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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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때가 되어 지는 벚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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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진에서부터 솟아오른 성스러운 광휘를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던 헌터들은, 귓전을 자극하는 괴성에 고개를 돌렸다.
“갸아아아아–!”
“아트로포스….”
흰자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새까맣게 검은 물이 스며든 눈동자. 그리드는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며 헌터들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
이미 퇴각하기로 방침이 정해졌을 터다. 그런데, 막상 그리드를 앞에 둔 헌터들의 표정은 어쩐지 미묘하게 변해 있었다.
“내버려두면 그냥 죽을 것 같은데…?”
선두에 선 마법사의 말에 동의하듯, 몇몇 헌터들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뻥 뚫린 뱃가죽에서 칠칠맞지 못하게 삐져나와 소시지처럼 늘어진 창자, 어깻죽지부터 뜯겨나간 오른팔. 그리드는 군데군데 성한 곳을 찾을 수 없는 누더기 같은 몸에서 검은 체액을 질질 흘려가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치익… 칙….
그녀의 혈관을 타고 도는 어둠의 마력 탓일까. 강산성을 띤 검은 핏방울이 지면에 닿을 때마다 흙모래가 검게 타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저 정도면 별로 위협적이랄 것도 없어 보이는데….”
처음 말을 꺼냈던 마법사는 어느새 길쭉한 스태프를 치켜들고 있었다. 아트로포스의 상태가 저리 좋지 않다면 한번 싸워 볼만하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최종 결정을 내렸던 늙은 사제의 생각은 달랐다.
“그만 두게.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야 하네.”
“예? 하지만….”
“아트로포스의 몸을 자세히 보게. 좀 전에 그 많은 헌터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잊어버린 건가? 하물며 지금은… 저 기운을 짓누르는 ‘아벨의 손’마저 없네. 아까와 같은 폭발이 일어난다면… 우린 다 죽을 걸세.”
“…….”
늙은 사제의 말대로였다. 어기적어기적 걸어오는 그리드의 몸은 울룩불룩 불규칙한 기복을 일으키고 있어, 마치 활활 불이 붙은 화약고를 보는 것만 같았다. 언제 터질지 몰라 아슬아슬한 그 모습에, 자신만만하게 스태프를 꼬나 쥐었던 마법사는 슬며시 손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저래서는 섣불리 공격할 수도 없다. 언제 자극을 받아 몸이 터져버릴지 모르니까. 늙은 사제의 말대로 폭발반경에서 빨리 벗어나는 게 최선이었다.
“…아벨의 손이 없으니, 만에 하나 폭발이 일어난다면 도시 전체가 날아갈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밖에 있는 피난민에게까지 여파가 미칠지도….”
“저기 있는 아이리스의 헌터들은 어찌 합니까?”
난관에 부딪친 늙은 사제는 벙어리가 된 것처럼 입을 닫았다. 지금에야 비로소, 정체를 알 수 없는 습격자가 왜 실렌을 우선적으로 노렸는지 알 것 같았다.
‘설마 이걸 노린 건가….’
‘아벨의 손’이 없는 이상, 저 괴물에게 제대로 된 억지력을 발휘할 수단이 없다. 그렇다면 도망치는 게 최선인데, 빛의 기둥을 둘러 싼 아이리스의 헌터들이 자기 오너를 두고 순순히 물러날 턱이 없었다. 아니, 단순한 계약 관계로 이루어진 다른 클럽이라면 그리하겠지만, 옆에서 지켜본 바 아이리스는 그 유대감이 유독 남달라보였다. 그런 그들이라면, 아마도 그리드가 오든 말든 그 자리를 사수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래서는 다 죽는다.’
씨알도 안 먹힐지라도, 일단 말이라도 꺼내봐야 한다. 그리 생각한 늙은 사제는 자길 바라보고 있는 헌터들에게 말했다.
“자네들이라도 먼저 이곳을 벗어나게. 난 저들을 설득해 볼 테니. 그리고 통신이 가능하거든 지휘부에 연락해서 성벽 밖의 피난민들을 최대한 뒤로 물리라고 전하게. 이곳은 너무 위험해.”
“알겠습니다.”
“네.”
이제는 대부분 마법사와 사제들 밖에 남지 않은 헌터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리려는데, 갑자기 사제 여인 하나가 탄성을 내지르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어…? 저, 저기… 누가 오고 있어요!”
“……!”
의아한 얼굴로 여인이 가리킨 곳을 돌아본 늙은 사제의 짓무른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아주 먼 옛날, 단 한번 본 적이 있었다. 늙은 사자의 갈기 같은 반백의 머리를 아무렇게나 늘어뜨리고, 곳곳에 땟국물이 끼어 꼬질꼬질한 잿빛 망토로 몸의 절반 이상을 둘러 가린 초로인의 모습… 세월이 흘러 머리색만 조금 바뀌었다 뿐이지, 그 행색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변한 게 없었다.
무엇보다 허리춤에 걸려 덜렁거리는 장검, 그 손잡이의 끝에 매달린 붉은 수실은 사내의 정체를 여실히 말해주고 있었다.
