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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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적과의 동침
76# 적과의 동침
“이모.”
“으흐흥~ …응?”
찰랑거리는 머릿결을 흥겹게 빗어 내리던 팔이 멈칫거렸다. 소냐의 머리를 손수 빗어주던 소피아는 왜 그러냐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수양딸을 쳐다봤다.
“…죄송해요.”
“으응, 또 그 얘기야? 괜찮아, 괜찮아. 좀 더 일찍 사실을 말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바보 같았던 거지, 뭐.”
“그래도.”
“얘도 참, 괜찮다니까.”
사단이 있었던 어제와 오늘을 통틀어 미안하다는 말만 벌써 대여섯 번째다. 이대로 가다간 소냐의 입에 미안하단 말이 들러붙을까 싶었던지, 소피아는 강하게 손사래를 치며 정말로 됐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단지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뿐 아니라, 실제로도 소피아의 속은 무척 홀가분하기 짝이 없었다. 어제를 기점으로 해서 소냐의 행동이 굉장히 유순해졌기 때문이다. 조금이지만 말투도 부드럽게 변했고, 꼭 ‘님’자가 들어가 거리감을 자아내던 호칭도 편하게 바뀌었다. 그간 꽁꽁 얼어붙어 있던 소냐의 마음이 서서히 녹아들고 있다는 게 분명히 느껴지고 있었다.
그런 변화는 굉장히 기꺼웠지만, 걱정되는 게 없는 건 아니었다.
“소냐? 그… 어제 주인님께 했던 제안 말인데…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때? 그런 실무를 알고 싶다면 내 옆에서 배워도 되지 않겠어?”
“대부님 앞에서 공언한 일이에요. 하루 만에 말을 뒤집을 수는 없어요.”
“그야… 그렇긴 하지만….”
주거니 받거니 하는 두 사람의 모양새가 퍽 우스웠다. 닳고 닳은 오너들을 구워삶아대는 소피아도 이 쪼그만 수양딸 앞에서는 쩔쩔매는 꼴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원래부터 상성이 약하기도 했지만, 소냐가 한번 탈선 행동을 보이고 나니, 아이를 대하는 게 더욱 조심스러워진 것이다. 양육 경험이 전혀 없는 초보 엄마의 비애랄까.
더 이상 그 화제로 소피아와 왈가왈부하는 게 거북했던지, 소냐는 머리를 손질해주는 소피아의 손길을 음미하며 화제를 바꾸었다.
“그건 그렇고, 이모.”
“엉?”
“늦었지만 축하드려요.”
“으, 으음?”
“대부님 말이에요. 이제 주인님이 아니라 ‘여보’나 ‘당신’으로 불러야 하는 거 아닌가요?”
“…켁…켈록…! 쿨럭! 쿨러억!”
단정하게 가라앉아 있는 소냐의 정수리 위에 붙어 있던 손이 또다시 미끄러졌다. 소피아가 갑자기 사레가 들린 듯 기침을 연발하자, 소냐는 조용히 이모에게 차디찬 냉수 한 컵을 가져다주었다.
지체 없이 냉수 한 모금을 꿀꺽 들이킨 소피아는 겨우 살았다는 듯 안도의 숨을 내쉬다가, 조카의 무심한 눈동자와 눈을 마주치자 재빨리 시선을 피하며 말을 더듬거렸다.
“어, 어떻게 알았지?”
“냄새요. 어제 대부님께 안겼을 때도 그렇고, 이모한테도 같은 냄새가 심하게 났거든요. 책에서 본 적이 있어요. 남자의 그건 밤꽃향에 가깝다고… 그게 아마 정액 냄새란 거겠죠?”
“푸우우웁!”
난데없는 찬물세례가 얼굴에 끼얹어지자, 소냐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그에 소피아는 허둥지둥대며 수건을 찾아 조카의 젖은 얼굴을 닦아내느라 바빴다.
“미, 미안해! 아니, 그런데 대체 무슨 책에서 그런 말을 본 거야!”
“…이모의 침대 밑, 이중 서랍장 안에 숨겨져 있는 책에…….”
“으, 으아아아아! 내가 잘못했어! 그만!”
누가 듣고 있는 것도 아니건만, 혼비백산한 소피아는 다급히 손을 뻗어 소냐의 말을 제지했다. 그 바람에 손에 들려 있던 수건이 막 벌어지고 있던 소냐의 작은 입에 틀어박혀버린 것은… 정말 불의의 사고였다.
“꺄아악! 미안해! 정말 미안해!”
“…아니요. 이것도 나름대로 신선한 경험이네요.”
불의의 기습을 연타로 날린 대가로 안면에 물이 끼얹어지고, 젖은 수건을 맛보는 진귀한 경험을 한 소냐는 예의 그 무덤덤한 얼굴로 소피아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위로가 되지 않는지, 소피아는 연방 그녀의 눈치를 살피는 중이었다.
“이모. 첫날밤을 준비하느라 들떴던 건 알겠지만, 그래도 그런 책을 그리 뻔한 곳에 비치하는 건 너무 안일했어요.”
