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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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남겨진 것 (1부 완)
“…당연히, 저도 돕고 싶어요. 하지만, 그전에 주인님께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내게 보여줄 것?”
소피아는 한 발, 두 발 느리게 걸어가,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의 앞에 섰다.
“정신을 잃고 있었을 때, 실렌 씨를 만났어요.”
“뭐라고?”
캄캄하게 침잠한 눈동자에 의아한 빛이 깃들었다.
소피아는 나직하게, 의식 세계에서 실렌과 만났던 일을 얘기해 주었다. 어떻게 해서 그녀와 만날 수 있었는지, 또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마지막으로 그녀가 동료들에게 남긴 전언에 대해서….
노구덕은 처음엔 소피아의 얘기를 믿지 못했다. 죽은 이가 의식 속에서 의지를 전하다니.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얘기 아닌가. 하지만 소피아의 말이 생동감 있게 이어짐에 따라, 그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실렌이 자신에게 전해달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희미한 실소마저 머금고 말았다.
“그 녀석, 그런 얘기까지 하다니…. 이건 믿을 수밖에 없겠군.”
‘임신시켜서 잡아버리면 되잖아요?’라는 발칙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담았던 실렌의 얼굴이 아스라이 떠올랐다. 이건 그녀와 밀회를 가졌을 때 둘이서만 나누었던 얘기다. 소피아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건, 역시 직접 본인을 만났다고 볼 수밖에.
길게 이어지던 소피아의 이야기가 끝나자, 노구덕은 왠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소피아. 잠깐… 네 기억을 보고 싶다.”
“네, 물론이죠. 그렇잖아도 제 쪽에서 부탁드리고 싶었어요.”
소피아는 흔쾌히 노구덕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모탈 블러드인지 뭔지, 흡혈귀를 초월한 새로운 종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심령으로 이어진 권속의 계약은 굳게 유지되고 있었다. 말인즉슨, 그녀는 여전히 노구덕에게 매여 있는 몸이라는 의미였다.
“…그래.”
이내 노구덕의 눈자위에 붉은 기운이 어리고, 소피아는 머릿속에 이질적인 무언가가 서서히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의식이 주인에게 잠식당할 때의 감각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별달리 고통스럽지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뇌 속에 백태가 낀 것처럼 불쾌하고, 머리가 쪼개질 듯한 두통이 밀려와야 했지만, 지금은 다른 의식이 들어왔다는 것 정도만 알게 되었을 뿐… 그에 따른 반동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모탈 블러드… 진화의 영향일까?’
그것 말고는 달리 떠오르는 해답이 없었다. 잡생각을 떨쳐낸 소피아는 눈을 반개한 노구덕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봤다. 평소의 넉넉함은 어디가고, 까끌까끌하고 거친 수염과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눈 밑 탓에 더욱 수척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실렌을 허무하게 잃어버리고, 도대체 얼마나 자신을 탓한 것일까.
소피아는 느낄 수 있었다. 노구덕은 적들을 죽이고 싶다고, 복수를 하겠다고 말했지만 그의 증오심에는 그 자신마저 포함되어 있었다.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그 분노는 노구덕 본인마저 탐욕스레 집어삼킬 것이다.
실렌을 위해, 복수를 위해 삶을 불태운다… 이게 과연 그녀가 원하는 것일까?
아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의식 세계에서 만난 실렌은 ‘복수’라는 단어는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별을 앞둔 그녀가 말했던 것은 남은 동료들에게 향한 걱정이었지, 죽음에 대한 원한과 복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소피아는 차마 자기 입으로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바란 것은 복수가 아니었다고…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자신에게 있는 것일까? 혹여 그리 말한다고 한들, 노구덕이나 다른 동료들의 마음에 앙금처럼 남아 있는 원한을 없앨 수 있는 것일까?
‘안 되겠지. 정작 나도… 이렇게 괴로운데….’
실렌을 죽였던 그 하얀 가면을 떠올리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주체할 수 없는 증오가 끓어올랐다. 본인부터가 이러한데, 다른 이들의 마음을 돌린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결국, 소피아는 그 선택을 노구덕에게 내맡겼다. 그는 그녀의 주인,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기꺼이 따르리라. 설령 그것이 지옥의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것이라 할지라도.
‘결과가 어떻든… 가장 먼저 지옥에 가는 건 나야.’
후회는 없었다. 이미 한 번 잃었던 목숨, 복수를 위해 쓰인다면 그보다 더 값진 것도 없을 터. 모든 것은 주인의 선택에 달렸다. 비장한 각오를 굳힌 소피아는 또렷한 눈동자로 주인의 얼굴을 주시했다.
“…….”