잠시 후, 주름진 목울대를 타고, 강산이 두 번 바뀌었음에도 결코 잊을 수 없었던 초로인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북왕(北王) 아이벤….”
그 나지막한 울림을 들은 헌터들은 모두 아연실색하여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부, 북왕? 저 사람… 아니, 저 분이 십존 중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그 북왕이란 말입니까?”
“말로만 듣던 그… 북부의 절대자…?”
“그렇다네.”
늙은 사제는 여전히 초로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자 곳곳에서 경외에 찬 감탄성이 터져 나왔다.
북왕 아이벤. 무려 3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십존의 위(位)를 유지한 최고의 실력자. 그리고 십존으로서 헌터의 정점에 섰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관심이 없는 자. 그는 특이하게도, 십존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영지(領地)’가 없었다. 그의 이름을 높이 산 위원회와 연맹에서 몇 번이고 영지를 주려 했으나, 그런 것은 필요 없다며 스스로 거절한 별종이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북왕(北王)’. 스스로 가지고 있는 영토는 없으나, 북부를 대표하는 헌터를 말할 때에는 언제나 첫손가락에 꼽히는 무인. 북부의 헌터들이라면 누구나 존경해 마지않는 최강의 헌터가 바로 북왕이었다.
“…북왕이 온 이상, 후퇴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아트로포스가 자폭을 하더라도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걸세.”
“예? 겨우 저런 낡은 검 한 자루로 말입니까? 혹시 검이 부러지기라도 하면….”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북왕’이라 불리기 이전, 그의 별명이 뭐였는지 아나?”
“그, 글쎄요….”
아이벤은 20년 간 쭉 북왕이라 불려왔다. 역사에 별 관심도 없고, 늙은 사제를 제외하면 나이를 많이 먹어봐야 마흔 남짓 정도인 헌터들이 그걸 알 리가 없었다.
늙은 사제는 후배들의 무식함에 기가 찬 듯, 쯧쯧 혀를 굴리며 말했다.
“…검왕(劍王)이라네. 검은 그가 가장 잘 다루는 무기 중 하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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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왕 아이벤은 헌터들에게 설교를 늘어놓고 있는 늙은 사제의 얼굴을 일별하곤 피식거리는 웃음을 머금었다.
“날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나…. 낯이 익은 것 같기도 한데.”
그러고 보니 20년 전, 북부에 재앙이 일어났던 그 자리에서 비슷한 얼굴을 본 것 같기도 했다. 차이가 있다면 지금은 몰라볼 정도로 많이 늙었다는 것이겠지만.
“…조금 반갑군.”
과거 그와 함께 싸웠던 헌터들은 거의 대부분 고인이 되어 흙속에서 썩어가고 있다. 홀로 세월의 고독을 견디던 와중에 묵혀 두었던 옛일을 같이 논할 수 있는 지인을 만난 건 꽤나 반가운 일이었다.
“저게 이 사단을 일으킨 카름인가.”
스르릉.
투명한 날을 가진 장검이 맑은 쇳소리를 내며 검집에서 빠져 나왔다. 무미건조하게 검을 뽑아 든 아이벤은 저벅저벅 걸어가며 그리드의 모습을 훑어 내렸다.
“흐으… 흐으으으…….”
느릿, 느릿. 녹아내린 성대로 기괴한 흐느낌을 발하는 괴물의 모습이 점차 가까워졌다.
“…흠. 대단한 마력량….”
미묘하게 눈두덩을 꿈틀거린 아이벤은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는 한눈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그리드의 상태를 간파했다. 몸의 균형이 무너지고, 체내에 저장되어 있던 강대한 마력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폭주했다. 이대로라면 가만히 내버려 둬도 죽겠지만, 이곳이 수만의 인구가 상주하는 대도시의 한복판이라는 게 걸림돌이었다.
저 폭주를 억누르고, 가능하면 도시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깔끔하게 끝내야 한다. 생각보다 쉽지 않은 문제였다.
“차라리 좀 늦었더라도 내가 온 게 잘 된 일일 수도 있겠군. 가리발디, 그였다면 무작정 손부터 쓰고 봤을 테니….”
번거로운 행동으로 그의 걸음을 늦춘 장본인, 늑대왕 가리발디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소를 머금은 아이벤은 돌연 크게 한발을 내딛었다.
쓰각!
“……!”
좀비처럼 다가오던 그리드의 발이 얼어버린 것처럼 멈추었다. 먹물을 칠한 듯 까맣게 빛나는 동공이 크게 열리고, 꺼이꺼이 울음을 토해내던 목구멍이 쩍 벌어졌다.
이윽고, 하얀 목덜미에 검은 색의 실금이 생겨나더니, 창백한 얼굴이 모로 기우뚱, 흔들렸다.
툭. 데구르르르….
어깨에서 공처럼 굴러 떨어진 머리가 아이벤의 발치로 굴러왔다. 그리드의 절단된 목은 아직까지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까만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무심히 그 머리를 지나친 아이벤은 여전히 석고상처럼 굳어 있는 그녀의 몸뚱이에 다가섰다.
