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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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마녀의 산(Witch’s mountain)
만신창이가 되어 날아가는 드리안을 온전히 받아 낸 사람은 임유진이었다. 그녀는 타이밍 좋게 드리안을 낚아채고는 후방 쪽으로 발에 땀이 나도록 뛰었다. 그곳에는 자경단 소속의 중상자 2명과 노구덕이 지원대 역할을 맡고 있었다.
“재생물약이 필요해요! 빨리!”
“재, 재생물약?”
“제 배낭 속에 있는 노란색 물약이요!”
노구덕이 허둥거리는 틈에 재빨리 배낭을 뒤져 물약을 꺼낸 자경단원이 임유진에게 달려갔다. 임유진은 드리안을 눕힌 뒤 왼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벌려진 입에 물약을 털어 넣었다. 그러자 가슴에 나 있던 주먹 크기의 구멍이 빠르게 아물기 시작했다.
노구덕은 드리안의 형편없는 몰골을 보며 엉뚱한 생각을 했다.
‘저 영감태기가 저렇게 되다니. 괴물이 대단하긴 대단한 모양이군.’
“난 가봐야 해요. 드리안님을 부탁드려요.”
임유진은 그 말만 남기고 다시 전장으로 복귀했다. 죽은 줄 알았던 괴물은 가공할 재생력을 뽐내며 다시 부활했다. 데모나가 거목(巨木)을 소환하는 새로운 능력을 선보이며 분전하고 있었지만 난폭하게 날뛰는 괴물을 제지하기에는 무리였다. 윤희지는 탈진했고, 김정인은 촉수들을 일일이 쳐 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어 보였다. 신소율은 경험이나 실력으로나, 저런 괴물을 상대로 도움이 되기에는 아직 한참 모자랐다.
재생물약의 효험이 있었는지, 드리안은 금방 정신을 차렸다. 낮게 신음하며 전황을 살핀 그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재생물약은 치명적인 상처의 치유에는 더할 나위 없지만 이후 반드시 일정기간 요양을 취해야 했다.
물론 드리안은 그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전황은 점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카름은 윤희지의 마법에 의해 붕괴됐던 머리마저 상당 부분 복구된 상태였다. 재생 능력을 가진 괴물은 이런 점이 까다로웠다. 이대로 가다가는 괴물이 꽁무니를 뺄 것이다.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어야 했다. 결국 드리안은 모종의 결심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보게, 노구덕.”
“어, 드리안 영감. 좀 괜찮소?”
“자네, 여기서 구경만 하고 있을 건가? 자네 동료들이 죽을 고생을 하며 싸우는 마당에?”
느닷없는 매도에 노구덕은 크게 당황했다. 한편으로는 화가 나기도 했다.
“제기랄, 나보고 저 촉수 놈들하고 어떻게 싸우라는 거요? 그딴 소리 안 해도 이미 한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저 괴물을 무찌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 해 보겠나?”
안 그래도 할 수 있는게 달리 없어 답답하던 차에 귀가 솔깃한 제안이었다. 노구덕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머리를 쳐들었다.
“그게 뭐요? 당장 할 테니 알려만 주시오!”
“좋아. 자네의 각오는 잘 들었네. 자네도 들었지?”
옆에 있던 자경단원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증인까지 확보한 드리안은 매우 만족스런 얼굴로 노구덕의 멱살을 굳게 쥐었다.
“어어?”
“날 원망하지 말게. 자네가 택한 길이니까.”
“무, 무슨 짓이야! 으아아악!”
몇 번의 호흡이 돌고, 두 손에 마력이 충만해진 드리안은 무지막지한 완력으로 노구덕을 들쳐 메고 괴물의 본체를 향해 뛰어나갔다. 2미터가 넘는 거구가 붕 떠오르며 꽥꽥 비명을 질러댔다.
괴물은 이제 절반 이상 호수에 잠겨 있었다. 데모나가 나무를 소환해 어떻게든 옭아매지 않았더라면 진즉에 호수로 도망쳤을 것이다.
-오오오오–!