“으으으…….”
비수로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일침. 연타에 이어 결정타까지 얻어맞은 소피아는 무력해진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뭐, 그래도 굳이 핑계를 대자면 할 말은 있었다. 어제는 아이들이 다투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직후 곧바로 급하게 몸만 씻고 올라온 터라 냄새를 지울 틈이 없었다. 그리고 소냐가 말한 그 책… 그건 박선주의 권유로 은밀히 구입한 책이었는데, 그 책의 은닉 장소를 소냐가 알고 있었을 거란 예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아니, 이건 결국 그녀가 안일했다는 뜻이니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 그 책… 얼마나 본 거야?”
“전부 다요.”
“미…미안.”
아까와는 상황이 정반대다. 이제는 그녀의 입에 미안하다는 말이 찰싹 달라붙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아이의 손길이 닿는 곳(?)에 음란서적을 보관한 자신의 관리부실이 명백한 이상, 소피아는 순순히 잘못을 시인했다.
소냐는 뾰족한 귀를 시무룩하게 늘어뜨리며 사과를 하는 이모를 묘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이모는, 제가 알고 있던 것과 많이 다르네요. 아니면, 제가 지금까지 보지 않고 있었던 걸지도…….”
“내가 잘못… 응? 뭐라고 했어?”
“아뇨. 아무것도.”
소냐는 적당히 말을 얼버무렸다. 이건 소피아에게서 답을 물어야 할 게 아니라, 그녀 스스로 풀어나가야 할 난제였다.
어머니인 그리드에게 관계가 소원한 동생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비트레이에서 입지전적인 공적을 세웠으며, 이후 이적한 라이오넬에서도 ‘여우’라 불리며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까지도.
비트레이에서의 영향력이 지대했던 만큼, 오랜 세월이 지나도 소피아를 기억하는 이들은 많았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접한 이모에 대한 내용은, 매사에 철두철미하고 냉혹한 성정을 지녔다는 것이었다. 비트레이에서 암약할 당시, 소피아가 이끌었던 것은 클럽의 음지에서 활동하는 그림자 조직. 그에 대해 어둡고 피비린내 나는 소문이 도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실상이 그러하기도 했고.
그러한 편견은 아이리스에 와서도 계속되었다. 지난 2년간, 소냐는 이모가 범상치 않은 행동거지를 보여줄 때마다 그 밑에 무슨 계산이 깔려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이전에 끼고 있었던 색안경과 어머니의 일로 인한 피해의식이 맞물려, 그녀 안에 있던 망상은 점차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던 것이다.
아니, 색안경이라 칭하기엔 조금 애매할지도 모른다. 주변 지인들이 입을 모아 말했던, 비트레이 시절의 냉혹한 소피아가 모두 거짓이라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그렇다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
‘이모도… 변한 거겠지.’
무엇이 그 비정했던 소피아를 변하게 했을까. 그건 아마도, 그녀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겠지. 이를테면 몸과 마음을 다 바칠 정도로 위하는 사람.
“성인이 될 때까지, 천천히 지켜볼 생각이에요.”
“……?”
“성인식 소원… 아직 정하지 않았거든요. 후후후….”
영문 모를 말을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는 소냐. 어리둥절한 채 수양딸의 얼굴을 지켜보던 소피아는, 불현듯 가슴 한쪽이 덜커덕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쩐지 좋지 않은 예감이, 여자로서의 직감이 불길한 경고를 사정없이 날려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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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
“핫! 아야아….”
상념에서 깨어난 소피아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홱홱 머리를 휘저으며 주위를 살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노골적으로 한심하다는 듯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노구덕의 얼굴이었다.
흉흉하게 말아 쥔 그의 주먹을 보아하니, 방금 전 정수리에서 느껴진 둔중한 충격의 원인을 알 것 같았다.
“잘 한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침까지 흘리면서 자고 있어? 가장 예민해야 할 녀석이….”
“죄, 죄송합니다…….”
어젯밤, 소냐가 남긴 의미심장한 웃음의 여운이 도통 가시질 않은 탓에 잠을 설쳐버린 소피아는 까만 어둠이 드리워진 눈 밑 그늘을 문질렀다.
그때 소냐가 보여줬던 표정은… 비유하자면 활짝 흐드러지게 피어난 장미꽃 같다고 해야 할까. 도저히 아홉 살 어린애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농염한데다, 어른스러운 색기가 흠뻑 담겨 있는 얼굴이었다. 게다가 살짝 피어난 눈물점이 더욱 요염하게 도드라진 덕분에, 성숙미에서 소피아를 크게 앞섰던 그녀의 언니, 그리드가 절로 연상될 정도였다.
소냐가 풍겼던 그 성숙한 여인의 분위기를 단지 ‘어른의 책’을 완독한 영향이라 치부할 수 있을까…? 소피아는 어쩐지 자신이 호랑이 새끼를 키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노구덕은 여전히 얼을 빼고 있는 것 같은 소피아의 얼굴을 보며 가볍게 혀를 찼다.