잠시 후, 반쯤 감겨 있던 노구덕의 눈이 깜박거렸다. 그는 웃는 듯, 우는 듯, 어쩐지 복잡미묘한 표정이었다.
“…이렇게 갔구나…. 변함없이 떠들기 좋아하는 녀석이야. 쯧, 조잘조잘 잔소리도 많고. 나쁜 녀석. 네게 갈 수 있었다면 내게도 한번 들를 것이지… 하긴, 내 머리로는 그 녀석의 수다를 일일이 다 받아주지 못했겠지만.”
실렌의 마지막 모습을 회상하는 것인지, 아련히 허공을 쳐다보고 있던 노구덕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주인님….”
“…고맙다. 이렇게나마 만날 수 있게 해줘서.”
“…….”
소피아는 침묵을 지켰다. 기분 탓일까?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노구덕의 눈빛은, 처음에 비해 상당히 부드러워져 있었다.
“네가 뭘 말하고자 하는지 알겠다. 하지만 난 역시… 그놈들을 용서할 수 없다. 실렌이 원치 않는다고 해도 좋다. 저열한 자기만족이라 해도 좋아. 이건 내 자신과의 약속이다. 그것들을 가만히 내버려두면, 난 평생토록 발 뻗고 잘 수 없을 거다.”
“저는…….”
“소피아, 난 너를 언젠가 놓아주겠다고 약속했었지. 미안하지만, 그 약속을 지킬 수는 없을 것 같아. 난 네가 필요해. 복수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같은 길을 가는 동료로서 말이다. 그리고… 우린 같은 무게를 짊어졌으니까.”
돌연,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노구덕의 손에서 뚜렷한 선홍색의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에 반응하여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네 개의 각인들이 보였다.
“…주인님, 그건…?”
소피아는 아연히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력이나 신성력, 기타 이능에 대한 재능이 전혀 없는 노구덕이 정체불명의 힘을 일으켜 보인 것이다.
불현듯, 방금 전 노구덕이 했던 마지막 말이 와 닿았다.
“설마….”
“그래, 나도 너처럼 뭔가가 변했다. 저거너트(Juggernaut)… 새로 생긴 힘이지.”
그때, 실렌이 일으킨 기적의 기둥에 휩싸인 것은 소피아뿐만이 아니었다. 팔다리가 각기 하나씩 떨어져 나가는 중상을 입은 노구덕도 마법진의 한 가운데에 있었고, 그 결과 소피아와 마찬가지로 현실을 뛰어넘는 변화를 겪게 되었다.
죽기 직전, 실렌의 강렬한 소망이 그대로 언령을 통한 권능으로서 발현되어 그의 몸에 깃든 것이다.
특성 저거너트(juggernaut, 멈출 수 없는 힘)와 이모탈 팩터(Immortal factor, 불사 인자). 실렌이 그의 몸에 남긴 유산이었다.
“복수를 위한 힘이다. 난 그걸 이행해야 할 의무가 있어.”
“저도… 돕겠어요.”
“널 놓아주지 못한다고 해도?”
“…그런 건 이제 상관없잖아요. 실렌… 언니가 살린 목숨이에요. 평생이 걸리더라도 언니를 위해 살겠어요.”
“후후… 실렌 언니라니.”
거친 손마디가 뺨에 와 닿았다. 뽀얀 그녀의 뺨을 타고 올라간 손이, 윤기를 되찾은 옆머리를 쓸어내렸다.
한동안 그 촉감을 음미하듯, 반짝이는 백발을 만지작거리던 노구덕은 테이블 아래의 서랍을 열어 무언가를 꺼내놓았다.
“이걸 네게 맡기마. 아트로포스에게서 얻은 카름의 핵이다.”
“……!”
소피아의 교구가 세찬 경련을 일으켰다. 말하자면 저것은 그리드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물건. 그녀의 눈은 손바닥 정도의 크기를 가진, 거무튀튀한 돌멩이에서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
노구덕은 그것을 못 본 체하며, 핵을 얻게 된 경위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아트로포스는 마지막 순간에 나타난 북왕 아이벤에 의해서 퇴치되었다. 전투가 끝나고, 직접 북왕을 영접한 오키도의 마스터, 우룬은 북왕이 추출해 낸 아트로포스의 핵을 노골적으로 요구해 왔다. 우선은 헌터하우스에서 전리품을 관리하고, 이후 시스템이 판정한 기여도에 따라 차등 배분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오너들도 대체로 우룬의 의견에 동의하고 나섰다.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지만, 결국 아트로포스의 핵을 몇 등분으로 나누어 각 클럽이 나눠 갖겠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북왕 아이벤은 우룬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왜냐하면 그가 그리드를 없앤 그 순간, 카름 아트로포스에 관한 전투 기여도는 시스템을 통해 각 헌터들의 저널에 명확히 명시된 상태였으니까.
