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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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한밤의 사담(私談)
평소의 온순하고 조곤조곤한 말투와는 달리, 어쩐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올 게 왔음을 직감한 노구덕은 잠시 주위를 둘러봤다. 신소율과 안세영은 여전히 팔을 부들부들 떨면서 만세를 부르고 있고, 데모나는 모닥불 가까이에 앉아 독서에 여념이 없다. 주위가 이렇게 어수선한 와중에도 자신만의 세계를 확고히 구축한 굵은 신경줄이 새삼 대단하게만 보였다.
이두식과 헨더슨은 막 잠자리를 준비하고 있고, 김진솔과 안세희는 소곤소곤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주로 김진솔이 이야기를 하고, 안세희가 감탄한 얼굴로 맞장구를 치는 걸 보면 또래 소년 특유의 과장된 무용담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겠지.
파티원들 중 이곳에 신경을 쓸 만한 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리더로서 눈대중으로나마 마무리 점검을 끝낸 노구덕은 치켜들었던 머리를 내려 임유진에게 눈길을 주었다.
“미안. 왠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아니요…. 잘 하셨어요. 길어질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점검은 중요하니까요. 준비가 되셨다면… 소피아 씨도 이리 가까이 와 주시겠어요?”
“…네.”
심지어 ‘준비’까지 등장했다. 심상치 않은 임유진의 기색에 긴장한 것은 노구덕 뿐만이 아니었다. 소피아 역시 평소의 능글능글하고 나른한 신색을 싹 지워버린 채, 살살 그녀의 눈치를 보며 모닥불 가까이 쪼그리고 앉았다.
화톳불의 열기 때문일까. 하얀 얼굴에 발그스름한 홍조가 덧씌워진 임유진은 여전히 초롱초롱하게 흔들리는 불씨를 주시한 채 입을 열었다.
“오늘 이야기를 끝냈으면 좋겠어요. 더 이상 애매한 관계로 겉도는 건 저희에게나 소피아 씨에게나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뭔가 불안하더라니, 임유진이 처음부터 정곡을 찌르고 들자 노구덕은 깊이 침음했다. 하물며 당사자인 소피아야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녀는 얌전히 속눈썹을 내리깔고 앉아 임유진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음…. 나는…?”
“당신은 죄 많은 사람이니 제외할게요. 후훗.”
슬쩍 눈길을 돌리니, 새초롬히 눈웃음을 짓고 있는 임유진의 아름다운 얼굴이 보인다. 타박 아닌 타박을 당했지만, 그녀가 미소짓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노구덕은 적잖이 안심이 되었다.
사실 진즉에 그가 주도적으로 나서서 마무리를 지었어야 하는 얘기였다. 그럼에도 노구덕이 그러지 못했던 것은, 자칫 임유진이나 신소율에게 실렌의 빈자리를 소피아로 채우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는 기껏 소피아를 받아들여도 잡음만 일어날 뿐이다. 특히 신소율이 소피아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다 보니 본의와는 다르게 소피아를 방치해 놓는 셈이 되었는데, 노구덕이 소피아의 아양을 거의 다 받아준 것도 그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소피아 씨에게는 미안하게 생각해요. 어떻게 보면 필연이라 할 수 있는 것을… 제 욕심 때문에 2년이나 시간을 끌게 되었으니까요.”
“…아뇨……. 저는, 이대로도 상관없어요. 사실 지금만 해도 제겐 충분히 과분하니까….”
“그렇지 않아요. 소피아 씨가 처음 저이와 권속의 계약을 맺었을 때, 어쩌면 이런 날이 올 지도 모른다고 예감했죠. 하지만 반대하지는 못했어요. 우리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선 소피아 씨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때는 소피아 씨도 우리에게 적의(敵意)를 지니고 있었으니… 쉽게 마음을 열지 않을 거라 생각했죠.”
“…그건.”
“호호, 사람 일은 정말 알 수가 없네요.”
임유진의 자조적인 말에, 소피아는 면목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로서는 도둑고양이라고 매도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본심을 속이고 아이리스에 들어와 배신을 하고, 강압적으로 그의 권속이 되어 재차 활동을 재개했다. 그것도 죽지 못해 사는 비참한 형태였다. 처음부터 함께 했던 이들과는 다르게, 아이리스에 대한 정이 한 터럭이나마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 때문에 애꿎은 여인이 희생당했다. 실렌의 희생은, 소피아의 인생에 있어 커다란 전환점이라 할 수 있었다.
철이 들고나서부터 생전 처음, 타인에게서 받은 따스한 정(情).