“너도 요새 참 많이 망가지는구나. 어서 정신 차려라. 마티아스는 한눈 팔고 상대할 만큼 만만한 자가 아니니까.”
“…네.”
그가 엄중히 타이르자, 소피아는 얼른 흐트러진 정신을 수습했다. 대사가 임박한 이때, 아이리스의 머리인 그녀가 정신을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임유진은 평소의 데모나 만큼이나 피곤해 보이는 소피아를 보며 심려스런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노구덕과 하룻밤을 보낸 것도 아닌데 저리 그늘진 얼굴이라니.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괜찮니?”
“네, 언니. 걱정마세요.”
“응…. 너무 무리하지는 마.”
임유진은 이틀 전부터 한결 수심을 덜어낸 듯 얼굴이 밝아져 있었다. 아마도 최근 그녀의 골치를 썩이던 두 문제아들이 마침내 화해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서부터인 것 같았다. 임유진이 유독 소피아를 챙기는 것도 그에 대한 나름의 감사일지도 몰랐다.
클럽 아이리스의 최고 수뇌부라 할 수 있는 노구덕과 임유진, 소피아가 나란히 앉아 있는 방은 칼립스에 있는 아이리스 살롱, 레그나토르의 특별실이었다.
아지트라 할 수 있는 이곳에서 그들이 만나기로 한 인물은 다름 아닌 현 칼립스의 연맹위원 마티아스. 최근 심상치 않은 도시의 분위기에 비추어 볼 때, 이번 만남은 칼립스 정계를 요동치게 할 만한 대사건이었다.
얼마 전, 헌터하우스에서 의뢰한 이레귤러 탐사를 성공적으로 마친 아이리스는 마침내 누적 포인트 백만을 달성했다. 마지막 남은 조건을 만족한 노구덕이 입후보 마감 최종기일에 아슬아슬하게 맞추어 후보로 등록한 것은 당연지사.
덕분에 칼립스 정계는 크게 술렁이고 있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철의 동맹을 이끌고 있는 맹주가 끝내 공식 출마를 선언했다. 오랜 세월 그룸달, 마티아스, 리엔더의 세 세력이 삼등분하고 있던 정계 구도에 드디어 지각변동이 생긴 것이다. 당연히 초유의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별로 좋은 예감은 들지 않네요…. 마티아스 쪽에서 먼저 만남을 제의하다니…….”
“옛정도 있고 하니, 한번 구슬려 보려는 걸 수도 있지.”
노구덕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과거, 레그나토르의 시작은 마티아스의 산하에 있던 몇몇 오너들의 비밀 연합이었다. 과거라고 해봤자 불과 몇 년 전이었지만……. 그 고리타분한 관계를 들먹이면서 수를 쓸 수도 있으리라.
“그래봐야 이쪽이 꿀릴 이유는 없어. 천천히 기다려 보자고. 뭐라고 말하는지 말이야. 음,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노구덕의 나직한 말이 끝남과 동시에, 텁텁하게 닫혀 있던 특별실의 문이 소리없이 열리는 게 보였다. 이윽고, 화려하게 장식된 문 틈 사이로 깔끔한 인상의 중년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임기가 끝물에 다다른 칼립스의 연맹 위원, 마티아스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넉살을 부렸다.
“이런… 내가 좀 늦었군.”
“괜찮습니다. 자리에 앉으시죠.”
“허허… 그럼 실례.”
기세 좋게 의자에 엉덩이를 걸친 마티아스는 제 집 안방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리를 쭉 폈다. 그 오만한 작태에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는 임유진의 표정이 살짝 찡그려졌지만, 그녀는 그 이상 티를 내지 않았다.
“될 수 있으면 용건만 간단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만. 피차 사이좋게 앉아있을 사이도 아니고 말이지요. 혹시 입소문이라도 돌면 서로 곤란하잖습니까?”
“이거 서운한걸. 어떻게 보면 내 직계라고 할 수 있는 아이리스 오너가 말이야…. 이제는 사자가 다 됐다는 건가?”
“뭐,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태연자약한 노구덕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마티아는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흐흠. 좋아. 마음에 들어. 그럼 사양하지 않고 본론을 꺼내볼까.”
탁. 습관처럼 탁자를 튕긴 마티아스는 갑자기 양 손에 턱을 괴며 그 얼굴을 일행 가까이 들이대며 말했다.
“연합을 제안하네. 오늘은 나와 자네가 동맹을 맺고, 나머지 두 놈들을 쳐부수잔 제안을 하러 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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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보셨다면 추천/코멘 부탁드립니다!
저번화에 댓글 달아주신 것들, 빠짐없이 모두 다 읽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일일이 코멘트를 달아 드려야 하는데… 월말에 금요일이라 그런지 가게가 쉴 틈 없이 바쁘네요 ㅠㅠ
미리 비축분을 만들어 놓지 못했다면 이번화도 올리지 못할 뻔했는데, 그나마 다행이네요..
부족한 작품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 기세로 이제 다시 400화를 목표로 달려보도록 할게요!
불타는 금요일 잘 보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