그 판정에 따르면, 아이리스 소속의 헌터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약 68%로, 전체의 삼 분의 이가 넘었다. 그 중에서도 게오베르그와 아벨의 손을 소환해 전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소피아와 실렌의 지분이 50% 이상이었다. 나머지는 차례대로 임유진, 데모나, 노구덕의 순. 거기에 북왕 아이벤의 지분인 10%를 제외하면, 실제 오키도 헌터들의 기여도는 대략 20% 정도 밖에는 되지 않았다.
겨우 그 정도로는 핵의 소유권을 주장하기에 턱 없이 부족한 수치. 북왕 아이벤은 시스템의 판정에 따라, 자신이 직접 아트로포스의 핵을 아이리스에 전달할 것임을 천명했다.
당연히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마스터 우룬을 위시한 오너들은 오키도에서 퇴치한 카름의 핵을 다른 지역의 클럽이 가로채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들은 아이리스의 공헌은 인정하나, 핵을 아이리스에서 가져가면 목숨을 걸고 싸운 다른 헌터들의 보상은 어떻게 할 것이냐는 논리를 들고 나와 북왕에게 맞섰다.
그러자 북왕이 반박하기를,
“그건 연맹에 따로 보상을 요구하시오. 재앙급, 혹은 그에 준하는 카름에 의한 피해는 별도의 보상제도가 있지 않소? 당신들은 오히려 아이리스의 헌터들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오. 만약 그들이 없었다면, 이 자리에서 시끄럽게 나불거리는 당신들의 목숨은 물론이거니와 오키도 전체가 한 줌 잿더미가 되었을 테니.”
“하, 하지만…!”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가? 더 할 말이 있거든 내 검에게 대답을 들으시오.”
그 살벌한 협박에, 불만스런 목소리를 내던 지휘부의 인사들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세상에 그 누가 있어 십존, 그 중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강자인 북왕의 검에 맞설 수 있겠는가.
단 두 마디로 지휘부의 반발을 억눌러버린 북왕은 이틀 동안 오키도에 머무르며 전후 복구에 도움을 주다가, 엊그제 아이리스에 들려 직접 아트로포스의 핵을 전해주었다.
북왕 아이벤과의 만남을 상기하던 노구덕은 이야기를 하는 내내 그에 대한 존경을 금치 못했다.
“십존은 모두 서리여왕이나 늑대왕 같은 무도한 작자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북왕 같은 사람도 있더군…. 존경할 만한 사람이었어.”
“그는 의인(義人)으로 이름이 높으니까요…. 그리고 아마, 주인님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던 탓도 있겠죠.”
“동질감이라고…?”
“네. 20년 전… 그는 북부에서 나타난 재앙급 카름에게 아내를 잃었어요. 정확히는, 기가스에게 당해 사경을 헤매는 그를 살리기 위해, 그의 아내가 목숨을 바쳐 신성 주문을 썼다고 해요. 북부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일화죠.”
왠지 모를 감회에 젖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북왕의 눈. 그것을 떠올린 노구덕은 나직이 탄식했다.
“그랬었군….”
무심코 중얼거린 노구덕은 아트로포스의 핵을 소피아의 앞으로 넌지시 밀었다.
“말했다시피, 이 핵을 네게 주마. 데모나와 의논해서 알맞은 사용처를 찾도록 해라. 네가 직접 사용해도 괜찮고.”
“저보다는 주인님이….”
“아니, 기여도를 따져 봐도 네가 갖는 게 맞아. 실렌도 이제 없으니… 이미 결정된 사안이니 반론은 듣지 않겠다. 이만 나가봐라. 혼자 있고 싶구나.”
노구덕은 어서 가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소피아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뒤로 물러났다.
돌아서서 방을 나가려는데, 홀연한 그의 음성이 걸음을 멈추게 했다.
“…언니 일은, 안 됐구나. 유감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소피아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이제 제게는… 또 다른 언니가 생겼으니까요…. 전 괜찮아요.”
“그러냐…. 그건 다행이군. 참, 지금 바로 403호 방에 가봐라. 널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절 기다리는 사람이요?”
“가 보면 알게 될 거야.”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은 노구덕은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어리둥절해 하던 소피아는 이내 조용히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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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조아라 작품을 보려고 몇몇 작품에 들어갔더니, 대부분 작품 소개에 [xx물] 이런 식으로 되어 있더군요. 요즘 트렌드인가요? 거기 맞춰서 저도 좀 바꿔봤습니다.
바로 시장에 가야되서 리리플은 달아드리지 못할 것 같은데… 저녁에 올라가는 화에는 전부 달아드릴 테니 따로 궁금하신 점 있으시면 이번 화에 달ㅇ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