목을 잃은 몸뚱이는 그 절단면에서 한 방울의 검은 피도 흘려보내지 않고 있었다. 그만큼 아이벤의 솜씨가 깔끔했던 것이리라.
허나 그것도 잠시, 목을 잃은 몸뚱이는 이내 심장이 펄떡펄떡 뛰는 것처럼 기복을 더하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그건 안 되지.”
번개처럼 다가 선 아이벤은 성큼 손을 뻗었다. 곳곳에 주름이 진 데다 굳은살이 알알이 박힌 보잘 것 없는 손이었다. 그러나 그 손은 노구덕의 뼈와 살을 녹이고, 십여 명 헌터들의 목숨을 앗아간 칠흑의 마력을 무력하게 와해시키며 나아가더니 그리드의 가슴 한복판을 세게 강타했다.
펑! 펑! 펑!
둔탁한 타격음이 터질 때마다 하얀 몸뚱이가 크게 휘청거리는 게, 몽둥이로 물기를 털어내는 빨랫감을 보는 듯했다. 그러자 거세게 흔들리는 몸뚱이의, 전신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뭉클거리는 마력 덩어리가 죽은 피처럼 쏟아져 나왔다. 엉망으로 엉킨 기혈이 바로 잡히며 응고되어 있던 마력이 배출된 것이다.
아무렇게나 두들기는 것처럼 보여도, 이것은 타혈법(打穴法)이라 불리는 북부 지구의 고유한 기술이었다.
푹!
손가락 끝을 날카롭게 세운 수도(手刀)가 창백한 앙가슴을 뚫고 들어갔다. 맨손으로 그리드의 명치 부근을 헤집던 아이벤은 이내 쑤욱 손을 뽑아냈다. 그 손에는 까만 재처럼 응어리진 덩어리가 쥐어져 있었다. 노도처럼 폭주하던 기운을 타혈법으로 안정시키고, 재차 폭주가 이루어지기 전에 그 근원을 체내에서 뽑아버린 것이었다.
과정을 보자면 어이가 없을 정도로 간단해 보였으나, 실상 이것은 오로지 그가 북왕 아이벤이기에 가능한 고난이도의 수법이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결정체를 손에 쥔 아이벤은 썩은 짚단처럼 무너지는 몸뚱이를 일별한 후에야 발을 돌렸다.
“…끝났군.”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헌터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하던 아이벤의 눈가에, 언뜻 돌멩이처럼 바닥에 굴러다니는 그리드의 머리가 밟혔다.
질기게 유지되던 생명이 끊겨버린 것인지, 참수된 뒤에도 간헐적으로 깜박이던 검은 눈동자가 완전히 멈춰있었다.
망연히 치뜬 눈자위 아래로 비스듬히 대각선을 그리며 흘러내린 체액이 보였다. 그것은 자신으로 말미암아 죽은 이들에 대한 참회의 눈물일까, 아니면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는 원통함의 표현일까.
…어찌 되었든, 그리드는 죽어버렸다. 그녀가 이토록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라고는, 그녀 자신조차 상상하지 못했으리라.
“…….”
말없이 그녀의 잘린 머리를 바라보던 아이벤은 고개를 들었다. 어디선가, 찢어질 것 같은 절규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아아아아아—!”
어느덧 하늘을 뒤덮었던 빛의 기둥이 사라져 있었다. 저 멀리, 기둥이 있었던 곳에서 비통한 울음을 토해내며 주저앉는 갈색 머리의 여인이 보였다. 그리고 빛의 근원이 되었던 마법진 위, 죽은 듯이 누워 있는 두 남녀 또한.
가녀린 체구의 사람 하나가 들어갈 정도로 떨어져 있는 두 사람 사이에는, 고색창연한 은빛의 서클렛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 작품 후기 ============================
재밌게 보셨다면 추천/코멘 부탁드립니다.
가면 사내가 굳이 실렌을 우선으로 노린 이유에 대해서 부연설명이 부족한 것 같아 살짝 추가했습니다. 말하자면 일타쌍피 이상을 노린 거지요. 그리드는 어차피 자폭할 테고, 아벨의 손이 없으면 그 폭발 범위에 대부분의 헌터들이 휘말려 버릴 테니까요. 결과적으로 북왕 때문에 무산되기는 했습니다만..
어쨋든, 이것으로 그리드 파트는 끝났습니다. 일요일 2편이 올라갔더라면 딱 끝나는 거였는데, 뭔가 아쉽군요.. 참, 미뤄두었던 소제목도 달았습니다.
실렌 관련해서는… 스토리 진행상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작가도 공들인 히로인 잘라내는 건 무척 마음이 아픕니다만, 아픔 없이는 성장의 계기도 없으니까요..
이번 에피소드 이후로 주인공의 성격도 다소 변할 수 있음을 인지해 주시기 바라며, 주변 인물들 또한 크든 작든 심적 변화가 있을 겁니다. 이 또한 성장의 동력이 되겠지요.
중복되는 내용이 많아 일일이 리리플 달아드리지 못하는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다음화 리리플 때에는 일일이 전부 달아드릴 테니 혹시 궁금하신 점 있으시면 이번화 리플로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