰아치는 주문의 폭풍은 그리드와 고치가 있던 시가지 주변을 완전히 초토화시켰다. 땅이 움푹 꺼지고, 주변의 건물은 모조리 파괴되어 무너졌으며, 주위 공기에는 아직도 희미한 전하가 남아 파지직거리는 전류를 토해내고 있었다.
그리드는 그 폐허 위에 홀로 오연히 서 있었다. 팔짱을 끼고, 긴 머리를 바람에 나부낀 채. 약간 먼지를 뒤집어쓰긴 했어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는 것쯤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보고도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전까지는 범인(凡人)에 지나지 않았던 그녀가, 대마법사라도 된 것인 양 어둠의 마력을 마음껏 다루고 있다. 정말 그 거대한 카름, 아트로포스가 그리드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다시 태어난 것일까?
그런 의문을 품을 겨를도 없이, 그리드는 오만한 미소를 띠며 입꼬리를 치켜세웠다.
“이게 끝이냐?”
“……!”
소피아의 입이 살짝 벌어지고, 노구덕과 임유진을 비롯하여 그녀를 에워싼 헌터들의 얼굴에 당혹스런 기색이 어렸다.
“마, 말을 했어…?”
“비트레이 오너, 정말 당신이 맞는 거요?”
문득, 그리드의 고개가 느릿하게 왼편으로 돌아갔다.
“넌… 세비지의 헌터로군?”
“기, 기억이 남아 있는 건가?”
방금 전, 비트레이 오너 운운하며 그녀를 호명한 헌터는 그 공허한 눈빛에 살짝 목을 움츠렸다가, 이내 주변에 많은 수의 헌터들이 있다는 것을 상기하곤 짐짓 어깨에 힘을 주며 호통을 쳤다.
“한때 거대 클럽을 이끌었던 사람으로서 부끄럽지도 않은 거요? 이런 한심한 작태라니! 당장이라도 스스로 목숨을 끊어 오키도의 시민들에게 사죄하… 커허어어…!”
부리부리하게 그리드를 노려보던 눈이 허옇게 뒤집어졌다. 미처 말을 끝맺지도 못한 그의 가슴팍에는 언제 생겼는지 모를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정확히 심장이 위치한 곳이었다. 그 헌터는 입을 쩍 벌린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말이 많아. 벌레 같은 것.”
“…….”
손 쓸 겨를도 없이 헌터 하나가 죽어나갔음에도 입을 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드의 비아냥거림에 발끈하는 이조차. 모두 말문이 박혀버린 것이다. 특정할 만한 손짓도, 주문도, 시동어도 없었다. 헌터들은 아무런 전조도 없이 베테랑 전사의 심장이 터져나갔다는 사실에 몸을 떨며 전율했다.
어쩌면… 다음 차례는 내가 되지 않을까?
지금 이순간 모두의 뇌리에 공통적으로 떠오른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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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보셨다면 추천/코멘 부탁드립니다.
벌레 / 가능성이라면 1% 정도… 되지 않으려나요..
코카콜라중독 / 프라임리그 수준은 아니었고, 프리 헌터라 정식 리그에 속하지도 않았었습니다. 용병이었죠. 따지자면 5대리그 정도 되겠네요
김도리131 / 자매덮밥은… 접어두시길…
북치네 / 여기까지 왔는데 자매덮밥은 너무 스토리가 산으로 갈 것 같네요 ㅎㅎ;;
우낄푸핫 / 거기에 주름까지…
엠파이어3 / 네 지금은 척살대상입니다
아토므스크 / 추천과 리플만으로도 저는 매우매우 행복합니다!
은신설야 / 얘는 가시가 많아도 너무 많아서… 먹으면 체해요
트릭스타 / 신소율 의문의 1패…
†아마테라스† / 가능성은 어디까지나 가능성만으로… 묻어두심이…
카론느 / 스미스요원 러쉬 ㅋㅋㅋ 이제 짱짱쎄진 오리지널 스미스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