이용당하지 않으려면 이용해야 했다. 인간관계에서 필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쓸모’였지, 신뢰나 정 따위가 아니라 생각했다. 친언니에게서 몇 번이나 죽음의 위협을 느끼며 깨닫게 된 인생의 진리였다. 사람이란 모두가 그렇게 살아간다고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기실, 거슬러 올라가면 실렌이 시초는 아니었을 것이다. 최근에 들어서야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자신만 깨닫지 못했을 뿐이지, 많은 이들이 그녀에게 보이지 않는 호의를 베풀어 주었던 것을.
노구덕은 그녀가 배신을 했음에도 곧바로 죽이지 않았다. 이후 ‘피의 권속’이라는 보험장치를 통해 그녀를 묶어두긴 했으나, 자신의 죄목에 비하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관용적이었다. 머릿속을 들여다보지 말라는 그녀의 요구도 흔쾌히 들어주었을 뿐 아니라, 어차피 그의 명령에 절대복종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에도 불구, 많은 편의를 봐주었으며, 멋대로 그리드에 대한 일을 진행시킬 때도 돌아오라는 말없이 직접 지원대를 이끌고 와 주었다.
게다가 다른 동료들은 어떠한가. 임유진, 데모나, 실렌, 나타샤, 이두식, 헨더슨… 그 모두가 자칫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협이 도사리는데도 기꺼이 나서서 그녀를 도와주었다.
소피아는 반문했다. 자신의 ‘필요’가, ‘가치’가 이 정도까지인가? 이게 단지 내가 쓸모 있다고 해서 줄 수 있는 도움의 수위인가?
…결코 아니었다. 답은 금방 나왔다. 그리고 또다시 제기된 의문.
그렇다면 왜 이들은 이렇게까지 해서 날 도와주는 거지…?
‘논리로 따지려 들지 말고 잘 생각해 보세요. 소피아 씨는 이미 답을 알고 있으니까.’
문득, 귓전을 아련히 맴도는 실렌의 말이 기억났다. 눈부시게 웃는 그 얼굴까지도.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서도 저렇게 환하게 웃을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준 그녀.
소피아는 임유진의 말에 깊이 동감했다. 사람 일은, 정말 한치 앞도 알 수가 없다.
“…임유진 씨의 말이 맞아요. 저도… 제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지금에야 비로소… 제 삶이 가치가 있다고 느껴요. 예전에는, 살아있으면서도 캄캄한 암흑 속을 걷는 기분이었죠.”
잠시 뜸을 들인 소피아는 임유진의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눈동자를 조심스레 마주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같이 걸어갈 사람들이 있어요. 언제든지 제게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고마운 동료들이죠. 전… 겨우 찾은 이 안식을 깨트리고 싶지 않아요. 옆에서 보고만 있어도 행복하니까요. 만약 제 행동이 부담스럽게 느껴지셨다면, 태도를 고치도록 할게요. 전 주인님이나 임유진 씨, 신소율 씨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
그때, 낮게 소리죽여 말하는 소피아의 새하얀 머리 위로, 커다란 손이 턱하니 얹어졌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
짙은 녹색 피부로 덮인 두툼한 손의 주인공은, 두말할 것 없이 노구덕이었다. 여태껏 두 여인의 대화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그는, 깜짝 놀라 토끼눈을 한 소피아와 임유진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네가 부담스럽게 느껴졌다면 내 선에서 제지를 했겠지. 그러지 않았던 건,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야. 너는, 이미 내 여자니까.”
“…….”
당혹스럽게 눈을 치뜬 소피아는 자기도 모르게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절 앞에 두고 하실 말씀은 아니라고 보는데요.”
그 순종적이던 임유진이라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날이 선 말투. 하지만 말과는 달리, 그녀의 눈매는 여전히 둥근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할 수 없지. 이 녀석이 달리 나 말고 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책임질 사람을 고르라면 나밖에 없잖아.”
“너무 당당한 거 아니신가요? 남들이 보면 주책맞다고 욕해요.”
“이 나이에 젊은 마누라 둘 거느린 것부터가 벌써 주책인데, 뭘. 나 이런 놈인 줄 이제 알았어?”
“…정말.”
임유진은 졌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2년 사이에 얼굴 두께가 더욱 두꺼워진 것인지, 정말 상종 못할 뻔뻔함이었다. 그러나 한숨을 푹푹 내쉬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의 입가에는 왠지 모르게 희미한 미소가 머물고 있었다.
차라리 이게 노구덕답다. 어차피 받아들일 거라면 구차하게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는 것보다, 대놓고 내 여자라 선언하는 것. 욕을 한다면 소피아가 아니라 그냥 날 욕하고 말아라라는 식의 태도다.