놈이 힘을 주자 몸체를 속박한 나무줄기가 서서히 뜯겨나가기 시작했다. 데모나의 가면 아래 가느다란 목덜미로 굵은 땀방울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그녀도 안간힘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김정인은 여전히 촉수다발에 가로막혀 놈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끄아아악!”
다른 한쪽에서 누군가의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놈이 되살아난 이후 더욱 강력해진 텐타클 좀비들은 끝없이 몸을 재생하며 자경단을 압박했다. 반면 시간이 지나 체력이 많이 떨어진 자경단은 갈수록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켁켁! 이 망할 영감! 이게 무슨 짓이오!”
노구덕이 대머리에 핏대를 세우며 악을 썼지만 드리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어! 마녀! 놈의 생살을 매개로 저주를 걸도록 하게! 최대한 재생을 늦출 수 있도록! 김정인! 내가 놈의 촉수를 한 곳에 모을 테니, 어떻게든 프레셔 버스트를 성공시키게! 놈의 핵을 확인했으니, 잠깐만 시간을 벌어준다면 내가 끝장내도록 하지! 서둘러! 이대로라면 놈이 도망치고 말아!”
호명당한 모두가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드리안은 행동을 개시했다. 그는 가장 먼저 옆에 서 있던 노구덕을 괴물에게 집어던졌다. 눈 깜박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뒤따라 외친 말은 더욱 황당했다.
“자! 네놈이 좋아하는 먹이다!”
“드리아아아안! 야이 개새끼야아아아—!”
부지불식간에 괴물의 먹이로 던져진 노구덕은 필사적으로 바둥거렸으나 걸릴 게 하나 없는 허공에서는 의미 없는 움직임이었다. 괴물은 드리안의 호의를 마다하지 않고 촉수다발을 뻗었다. 거의 모든 촉수다발이 뻗쳐 나와 노구덕을 똘똘 에워쌌다. 목이 터져라 드리안을 욕하던 입이 가장 먼저 틀어 막히고, 노구덕은 금방 고치 신세가 되었다.
그 광경을 본 일행들은 모두 얼이 빠져서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와아아악! 아저씨이이이—!”
“노구덕 씨!”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자 당황한 김정인이 따져 물었다.
“대체 무슨 짓입니까! 어째서 형님을……!”
“당장 죽진 않네. 놈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건 재생력을 북돋워 줄 살아있는 먹이니까. 마녀! 아직 멀었나!”
“망할, 즉석에서 저주를 거는 게 말처럼 쉬운 줄 알아! 좀 닥쳐!”
거칠게 대꾸한 데모나는 여기저기 널려 있는 놈의 살점 파편 중 하나를 주워들고 품에서 손칼을 꺼내 자신의 팔목을 그었다. 동맥이 베인 것인지 핏물이 울컥울컥 살점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피로 살점 주위에 형이상학적인 그림을 그렸다. 이 모든 과정은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저주가 준비되었군. 이제 자네 차례일세.”
“도대체…….”
“지금 내 상태가 매우 좋지 않네. 더 늦으면 노구덕도 죽어. 나를 믿고 내 말을 따라주게.”
그 말대로 시간이 없었다. 김정인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비처럼 몸을 날렸다. 노구덕을 둘둘 말고 있는 촉수다발을 향해서였다.
드리안은 심유한 눈으로 괴물의 상태를 꿰뚫어봤다. 괴물은 촉수가 잘려도 고속으로 재생하지만, 재생이 무한정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가 괴물의 머리를 날린 것은 괴물에게도 큰 타격이었다. 가뜩이나 먹이가 모자라 에너지를 비축해두지 못한 상태에서 재생으로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 만큼, 괴물은 노구덕의 생기를 두고두고 빨아먹을 게 틀림없었다. 고기는 죽은 뒤에 섭취해도 늦지 않으니까. 속이야 어떻든, 겉으로 보면 노구덕만큼 크고 맛있어 보이는 먹잇감도 없었다.
거기에 원래부터 죽이고 싶은 놈이었으니 죄책감도 덜하고. 드리안 입장에서는 일석이조였다.
“어디 이번에도 살아남아 보게나.”