다른 여자를 감싸주는 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렇다고 화가 나지는 않았다. 왜냐면 같은 상황이 닥쳐도 그는 자신을 감싸줄 테니까. 4년 간 살을 맞대며 살아본 결과, 노구덕은 그런 남자였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그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많이 달라졌다. 주스트에서 고춧가루를 뿌려대며 힘겹게 승리를 거머쥐었던 그 꼴불견 헌터는 이제 없었다. 지금 그는 숱한 지지자들을 이끄는 동맹의 맹주이자, 딕툼에서는 거의 절대적 군주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지난 시간, 숱하게 겪었던 고난과 역경이 그를 변하게 한 것이리라. 아니, 변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을 터.
그렇다면 자신도 변해야 한다. 그가 군주가 되었다면, 자신도 마음가짐을 새로이 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까지나 과거의 그에게 얽매여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니.
어쩌면 소피아뿐 아니라 더 많은 여자들이 그의 옆에 서게 될지도 모른다. 본래 권력이란, 여자를 끌어 모으는 마력을 지녔다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왕후(王后)로서의 역할을 양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만한 자신감도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한때 차기 십존에 가장 가까웠던 불세출의 재능, 붉은 봉황이었으니까.
“…각오해두세요.”
“응?”
“앞으로는 바가지를 좀 더 심하게 긁을 생각이니까요.”
“…커흠! 그건 좀…….”
딴청을 부리는 못난 남편을 곱게 흘겨 본 임유진은, 여전히 얼떨떨해 하는 소피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환영해요. 소피아 씨.”
“아…. 저, 저기…….”
“소율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 애랑도 얘기는 됐으니까. 아니, 우리와는 무관하게 이미 결정된 사안이었으려나요?”
그러면서 임유진은 또다시 노구덕의 얼굴을 찌릿하게 쏘아보았다. 그러자 재차 사례가 들린 것처럼 헛기침을 연발해대는 노구덕. 당당하게 소피아를 자기 여자로 선언할 때의 패기는 어디가고, 마누라의 눈치를 보는 불쌍한 가장으로 돌아간 모습이었다.
다소 부드럽게 풀어진 분위기에도, 소피아는 여전히 어찌할 바를 몰라 궁색한 얼굴이었다. 임유진은 그런 막내의 손을 포근하게 움켜쥐었다.
“소피아. 언니라고 불러주겠니?”
“네, 넷?”
“싫어?”
“아, 아니요! 아니에요!”
임유진의 얼굴에 약간의 서운함이 어리자, 가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홱홱 내저은 소피아는 이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유진이 언니….”
“후후후… 나이가 많은 것도 장점이 될 수도 있구나. 소피아에게 언니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묘한 걸? 실렌도 이런 기분을 느꼈으려나….”
“…….”
임유진은 팔을 벌려 살짝 떨려오는 소피아의 몸을 끌어안았다. 마치 딸아이를 품에 안은 어머니 같은 모습이었다. 가슴에 와 닿은 옷 사이로, 그녀의 작은 심장이 두근두근 힘차게 맥동하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항상 스스럼없어 보여도 실제로는 낯가림을 많이 하는 아이란 걸 알고 있단다. 혼자 고민하고, 외로워서 많이 힘들었지? 앞으로는… 그러지 말고 나나 저이를 좀 더 의지해도 돼. 아니, 이왕이면 저이보다는 내가 나을 거라 생각해.”
“…으…흑… 흐극…… 으아아아앙…….”
“그래, 마음껏… 속이 풀어질 때까지 울도록 해.”
따사로운 모성이 그토록 냉철한 이성을 흐물흐물 녹여버린 것일까. 백발이 길게 늘어진 소피아의 머리가 사정없이 떨리며, 우물쭈물하던 얼굴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처음엔 억눌린 것처럼 힘겹게 새어나오던 흐느낌은 이내 야영지를 가득 채울 정도로 큰 통곡으로 번져나갔다.
임유진은 엉엉 우는 소피아는 언제까지나 그렇게 안고만 있었다. 그녀가 울다 지쳐 곤히 잠들 때까지, 변함없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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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보셨다면 추천/코멘 부탁드립니다.
드디어 구더기 하렘에 합류한 소피아.. 야영 파트는 이렇게 마무리되었습니다.
이제 소피아의 별명은 울보로 정해졌군요..
아침에 일어나서 확인해보니 대참사가… 288편을 287편에 덧씌웠더군요. 이어쓰기가 아니라 수정을 누른 것인가??
저도 기억이 희미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본의 아니게 스포(?)를 당하신 분들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_ _
오늘 저녁화는 어쩌면 12시 넘긴 후에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