나직한 그의 중얼거림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괴물이 노구덕에게 온통 신경이 쏠려 있는 사이 김정인은 다시 한 번 괴물의 등에 올라탈 수 있었다. 평소라면 몇 번의 도약으로 촉수다발이 뭉쳐있는 곳으로 갈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많이 지친 상태였다. 거기에 놈의 피부를 덮고 있는 점액이 워낙 미끄러운 탓에 걸음을 뗄 때마다 검을 꽂아 넣으며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끼이이이!
등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놈은 촉수 몇 가닥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얼른 머리를 숙여 피하긴 했지만 자칫 했으면 호수에 빠질 뻔했다. 괴물은 몸을 흔들어 그를 떼어 내려고 했지만, 김정인도 칼을 깊숙이 박아 넣으며 찰거머리처럼 버텨냈다. 그러자 놈은 재차 촉수공격을 감행했다. 칼에 매달려 있던 김정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대로라면 피할 방법이 없었다.
-끼엑! 끼에엑!
날카로운 촉수가 김정인의 미간을 꿰뚫기 직전, 괴물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며 기세등등하던 촉수가 우왕좌왕 방황하기 시작했다. 놈의 몸에 달라붙어 있는 김정인은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놈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마치 발작해서 경련을 일으키는 사람 같았다.
‘데모나의 저주!’
이렇게 되면 거칠 것이 없었다. 김정인은 있는 힘껏 놈의 머리로 움직였다. 괴물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성공할 수 있을까? 아니, 성공하고야 만다.’
드리안이 말한 프레셔 버스트는 이전에 사용한 ‘약식(略式)’이 아니라 온 정신과 마력을 집중해야 겨우 펼칠 수 있는 ‘정식’이었다. 흔들리는 마음을 굳게 다진 김정인은 검 끝에 정신을 집중했다. 정수리에서부터 피어난 자그마한 물줄기가 심장을 거쳐 강물이 되고, 발끝에서 일어난 기운과 합쳐지자 거대한 파도가 되었다. 괴물의 머리 위에 서 있단 사실도,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절박함도 잊혀졌다. 무아지경이었다.
뱃사공이 된 김정인은 능숙하게 노를 저었다. 여태껏 사납게 저항하던 물길이 지금은 왠지 수월하게 열렸다. 도도히 흐르는 기운은 그의 인도아래 팔을 지나, 손가락을 지나 검에 그득히 고여 차올랐다. 검이 물풍선처럼 느껴졌다. 물을 너무 많이 담아 금방이라도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릴 것만 같았다.
‘물이 넘쳤어. 쏟아진다. 쏟아지기 전에 터뜨린다.’
심상(心想)을 보던 눈이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여전히 물풍선을 들고 있었다. 참을 수 없는 성취감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으아아아압–! 터져라!”
쿠아아앙!
검 주위에 응집되어 있던 기운이 폭발했다. 협소한 검에 억눌려 있던 기운들이 해방되자 고삐 풀린 야생마가 따로 없었다. 사방으로 퍼진 기운들은 닥치는 대로 짓밟고, 부수고, 파괴했다. 수십 가닥이 두껍게 뭉쳐 있는 촉수다발도 종잇장처럼 찢겨나갔다. 한바탕 난리가 휩쓸고 지나간 곳에는 커다란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이전에 드리안이 파고 들어간 구멍이 다시 파헤쳐진 것이다. 무참히 뜯겨나간 촉수다발은 다시 재생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하…….”
모든 기력을 쏟아낸 김정인은 괴물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직도 이 극한의 타이밍에 ‘프레셔 버스트’을 성공시킨 게 실감나지 않았다. 뼈마디가 모두 녹아 노곤해진 기분이었다.
“수고했네. 뒤는 내게 맡기게.”
임유진의 도움으로 김정인이 있는 곳까지 다다른 드리안은 그 말을 남기고 구덩이 속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뻥 뚫린 놈의 내부 속에서 원독어린 하얀 눈동자 한 쌍이 보였다.
그렇게 드리안이 내부로 돌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콰아아앙–!
괴물의 내부에서 형언할 수 없이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